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뺏기 Land Grabbing
스테파노 리베르티. 유강은 옮김. 레디앙
번역자 이름만 보고도 고를 수 있는 책이 있다. 내게는 유강은이라는 번역자가 그런 사람이다. 국제문제와 관련된 책들을 주로 번역하는 분이고(물론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며 일면식도 없다) 하워드 진의 책들을 많이 옮겼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땅뺏기' 실태를 다루고 있다. 부제는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또다른 이유- 새로운 식민주의 현장을 여행하다'이다. 마다가스카르 대우 사태를 비롯해, 한국은 이런 문제제기에서 자유롭기는커녕 손가락질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에티오피아의 셰이크들
여기는 아와사 Awassa, 아디스아바바에서 남쪽으로 300킬로미터 떨어진 에티오피아 지구대 Ethiopian Rift Valley 의 중심부에 자리한 곳이다. 이 출입구 뒤편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피해 멀리 떨어진 곳에 에티오피아 농업 발전의 최후 개척지가 있다. 콩, 과일, 채소 또는 이른바 농산 연료용으로 재배하는 식물을 키우는 최첨단 온실이 그것이다. 에티오피아 정부가 해외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장기 임대와 개발 계획을 위임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사업가와 모험가들이 속속 이 나라를 찾고 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표적 시장 target market 의 수요에 특별히 맞춰 재배되는 이 즙 많은 토마토와 빨강, 초록, 노랑 피망, 애기 피부같이 부드러운 가지 등은 에티오피아사람들이 먹는 게 아니라 아라비아만 국가들의 훨씬 더 부유한 소비자들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생산하는 것은 전부 수출용입니다. 우리는 24시간 안에 우리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운송할 수 있습니다. 두바이의 레스토랑까지요."
상품을 따서 나무 상자에 담아 냉장실에 넣고 아디스아바바까지 트럭으로 나른다. 그곳에 도착하면 중동이나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지로 향하는 비행기에 실린다. 회사의 투자자들과 일부 기반 시설도 외국인 혹은 외국 소유이다. 종자는 네덜란드에서 수입하며 자동화 관개 시스템도 네덜란드 것이다. 온실 구조물은 스페인 기술자들이 개발했고, 비료도 유럽에서 가져온다.
(29쪽)
이 회사는 전형적인 현지의 두 요소인 토지와 노동력을 활용한다. 높은 생산성과 매우 낮은 비용이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두 가지 특징은 바로 이 두 요소에서 나온다. 지투 Jittu 회사가 노동학취 공장은 아니다. 회사는 단지 수용가능한 시장의 한계안 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노동과 토지의 가격이 굉장히 싸기 때문에 막 대한 이윤을 올릴 뿐이다. 게다가 자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는 에티오피아 투자청은 웹사이트에서 이런 측면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2007년 말 에티오피아 당국은 투자자들에게 토지 일부를 장기 임대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세계 각지의 여러 집단이 이 계획에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인과 인도인이 주축이지만 유럽인도 있었다. 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대규모 생산을 시작할 수 있는 토지를 취득했다. 향후 몇 년에 걸쳐 모두 합해 약 300만 헥타르가 할당될 것으로 예상된다. 벨기에 면적과 맞먹는다. 임대료는 터무니없이 낮아서 토지의 질과 위치에 따라 헥타르당 1년에 100비르에서 400비르(평당 2원에서 8원 수준) 사이이다.
(32쪽)
무엇보다도 현지에서 재배하고 건조한 뒤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출하는 쌀이 주된 품목이다. 셰이크 알아무디는 신젠타 Syngenta 와 협력해서 동북부에 30,000헥타르 규모의 사탕수수 농장을 세우고자 하며, 말레이시아 기업인 아그리 넥서스 Agri Nexus 와 함께 베니샨굴구마즈 Benishangul Gumaz 주에 바이오 디젤을 전문 생산하는 100,000헥타르 규모의 농장을 세울 생각이다.
나이지리아의 전 대통령 올루세군 오바산조에서부터 지부티의 현 대통령 이스마엘 오마르 구엘리에 이르기까지 에티오피아 정부가 해외의 정치적 동지들에게 양도한 작은 구획의 토지가 많이 있다. 두 사람은 각각오로미아주의 토지 2,000헥타르와 4,000헥타르를 받았다.
하지만 이 나라에 진출한 가장 큰 농업 투자자는 인도 카루투리 그룹이다. 케냐와 에티오피아에서 으뜸가는 장미 생산 업체인 이 회사는 아디스아바바에서 2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10,000헥타르, 그리고 감벨라 주에 300,000헥타르를 취득하고 있다.
남수단과 국경을 접한 이 지역에서 활동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 이점이 생긴다. 땅이 공짜인 것이다. 처음 6년 동안 임대료를 전혀 내지 않는다. 그 뒤에는 84년 동안 헥타르당 15비르(약870원)를 지불한다. 회사 스스로도 인정하는 것처럼,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에서 같은 질의 토지를 빌리려면 연간 헥타르당 약 300유로(약435.000원)의 비용이 든다. 이 회사는 장미를 재배해서 유럽에 수출하고 팜유는 인도와 아프리카 시장에 판매한다. 특히 동남아프리카 공동시장(Common Market for Eastern and Southern Africa(COMESA) 나라들이 주요 대상이다. 에티오피아는 수출 관세를 피하기 위해 이 자유무역협정에 가입을 고려하는 중이다.
(59쪽)
식량위기와 산유국들
2007~08년 세계적인 규모의 식량 위기가 발발하자 언론에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앙아메리카의 여러 나리에서 불붙은 식량 폭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게 사실이지만 식량 위기를 계기로 평상시에 고요한 많은 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풍파가 일었다. 아라비아만 국가들은 막대한 현금 자원을 보유하고도 식량이 고갈되는 사태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리야드뿐만 아니라 두바이와 아부다비에서도 경고등이 켜졌고, 식량 수급 책임자들은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고 여기에 절대적인 우선성을 부여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식량공급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정책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에티오피아야말로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다른 나라이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비옥한 땅이 풍부하며 더할 나위 없는 기후를 갖춘 이 아프리카 나라는 곧바로 ‘페르시아 만의 곡창지대’ 구실을 떠맡을 최고의 후보로 부상했다. 에티오피아의 토지 시장이 외부 투자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33쪽)
비밀에 부쳐지는 토지 임대
토지 임대 규모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입수할 수 있는 데이터는 정부에서 내놓는 것뿐인데, 정부의 말에 따르면,100만 헥타르가 이미 입대되었고 조만간 200만 헥타르 정도가 추가로 임대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임대 협약은 조사대상이 아니다. 협약은 비밀리에 교섭되며, 어떤 형태로든 확인할 수 없다. 극소량의 정보가 흘러나 오는 통로는 외국 언론에 실리는 기사나 토지를 취득한 기업들의 신고내용, 에티오피아 출신 이민자들이 제기하는 반대 등이다. 이민자들도 1차 정보를 접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해외 언론에 의존해야 한다.
(53쪽)
사우디의 정책 변화
이 초록 들판은 1970년대에 사우디 정부가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개시한 대규모 국가 지원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오일달러로 지금을 대는, 비용이 무척 많이 드는 생산 시스템은 지하 깊숙한 수원까지 전례가 없이 깊이 파서 물을 댄다. 이 모든 일은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벌어졌다. 당시 석유수출국기구(OPEC) 나리들이 원유 수출을 통결하자 서구는 ‘식량 무기’를 활용하겠다는 위협으로 대응했다.
이 시기 동안 식량생산을 촉진하려는 여러 가지 정책이 숱하게 도입되었다. 1978년에 밀 생산 지원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대규모 보조금 시스템으로 구성되었다. 국가가 모든 생산물을 시장 가치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사들이는 방식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시작되자 생산된 밀 1톤당 933달러를 지불하도록 규정되었다. 실제 시장 가격은 165 달러였는데 말이다. 농민들은 순식간에 수완을 발휘했다. 1984년에 사우디는 밀 자급 수준에 도달했고, 1992년에는 세계 6위의 밀 생산국으로 올라섰다.
(71쪽)
요즘에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관리자들은 석유와 마찬가지로 사용가능한 물도 소모되는 자원임을 깨닫고 있다. 결국 정부는 밀 생산 보조금을 점차 줄이기 시작했다. 2016년까지 보조금을 완전히 폐지할 계획이다. 세계 2위의 쌀 수입국이자 1위의 보리(대부분 동물사료용이다) 수입국, 그리고 보조금을 폐지함에 따라 조만간 세계 1위의 밀 수입국이 될 사우디인들은 발밑의 땅이 흔들리는 기분이다.
압둘라 국왕은 열정적으로 대처했다. ‘외부화 관리 controlled externalisation’라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해외농업 투자를 위한 압둘라 국왕의 계획(KAISAIA)'은 2009년 1월에 위풍당당하게 시작되었다. 대표단은 수단, 에티오피아, 이집트, 터키뿐만 아니라 필리핀, 베트남, 우크라이나도 찾아갔다. 오래지 않아 첫 번째 계약이 체결되었다.
모함마드 후세인 알아무디의 사우디스타는 에티오피아에서 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채소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제다에 본부를 두고 이슬람개발은행과 리야드 정부, 기타 민간 투자자들에게서 끌어모은 자금을 사용하는 포라스 인터내셔널 Foras International 그룹은 세네갈과 말리, 모리타니에서 토지를 취득했다. 밀 생산 전문 하일 농업개발 Hail Agricultural Development 은 수단에서 수만 헥타르의 토지를 임대했으며 터키와 카자흐스탄으로도 진출할 계획이다.
(74쪽)
중국은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 남반구 투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이런 움직임에 놀라울 정도로거의 관여하지 않는 한 나라가 있었다. 중국이다. 베이징의 사업체들은 아프리카든 다른 곳이든 간에 해외의 대규모 농업 프로젝트에 크게 참여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토지를 사재기한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떼로 몰려들어 아프리카 농민들을 몰아내고 토지를 장악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사실 이런 일은 전혀 없었다. 중요한 투자도 없었고 중국 농민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처녀지로 대규모 이주하는 일도 없었다. 베이징의 기업들이 관여하는 프로젝트들은 비교적 규모가 작으며, 대부분 국내 시장용 생산을 한다.
베이징 농업부의 관리는 이렇게 말한다. “해외, 그것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곡물을 경작하는 건 현실성이 없다. 아프리카에서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그곳에서 중국으로 농산물을 수출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 비용이 무척 많이 들 것이고 리스크도 클 것이다"
(75쪽)
땅뺏기 금융과 '기아의 상인들'
에티오피아에서 중요성과 함의가 드러난 거대한 전 지구적 경쟁은 각기 다른 파생 효과와 연결 고리를 수반하고 있다. 이 움직임에 관여하는 집단과 기관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농업과 토지 개발에 몰두한다는 생각 자체를 전혀 한 적이 없었다.
다른 집단들도 땅을 둘러싼 경쟁에서 주요 참가자로 부상하고 있다. 투기 펀드, 대규모 다국적기업, 연기금 등이 그 주인공이다. 토지는, 이 새로운 투자자들이 구사하는 언어로 하자면,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새로운 자산이다. 이 모든 변화는 2007년 여름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붕괴하면서 일어난 주식시장 위기와 함께 시작 되었다. 붕괴 직후에 금융시장의 많은 행위자들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금에서 원유, 그리고 옥수수와 밀 같은 기초식량에 이르는 이른바 ‘안전상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에서 농지 개발 관련 주식을 사들였다. 더 큰리스크를 감수하는 이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아프리카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이 시장은 안전은 보장하지 않지만 천문학적인 수익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자금들은 때로 직접 현지에서 움직인다. 다른 경우에는 특별히 설립된 펀드(이른바 ‘사모펀드') 지분을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부문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 운영하는 농업 사업에 투자하는 펀드가 주 대상이다. 이런 현상은 지난 5년 동안 놀랄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스페인의 비정부기구 그레인에 따르면, 2007년부터 현재까지 외국인 그룹이 최소한 4,500만 헥타르의 토지를 취득했다고 한다.
(115쪽)
지구를 주무르는 ‘기아의 상인들 hunger merchants’, 경영자들이 전염병처럼 피하려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빈곤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비난하는 신문 헤드라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투자가 ‘세계를 먹여 살리기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136쪽)
지난 5년 동안 수백억 달러가 순수 금융 부문에서 농업으로 옮겨갔다. 상품 시장(밀, 옥수수, 쌀, 콩)에서만이 아니라 농업 생산과 연결된 다양한 종류의 투자 펀드에 직접 참여하는 식으로 말이다. 많은 세력들이 그린골드 green gold 쟁탈전에 합류하고 있다. 제이콥 로스차일드 경 같은 거물 금융가들, 카길이나 루이 드레퓌스 같은 전통적인 농산복합기업, 투자은행, 심지어 부유한 나라들의 연기금도 한몫 낀다.
(138쪽)
마다가스카르 대우 사태
임대료, 임대 기간, 기타 여러 조항이 들어 있는 협약조건이 공개되는 일도 드물다. 관련된 나라의 국민들은 흔히 해외 언론 보도 같은 통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다. 2008년에 마다가스카르 정부가 대우와 조인한 천문학적인 협약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협약으로 한국의 다국적기업 대우는 99년 동안 마다가스카르 전체 농경지의 절반을 양도받아 옥수수와 팜유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 계약에 따르면, 고용을창출 하고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한다는 약속을 대가로 토지를 무상 임대한다고 한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이 거래를 폭로하면서 거리 시위가 일어났고, 불과 몇 주일 만에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정부가 무너졌다. 마다가스카르의 사례는 협약의 규모나 협약이 야기한 정치적 결과라는 면에서 볼 때 예외적인 경우이다. 다른 많은 나라에서는 토지 임대나 양도가 조용하게 이뤄진다. 안정 통화를 찾는 정부와 큰 수익을 얻거나 필요로 하는 식량의 수입 통로 확보를 원하는 투자자가 밀실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다.
(116쪽)
국제기구들
가디언이 선정한 ‘지구를 구할 수 있는 50인'에 꼽힌 45세의 인도네시아인 헨리 사라기는 지난 몇 년 동안 비아캄페시나(Via Campesina. 농민의 길)의 사무총장을 맡았다. 비아캄페시나는 세계 각지의 다양한 농민 운동을 아우르는 협회이다.
이제까지 헨리는 힘든 싸움을 많이 치렀다. 그의 나라는 15년이 넘도록 다국적기업들의 공략 대상이었다. 다국적기업들은 특히 수마트라와 칼리만탄 지역에서 바이오디젤용 야자나무를 재배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땅을 사들였다. 3헥타르 넓이의 가족농장을 가진 그는 여러 해 동안 농민들의 토지 이용권을 확보하려고 시도하면서 초국적기업들과 맞서 싸웠다. 가디언은 그가 벌이는 운동의 결과에 따라 ‘향후 20년 안에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 지역이 50년 뒤에도 보존될지 여부가 결정될 테고 또 많은 개도국의 정치적 미래가 죄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요점은 거대 국제기구들이 랜드 러시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땅뺏기 현상은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식량농업기구, 유럽연합 같은 기관들이 장려하는 농업 관련 산업 모델에서 필수적인 일부분입니다. 세계은행의 금융 부문인 국제금융공사(IFC)는 토지 임대협약을 장려합니다. 세계은행은 토지를 소유한 정부에 유리한 투자 환경을 조성하라고 압력을 가하지요. 안전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투자에 보험의 형태로 보증을 제공하는 일도 많습니다."
국제금융공사는 특히 여러 나라 정부에 의지해서 각종 제한을 폐지하고 재정 지원을 비롯한 여러 특권을 제공함으로써 투자자들에게 더욱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게 만든다. 세계은행의 또 다른 부문인 다자간투자보증기구(MIGA)는 리스크가 점점 커진 투자에 보증을 제공하느라 분주하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모델은 새로운 게 아니다. 세계은행은 이미 특히 아프리카에서 레소토나 우간다에 지은 댐처럼 대형 사회기반시설 프로젝트를 건설하거나 계획하면서 이 모델을 활용한 바 있다. 참조 모델은 공공-민간 파트너십이다.
(120쪽)
소농이냐 대규모 플랜테이션이냐
벨기에 법학교수 올리비에 드 슈터Olivier De Schutter 유엔 식량권 특별 보고관은 식량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2008년에 이 역할을 맡았다. 사람들이 온통 곡물가격 급등과 식량 폭동에 관해 이야기하던 때에 세계 무대에 등장한 그는 이 재앙을 일으킨 주된 원인에 대해 기회가 될 때마다 비난을 퍼부었다. 바이오 연료개발 및 그와 관련된 금융투기가 비난의 주요 대상이었다. 토지 취득에 관해서는 몇 차례 대단히 유보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그런 까닭에 농민 조직들 사이에서 상당한 존경을 누리고 있다.
그는 정말로 ‘특별한 보고관’이다. 그의 전임자로 스위스의 연방의원이자 저술가인 장 지글러는 농산 연료를 ‘대량살상무기’에 비유하는 등 수많은 독설로 이름을 떨쳤다. 드 슈터의 스타일은 한결 침착하다. 그는 좀 더 학문적으로 접근하면서 유엔의 다른 기구들이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비판한다.
“국제기구들은 흔히 기아를 생산이나 접근성의 문제로 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식량농업기구는 생산증대를 장려하고, 세계식량계획은 기근이나 흉작, 기타 위기 상황 때문에 특별히 필요할 때 식량을 배급합니다. 제가 보기에 기아가 발생하는 주된 이유는 차별과 주변화입니다."
(127쪽)
“식량농업기구의 추산에 따르면, 활용가능한 토지가 4억 헥타르 존재하는데, 그중 2억200만 헥타르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활용가능한 토지’로 간주되는 땅이 평방킬로미터당 주민이 25명 이하인 땅이라는 겁니다. 이 땅은 대개 유목을 하는 소농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유목민들은 땅에 대한 법적 권리증서가 없기 때문에 쫓겨난다 하더라도 법에 호소할 수 없어요. 이 ‘활용가능한 토지’ 개념은 사실 조작하기 쉽습니다."
“적절한 토지개혁을 해서 소농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체계적인 융자로 소농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대신 거대 투자자들에게 땅을 넘겨줍니다. 이 투자자들은 토지 이용권만이 아니라 물 이용권도 위협합니다. 그리고 소농들을 일용직 노동자나 계절노동자로 전락시켜서 결국 도시 빈민의 대열만 늘어나게 되지요.
사실 진짜문제, 진짜 선택은 이런 겁니다. 우리는 소규모 가족농에 투자하고 토지를 분배하고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고 저장 시설을 제공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규모 플랜테이션에 의지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데 아무도 답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토지개혁 문제가 떠오르고, 또 거대 투자자들에게 시장을 개방해서 정부가 얻는 이득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29쪽)
미국의 에탄올 보조금
에탄올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중서부의 농민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인들 밖에 없는 것 같다. 환경론자들처럼 이론상 에탄올을 두 팔 벌려 환영해야 마땅한 이들은 거의 즉각적 으로 반대론자와 운명을 같이하면서 에탄올을 ‘녹색연료’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이 학파의 수장은 레스터 브라운이다. 워싱턴의 환경 싱크탱크인 지구정책연구소 Earth Policy Institute 소장을 맡고 있는 브라운은 바이오연료를 완전한 재앙으로 여긴다.
“옥수수가 에탄올 생산으로 옮겨가면서 세계적인 규모로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올해 미국중 서부에서 생산된 옥수수 4억 톤 중 4분의 l이 연료생산용으로 처리됐습니다. 지난 8년 중 7년 동안 곡물 생산이 수요에 미치지 못했고, 전 세계 비축량이 지난 34년 중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최근 2년에 걸쳐 시카고 거래소에서는 옥수수 가격이 두 배가 넘게 올랐지요. 주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중서부의 생산자들이 에탄올 열기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방정부가 후하게 지급한 보조금 때문이지요."
브라질의 경우는 적어도 레스터 브라운이 인용한 수치보다는 에너지 균형이 훨씬높다.
(181쪽)
과라니족과 브라질의 에탄올
브라질 서쪽 끝에 자리한 마투그로수두술 Mato Grosso do Sul 주는 파라과이 국경 근처에 있는 변경 지역이다. 초록색 풍경이지만 허허벌판이다.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눈길이 닿는 곳까지 대농장만이 뻗어 있다. 한때 이곳은 세라두cerrado 즉 사바나와 비슷한 열대 환경으로 생명다양성이 대단히 높은 생태계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대부분 콩 재배지이다. 마투그로수두술 주는 북쪽에 있는 쌍둥이 주(마투그로수 주) , 파라과이, 볼리비아 북부, 아르헨티나 동부 등과 더불어 이른바 ‘콩공화국연합 United republic of soya’을 형성한다 .
트랙터와 전기톱으로 무장한 백인 개척자들은 나무를 베어 내고, 토지를 차지하고, 밭을 일구었다. 남부의 몇몇 부유한 주에서 온 이들이었다. 땅을 빼앗기고 메마른 보호 지역에 유예된 채 대개 저임금 막노동자로 살아가는 과라니족은,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여전히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지금은 대농장주들이 차지한 땅의 권리를.
오늘날 마투그로수두술 주에는 11,000명의 과라니족이 3,500헥타르의 보호 지역에서 살고 있다. 말 그대로 거대 콩농장에 포위된 채로. 전 환경부 장관이자 생태주의자인 마리나 시우바가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라고 부르는 이런 상황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종종 살해된다. 2008년에 브라질에서 원주민 60명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 42명이 마투그로수두술 주의 과라니족이었다.
(195쪽)
손꼽히는 사례는 아마 ‘콩의 황제 Orei da soia’ 블라이루 마지Blairo Maggi 일 것이다. 대부분 콩 재배용으로 사용하는 300,000헥타르가 넘는 땅을 소유한 그는 2003년에 중심 거점인 마투그로수 주의 지사로 선출되었다. 산림 파괴와 콩재배 경계선을 세라두에서 아마존 열대우림까지 확대한 공로로 그린피스로부터 ‘횡금 전기톱 상’을 받은 마지가 선거에서 승리한 이유는 대토지 소유제에 근거한 거대 농산업의 대의를 증진 했기 때문이다.
(201쪽)
브라질은 농산 연료를 생산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일찍이 1970년대 중반부터 친알코올 Proálcool 프로그램을 통해 대규모로 농산 연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군사 독재 시대에 국제 시장에서 유가가 오르고 설탕의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에 대응해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군부는 새로운 산업을 창조했다. 수십 개의 정제 공장이 건설되었고, 사탕수수 재배 면적이 훨씬 더 늘어났다. 1986년에 이르러 판매된 자동차의 90퍼센트가 에탄올을 연료로 사용했다.
그러던 중에 한 차례 된서리가 내렸다. 유가가 하락하면서 파티가 끝난 것이다. 1990년대 말에 이르자 브라질에서는 이제 아무도 에탄올을 생산하지 않았다. 농산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의 수는 고작 1퍼센트로 떨어졌다. 하지만 지난 10년에 걸쳐 새로운 두 가지 요소가 바이오 연료 프로젝트를 재개시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으로 원유 가격이 급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겸용 연료 flex-fuel 기술이 발전해서 소비자들이 에탄올과 휘발유를 한 탱크에 넣을 수 있다.
오늘날 브라질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에탄올 생산국이다. 미국의 경우 에탄올 산업이 성공을 거둔 주된 이유가 공적 보조금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브라질에서는 에탄올 산업 스스로 수익을 내고 있다. 생산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고, 옥수수보다 사탕수수를 원료로 쓰는 게 에너지 수익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210쪽)
부시와 룰라
2007년 3월, 조지 W. 부시와 룰라가 악수와 포옹을 나누면서 ‘에탄올 동맹’이 더욱 공고해졌다. 이면에는 브라질과 미국 사이를 움직이며 남북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장악하려는 강력한 압력 집단이 존재한다. 미주에탄올위원회 Interamerican Ethanol Commission 는 서반구 각국 정부를 설득해서 농산 연료 사용을 늘리게 한다는 것이 목표라고 공언한다.
이 위원회의 창립자는 호베르투 호드리게스와 젭 부시이다. 룰라 첫 임기 당시 농업 장관을 지낸 호드리게스는 농산 연료에 찬성하는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배후에서 지휘한 주인공이다.
(212쪽)
탄소 배출권 시장과 땅뺏기
예프레드 음옌지 Yefred Myenzi는 토지법을 주로 다루는 탄자니아의 일류 연구소인 하키아르디HakiArdhi의 소장이다.
"지금까지 탄자니아 투자센터는 640,000헥타르의 땅을 외국 기업들에 양도했 습니다. 농업 부문 해외 투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투자는 농산 연료와 관련된 겁니다. 그 디음은 수출용 식량생산과 관련된 투자입니다. 아랍국가들과 한국인들이 주로 여기에 관여하지요. 마지막으로 탄소 배출권과 관련된 투자가 있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상대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은 땅뺏기의 한 측면이다. 교토의정서의 일부로 마련된 청정개발체제 Clean Development Mechanism(CDM) 에 따르면, 이산화탄소 배출 할당치를 초과한 선진국의 기업은 개발도상국에서 배출감축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식으로 ‘탄소 배출권’을 구입할 수 있다. 교토의정서 조인국들이 2012년까지 목표치를 충족 해야 하는 상황에서 탄소 배출권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금융 투기 메커니즘에 종속되는 상품으로 변질된 것이다. 탄소 배출권은 이런 식으로 만기일이 있는 선물과 옵션을 완비한 채 여러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된다.
이 부문이 금융화됨에 따라 기업들이 아주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남반구에서 탄소 배출권을 취득해 시장에서 다시 파는 사업 말이다. 많은 기업들이 토지를 취득해서 그 땅에 나무를 심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감소 인증’을 얻으려는 목적이 분명하다. 다른 기업들은 청정개발체제에 의해 배출감소 프로젝트로 인증을 받을 수 있는 농산 연료 경작지를 개발하는 식으로 일석이조를 노리고 있다.
단순히 배출권을 획득하기 위해 수많은 ‘산림 재조성’ 프로젝트가 지역 환경 상태를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지나치게 성급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숲이 아니라 농산물을 재배하거나 목축을 위해 사용되던 지역들에서 산림 재조성 사업이 진행될 수 있다. 탄자니아 남부 무핀디 Mufindi 지역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노르웨이 기업인 그린리소시즈는 이 지역에서 현지 마을들이 임시로 양도한 ‘촌지’ 2,600헥타르에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었다.
(249쪽)
두 세계를 가르는 간극
탄자니아는 비교적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있는 개방적인 나라다. 에티오피아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체포되거나 직장을 잃을 염려가 없이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수도에서 항의시위를 조직하거나, 변호사를 접촉하거나,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똑같은 대접을 받은 다른 10개 마을과 네트워크를 만들지도 않았다. 처음에 나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하는 이런 무기력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이내 내가 수도나 전기 같은 게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도시적 사고방식을 투사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무하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사는 마을이 세계다. 중앙정부는 머나먼 존재로 그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만 개입한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무척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제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진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간극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 준다. 자신의 땅이 이제 상품이 되었다는 걸 알지 못하는 농민과 워싱턴DC의 사무실에 앉아서 닷컴 기업보다 자트로파에 투자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투자자 간의 간극 말이다. 이 두 세계를 가르는 간극이 문제의 핵심이며, 내가 나눈 대화와 만난 사람들, 세계 구석구석에서 목격한 상황들을 연결하는 공통된 맥락이다. 거대한 랜드 러시는 지식과 수단의 격차에 주로 의존한다.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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