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와이즈먼의 <인구쇼크>를 읽었다. 와이즈먼의 책은 <가비오따스>부터 시작해 세 권째인데 모두 재미있다. 가장 흥미진진했던 것은 역시나 <인간 없는 세상>이었고, 이번 책은 뭐랄까, 재미는 있지만 좀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인구문제라는 것이 환경문제, 기후변화 등과 다 이어져 있는 탓이겠지만.
[스크랩]
프리츠 하버와 화학무기
프리츠 하버의 비료 합성법은 대단히 엄청난 발견이었기 때문에 그가 노벨 화학상을 받은 것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1918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논란이 벌어졌다. 전쟁 중에 하버는 적의 참호에 화학무기를 사용하자고 독일군에게 처음 제안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이어서 그 작전을 지휘하는 자리에 올랐다. 역시 화학자였던 그의 아내는 남편이 염소가스와 머스터드가스 공격을 지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자살하고 말았다. 역시나 화학자였던 아들마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자살했다.
하버의 능력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청산가리를 토대로 곡물 저장용 훈연 살충제인 지클론 A(Zyklon A)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나치 화학자들은 이 물질을 정제해 더 강력한 지클론 B 가스를 개발했고, 이를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용했다. 하버는 유대인 출신이었지만, 자기 발명품에 직접 희생되지는 않았다. 학생 때 루터교로 개종한 데다 군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 그는 1933년 새 나치 정부가 자신의 연구실에 있는 유대인 12명을 내쫓으라고 명령했을 때 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자신했다.
그들이 해고당하자, 그는 항의의 표시로 사직서를 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택할 길은 망명밖에 없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의 재능을 화학전에 투자한 애국자였지만, 독일 바깥에서는 실직자에 불과했다. 결국 그는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카를 보슈는 바스표를 매입한 대기업인 I. G. 파르벤 I. G. Farben의 사장이 되어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가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는 천연가스를 수중기로 개질하여 수소를 생산하는 방법을 창안하는 등 고압 화학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1931년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제3제국의 정책에 경계심을 품게 된 그는 히틀러를 만난 자리에서 조국을 다시금 전쟁에 몰아넣으려는 히틀러의 의도를 단념시키려 했다. 총통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보슈를 I. G. 파르벤에서 내쫓았다. 나중에 그 공장에서 지클론 B가 생산되었다. 절망에 빠진 보슈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1940년에 사망했다.
(81쪽)
밀과 쌀의 본부
멕시코시티 북동쪽에 있는 유명한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 인근에 록펠러 재단이 설립한 국제옥수수밀연구소는 이른바 녹색혁명의 발상지로 꼽힌다. 고인이 된 그곳의 전임 소장 노먼 어니스트 볼로그Norman Ernest Borlaug 박사는 질병에 내성이 있고 수확량이 더 많은 키 작은 밀 품종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볼로그가 유전적으로 선택한 품종은 낟알이 많이 달려 정상적인 키의 밀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꺾이기 때문에 키 작은 밀이 필요하다).
멕시코시티에서 국제옥수수밀연구소까지 약 40킬로미터를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놀라운 경관을 잠시 지나치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땅이다. 이 황량한 염습지는 에르난 코르테스 Hernan Cortez의 스페인 군대가 처음 왔을 때 멕시코 중부의 이 고지대 분지를 채우고 있던 5대 호수 중 가장 컸던 텍스코코 호의 잔해다. 아즈텍족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바로 이 호수의 섬에 있었고, 둑길을 통해 연안과 이어져 있었다.
이곳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호수의 물을 뺐다. 이윽고 분지는 다시 채워졌고 넘쳐흘렀다. 이번에는 인구로 말이다. 오늘날 멕시코연방구와 주변 5개 주의 일부를 포함한,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는 지역 중 세계에서 가장 넓은 곳인 이곳에는 2400만 명이 산다. 지하수를 너무나 많이 퍼올려 쓰는 바람에 대수층의 수위가 너무 낮아져서, 이곳의 하수도는 더 이상 비깥으로 물이 흘러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비라도 오면 멕시코시티는 쓰레기에 익사할 위험에 놓여 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긴 히수관을 건설해야만 했는데, 지름 약 58센티미터에 길이가 60킬로미터에 이르는 히수관이 거의 150미터 높이를 내려가 아래쪽 계곡에 하수를 쏟아 낸다.
(87쪽)
볼로그는 받는 태양에너지의 90퍼센트를 전환하는 수준으로까지 이미 밀을 개량했다.남은 것은 루비스코 RuBisCO 를 조작하는 것밖에 없다. 루비스코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셀룰로오스, 리그닌, 당으로 전환히는 효소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모든 식물과 동물의 생존 토대라 할 수 있다. 루비스코의 탄소 고정 능력을 강화하려면 유전자를 변형해야 한다.
광합성 방법으로 볼 때, 밀과 벼는 C3 식물이다. 들이마시는 이산화탄소로부터 만드는 첫 탄화수소 분자에 탄소 원자가 3개 들어 있다는 의미다. 더 나중에 진화한 옥수수와 수수는 C4 식물이다. 국제옥수수밀연구소의 자매기관인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 lRRI 에서 식물유전학자들은 볏잎의 세포 구조를 재배열하여 C3 식물인 벼를 C4 식물로 바꾸려 노력하고 있다. 국제옥수수밀연구소는 그 일이 성공한다면, 밀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96쪽)
국제옥수수밀연구소의 밀과 옥수수 유전자은행, 즉 바닥부터 천장까지 하얀 금속 선반에 종자가 빼곡히 놓여 있는 웰하우젠-앤더슨 유전자원센터 Wellhausen-Anderson Genetic Resources Center 는 세계 최대의 밀 재래품종 보관소다. 약 2만 8000종의 밀 종자가 보관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밀의 원산지인 라틴아메리카에서 얻은 것이다. 원시 품종 landrace 은 각 지역의 농민들이 수천 년 동안 선택하여 길러 온 품종을 말한다. 이 품종들은 모두 테오신트 teosinte 라는 볏과의 잡초에서 유래했다.
콜로라도 주 포트콜린스의 국립유전자원보전센터 National Center for Genetic Resources Preservation 와 노르웨이의 영구 동토층 깊숙이 동굴을 파서 세운 스발바르 세계종자보관소 Svalbard Global Seed Vault 에도 동일한 품종들이 보관되고 있다. 후자는 지구의 식물다양성을 보존할 이른바 최후의 보관소다. 재앙이나 전쟁 혹은 기후변화로 식물이 사라지는 상황에 대비해 종자를 보관한 은행이다. 이 유전자은행의 목적은 새 품종을 개발하려는 육종가들에게 한 번에 5그램씩 유전물질을 나눠 주는 것이다. 하지만 1999년 밀 곰팡이 때문에 줄기녹병이 우간다를 휩쓸고 지나갔을 때 국제옥수수밀연구소가 수백 킬로그램의 내성 종자를 동아프리카로 항공 운송한 사례에서처럼, 위기 상황에서 위험을 분산하는 역할도 한다.
(98쪽)
코스타리카
1948년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 Jose Figueres Ferrer 는 어쩌면 세계 역사에서 가장 독창적일 쿠데타를 단행했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뒤비뀌는 사태를 겪은 뒤, 키가 157센티미터에 불과한 커피 재배업자 피게레스는 700명의 민병대를 모아서 코스타리카 정부를 전복했다. 새 정부의 지도자가 된 그가 군 통수권자로서 처음 한 일은 군대 자체를 없앤 것이었다.
피게레스는 상비군이 내부의 불안을 억압하는 것보다는 시민이 학교, 보건, 사회보장을 맡는 것이 더 쉽고 비용이 덜 든다고 판단했다. 코스타리카 남부의 커피 농장에서 그는 일꾼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고, 의료도 제공하고, 아이들에게 낙농장에서 싼 우유를 공짜로 제공한다면 더 성실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정부를 전복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는 군 막사를 학교로 바꿨고, 재선거를 실시하고, 임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몇 년 뒤 그는 민주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 뒤로도 두 번 더 선출되었다. 코스타리카의 혁명이 5년 뒤, 즉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일어났다면 피게레스는 1954년 토지개혁으로 유나이티드프루트사 의 바나나 농장이 몰수당할 위기에 처하자 CIA가 제거한 과테말라 대통령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Jacobo Arbenz Guzman 과 같은 운명에 처해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란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려다가 마찬가지로 1953년 CIA의 손에 축출된 이란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 Mohammad Mosaddeq 와 같은 전철을 밟았을지 모른다.
그때쯤 피게레스는 코스타리카 은행들을 국유화하고, 여성과 흑인에게 선거권을 주고, 보건 서비스를 확대하고, 전국에 고등교육기관을 세운 지 오래였다. 그 결과 사회가 안정되어 노동자와 기업가 양쪽으로부터 찬사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은 그의 수상쩍은 포퓰리즘을 간과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 가 쿠바혁명을 일으킨 뒤에는 더욱 그러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공산주의 광고판 같은 쿠바에 소련이 돈을 쏟아붓자 미국은 자본주의의 광고판이 필요했고, 당연히 그 지역에서 가장 믿을 만한 민주주의 국가를 선택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국가들을 후하게 원조할 국제개발처 USAID를 설립했다. 국제개발처의 최대 원조국은 코스타리카였다.
(103쪽)
푸에르토리코
1934년, 미국은 첫 정부 산아제한 계획을 출범했다. 푸에르토리코는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할 공간이 그리 많지 않은 길이 170킬로미터, 폭 56킬로미터에 불과한 섬이었다. 19세기 초에 15만 명에 불과했던 푸에르토리코의 인구는 어느덧 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이래로 징집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이 외국에서 벌인 여러 전쟁에 서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푸에르토리코 군인이 백인보다 머스터드가스에 더 내성을 띠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하는 실험을 했다. 그리고 1950년대에 푸에르토리코 여성은 나중에 코스타리카로 보내진 경구 피임약을 시험할 인간 실험쥐가 되었다. 푸에르토리코 여성들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태 이론을 왜곡한 사이비 과학인 우생학에 토대를 둔 가장 무분별한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105쪽)
중국
대약진운동이 실시되던 시기에, 마오 주석은 중국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참새와 전쟁을 선포했다. 참새가 곡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4년 동안 사람들은 새총으로 참새를 사냥하고, 둥지를 없애고, 참새가 내려앉을 때마다 냄비와 팬을 두드려서 하늘로 내쫓았다. 마침내 기력을 잃은 참새들이 죽어서 떨어질 때까지 말이다. 수백만 마리가 죽고 멸종 직전으로 내몰릴 때까지, 전국의 벼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메뚜기 떼를 사라진 참새와 연관지어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참새는 메뚜기의 천적이었다. 중국 생태계에서 참새가 없던 시기가 대기근으로 3000만-4000만 명이 굶어 죽은 시기와 일치했다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255쪽)
퇴경환림공정은 전 세계를 통틀어 정부가 시도하는 가장 야심찬 그리고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환경 계획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전국에서 가장 가파른 산지(어디든 경사가 25도를 넘는다)에서 경작을 하던 사람들 3000만 명이 10년 동안 연평균 8000위안에 상당하는 현금이나 쌀을 보조금으로 받기로 하고 새 마을로 이주했다. 그들의 경작지에는 토종 나무나 풀을 심었다. 중국이 여전히 천연림으로 덮여 있던 1950년대로 시계를 되돌리려는 것이다.
중국은 이 땅들에는 사람이 결코 정착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힘들게 배웠다. 그 교훈을 뼈저리게 느낀 것은 1997년이었다. 나무가 남아 있어서 뿌리가 토양의 물을 머금을 수 있었다면 가뭄이 그렇게 극심한 재앙이 되지는 않았리라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숲이 사라졌기에 황허의 물이 무려 267일 동안 마르다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중국 북부 전역의 물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다음해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사는 중국 중부에서 양쯔 강이 범람하면서 1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이 물에 잠기고 20억 톤이 넘는 겉흙이 쓸려 내려갔다. 사망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고, 주택 수백만 채가 파괴되었고, 피해 규모가 수십억 달러에 달했다. 이 가뭄과 홍수는모두 산비탈에서 숲이 사라진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258쪽)
파키스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에요“ 탄비르 아리프Tanveer Arif가 말한다. 가다프타운 Gadap Town의 우물들이 말라버린 사건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20년 전만 해도 이 땅은 세계에서 밀과 옥수수의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 이 농장들은 대부분 밀려드는 메스키트 덤불에 뒤덮여 있고, 주말에 나들이 장소로 쓰일 뿐이다.
1947년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될 때 이곳에 있던 민영 동물원들에는 인도영양, 야생 당나귀, 닐가이영양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빌린 말 몇 마리가 있을 뿐이다. 당시 파 키스탄은 3분의 1이 숲이었다. 오늘날 파키스탄의 숲 면적은 채 4퍼센트도 안 된다. 그것도 실제로는 거의, 또는 전부 헐벗은 곳이지만 숲이라는이름이 붙은 땅까지 포함한 면적이다.
“그때는 7미터만 파도 물이 나왔어요. 15년 전에는 60미터까지 뚫어야 했지요. 그러다가 80미터로까지 낮아졌고, 이윽고 완전히 말라 버렸어요.”
가다프타운은 녹색혁명의 성과를 맛본 곳이었다. 수확량을 경이로운 수준으로 늘리는 키 작은 잡종 품종을 심어서 말이다. 그저 물만 더 주면 되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우물을 팠고, 흘러나오는 물이 줄어들자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더 깊이 팠다. 지금은 모두 말라 버렸고 더 이상 팔 곳도 없다. 우기에 흐르는 물을 가두기 위해 메마른 강바닥에 세운 집수댐도 소용이 없다. 아리프는 말한다. “대신에 사람들은 카라치 같은 도시를 더 건설하겠다고 모래를 헤치고 기반암까지 파 들어가지요.”
그는 방울깃작은느시 Houbara bustard 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두바이의 석유 재벌들이 즐겨 사냥하는 새다. 그들은 주말에 제트기를 타고 새를 사냥하러 온다. 그들에게는 일인당 100마리까지 잡을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다. 그들은 사냥을 방해하면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아리프에게 전화로 경고를 하곤 한다. 이 지역의 좋은 나무들, 특히 몰약을 만드는 데 쓰이는 구갈guggal은 정치 세력이나 무장 세력과 연계된 사람들, 혹은 정치가들이 다 베어냈다.
대신에 정치가들은 토양 침식을 막겠다고 텍사스산 메스키트를 들여왔다. 유감스럽게 도 메스키트는 벌거벗은 땅이 아니라 밭으로 밀려들었다. 메스키트를 불태우려고도 해봤지만, 그때마다 덤불은 더 빨리 불어날 뿐이었다. 그 다음에 정치가들은 오스트레일리아산 유칼립투스를 들여왔다. 하지만 유칼립투스는 물을 찾아 뿌리를 뻗으면서 도시 전역의 배관을 파괴했다.
아리프는 구갈을 멸종 위기 종으로 정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아리프가 남아 있는 숲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한 녹색 지킴이Green Guard 청소년 대원들은 폭력배들에게 들볶였다. 카라치 동쪽 인더스강을 따라 있는 숲에서는 그의 보호 활동을 언제라도 와해시킬 수 있는 국회의원이 종종 벌목을 주도한다. 북부에서는 탈레반이 같은 짓을 한다.
최근까지 파키스탄은 매우 비옥한 곳이었다. 이곳을 흐르는 거대한 인더스 강은 인류 문명 가운데 하나를 출현시킨 요람이었다. 세계의 지붕인 티베트 고원에서 흘러나온 양분이 인더스 강의 드넓은 범람원에 쌓여, 이곳은 아시아에서도 토양이 가장 기름진 곳이었다. 탄비르 아리프는 현재 파키스탄이 겪고 있는 수해와 수확량 감소는 인간이 만든 재앙이라고 말한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인 파키스탄은 앞으로 20년 안에 현재 인구가 가장 많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를 넘어설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인구가 2억 4800만 명이지만, 개발도상국 중에서는 가족계획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는 편이다. 물론 그렇긴 해도 2030년이면 인구가 4000만 명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인도네시아 인구의 4분의 3인 파키스탄의 인구는 그때쯤이면 8000만 명이 더 늘어날 것이다.
인도와 더불어 파키스탄은 녹색혁명의 첫 대상지역이었다. 그럼으로써 파키스탄은 기아에서 벗어났고, 살아남은 수백만 명은 수 백만 명을 더 낳았다. 늘어난 인구 가운데 60퍼센트는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다. 녹색혁명에 물을 대어 그들의 목숨을 구한 우물과 강은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결과 파키스탄 아동의 3분의 1은 만성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 두 자릿수에 이르는 실업률은 인구가 증가하면서 함께 높아지고 있으며, 불완전 고용자의 비율은 더욱 높다.
(336쪽)
이란의 가족계획
1987년 후리에 샴시리 밀라니는 테헤란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과정을 끝냈다. 전쟁 중에 그녀의 전공 분야는 정치색을 띠게 되었다. 인구가 이란 병기고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986년 이란 총리는 엄청난 인구가 ‘신이 주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 특히 기획예산국장은 망연자실했다. 교착상태에 있던 전쟁이 유엔의 중재로 정전 협상으로 이어질 무렵, 그의 부서는 파탄 상태에 이른 경제가 감당할 수 있을 인구가 얼마인지 계산했다.
한때는 축복이었지만 지금은 위기가 된 인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최고지도자가 함께하는 비밀회의가 열렸다. 기획예산국장과 보건부 장관은 인구 증가율을 억제하고 국가 차원의 가족계획 운동을 펼치자는 안을 제시했다. 그 사업안은 단 한 차례의 표결로 승인되었다. 샴시리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인구통계학자들과 예산 담당자들의 보고서가 호메이니에게 전해졌습니다. 다 듣고 난 뒤 그가 말했다고 합니다. ‘필요한 조치를 취하시오.’”
1989년 이맘 호메이니가 세상을 떠났다. 예전에 여성 1인당 출산율이 아홉 명에 이른 것이 신이 내려 준 선물이라고 찬양했던 총리는 이제 국가 가족계획 사업을 출범시켰다. 중국과 달리 몇 명을 낳을지는 부모가 선택했다. 10명을 낳기로 했다고 해서 법으로 금지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인구증가 역전 사례가 되었다. 12년 뒤 이란 보건부 장관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가장 계몽적이면서도 성공적인 가족계획 사업을 수행한 공로로 유엔 인구상을 받았다.
샴시리와 동료 산부인과 의사들은 말을 타고 전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종류의 피임법-콘돔과 피임약부터 수술까지-을 모든 이란인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원래 호메이니가 내놓았던 피임 파트와가 엄마도, 아이도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낙태와 수술은 제외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후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Ayatollah Ali Khamenei 는 좀 다른 파트와를 내렸다. “지혜로이 판단할 때 아이를 더 낳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면, 정관수술을 허용할 수 있다.” 그 말은 여성의 자궁관묶기도 포함된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이란의 인구통계학자들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자료를 보았다.
그들은 텔레비전에서 현대 여성들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샴시리도 포함되는데, 그녀를 비롯한 산부인과 의사들이 이란 TV에 자주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서는 전화를 걸곤 했어요. ‘학위를 어떻게 왔나요? 어떻게 가르쳐야 우리 딸이 선생님처럼 될 수 있지요?’라고 물었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답변하기가 점점 더 쉬워졌다. 이란 가족계획 사업 관계자들이 포상을 받을 때마다 예외 없이 언급하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여성 교육이었다. 초등교육과 중둥교육뿐 아니라 대학교육까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75년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란 여성은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2012년에는 이란 대학생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60퍼센트를 넘어섰다. 2012년에는 공무원 가운데 3분의 l이 여성이었다.
그녀는 암묵적인 강요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설명한다. 딱 하나 요구한 게 있다면, 모든 예비부부에게 모스크나 혼전 혈액 검사를 받는 보건소에서 결혼 전에 강의를 들으라고 한 것이었다. 강의에서는 피임법과 성교육을 가르쳤고, 자녀가 적으면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가 낫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가 출산 의욕을 꺾기 위해 내린 조치는 하나뿐이었다. 식품, 전기, 전화, 가전제품을 제공하는 장려금을 넷째부터는 없앴다.
(371쪽)
이란의 환경문제
이란의 고속도로가 대부분 그렇듯이, 골레스탄 국립공원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도 혁명수비대 소유의 회사에서 건설했다. 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이 엘리트 부대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기업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30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이란 최 대의 복합기업이 되었다. 가장 수지가 맞는 사업은 댐이다. 이란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댐이 많은 나라다. 완공된 댐만 600개가 있고, 수백 개를 더 짓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한 이란의 과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군은 미국 공병대와 마피아의 결합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함수호이자 유네스코의 생물권 보전 구역이며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이란 북서부의 우르미아호는 지금 크기가 예전의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이며, 머지않아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호수로 물을 보내는 강에 댐을 35개나 지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의회는 2011년에 중동에서 가장 큰 호수인 우르미아 호로 물을 흘려보내 사라지고 있는 호수를 구하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과학자들은 호수가 완전히 말라붙으면, 80억 톤의 염분이 바람에 날려서 이란 이라크 터키 아제르바이잔의 도시들을 강타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385쪽)
이란에서 가장 과격한 비정부기구 가운데 하나인 ‘환경오염에 맞서는 여성 협회Women's Society Against Environmental Pollution’ 는 테헤란대학교의 사서 말라가 말라 Mahlagha Mallah가 설립했다. 그녀는 1973년에 새로 들어온 낯선 주제의 책을 보고서 당황했다. 환경오염에 관한 책이었다. 그 책을 어느 분야로 분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그녀는 아예 책을 다 읽어 보았다. 이란 최초의 페미니스트 작가인 비비 카눔 아스타라바디 Bibi Khanoom Astarabadi 의 손녀인 말라는 이란 환경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녀의 활동은 혁명과 이라크 전쟁으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1990년대에 일흔네 살의 나이에도 이란 곳곳을 여행하면서 협회의 새 지부를 설립하는 일에 나섰다.
(389쪽)
16세기 사파비 왕조 때 페르시아 정부가 있던 곳인 이스파한은 경이로운 이슬람 건축물로 가득하다. 도시를 관통하는 자얀데루드 강에 놓인 5개의 돌다리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1560년에 지어진 이 아치들은 음향학적으로 정교하게 지어졌다. 그래서 여름날 저녁에 수피교의 시가를 낭독하거나 음악을 연주하면 다리 전체로 그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2008년 이래로 이 다리 밑으로는 물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 지금 강바닥에는 마른 모래뿐이다.
개혁가였던 모하마드 하타미Mohammad Khataml 대통령 시절 수십 개의 환경 단체가 설립되었다. 2001년에는 수백 명이 참석한 생태 대회가 열렸다. 이스파한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강이 재앙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지질학자들의 설명을 들었다. 그들은 자얀데루드 강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집회를 열고 각급 학교에서 지구의 날 행사를 주최하기 시작했다. 2008년, 강물이 정말로 말라버렸다. 하지만 오히려 과학자 단체인 녹색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서양 스파이라는 비난을 받는 상황으로 몰렸다.
"이스파한의 아 릅다운 역사적 건축물들 밑으로 지하철을 뚫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동 때문에 유적에 금이 가거나 무너질 수도 있다고 계속 말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아예 외면합니다." 건축가가 말한다.
(391쪽)
일본
편백나무와 삼나무도 토착 식물이지만 전후에 정부가 낙엽수를 베고서 건축과 가구 산업을 위해 더 빨리 자라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심으면서 일본의 낙엽수림과 침엽수림의 균형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국이 생태학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두 종의 나무들은 자라면서 점점 더 많은 꽃가루를 내뿜었다. 2000년 무렵 일본인의 25퍼센트 이상은 코가 간질거리고 재채기가 터져 나오는 화분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두 정부가 조렴한 편백나무와 삼나무 때문이었다. 해가 지나며 이 나무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의 눈은 더 빨개지고 코에서도 불이 난다.
(427쪽)
이것이 바로 인구 감소 속에서 번영을 보는 경제학자 마쓰타니 아키히코가 더 젊은 세대가 깨닫겠지, 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도쿄 대도시권과 오사카-교토-고베 같은 대도시 지역은 자석처럼 젊은이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노동인구가 늙고 생산성이 떨어지면 거대도시도 늙어갈 것이다.
노동인구가 줄어들면 원료를 수입할 항구를 필요로 하는 중공업계에서 일할 인력도 줄어들 것이다. 마쓰타니는 2030년에 도쿄가 현재 수준의 노동력을 유지하려면 일본 각지에서 600만명 이상의 인구가 유입되어야 할 것이라고 계산한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이유를 떠나서, 부동산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중공업을 찾기보다는 더 가벼운 소비재를 만드는 경공업을 찾아갈 것이며, 그러면서 기회를 찾아 전국으로 더 균일하게 퍼질 것이다. 더 작고 국지적인 시장이 새롭게 떠오를 것이며, 번영이 가차 없는 축재가 아니라 더 짧은 노동시간과 더 높은 삶의 질을 중심으로 재정의될 때, 시골 오지는 더 매력적인 장소로 여겨질 것이다.
(429쪽)
일본에서 야생 황새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1971년이다. 1989년 효고 현의 교토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도요오카의 황새 부화장에서는 러시아에서 들여온 황새들을 번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해마다 뿌려대는 유기 수은 살충제로 뒤범벅된 그 지역의 논은 너무 독성이 강해서 날개가 돋은 황새들을 풀어놓을 수 없었다.
2004년, 오카다 유카라는 열 살짜리 여학생은 도요오카의 부화장에 우글거리며 갇혀 있는 황새들이 예전에는 하늘을 뒤덮었고 굴뚝마다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알게 된 유카는 시장을 찾아가서 도요오카의 학교 급식에 유기농 쌀을 공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하려면 논에서 수은을 제거해야 했다. 그것은 곧 메뚜기가 돌아오고 논이 황새가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열 살짜리 소녀에게서 평범한 진리를 듣고 난 시장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곧 도요오카 시는 “황새에게 좋은 환경은 사람에게도 좋다”를 표어로 삼게 되었다. 그 뒤로 주민들은 논에 더는 살충제를 뿌리지 않았다. 1년 뒤 시는 황새를 처음으로 풀어놓았고, 지금은 황새가 둥지를 트는 곳마다 쌀의 가격이 두 배로 띈다. 경제는 다시 소생했고, 게다가 수백 마리의 황새를 보려고 관광객들이 도요오카로 몰려들고 있다.
자연자본은 결코 기업의 대차대조표에 계상된 적이 없지만, 화학물질을 쓰기 이전의 농민들은 그 자본을 잘 알고 있었다. 금세기에 불가피하게 그렇게 될 테지만, 국민이 훨씬 적어진 일본에서는 자연자본을 다시 채우고,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기회가 있다.
(437쪽)
펀자브
펀자브의 주요 작물인 밀과 바스마티 쌀 basmati rice 을 재배하는 지역에서 지하수위가 연간 3미터씩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에는 30미터만 파도 물이 나왔지만, 그 뒤에는 90미터, 이어서 150미터까지 파야 했다. 지금은 300미터를 넘게 파야 물이 나오는 곳도 있다. 예전에는 몬순이 30일 이상 지속되었지만, 지금은10~l5일로 줄었 다. 토양은 염류화가 진행되고 있다. 펀자브는 인도 총면적의 1.5퍼센트에 불과하지 만, 인도 밀의 60퍼센트와 쌀의 50퍼센트가 생산되는 곡창지대다.
1970년 이전에는 여름에 옥수수와 땅콩을 심고, 목화와 벼도 약간 재배했다. 겨울에는 밀, 콩, 병아리콩을 심었다. 당시 인도의 인구는 지금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5억 명이었다. 록펠러 재단의 과학자들이 멕시코의 밀 개량 센터에서 개발한 고수확 신품종을 갖고서 이곳에 왔다. 그들은 새 계획을 ‘녹색혁명’이라 불렀고, 칼카트는 공동 책임자가 되었다.
“새 밀을 처음 수확한 것이 1968년이었습니다. 1만6000제곱킬로 미터에 심었지요. 1969년에는 국제미작연구소가 기적의 쌀이라고 부른 품종이 도입되었습니다. 그전까지 1만 제곱킬로미터당 수확량이 벼는 1톤, 밀은 1.2톤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벼는 4톤, 밀은 4.5톤으로 수확량이 급증했지요.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관개였어요. 우리는 우물을 팠지요. 댐을 쌓고 수로를 파려면 10~15년이 걸릴 텐데, 우물은 훨씬 더 빨리 팔 수 있었으니까요.”
(444쪽)
케랄라
케랄라 주는 가난한 사회도 높은 수준의 생활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생활수준을 부가 아니라 삶의 질로 평가한다면 그렇다. 이곳에는 조혼도, 유아 살해도, 성 비 불균형도 없다. 케랄라는 여성이 남성보다 조금 더 많으며, 1970년대 이래로 인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다.
케랄라의 여러 종교들은 종파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잘 어올려 지내 왔다. 19세기에 깨어 있는 영국 선교사들, 자애로운 젊은 여왕, 자기 계급에서 내쫓긴 카리스마 넘치는 힌두교 개혁사상가, 몇몇 존경받는 무슬림 지도자들 사이에 보기 드문 협정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성별, 종교, 계급에 관계없이 노예와 불가촉천민도 포함하여 모든 주민이 주 법령에 따라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56년 인도는 힌두교의 마하라자와 무슬림의 나와브가 통치하던 예전의 토후국들을 주로 언어에 따라 재편했다. 말라얄람어를 쓰는 지역은 케랄라 주가 되었다. 1957년 대중 교육을 옹호하던 카스트 개혁가들은 세계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산주의 정부를 구성했다. 그 뒤로 공산주의자들은 케랄라에서 자주 권력을 잡아 왔다. 그들은 공중 보건과 교육에 힘써 찬사를 받고 선거에서 이기곤 했다.
그들의 성공은 어느 정도는 1960년대에 의료 수준이 높아지면서 유아 사망률이 낮아지고 수명이 늘어나면서 뜻하지 않게 케랄라가 인도에서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는 곳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민들이 깨달은 덕분이기도 했다. 곧 가족계획 사업이 실시되었다.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가족계획은 수월하게 정착되었다. 그 결과 케랄라는 1970년대 중반 산자이 간디가 800만명이 넘는 인도 남녀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실시했던 ‘긴급 조치’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야만적인 조치는 반발을 불러와서 그의 어머니 인디라 간디의 정부가 무너지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454쪽)
뭄바이
뭄바이는 공터가 없는 도시다. 새로 세워지는 고층 건물들 사이에는 움막집들이 무수히 들어서 있다. 어제 도착한 사람들이 그 천막 아래 살고 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사치스러운 고층건물들 아래로 난 하수관에도 사람들이 산다. 벽이나 다리나 기둥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이주자들의 텐트가 죽 늘어서 있다. 먼저 날품팔이 노동자가 오고, 이어서 그의 형제들이 온다. 더 시간이 지나면 그의 아내를 비롯해 한 세대의 친척들이 다 오고, 이윽고 아이가 생긴다. 오래 일하면서 금속 쪼가리나 굴러다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충분히 주워 모으면, 조금씩 벽이 솟아오르고 그 위에 방수포 지붕이 덮인다. 이윽고 슬럼가가 또 하나 생긴다.
그들을 쫓아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27층짜리 대저택을 지은 무케시 암바니 Mukesh Ambani 도 주변 건물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을 내쫓지 않는다. 그의 대저택을 관리하는 데 600명의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뭄바이는 세계에서 고용률이 100퍼센트인 몇 안 되는 지역 가운데 하나다. 800킬로미터 위쪽 아라비아 해 연안에 있는, 또 하나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음울한 거대도시 카라치와 달리 이곳에서는 말 그대로 누구든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다라비는 아시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최대 규모의 슬럼가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1년 인도 타임스Times of India 는 이미 네 곳이 다라비를 능가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 네 곳도 모두 뭄바이에 있다.
다라비는 두 통근 열차 선로 사이에 낀 지역이다. 위에서 보면 다닥다닥 붙은 천막과 주석 지붕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있어서, 마치 땅에 한 번도 발을 딛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 듯이 보인다. 날마다 그 철도로 오가는 수백만 명이 다라비를 지켜본다. 다라비는 뭄바이의 금융가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개발업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큼 대단히 가치 있는 땅이다. 17세기에 붐바이는 7개 섬의 어촌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영국은 둑을 쌓아서 섬을 연결했고, 그 주변은 봄베이 항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섬 사이의 바다가 메워졌다. 지금 다라비가 있는 곳은 예전에 바다였다. 다라비는 ‘파도’라는 뜻이며, 몬순으로 하수도가 물바다가 되면 다시금 말 그대로 파도에 잠기곤 한다.
다라비의 어두컴컴한 골목에서,100만 명이 1만 가지의 소규모 산업에 종사한다.
(466쪽)
플라스틱은 다라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업이다. 전 세계에서 나오는 플라스틱이 커다란 자루에 담겨서 트럭에 실려 이곳으로 온다. 물병, 플라스틱 식기, 병원 폐기물, 유람선 쓰레기, 비닐봉지, 산더미 같은 합성섬유 등의 폐품이다. 다라비의 플라스틱 수집 업자들은 호텔 체인이나 항공사와 계약을 맺고서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컵, 칼, 포크, 숟가락, 커피 젓는 막대를 수거한다.
분류한 플라스틱은 자루에 담겨서 골목길 저쪽에 있는 주철로 만든 분쇄기로 보내진다. 분쇄기는 트럭의 플라이휠을 짜 맞춘 것인데, 불꽃을 튀기면서 플라스틱 가루를 토해 낸다. 가루는 커다란 드럼통에 담아 씻은 뒤 꺼내어 말린다. 그리고 거대한 통에 넣어 녹여서 죽처럼 만든다. 아크릴 냄새가 온 골목에 진동한다. 골목의 다른 곳에서는 여자들이 커피 젓는 막대와 항공기에서 나온 립스틱 묻은 컵을 분류하고, 남자들이 엄청나게 쌓인 전선 더미에서 피복을 벗겨 내고 있다.
걸쭉해진 플라스틱은 형틀에 부어서 알갱이로 만든다. 알갱이는 배 에 실려 수출되거나 다시 녹여서 소비재를 만드는 데 쓰인다. 다라비에서는 이른바 ‘부가가치’를 거의 접할 수 없지만, 이곳에서 직접 자그마한 사원 모형, 플라스틱 신상, 십자가 같은 장신구를 만들 때에는 예외다. 전 세계의 어떤 장신구도 이제 더는 장인들이 만들지 않는다. 슬 럼가 주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낸다.
다라비 의 연간 총소득이 6억 6500만 달러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하지만 뭄바이의 금융을 지배하는 이들은 이 중요한 지역을 활용할 다른 계획을 갖고 있다. 고층 아파트, 사무실, 병원, 쇼핑몰, 멀티플렉스 등으로 이루어진 야심 찬 다라비 재개발 계획이 곧 시작될 예정이다. 지금 있는 것들은 모두 파괴될 것이다.
(469쪽)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테파노 리베르티, '땅뺏기' (0) | 2015.05.19 |
---|---|
팔레스타인의 '고향' 찾기-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라디오 소개 (0) | 2015.05.01 |
푸드 앤 더 시티 (0) | 2015.04.10 |
장 지글러, '빼앗긴 대지의 꿈' (0) | 2015.03.16 |
김희경,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3) | 2015.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