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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딸기21 2016. 12. 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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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대한 복종 Obedience to Authority

스탠리 밀그램. 정태연 옮김. 에코리브르



온갖 책에 인용되는 스탠리 밀그램의 그 유명한 실험을 소개한 책을 드디어 읽었다. 1970년대에 나온 책은 사실상 밀그램의 ‘실험 결과 보고서’에 가깝다. 이미 나온 지 오래됐고 여러 곳에서 마르고 닳도록 인용됐으나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유럽계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실험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복종이라는 미명 하에 수행한 가장 비도덕적인 행위의 극단적인 예”였고, 그 충격이 아직 사람들의 마음에서 가시기 전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안겨준 충격은 반전이었고, 이 또한 숱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악’에 대한 논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밀그램은 미국의 ‘보통 사람들’조차 언제든 일정한 조건만 주어지면 전기고문의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밀그램의 표현을 빌면 “오랫동안 미덕으로 추앙받아온 권위에 대한 복종이 해로운 목적에 기여할 때 새로운 측면들을 떠안게 된다. 즉 미덕은커녕 사악한 죄악으로 바뀐다.”(26쪽)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고문을 비롯한 신체적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개인에게는 당연한 도덕률이 어느 순간에 무너지는 것일까. 밀그램은 단순하지만 정교하게 고안된 전기충격 실험을 통해 ‘권위에의 복종’이 평범한 사람들을 ‘악의 수행원’으로 만드는 심리적 조건임을 보여줬다. 굳이 총칼을 든 국가권력이 아니어도 좋다. 과학기술자, 전문가, 유명 대학의 간판이 주는 신뢰성 정도만으로도 사람들을 전기고문의 가해자로 만들 수 있었다. 


저기 앉아 있는 자가 올바른 단어 조합을 만들지 못했으니 전기충격을 줘서라도 학습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이 단순한 요구에 실험 대상자들은 압력 혹은 ‘책임감’을 느꼈고 자기네 동료 시민을 고통으로 몰고갈 전기충격기 버튼을 눌렀다. 실험은 ‘가해자’가 전기충격의 강도를 점점 더 높여가게끔 설계됐고, 실험 대상자들이 어느 단계에서 버튼을 누르는 걸 중단하는지(명령에 저항하는지) 조사했다. 


‘피해자’의 괴로워하는 반응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가해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등은 실험 결과에 사실 별로 영향을 주지 않았다. 가해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권위자’인지 아니면 자신과 똑같은 ‘일반인’인지였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권위를 끊임 없이 의심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전문가가 ‘가짜’일 수 있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전문가에 대한 맹신이 사람들을 악으로 몰아가는 메커니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차례에 걸친 실험에서 우리는 전기충격을 지시하는 사람을 권위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바꾸었다(그 대신에 '권위자'가 전기충격을 받는 것으로 역할을 바꿨다). 전기충격을 더 가하라는 요구를 따른 피험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결정적인 사실은 피험자들이 전기충격을 가하라는 특정 명령보다 권위자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권위자가 아닌 일반인의 명령은 모든 힘을 상실한다. 다른 사람을 해치라는 명령을 받으면 공격 동기나 가학 본능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실험에서 피험자가 (전기충격을) 계속할 것을 강력하게 거부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즉 중요한 것은 피험자가 한 행동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그러한 행동을 하느냐이다.” (160쪽)


밀그램의 실험은 단순히 ‘평범한 시민도 악의 수행원이 될 수 있다’는 것만 확인시켜준 게 아니다. 그의 연구팀은 그렇게 전기충격기 버튼을 누른 사람들이 뒤에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메커니즘도 엿보게 해준다. 본격적인 분석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권위에 대한 그런 복종이 인간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발달한 심리적 기제라는 데에까지 생각을 이어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악하지 않은 사람인데(개인적으로 악한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기업, 정부기관, 조직의 일원으로서 무참히 다른 사람을 짓밟고 괴롭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이중성을 띠게 되는 걸까. 


밀그램은 그것이 결국 사회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마음속에 내장돼 진화한 기능이며, 따라서 악은 ‘독일’ ‘2차 대전’ ‘나치’가 갖고 있던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위계 구조의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그런 구조에 편입하는 시점부터 변이성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비효율적인 구성단위가 시스템 전체의 작동을 결정하지 않게”(193쪽) 진화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평소 예의바르고 점잖은 사람이 이 실험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양심은 충동적인 공격행동을 억제하지만 그 사람이 위계질서로 편입되는 시점에서 그 양심의 힘이 감소했기 때문이다."(194쪽) 


이 부분은 조직구조를 둘러싼 사고 실험 정도의 설명으로만 돼 있으나 인상적이다.


또한 밀그램의 실험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가해를 하는 게 아니라 ‘한 다리 건너’ 가해하게 됐을 때에 특히나 무감각한 모습을 보였다.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지구적인 차원의 조직구조에서 우린 알면서, 혹은 의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된다. 


“피험자들은 희생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행위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긴장이 일어나 불복종할 때까지는 그 일에 심리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파괴적인 관료 체계의 유능한 관리자는 사람들을 배치할 때 가장 냉담하고 둔감한 사람을 직접적인 폭력에 투입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실제 잔인한 행위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지원 활동을 별 긴장 없이 수행하게 된다. 그들은 책임감에서 이중으로 벗어나 있다고 느낀다. 첫째, 합법적인 권위가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둘째, 그들은 잔인한 행동을 직접 하지는 않는다.” (182쪽)


더군다나 현대 사회에서 이제 ‘권위자’는 사람의 얼굴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절대적이 되고, 구조적이 된다.


“권위 구조는 문명사회든 원시사회든 상관없이 모든 사회에 필수적으로 존재하지만, 현대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들에게 비인격적인 권위에 따르도록 가르친다는 것이다. 권위에 대한 복종은 미국의 공장 근로자들 못잖게 아샨티(가나의 부족)에게도 존재하지만, 토착민들은 권위자들 모두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반면에 현대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은 비인격적인 권위에 복종할 것을 강요받기 때문에 훈장이나 유니폼, 직함 등이 함축하는 추상적 계급에 반응한다.” (200쪽)


밀그램은 가족 내에서 어른들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이 “가족의 보호에서 벗어나자마자 학교라는 제도적 권위 체계로 옮겨지고, 이곳에서 아이는 구체적인 교과 과정뿐만 아니라 조직의 틀 안에서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은 이 책에서는 다소 많이 나아간, 실험적 뒷받침 없는 분석이어서 좀 튀어 보인다. 하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사회 체제가 권위에 대한 복종을 몸에 배이게 만든다는 점에 이견을 제기하기는 힘들다. 사람들은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일반적으로 보상받고 불복종은 자주 처벌받는 보상 구조를 계속해서 대면하게 된다. 위계 구조 내에서 승진을 시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복종할) 동기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구조를 영속화시킨다. 이런 ‘승진’이라는 형태의 보상은 개인에게 강한 감정적 만족감을 주지만, 그것이 갖는 특별한 특징은 위계적인 형태의 영속성을 보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한다. 핵심은 ‘책임자가 말한 대로 하라’는 것이다.” (202쪽)


밀그램은 이렇게 개인을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몰아가는 주요한 요인으로 개인의 익숙한 경험(아버지 말씀을 들어라), 비인격적 권위 체계에 토대를 둔 일반적 사회환경(학교에 다니면서 몸에 익히는 순종적인 태도), 권위자에 대한 복종은 보상을 주고 불복종은 처벌을 준다는 보상 구조에 대한 장기간의 경험(입바른 소리를 하면 상사에게 찍힌다)을 든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람들이 전기충격 가해자가 되지는 않는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복종의 윤리를 강요당하긴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살인과 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도 배우지 않는가. 진화에 빗대어 말한다면, 인간 사회가 이만큼 진화하기 위해서는 복종의 메커니즘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공동체를 해치는 악행을 제어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권위의 이름을 쓰고 내려온 명령을, 도덕률을 무시한 채 실행에 옮기곤 한다. 자라면서 우리 몸에 익숙해진 복종의 윤리 외에 어떤 것이 우리를 두드러진 악의 수행원이 되게끔 자극하는 걸까. 밀그램은 제까닥 효과를 발휘하는 ‘즉각적 선행 조건’으로서 ‘합법적 권위자에 대한 지각’을 들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권위자는 사람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사회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권위는 맥락 안에서 지각되고, 그 권위가 직면하는 상황을 넘어설 필요는 없다.”(203쪽) 우리는 병원에서는 가운 입은 사람의 지시에 따르지만 거리에 나와서까지 의사의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병원에서 우리에게 복종을 압박하는 권위자가 반드시 꼭 유명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저 ‘가운’ 만으로도 족하다. 밀그램은 이를 ‘권위 체계로의 진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병원에 들어가는 순간, 대학의 실험실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에게 ‘가운’은 권위로 인식된다. 특히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 안에 들어왔다’고 느낄 때, 복종의 심리는 더욱 강해진다. 


복종과 불복종의 선을 긋게 만드는 내면의 요인은 없는 걸까? 악의 대리자가 된다는 것에 나의 양심과 도덕이 내면에서부터 저항을 외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다른 사람에게 좋게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에게 좋게 보이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한 사람이 지닌 자아는 내적 억제의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가혹한 행동을 부추길 때, 그는 그 행동이 자신의 자아상에 미칠 영향을 가늠해보고는 그 행동을 삼갈 수 있다.” 그러나 권위 구조 속에서 권위자의 명령을 대리 수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정하는 순간, “이러한 평가 메커니즘이 완전히 사라진다. 자신의 동기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더 이상 자아상을 반영하지 않고, 따라서 자아 개념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비록 자신이 그 행동을 했더라도, 그는 그것을 자신의 본성과는 상관없는 행동으로 본다.”(213쪽)


무시무시한 조직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에 동화되면, 심지어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조차 ‘권위자를 대신해’ 조직 논리를 강요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내부 고발자에 대한 그 조직 내의 비난(저 사람 원래 성격이 안 좋았어)도 그런 예일 것이다. 이럴 때에 개인의 도덕적 기준은 ‘권위자(조직)의 가치’에 맞춰진다. 국가, 기업, 학교 등 온갖 ‘집단적 권위’가 개인의 자아를 압도한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게 이데올로기다. “모든 상황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 초자아의 기능은 행동의 선악을 평가하는 것으로부터, 한 사람이 권위 체계 안에서 얼마나 잘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으로 옮겨간다.”(212쪽)


이는 제도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민주주의에서는 대중의 선거를 통해 관리자가 된다. 그러나 일단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들은 다른 수단을 통해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과 권위적인 측면에서 결코 덜하지 않다. 수백만 명의 흑인을 수입하여 노예로 만들고, 미국 인디언들을 파멸시키고, 일본계 미국인들을 억류하며, 베트남 시민들에게 네이팜탄을 사용하는 등 이 모든 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권위에서 나온 가혹한 정책들이며, 그 권위에 대한 복종의 결과물이었다. 권위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스스로를 내맡긴 이들은 그 파괴 과정에 참가한 다른 어떤 시대의 인간들보다 더 낫지도 나쁘지도 않다.”(254쪽)


그런데 사실 밀그램의 실험에서 더 재미있는 것은 우리 안의 복종 심리가 만들어내는 악에 대한 무감각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때에 저항하게 되는가’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밀그램은 ‘가해자’가 ‘희생자’와 가까이 있을 때, 직접 눈 앞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목격할 때에 권위에 대한 복종 대신 저항이 일어나기 쉽다는 걸 확인했다. 얼핏 들으면 당연하게 들린다.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 복잡한 실험까지 필요한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현재의 전쟁은 가해자와 희생자를 최대한 멀리 위치하게 해, 희생자를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쪽으로 발달해왔다. 


“많은 경우에 과학기술은 필요한 완충 장치들을 제공함으로써 긴장(바꿔 말하면 죄의식)을 줄여준다. 즉 네이팜탄이 3킬로미터 상공에서 시민들에게로 떨어진다. 개틀링포의 목표 지점은 사람이 아니라 적외선 오실로스코프 위의 작은 블립이다.”(258쪽) 


심지어 요즘에는 지구 반대편 사막 기지에서 버튼을 누르면 드론이 적지의 ‘좌표(라는 이름으로 얼굴과 이름이 사라져버린 희생자들)’를 폭격한다. 이런 전쟁이 가진 위험성은 눈 똑바로 뜨고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 묻혀버린다. 이라크전 때 이라크의 한 소녀는 “내 이름을 기억해주세요”라며 자신은 폭격 지점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고 미국인들에게 호소해야 했다. 희생자와의 ‘인접성’이라는 것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희생자가 내 옆에 있지 않아도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세계 시민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강국들의 대리전에 희생되는 시리아 아이들은 지금 인터넷을 이용해 지리적 인접성 대신 ‘가상의 인접성’을 확보해가며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다. 


희생자가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 가져다주는 공감보다 더 크게, 더욱 강력하게 저항할 용기를 주는 것은 ‘타인의 저항’이다. 남들이 저항할 때, 나도 저항할 용기를 얻게 된다. 밀그램의 실험은 이를 수치로 확인시켜준다. 가짜 가해자를 하나 더 만들어서, 권위자(실험자)의 명령에 저항하게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피험자 40명 중 36명이 실험자에게 도전했다. 집단의 압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14명이었다. 동료들의 반란은 실험자의 권위를 훼손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연구에서 수행한 모든 변형 실험 중에서 여기에 보고한 조작만큼 실험자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177쪽)


그렇게 동료의 뒤를 따라 저항에 나선 삶들 중에는 “나도 원래 저항하려고 했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다른 동료의 저항이 자신의 저항을 이끌어냈음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솔직함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악한 지시에 맞서서 싸우지 않더라도, 복종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저항은 전염된다. 

저항에는 대가가 따른다. 상사가 성희롱을 했다고 고발했으면 회사에서 나가야지. 선생이 말하는 데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너는 더이상 학생도 아냐. “불복종은 실험자의 특정 명령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뿐 아니라, 피험자와 권위자의 관계를 재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31쪽) 


이것이 단번에 이뤄지지는 않는다. 먼저 내면에 묻는다(아, 이건 좀 아닌데). 권위자가 내 불만을 알게 한데(프린터를 발로 차면 부장이 알아들으려나).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권위자와 관계를 단절하길 바라지는 않는다(이거 중단하는 게 어때요?). 하지만 이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이의제기는 명령을 듣지 않으리라는 위협으로 바뀐다(이런 지시는 따르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 나서 나오는 게 불복종이다. 


“불복종은 긴장을 끝내는 궁극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용기를 내지는 못한다. “일단 긴장이 발생하면 그들은 긴장의 강도를 줄이기 위해 심리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회피’는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다. 피험자는 자신의 행동에 따르는 감각적 결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한다. 희생자의 고통을 보지 않기 위해 엉뚱한 방법으로 고개를 돌린다. 좀 덜 눈에 띄는 형태의 회피는 실험 과정의 기술적인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식으로 희생자에 대한 관심을 끄는 것이다. ‘부정’은 사건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명백한 증거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피험자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부정은 사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피험자는 ‘매우 약하게’ 복종함으로서 양심을 위안하려고 한다. 이는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자신의 자아상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230쪽)


하지만 “잠정적으로 말하면, 첫 이의제기는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발판이 된다. 내적인 의심, 의심의 외적 표현, 이의제기, 위협, 그리고 불복종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오직 소수만이 해낼 수 있는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적인 끝맺음이 아니라 긍정적인 행동, 즉 시류에 대한 의도적 거부라는 특성을 가진다. 복종적인 피험자는 전기충격의 책임을 실험자에게 전가하는 반면,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실험이 (자기의 거부 때문에) 실패했다는 책임을 받아들인다. 불복종할 때 피험자는 자신이 실험을 망쳤고 과학자의 목표를 방해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우리가 찾던 불복종의 방안을 제공했으며, 인간적 가치를 확인해주었다.”(235쪽) 복종을 거부하는 순간, 팽팽했던 긴장감(죄의식)은 풀리고 피험자는 해방된다. 


어쩌면 역사는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의 용기’로 움직여 왔다. 물론 저항한 사람들과 저항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도덕적인 특징’들이 없지는 않았다. 저항한 사람들은 희생자가 겪는 고통의 책임을 가해자인 자신의 탓으로 돌렸으나, 저항하지 않은 사람들은 명령을 내린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식이었다.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복종이 가져오는 폭력적인 결과를 인지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저항의 물꼬를 트고, 거기에 공감한 보통 사람들이 물결을 만든다. 밀그램의 실험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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