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불평등 THE DISASTER PROFITEERS
존 C. 머터. 장상미 옮김. 동녘
번역이 별로이고, 책도 그리 재미있지 않다. 역시 빈곤이나 재난과 사회적 '건강'의 문제라면 폴 파머의 책을 읽어야. 자연과학을 하는 학자가 쓴 것이라, 사회과학과 접목되는 부분이 좀 약하다. 하지만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미얀마 이라와디 삼각주를 강타한 태풍 나르기스와 미국 루이지애나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를 비교, 분석한 내용이었다.
왜 저들(책임지고 무언가 대비를 하거나 사후 대응을 했어야 할 국가 기관 혹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나? '세월호' 이후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의문이다. 왜 대통령도, 청와대의 재난 대응 라인도, 해경도, 선원들도, 어느 누구도 승객들을 구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참사의 피해가 커져 버렸나?
나르기스(카트리나)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피해가 커지고 있는데도 무시하고, 사건의 규모가 드러났는데도 통제되고 있다고 말하고, 외부의 도움이나 민간 전문가들의 역할을 거부하거나 오히려 비난하고, 피해 상황보다 정권의 안위를 걱정하고, 사건 여파로 폭동이 일어날까 전전긍긍하며 그걸 억누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미얀마와 미국의 정권. 무력으로 집권했든 민간 선출로 대통령이 됐든, 재난과 그 대응의 메커니즘은 너무나 똑같았다.
재난에 대해 똑같은 대응이 나오기 전까지, 정권이 재난 대응체계를 어떻게 무너뜨렸는지가 중요하다. 정실 인사. 이익을 챙기기 위한 국가기관의 사유화. 무능력과 사익 추구가 겹쳐 일어난 대응체계의 마비. 저자가 짚어낸 이 과정이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대응과 너무나도 판박이라 소름이 돋을 정도다.
가장 공신력 있는 재난 통계 자료는 브뤼셀의 루뱅 가톨릭대학교 공중보건학부 부설 재난역학연구센터(CRED)가 운영하는 재난데이터베이스(EM-DAT)다. 재난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60년에는 재난이 약 50건이었는데 2010년에는 이 수치가 거의 열 배에 가까운 450건으로 치솟았다.
스톡홀름국제경제연구소의 데이비드 스트롬버그는 (계량경제학의 핵심적인 방법안) 회귀분석을 통해 사망자 수와 소득 수준 간에 강한 상관관계 있음을 밝혀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형태가 동일한 지리물리학적 사건이 발생할 때 부유한 나라의 사망자 수는 가난한 나라 사망자 수의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43쪽
방글라데시
열대 저기압을 이해하면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거의 언제나 태풍의 접근을 제때 경고하여 대피를 하는 등,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대비할 수 있다.
대피가 쉽지 않고 통신이 불안정한 방글라데시에서는 상설 태풍 대피소를 건설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높았던 폭풍 해일보다 더 높은 위치에 말뚝을 박아 지은 아주 간단한 피난 공간이었다. 그 효과는 2007년 사이클론 시드르Sidr 당시 입증됐다. 사망자가 3,000명가량 되긴 했지만, 그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대피소 덕분에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이에 반해 1970년 사이클론 볼라Bahla는 방글라데시에서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 역대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쓰나미의 높이는 매우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는 편이다. 하지만 폭풍 해일과 마찬가지료 해저지형과 해안의 특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데 그 특성을 아주 세밀하게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쓰나미에 대비해서는 그것이 가로지르는 대양의 거리에 따라 도착하기 몇 시간 앞서 경보를 내릴 수 있으며, 그 경보로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생존 전략은 이론적으로 아주 간단하다. 최대한 높은 지대로 이동하는 것이다.
-83쪽
아이티
시테 솔레이유는 원래 노동자들이 일터에 가기 쉽도록 ‘아이티 아메리카 제당’공장 근처에 조성된 노동자 마을이다. 이후 독재자 파파독 뒤발리에는 이곳을 수출 가공 지역 노동자 거주지로 활용했다. 그러내 미국이 강요한 정책 때문에 어느 한 부분도 남김 없이 다 파괴됐다. 일터로 가는 길은 멀고 힘겹고 위험해졌다.
시테 솔레이유는 지구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장소 중 하나다. 갱단이 슬렴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 조직원은 시메어chimere(유령)라 불린다. 시메어는 상당히 경멸적인 용어다.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계급이 다른 사람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갱단의 행위를 저주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아이티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이며, 범죄행위와 결부된 어감을 담고 있다.
-109쪽
아이티는 언제나 여성과 어린 여아가 강간 및 기타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된 곳이었다. 매우 만연한 문제였고 처벌이나 통제가 쉽지 않았다. 지진 이후에 성폭력은 끔찍한 수준으로 치솟았다.
독재자 ‘파파독’과 그의 아들 '베이비독’ 뒤발리에는 강간을 압제의 무기로 사용했다. 그런데 그런 짓은 그들만 저질렀던 것은 아니다. 1915년부터 1934년까지 아이티 점령기에 미군은 여성과 아이를 무차별 강간하고 성노예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발리에의 독재가 끝난 뒤, 포풀리스트였던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축출하는데 참여했던 라울 세드라Raoul Cédras는 자신의 집권을 반대하는 아리스티드 지지자를 억압하는 데 강칸을 활용했다. 강간 및 강간의 위협은 아이티 여성이 살면서 가장 많이 겪는 고난이다.
2004년 쿠데타로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축출 당한 후 22개월에 걸쳐 약 8,000명이 살해당하고 3만5,000명이 강간당했는데, 희생자 중 반 이상이 18세 미만 여아였다.
아이티의 강간 발생률은 다른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증가했다. 아테나 콜비 Athena Kolbe와 로이스 헛슨 Royce Hutson은 2010년 지진 이후 범죄와 인권 침해 급증에 대해서도 비슷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지진의 여파 속에서 1만500명에 가까운 여성과 여아가 강간당한 것으로 집계했다.
-130쪽
아이티는 지진 발생 이전에 경제 회복 계획을 수립했다. 그 계획은 애초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경제학 및 공공복지학 교수인 폴 콜리어가 수립했지만, 이후 국제연합 특사로 아이티에 파견된 빌 클린턴이 받아들이자 클린턴 계획으로 통하게 됐다. 콜리어는 (카리브 해가 아니라) 아프리카 개발 문제 전문가로, 세계은행에서 개발 연구 책임자로 일했다.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빈곤의 경제학 The Bottom Billion>이다.
콜리어가 19쪽짜리 보고서에 담은 핵심 내용은 매우 간단하며, 개발 경제학 분야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요약하자면 수출 소득을 올리고 수만 개의 단순 노동 일자리를 창출할 탄탄한 의류 산업을 개발하기 위해 해외 투자를 유치하자는 것이다. 이 방식은 다른 곳에서도 잘 먹혔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그랬다. 아이티에는 의류 공장이 이미 30여 개 있었다. 2018년까지 아이티산 의류를 미국 내로 들일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휴 증진을 통한 아이티 서반구 기회법 HOPE II: Haitian Hemisphere Opportunity through Partnership Encouragement Act의 협약에 따라 미국과 특별 무역 관계도 마련해 둔 상태였다.
지진 이후, 콜리어/클린턴 계획에 따라 아이티 경제 재건이 진행됐다. 복구위원회 대표를 맡은 클린턴은 재난 복구와 경제 재활성화를 하나로 묶은 사업의 전망을 열정적으로 설파했다
2011년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Center for Economic Policy and Research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12월 이후 아이티 기업과 계약이 성사된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그 전까지 성사된 계약 1,490건 중에서도 아이티 기업과 체결한 것은 23건 뿐이었다. 총 1억9,500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 금액 중 고작 2.5퍼센트만이 아이티 기업으로 들어갔다. 그 계약들마저도 다수는 긴급한 필요라는 매우 전형적인 이유로 정당화된 수의계약이었다.
그 밖의 모든 계약은 미국 기업이 가져갔으며, 그중 절반은 메릴랜드, 버지니아, 워싱턴D.C. 등지에 있는 소위 벨트웨이 업체Beltway contractor(미 정부공사를 주로 수주하는 회사들)였다. 미 국제개발처는 총 사업 중 92퍼센트를 벨트웨이 업체에게 맡겼고, 아이티 기업에는 한 건도 맡기지 않았다.
아이티 기업 중 계약을 한 건 성사한 샌코 엔터프라이즈Sanco Enterprises는 애초에 아홉 건을 수주했는데, 대부분 폐기물 처리 작업이었다. 샌코는 포르토프랭스 지역에서 가장 큰 폐기물 처리 회사다. 그런데 지진 피해 지역과 멀리 떨어진 아이티 북부에서 콜레라가 돌기 시작하자, 콜레라 전염원으로 지목된 네팔 출신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의 폐기물 처리를 샌코가 맡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45쪽
초기에는 복구를 위한 산업 단지를 포르토프랭스 인근에 조성하려 했지만 아이티 정부가 충분한 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새로 마련한 부지는 멀리 떨어진 북부 해안가였는데, 아이티 국경 내에서 포르토프랭스로부터 가장 먼 곳이었다. 한국의 의류 제조사 ‘세아’는 카라콜 북부산업단지의 유일한 주요 입주사며, 제공한 일자리는 2,000개 정도다. 세아에 취직한 사람들이 처한 업무 환경, 안정성, 급여 수준은 그리 좋지 않다. 일급은 4.56달러다. 그 정도면 한 달에 29일을 일해도 식비만 겨우 충당할 수 있다.
찬물을 끼얹을 마음은 없지만, 그 사업에는 입안자 중 누구도 고려하지 않은 듯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서쪽 절반이 아이티 영토인 이스파니올라 섬 북부에는 2010년 파열되어 포르토프랭스를 폐허로 만든 엔리키요 플랜틴 가든 단층과 똑같은 셉텐트리오날Septentrional 단층(북부 단층)이 있다는 사실이다.
-147쪽
인도양 쓰나미
쓰나미 탐지 및 경보 체계는 기본적으로 해저와 해수면에 설치하는 여러 가지 기구로 구성된다. 기구를 통해 해저의 미세한 압력 변화와 해수면의 높이 변화를 측정한다. 지진학자는 지진을 탐사한다. 지진이 탐지되면, 컴퓨터 프로그램은 신속히 지진 데이터를 분석해 쓰나미 유발성 여부를 판단하고, 만약 발생한다면 최대 파고와 각 지역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한다.
2004년 인도양에 경보 체계가 없었던 이유는 뭘까? 유엔 정부간해양학위원회 Intergovernmental Oceanographic Commission (이하 IOC)는 적당한 체계를 설치할 수 있었고, 그 내용이 몇 차례 회의 안건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기구 자체도 그리 비싸거나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인도양 주변국은 매우 가난하고 IOC에서 영향력도 별로 없다. 반면 태평양 주변국은 부유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데다, 태평양 경보 체계에 무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과학자, 과학 관련 기관, 기반 시설이 많다. 인도양 주변국은 그런 게 거의 없다. 그래서 해를 당했다.
-157쪽
미얀마
카렌족은 중앙 군부와 분쟁을 벌여 온 여러 소수민족 중 하나일 뿐이지만, 민족 독립을 위해 가장 끈질기고 헌신적으로 싸워 온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1949년부터 카렌국으로 독립하기 위해 무장 투쟁을 계속해 왔다. 카렌족은제2차세계대전 기에 독립국 지위를 얻기 위해서 영국군에 협조한 반면, 버마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본에 협력했다. 이라와디 삼각주 남서부 지역은 오래전부터 현재까지도 카렌족의 대정부 반란과 저항운동이 얼어나는 곳이다.
2008년의 미얀마 군사 정권은 아이티 정부와 어느 모로 보나 똑같은 모습이었다. 반대자를 가혹하고 폭력적으로 억압하던 강력한 독재 지도자 뒤발리에 부자의 시대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미얀마 군부와 달리 파파독 뒤발리에는 애초에는 선거를 통해 선출됐다.
미얀마의 부는 석유와 가스, 티크, 보석(주로 루비), 광물 등 풍부한 천연 자원에서 나온다. 농산물은 더 이상 중요한 수출 이익 자원이 아니다. 식민지 시절 때와 달리 쌀과 목재가 아니라 가스 수출이 주요 해외 수익원이다. 자원은 대부분 카친, 산, 카야, 카렌, 몬과 같은 소수 민족들의 지역에서 산출되지만 그 지역에 돌아가는 이익은극히 적다. 가스는 국제 시장에서 판매되기 때문에, 가스 판매로 수익이 얼마나 발생하는지를 대략 산출할 수가 있다. 그런데 시장가격과 100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로 상당히 낮은 정부 공식 환율을 잘 이용하면, 군부는 환율 조작으로 수십억의 수익을 빼돌릴 수 있다.
미얀마 정부는 아주 기괴하고 재앙에 가까운 화폐 개혁을 한 적이 있다. 1987년 어느 날 아침, 정부는 라디오를 통해 그날 아침을 기점으로 25, 35, 75차트 짜리 지폐가 모두 폐기될 것이라고 고지했다. 그 지폐들은 하루아침에 숫자와 장군들의 그림이 찍혀 있는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45, 90차트 지폐가 새로 발행됐지만, 시민들은 기존의 지폐를 그것들과 교환할 수 없었다. 새로운 화폐는 당시 실권을 갖고 있던 장군 네윈이 길하다고 생각하는 숫자인 9로 나눌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군부와 밀접한 지배층만이 그 변화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들은 미리 구권을 금과 보석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에 재산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모두가 소름끼치는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화폐 재앙이 일어난 직후, 학생과 승려의 주도로 군부의 억압적 통치에 저항하는 폭동이 발생했다. 학생들의 분노는 화폐 실책으로 인해 학교 등록금을 내지 못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176-177쪽
나르기스가 도착한 곳은 영국이 1800년대 초반에 교역소를 처음 조성했던 장소와 거의 일치하는 미얀마 이라와디 삼각주의 해안이었다. 1824년 영국이 미얀마를 점령한 이후, 뱅골 만을 가로질러 나르기스와 비슷한 경로를 따라 이통한 폭풍은 하나도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랍 중 누구도 이라와디 삼각주에서 이런 폭풍을 경험한 이는 없었다. 그런 전셜도 없었다. 이 의외성이야말로 사망자 수가 그토록 높았던 원인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요소다.
나르기스의 살상력은 아마 세 차례의 영국 미얀마 전쟁을 합산한 것보다 더 높을 것이다. 나르기스가 상륙한 꽂 주변은 (큰 강의 삼각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극단적인 저지대로, 미얀마 전국에서 가장 낮은 지대에 속한다. 강풍과 (일반적 수준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기압 때문에 거의 모든 사이클론에 동반되는 폭풍 해일은 삼각주 지역 해안에 상륙하면 상당히 깊은 내륙까지 밀려들 수 있다. 나르기스의 폭풍 해일은 이라와디 삼각주 내륙으로 30마일이나 밀려들어가 엄청나게 많은사센사망하는주요인이 됐다.
상륙한 뒤, 사이클론 나르기스는 마치 가능한 한 최고로 파괴적인 경로를 찾아낸 듯이 해안에서 내륙까지 삼각주를 10마일에 걸쳐 길게 타고 들어갔다. 이 경로에는 미얀마에서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지역이 위치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이클론은 육지로 올라가면 에너지를 공급받던 따돗한 바닷물이 사라져 급격히 힘을 앓는다. 그러나 삼각주는 습지여서 마른 땅에 비해 더 많은 물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나르기스는 유난히 더 강력한 상태를 유지했다. 양곤을 향해 거의 똑바로 나아가던 l 순간까지도 여전히 1등급 사이클론이었다.
영국은 삼각주에서 쌀농사를 시작하고, 드넓은 습지를 망가뜨리고, 홍수 제어를 위해 제방을 쌓고 풍성한 뱅그로브 숲을 없애 버린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잘못한 것은, 쌀 수출량 증대를 위해서 북부 지역 주민을 삼각주로 이주시킨 것이다. 쌀은 매우 노동집약적인 작물이다. 그래서 삼각주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 결국어는미얀마에서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지역이 됐다.
-179쪽
왜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나 -미얀마
나르기스가 주는 충격은 이 거대한 사망자 수보다는 군부가폭풍에 대웅한 방식,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대웅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먼저 미얀마 정부는 기상예보 역량이 부족한 역내 일부 국가를 지원하는 인도 기상청에서 내놓은 경고를 대부분 무시했다. 태풍의 위험을 잘 알고 있는 필리핀 정부는 2013년 11월 하이엔이 접근할 때 수만 명을 대피시켜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구했다. 필리핀은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무 때나 이동하기 쉬운 곳이 아니어서 대피는 매우 어려웠다. 인구 밀집도가 비슷한 다른 지역에 더 강력한 폭풍이 몰아쳤을 때도, 사망자 수는 나르기스에 비해 20분의 1 수준인 6,000명가량이었다.
첫째는 나르기스가 완전히 유례없는 폭풍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기상 예보 웹사이트 웨더언더그라운드Weather Undergrcund 사의 공동 창립자인 제프 매스터스 Jeff Masters는 나르기스를 500년에 한번 일어날 만한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두 번째이자 아마 더 중요했을 법한 이유는, 아이티처럼 미얀마의 보통 시민들도 정부에 별로 기대하는 바가 없다는 점이다. 정부가 하기 싫어서든 능력이 없어서든 아무것도 해 주는 게 없다면, 게다가 자신이 속한 민족 집단을 억압하기까지 한다면, 그 정부가 발령하는 경보에 주의를 기울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카트리나가 다가올 때 일부 주민이 뉴올리언스를 떠나지 않은 이유도 사실 정부에 대한 신뢰 부족이 일정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삼각주에 사는 주민들에게 정부는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 머무는 외딴 존재였다. 앞서 지적했듯, 네피도는 나르기스에 거의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삼각주 지역의 피해 규모에 대한 정확한 보고서는 상당 기간 동안 정부 최고위급까지 도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시간 영상을 찍는 기상 채널 카메라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장성들은 대부분 미얀마에서 지진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전의 쓰나미 사망자 수도 적게 집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사이클론 피해 규모의 집계치를 낮추어 스스로 대처가 가능한 듯 행동하려 했을 것이다.
엠마 라킨의 저서 《모든 것이 부서졌다-버마에서 일어난 재앙》은 나르기스를 다뤘다. 정보는 가장 낮은 단위, 그러니까 대체로 바닥의 상황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올라가기 때문에, 올라가는 과정에서 계속 조작된다. 나르기스에 대한 보고서가 장성의 책상 위에 놓였을 때, 그 내용은 모두 다 좋은 것 뿐이었다. 모든 장성은 실제로 폭풍이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개혁주의자인 전 미얀마 대통령 떼인 세인은 이라와디 삼각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나르기스가 강타할 당시 그는 국가 재난대응위원회의 의장이었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떼인 세인에 대한 기사 ‘가장 걸맞지 않은 해방자’에서는 폭풍 이후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지역을 방문하고는 피해 규모에 얼마나 넋이 나갔는지가 묘사됐다. 나르기스는 "충격적 깨달음을 얻는 계기였다. 이를 통해 〔떼인 세인은〕 구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게 됐다." 떼인 세인은 기사 내용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나는 미얀마에 있는 동안 똑같은 얘기를 여러번 들었다.
장성들은 행동을 해야겠다고 판단하자 거의 제멋대로, 게다가 이상한 방식으로 움직였다. 삼각주 지역은 상황이 가장 좋을 때에도 접근하기가 어려운 곳이었으니, 구호 활동이 복잡하고 어려웠을 것임은 틀림없다. 주로 민족적 기반을 갖고 있는 지역 비정부기구들은 필요한 구호 도구를 일부 제공할 수 있었다. 듣기로는 당시 이런 비정부기구들이 정부의 강제나 감시에서 벗어나 보여 준 활동을 통해, 시민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자립과 자치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장성들은 삼각주 주민을 위해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실제로 그들은 해외 원조를 거절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문제를 아주 작고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하는 것이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사이클론이 강타한 지 불과 여드레 만에 국민투표를 강행했다.
그런데 정말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까? 한 가지 이유는 무능력함을 숨기기 위해서다. 미얀마 군은 민간인 수색과 구조 경험이 전무하다. 그들은 대체로 정반대의 일을 한다. 장성들의 끔찍한 논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움을 주려는 이들을 방해한 이유는 뭘까? 부분적으로는 첫 번째 이유와 관련이 있다. 외부인이 들어오도록 허용하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고 모든 것이 통제하에 있다는 말이 속임수였음이 밝혀질 것이다. 장성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미얀마 외부 사람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장성들이 침략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거다. 장성들은 1988년 폭동이 정부를 전복하려는 외부 세력의 의지 때문에 일어났으며, 쏟아져 들어오는 국제 원조 활동가들은 미국의 침공을 위한 구실일 뿐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사이클론 피해 지역은 미얀마 경제에서 그리 중요한 곳이 아니었던 데다, 정부에 반대하는 무장 세력이 지원하는 지역이었다. 장성들은 그 지역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올지도 모른다.
-188쪽
재난 뒤에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 -미얀마
일단 비와 바람이 멈추고, 폭풍 해일이 물러가고, 해수면이 정상으로 되돌아가자 풍부한 포획의 기회가 눈앞에 펼쳐졌고, 장성들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이 자행하던 토지 약탈은 준법률에 따른 토지 탈취(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케빈 우즈가 명명한 용어에 따르면 ‘법적 토지 약탈’)라는 새로운 형태 바뀌었다. 2010년 정권을 잡은 새 정부는 새로운 법률을 여러 건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예를 들면 농지법 같이 농민을 보호하려는 취지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 법은 ‘국가적 이익’에 필요하다면, 국가가 토지를 수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가적 이익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지는 전혀 정해두지 않았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유는 장성들의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여릿 있었다. 군 세력은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현재 미얀마 국내 활동을 허가받은 외국기업들에게 토지와 같은 국가 자산을 팔아넘겨 이득을 취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런 기업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89쪽
카트리나
대통령 조지 W. 부시와 부통령 딕 체니는 당시 휴가중이었고, 둘 중 누구도 그 상황을 자신의 여가 시간을 방해받을 만큼 심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부시와 체니가 워싱턴으로 복귀하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렸다. 묘하게도 그 기간은 미얀마 지도자들이 나르기스에 대한 행동을 취하기까지 걸린 시간과 비슷하다.
카트리나가 그렇게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카트리나가 상륙하던 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야구 경기를 관람했다. 이틀 후, 뉴올리언스에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고 부시의 휴가가 끝나던 그날,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브로드웨이 연극을 관람하러 가서 관중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그래도 아랑곳없이 다음날에는 유에스 오픈에 참석하고 뉴욕 5번가에서 구두를 구입했다. 미 연방재난관리청을 관할하는 국토안보부 장관 마이클 처토프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모양인지, 나중에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었다고 주장했다.
딴 쉐와 조지 부시가 마침내 자국의 남부 삼각주에 발생한 재난의 규모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는, 둘 다 엄청난 인명과 재산 손실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손실과 명성의 훼손을 더 염려하는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둘 다 초기에는 모든 상황이 잘 통제되고 있다고 주장하려 들었다.
-200쪽
왜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나 -미국
마이클 브라운이 이끄는 연방재난관리청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노골적인 정실 인사는 어느 모로 보나 미얀마 장성들의 행태와 판박이며, 그 결과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방재난관리청의 ‘책임 있는’ 자들은 민간 부문에서 제공하는 원조를 말 그대로 돌려보냈다. 월마트가 생수를 실은 트럭 세 대를 뉴올리언스로 보냈지만 연방재난관리청 직원이 돌려보냈고, 미 해안경비대는 발전기에 당장 필요한 경유를 운송하는 것도 금지당했다. 그들은 그저 누가 책임자이며, 구호와 복구의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만 중요하게 여겼다.
연방재난관리청의 실책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실책은 부시 행정부의 측근이 엉터리 기관장으로 임명되어, 기관의 역량을 축소시키고 사적 이익 추구를 허용하는 역할을 맡은 데서 비롯됐다. 그들은 그 역할은 아주 잘 해냈다.
-214-215쪽
정말로 대통령 조지 W. 부시와 총사령관 딴 쉐는 느닷없는 붕괴에 겁먹고 부정과 무대응으로 반응한 것일까? 각각의 사건을 되톨아보건대, 그들의 무대응이 공포로 인한 것이라는 셜명은 그럴듯하며, 심리학적 근거가 있어 보인다. 나는 두 사람 모두 재난으로 인해 자신의 정권이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두려워했으며, 둘 중 누구도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213쪽
'약탈'을 과장하기
지배층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법적 강제력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그 권력이 흔들리면 체스와 클락이 말한 세 가지 뚜렷한 증세를 보이며 과잉 반응한다. 첫째, 지배층은 시민들이 공황 상태에 빠질까 봐 두려워한다(시민들이 공황 상태에 빠질 거라는 생각 때문에 공황 상태에 빠진다). 둘째, 상황을 과장함으로써 공황 상태를 유발한다. 셋째, 스스로 공황 상태에 빠진다.
뉴올리언스에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나타났다. 뉴올리언스에서는 재난 이후 이야기 구조가 인종에 초점을 맞춰 형성되면서 지배층 공황 상태에 불이 붙었다.
카트리나와 로드니 킹 폭동의 유사점은 연방군 투입 부분이었다. 1992년 대통령 조지 H.W. 부시는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연방군을 보냈다. 1807년 제정된 반란진압법 Insurrection Act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 권한은 1878년 대통령이 법 집행을 위해 연방군을 활용하는 권한을 제한하는 민병대법Posse Comitatus Act이 제정되면서 대체로 금지됐다. 그간 그 법을 적용하는 일은 드물고 매우 조심스러웠다.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케네디는 각각 1950년 말과 1960년 초 남부에서 시민권법 시행을 위해 주지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적용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 기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대통령에게 연방군 파견을 요청했다.
반란진압법을 발동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부시 행정부는 뉴올리언스의 상황이 1992년 로스앤젤레스와 비슷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흑인이 백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니 질서 유지를 위해 군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226쪽
재난 뒤에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 -뉴올리언스
카트리나 이후 뉴올리언스가 좀 차분해지자 도시가 망가진 것을 재정비의 기회로 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더 나은 뉴올리언스를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a Better New Orleans 보고서에 재정비 계획이 삽입된 것이 시작이었다. 정책 입안자에게 있어서 뉴올리언스 재정비는 건축이나 도시 구조만이 아니라 인구 구성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현실이 됐다.
시장 네이긴이 꾸린 자문단이 작성한 뉴올리언스되살리기BNOB: Bring New Orleans Back라는 계획이었다. 자문단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은 부동산 업계 거물인 조셉 카니자로Joseph Canizaro였다. 주위의 뉴올리언스 고위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그는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를 기회로 보았다.
네이긴의 뒤를 이어 뉴올리언스 시장이 된 마크 모리얼은 뉴올리언스되살리기의 초안이 “토지 약탈을 두고 벌인 대대적인 붉은 선 긋기”였다고 말했다. 일부 지역은 재건에서 아예 제외됐다. 물으나 마나 “골칫덩이 언간들”이 살던 주거지였다.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은 녹지로 바꾸어 보통 백인 거주자들이 주말에 자전거를 타거나 그 밖의 여가 활동을 하기 좋은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계획의 핵심 설계자는 카니자로였으며, 오직 지배층의 사업을 위한 기본 계획이었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 계획을 “공화당식 인종 청소"라고 불렀다.
-242쪽
201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카트리나 이전에 비해 뉴올리언스 거주자 중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10만 명이 줄었고, 백인은 1만5,000명만이 줄어들었다.
뉴올리언스에 더 이상 살고 있지 않은 사람 중에는 카트리나 이후 교육 제도 개편 과정에서 해고된 공립학교 교사가 7,000명 가까이 된다. 그 자리는 대부분 다른 주에서 온, 백인이며 노조가 없는 티치포아메리카 교사로 대체됐다. 해고된 교사들은 부당 해고와 손해배상 소송을 내 승소했으며, 그 배상 금액을 모두 합하면 10억 달러가 넘는다. 그러나 교육 개편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버렸다. 기존 학교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학교가 들어섰다.
교육 제도는 공립학교 대신에, 공공 기금은 계속 지원받지만 민간이 소유하는 차터 스쿨 형태로 재면됐다. 새로 생긴 차터 스쿨마저도 출석 학생의 다수는 백인이다. 현재 뉴올리언스에서 성공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를 가진 이들은 젊고 고급 기술을 가진 타지 출신 전문가로, 카트리나 이후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도전 중인 기업가들이다.
-250-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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