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르지아나 라지(37), 키아라 아펜디노(31), 안 이달고(57), 마누엘라 카르메나(72), 아다 콜라우(42). 요즘 유럽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인물들이다. 공통점은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최근 1~2년 사이에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시장에 당선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최근 유럽 곳곳에서는 ‘도시 정치’라는 새로운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권위와 기득권층에 맞서고, 생활밀착형 공약과 친환경 정책으로 21세기 거대도시들이 맞닥뜨린 도전에 대응하는 시장들의 움직임이 유럽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연합(EU)은 분열 위기를 맞고 있고, 회원국 정부들은 통합은커녕 내부 정치싸움을 벌이기 바쁘다. 그 사이에 중앙정부의 빈틈을 메우는 도시들의 도전은 더욱 두드러진다.
로마 2600년 역사를 다시 쓰다
지난 19일 밤, 2600년 이탈리아 로마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장이자 최연소 시장에 당선된 라지가 19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엉망이 된 로마의 합법성과 투명성을 재건하겠다”는 라지의 당선 일성은 강력했다. 창립된 지 7년밖에 안 된 신생정당 오성운동(MCS)의 라지가 로마 시장에 당선되자 라레푸블리카 등 현지 언론은 “2016년은 역사적인 해로 기억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로마에서 나고 자란 라지는 변호사로 일해온 평범한 여성이었다. 일곱 살 아들을 둔 그는 “아들이 지금같이 엉망인 로마에서 살게 할 수 없다”며 2011년 정치에 입문했다.
이탈리아 로마 시장에 당선된 ‘오성운동’의 비르지니아 라지가 20일(현지시간) 선거 승리 뒤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로마_EPA
오성운동은 2009년 정치 풍자로 인기를 끈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정직’을 기치로 만든 정당이다. ‘오성(五星)’은 물, 교통, 개발, 인터넷 접근성, 환경을 말한다. 베페의 정치운동이 시작됐을 당시만 해도 정치권은 유명 코미디언의 이벤트로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오성운동에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그 기성 정치권이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온갖 스캔들, 권력층 부패와 횡령, 정당들의 이합집산 속에 정부를 꾸리기조차 힘든 상황 등이 겹쳐지면서 기득권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
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는 현재 공공부채만 한 해 예산의 2배인 120억유로(약 15조8000억원)다. 2014년 말에는 시 정부와 마피아의 결탁 의혹이 터져나왔다. 시장직은 8개월째 비어 있었다. 전임 시장인 민주당의 마리오 이냐치오가 공금 유용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라지는 열악한 교통 인프라와 쓰레기 수거 시스템을 개선하고, 교육시스템을 바로잡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었다. 경험 부족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는 “로마 토박이라 문제점을 속속들이 안다”고 맞받았다. 결국 그는 19일 결선투표에서 67.15%를 얻어 압승했다.
이탈리아 4대 도시 중 하나인 토리노에서 시장으로 당선된 키아라 아펜디노가 지난 9일(현지시간)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토리노_EPA
오성운동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로마, 토리노, 카르보니아 시장직을 차지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로마, 밀라노, 나폴리와 함께 이탈리아 4대 도시 중 하나인 토리노를 얻어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자동차회사 피아트 본사가 있는 토리노는 민주당의 아성이었다. 그곳에서 오성운동의 여성 후보 키아라 아펜디노(31)가 외교장관을 지낸 민주당 현직 시장을 꺾은 것이다. 축구클럽 유벤투스 직원이던 아펜디노는 2010년 오성운동에 입문했고 이듬해 시의원이 됐다. BBC 등 외신들은 이번 선거결과로 볼 때 2018년 총선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지형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권위와 기득권에 맞서 손잡다
2014년 4월 취임한 파리 시장 이달고는 대기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올 들어 한 달에 한 번씩 일요일마다 샹젤리제 거리의 차량 통행을 금했다. 위생이 열악한 파리 북부 임시 난민촌은 철거하고 정식 난민촌을 짓기로 했다. 스페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이달고 시장은 두 살 때 가족과 함께 프랑스 리옹으로 이주해 어려운 환경에서 고학을 했다. 5월 5일 영국 런던에서 무슬림 이민자 가정 출신인 사디크 칸(46)이 시장에 당선되자 이달고는 곧바로 런던을 방문, 칸과 만났다. 이달고는 “우리 둘 다 어머니가 재봉사였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파리와 런던 두 도시가 가진 여러 문제를 풀기 위해 협력하자고 했다.
안 이달고 프랑스 파리 시장이 2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열린 연례 시장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파리_EPA
2015년 6월 나란히 취임한 스페인 마드리드 시장 카르메나와 바르셀로나 시장 콜라우도 변화의 주역들이다. 두 사람은 유럽 금융위기 뒤 스페인을 휩쓴 ‘분노하라’ 시위의 산물들이다. 카르메나는 24년간 마드리드를 장악해온 국민당을 몰아내고 시장이 됐다. 그를 당선시킨 좌파연합 ‘아호라 마드리드’는 2011년 스페인의 긴축 반대운동을 이끈 좌파정당 포데모스가 참여한 연합 정치세력이다.
카르메나는 프랑코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전직 판사 출신으로, 스페인이 민주화된 후에도 민영화와 부패에 반대하며 끈질기게 투쟁해왔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시 소유 골프장을 대중에게 개방했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시장에게 주어지던 오페라하우스와 투우장 무료 입장권도 포기했다. 시립 공공은행을 만들고 낙후된 도심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마누엘라 카르메나 시장(오른쪽 세번째)가 3일(현지시간) 어린이·청소년 포럼에 참석하고 있다. 마드리드_EPA
스페인 최대 도시이자 관광도시인 바르셀로나의 첫 여성 시장 콜라우 역시 포데모스가 포함된 좌파연합 ‘바르셀로나 엔 코무’ 소속이다. 콜라우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주택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는 서민들을 위해 일한 시민운동가였다. 취임한 뒤 콜라우는 “바르셀로나를 이탈리아 베네치아처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관광객들 때문에 땅 값이 오르고 생활이 불편해진 주민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일을 막겠다는 것이다. 그는 도심의 관광객용 숙박시설 건설사업 30여개를 중단시켰다.
부패한 왕실과의 싸움도 벌였다. 콜라우는 시청 대회의실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의 흉상을 없앴다. 아우디 관용차는 미니밴으로 바꿨다. 바르셀로나 그랑프리서킷 행사에 내주던 보조금 400만유로는 초등학교 급식 재원으로 돌렸다. 그 대신 빈민가 3곳을 개발하는 ‘이웃 동네 계획’을 세웠다.
스페인 최대도시 바르셀로나의 시장인 아다 콜라우(맨 오른쪽)가 5월 3일(현지시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 나와 카탈루냐 지방 정치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르셀로나_AFP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사라고사, 발렌시아 등 스페인의 도시들은 이런 성과에 바탕을 두고 ‘시우다데스 델 캄비오(변화의 도시들)’라는 동맹체를 만들었다. 지난해 12월에는 유럽판 도시동맹을 추진하는 ‘유럽의 대안’이 탄생했다. “우리 시대의 시급한 정치적·문화적·사회적 도전들은 더 이상 국가 차원에서 풀기 어렵다. 시민들이 스스로 미래를 통제할 수 있도록 국가를 넘나드는 조직체가 필요하다.” ‘유럽의 대안’이 홈페이지에 발표한 선언이다. 도시들의 연대가 가져올 변화의 바람은 유럽을 어떻게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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