"지금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다. 내 손이 올리브 가지를 놓지 않게 해 달라"
이스라엘이 중동 각국을 상대로 연이은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로서의 면모를 나날이 일신하고 있던 1970년대, 유엔 총회장에 망명자의 신분으로 나타나 세계를 상대로 연설을 했던 그 사람, 이제 거의 죽어가는 모양이다. 방금 전 뉴스를 보니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하는데, 뉴스 나오는 형식을 보니까 거의 가망이 없는 듯하다. 죽음을 눈 앞에 둔 그 사람, 그리고 싫든 좋든 그를 보내야만 하는 팔레스타인의 민중들.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는 1929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집안은 아마도 무명의 상인 집안이었던 듯하며,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 아라파트에게 도움이 됐던 것은 외가였다. 아라파트의 외가는 팔레스타인의 양대 세도가문으로 통했던 알 후세이니 가문이고, 아라파트는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어릴적에는 알 후세이니라는 성(姓)으로 알려졌던 아라파트는 후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투신하면서 스스로 '야세르 아라파트'라는 이름을 지었다. '아라파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근방에 있는 평원의 이름이고, '야세르'는 '근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름과는 정반대로 아마도 일평생 근심걱정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아라파트의 정치활동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면서 시작됐다. 유태인 시오니스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시작됐고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은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는 확인사살에 불과했을 수도 있지만, 아라파트는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에 맞서는 평생의 임무를 시작했다.
아라파트가 대학생이던 시절의 카이로는 (지금도 그렇듯이) 아랍 지성계의 중심지였고, 카이로의 대학들에는 중동 각지에서 온 해방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의 한 명이었던 아라파트는 선동가 자질을 타고난 덕에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학생 동맹을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아라파트의 공식 호칭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이지만 몇년전까지만 해도(혹은 지금도) 아라파트의 이름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아라파트는 1959년 PA의 전신 격인 PLO의 주축 '알 파타' 조직을 창설했다. 알 파타는 10년 뒤 PLO로 확대개편됐으며 아라파트는 PLO를 통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중심 인물로 부상한다. 격렬한 투쟁을 통해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에 맞선 해방운동의 상징이라는 위상을 얻게 됐고, 첫머리에서 말한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았다.
아라파트의 투쟁 역정이 순탄했을 리 없다. 국제사회에서는 '상징성'을 인정받았지만 팔레스타인의 해방운동은 곡절에 곡절을 거듭했다. 1970년대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아랍 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는 무능력할 뿐임을 보여줬고, 투쟁은 침체기를 맞는다.
다시금 투쟁에 불길이 붙었던 것은 1988년, 이른바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 때였다. 인티파다는 당초 이스라엘 점령 뒤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이 일으킨 자발적, 비조직적 봉기였지만 바로 그 '상징성' 때문에 아라파트를 중심으로 한 PLO 세력에 다시금 힘이 실리게 된다(아라파트가 부르주아지에 불과하다고 보는 운동 내부세력들은 아라파트 세력이 민중봉기의 성과들을 가로채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인티파다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채 끝난 이후 아라파트의 노선은 눈에 띄게 타협적으로 변해간 것이 사실이다. 아라파트의 인생역정에서 가장 화려했던 것은 아마도 1993년 최대 적수였던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평화협정을 맺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오슬로 평화협정'의 공적을 인정받아 이듬해 라빈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안았지만, 아라파트의 이후 행로는 평화 혹은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화협상 뒤 라빈 총리는 유대 극우파에 암살됐으며 평화협상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했다. 팔레스타인만 놓고 보자면, 이 문제는 아라파트의 권력기반과 관련이 있다. 아라파트는 앞서 말한대로 팔레스타인의 전통적인 세도가문 출신이고, 계급투쟁 우선론자들은 그의 부르주아지적 속성을 줄기차게 비판해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라파트의 기반이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밖에 있는 사람들 쪽에 있다는 점이다. 시오니스트들의 정착 이후, 특히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겨나 아랍권을 떠돌게된 난민들은 4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의 산물인 이 난민들의 염원은 당연히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반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지금도 힘겹게 이스라엘과 '공존'하고 있는 사람들은 생존 차원에서라도 이스라엘과 평화적 관계가 이뤄지기를 바란다.
오슬로 평화협정은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난민들의 귀환을 보장해줄 것인가.
좁디 좁은 땅에 난민들까지? 이스라엘은 절대로 이 문제에서는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그러면서 자기네들은 세계 각지의 유태인들을 불러모으고 있지만), 난민들은 이 문제를 속수무책으로 방기한 아라파트를 거세게 비난해왔다. 다름아닌 아라파트의 지지기반이 난민들인 마당에,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라빈 암살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잇따라 강경 보수정권이 들어섰고, 그 중 압권은 1982년 레바논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의 주범인 아리엘 샤론이 2001년 총리에 오른 것이었다. 이후 3년간, 아라파트의 형편은 고난 그 자체였다. 가택연금에 암살 위협, 게다가 팔레스타인 안에서 지지 상실 등 내우외환이 겹쳐 사실상 정치력을 행사하지 못해왔다. 말 그대로 '상징'이었을 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내의 분란조차도 잠재울 능력이 없었다.
한때 아라파트는 '부도옹'이라 불렸다. 오뚜기처럼 역경 속에서도 일어났던 아라파트. 이재에 밝아 숨겨놓은 재산이 엄청나다고도 하고(마타도어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스라엘로부터도 알게모르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풍문도 많다.
어찌됐든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의 모든 공과에 직간접적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아라파트는 '상징 그 이상의 상징'이다. 죽음을 앞둔 아라파트를 지켜보면서 이스라엘은 어쩌면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카운터파트의 상실을 역설적으로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라파트를 노골적으로 미워했던 조지 W 부시는 재선의 기쁨에 더해 아라파트의 죽음을 속시원해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라파트와 어떻게든 연관이 되어있는 아랍권 국가들은 자국 내에 흩어져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는 그 땅의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상징을 잃게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통치력 없는 자치정부와 난립중인 무장투쟁단체들 틈에서 어떻게든 질긴 목숨을 유지해가겠지만, 그들의 운명이 더욱더 험난해질 것만은 틀림없다.
희망이란 무엇이길래, 어떤 민족에게는 이렇게 멀기만 한 것일까. 지난 몇년간, 아라파트의 일거수 일투족은 내가 가장 집중해야 하는 사안 중의 하나였다. 팔레스타인에 가본 적도 없고, 아라파트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인생의 어느 시기, 이 사람은 내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나이인데다 병마에 시달린지도 제법 오래됐기 때문에, '아라파트의 죽음'에 대해서는 항상 뭐랄까, 우습지만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너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