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유럽연합(EU) 탈퇴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25일(현지시간) 사설에서 “EU는 부정당하고 패배했다. 안으로 약해졌으며 밖으로도 쇠퇴하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고 썼다. 부정당한 것은 유럽만이 아니다. 세계적으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정치·경제질서, 유럽 차원에서는 EU라는 통합된 공동체, 국가 단위에서는 정치 엘리트들이 좌우하는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이 브렉시트를 통해 드러났다. 세계 모든 곳, 모든 영역에서 일고 있는 ‘탈중심’의 흐름이 증명된 것이다.
EU 탈퇴를 택한 영국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국민투표를 다시 실시하자는 청원에 26일까지 280만명 가량이 서명했다. 런던 시내를 비롯해 곳곳에서 반 브렉시트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반면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EU는 영국을 향해 “빨리 나가라”며 독촉하고 있다. 유럽 지도자들은 잇달아 회동을 하며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슬렉시트’ 투표를 주창하고 나선 슬로바키아를 비롯해 유럽 여러 나라에서 분열이 가속화하기 시작됐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된 24일, 영국 넛스포드의 한 집앞에 가운데가 찢겨져나간 유럽연합(EU) 깃발이 걸려 있다. _Getty Images
EU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채무국들에게 요구한 가혹한 긴축처방은 EU 피로감을 가중시켰다. 재정정책에서 회원국들에게 자율성을 좀 더 주는 것, 이민자 반대 목소리를 어느 정도 반영해 국경통제 권한을 회원국들에게 상당부분 내주는 것이 EU 시스템을 유연화하기 위한 핵심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EU 내의 개혁으로 브렉시트가 던진 고민들을 해소하기는 역부족이다. 브렉시트는 오랜 세월 추구해온 통합 대신 고립을, 자유로운 이동 대신에 국경 통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투표로 힘을 과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의회를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 속에서 좌절감을 느낀 시민들은 직접민주주의로 정치 흐름을 바꿔버렸다. 2012년 시리아 내전을 촉발한 것은 독재정권을 비난하며 아이들이 담장에 쓴 낙서였다. AFP통신은 26일 브렉시트 결정 역시 ‘담벼락의 낙서’와 같다며 “기성 정치권에 맞선 혁명의 징후”라고 표현했다.
성장이 정체되자 일자리가 줄고 지갑이 얇아진 시민들은 ‘내 것을 빼앗아간’ 이방인들과 기득권층에 화살을 돌린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붐을 일으키고 필리핀에서 과두제 가문정치에 맞선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독일에서 극우파들이 난민촌에 불을 지르며 수시로 실력행사를 벌이는 상황, 그리고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은 모두 이어져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캐슬린 파커는 24일 트럼프 현상을 브렉시트에 빗대 ‘트렉시트’라 표현했다. 제프리 삭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프로젝트신디케이트 기고에서 “브렉시트 투표에는 세 종류의 저항이 담겨 있다”고 표현했다. “급증하는 이민, ‘더시티(런던의 금융중심가)의 은행가들, 그리고 EU 기구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다.
기득권 정치에 반발한 시민들은 더이상 순응하기를 멈추고 세계에서 새로운 포퓰리즘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브렉시트가 되면 살림살이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경고는 이민자들과 더시티를 향한 시민들의 감정적인 반발에 뒤로 밀렸다. 미국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월가가 트럼프의 경제정책에 대해 경고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수십년 동안 열매를 독식한 ‘가진 자들’의 속임수로 들릴 뿐이다. 삭스 교수는 “영국인들은 ‘현상유지’를 거부함으로써,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세계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EU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세계질서의 한 축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라는 틀 속에서 미국과 유럽의 협력은 글로벌 안보체제로 기능했다. 영국은 미국이 지난 10여년 동안 벌인 대테러전쟁의 핵심 파트너였고, 미국과 유럽을 잇는 연결고리였다. 그 고리가 깨져나감으로써 미국 중심의 질서는 더이상 이전처럼 기능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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