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이 ‘러시아 스캔들’로 시끄럽습니다. 발단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했던 마이클 플린이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와 통화를 하면서 미국의 러시아 제재를 해제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 이야기를 나눠놓고서, “제재 이야기는 한 적 없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까지 거짓 보고를 한 플린은 결국 쫓겨났지요.
그 다음에는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에게 불똥이 튀었습니다. 미국의 법무장관은 우리 식으로 하면 검찰총장입니다. 러시아 스캔들 수사를 총지휘해야 할 세션스도 러시아 대사와 접촉한 사실이 1일 드러났습니다. 세션스는 결국 이튿날 “수사에서 손을 떼겠다”고 했습니다. 세션스는 인준 청문회에서 러시아 측과 접촉한 적 없다고 했기 때문에, 위증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줄줄이 터지는 ‘커넥션’...부지런쟁이 러시아 대사는 대체 누구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도 플린과 함께 지난해 12월 뉴욕의 트럼프타워에서 러시아 대사를 만났다고 뉴욕타임스가 2일 폭로했습니다. 대통령 당선자의 최측근들이 대통령 당선자의 건물에서, 차기 정부를 꾸리기 앞서 러시아 대사와 만나 뭘 논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뉴욕타임스는 이들의 만남이 미국 새 정부와 러시아 정부 간 ‘끈(a line of communication)을 만드는’ 자리였다고 보도했습니다.
2015년 9월 미국 뉴욕에 도착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맞아 악수를 하는 세르게이 키슬략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 둘 사이에 선글라스 쓴 사람은 비탈리 추르킨 당시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 위키피디아
줄줄이 또 터져나옵니다. 이어 USA투데이는 트럼프 캠페인 팀의 멤버 2명이 러시아 대사를 만난 것이 추가로 확인됐다고 보도했습니다. 트럼프 측에서 초창기 외교정책 자문을 했던 J D 고든과 카터 페이지라는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공화당의 전국 선거조직인 전국위원회(RNC) 행사에서 러시아 대사를 접촉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7월 공화당이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지명하는 전당대회를 클리블랜드에서 했을 때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 주최로 컨퍼런스가 열렸는데, 거기서 만났다는 겁니다.
이쯤 되니 궁금해집니다. 주미 러시아 대사는 대단히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외교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대체 얼마나 많은 트럼프쪽 사람들을 만난 것일까요.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요.
그래서 들여다봤습니다. 주미 러시아 대사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키슬략. 1950년 9월생.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때인 2008년 임명돼 올해로 미국 대사 10년째를 맞는군요. 모스크바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통상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1977년 소련 시절에 외교부에 들어갔습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뉴욕 유엔본부 소련대표부에서 일했고, 곧바로 이어서 1989년까지는 워싱턴의 소련대사관에 근무했습니다. 소련 외교부의 ‘미국통’이라 봐야겠군요.
미국 관리 50여명에게 저녁을 먹인 키슬략 대사
그후 본국으로 돌아가 외교부 본부에서 일을 했고, 1998년 벨기에로 갑니다. 브뤼셀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상대하는 러시아측 상임대표로 일했습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외무차관을 지내다가 미국 대사로 옮겨갔네요. 미국 전문가에다, 서방을 상대하는 데에 이골이 난 외교관이라고 봐야겠군요.
키슬략 대사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일화가 3일 뉴욕타임스에 실렸습니다. 마이클 맥폴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가 부임지로 떠나기 전, 키슬략의 초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손님은 맥폴 외에도 대략 50명. 모두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러시아 정책을 담당하던 국무부, 국방부 인사들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미 행정부 내에서 러시아와 관련된 인사들을 뽑아내 접촉하고, 저인망으로 훑듯 전방위로 만나온 사람이라는 것이죠. 맥폴이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우리 정부와 깊이 접촉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존경스러웠다”고 했습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영어가 유창한 키슬략은 이렇게 엄청난 네트워크를 구축해 미국인들과 친해지면서도, 러시아의 전략적 이익을 옹호하는 데에는 매우 단호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대사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요. 우크라이나 문제에선 한치의 굽힘 없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미국의 위선’을 서슴지않고 비판하고, 그러고 나서 파트너들에게 만찬을 대접하면서 토론을 이어가는 스타일이었다는군요.
세르게이 키슬략 주미 러시아 대사
특히 2012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재집권하기 전에는 오바마의 백악관과 메드베데프의 크렘린 사이가 꽤 괜찮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키슬략이 워싱턴 외교가에서 꽤나 인기 있는 인물이기도 했답니다. 유엔에서 키슬략을 오랫동안 상대했던 니컬러스 번스 전 국무차관보는 키슬략을 “아주 스마트하고 경험 많고 늘 준비돼 있는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러시아 내에서도 “아주 똑똑하고 프로페셔널한 외교관”으로 꼽히는 키슬략을, 트럼프 주변의 경험 없는 인물들이 제대로 상대할 수나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미국 외교안보 전문가들과 언론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일 터이고요. 만나고도 안 만났다 말한 트럼프 측근들의 거짓말도 문제이지만...
대사도, 장관도 10년은 기본인 러시아
지난달 20일, 뉴욕의 유엔 러시아대표부 사무실에서 비탈리 추르킨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가 쓰러졌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추르킨은 65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숨을 거뒀습니다. 심장병과 백혈병 등 지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과로에 따른 심장 이상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추르킨은 2006년 부임해서 유엔 대사로 10년 넘게 일했습니다. 스스로 ‘영구 대표’라 했을 정도인 유엔의 터줏대감이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대사들 중에서는 최장수 대사였고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부 때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서 외교부 대변인, 벨기에 주재 대사를 거쳐 유엔에 온 인물이었습니다. 그와 수차례 설전을 벌였던 서맨사 파워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도 “외교의 거장이었다”며 애도했던 베테랑 외교관이기도 했습니다.
2014년 1월, 우크라이나 문제를 놓고 갈등이 한창일 때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존 케리와 라브로프. 케리가 아이다호산 감자를 꺼내더니 라브로프에게 ‘선물’했습니다. 사진 미 국무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도 ‘장수 장관’ 중 한 명입니다.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싱할라(스리랑카어), 디베히(몰디브어)까지 한다고 합니다. 1950년생인데 아버지는 아르메니아, 어머니는 조지아 출신. 어머니가 소련 시절 외교부에서 일을 했다는군요. 라브로프도 키슬략처럼 공학과 물리학을 공부했고, 이어 국제관계학으로 방향을 틀어 외교관이 됐습니다.
라브로프는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냉전 말기에 유엔 대표부에서 일했습니다. 그러고는 소련으로 돌아가서,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CIS)이 출범하는 시기에 외교부를 다시 추스르는 작업에 관여했습니다. 1991년 새로 출범한 러시아 외교부의 차관이 됐고, 국제기구들을 상대함과 동시에 CIS 국가들과 외교적 입장을 조율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뉴욕으로 다시 간 것이 1994년입니다. 이 때부터 유엔 대사로 10년을 일했습니다.
2004년 외교장관이 됐으니, 장관직만 벌써 13년째입니다. 미국 국무장관들은 그 사이에 줄줄이 바뀌었지요. 라브로프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그리고 지금의 렉스 틸러슨까지 6명의 미국 국무장관을 상대하고 있는 겁니다.
러시아 외교장관 중에는 라브로프처럼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인물이 적지 않습니다.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이라는 용어로 더 유명해진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는 1939년부터 1949년까지 10년간 외교장관을 하고, 뒤에 1953년부터 1956년까지 한 차례 더 했습니다.
28년간 소련 외무장관을 지낸 안드레이 그로미코. 위키피디아
냉전시대를 주름잡은 베테랑 외교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1957년부터 1985년까지 무려 28년간 소련 외무장관을 지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외교장관을 한 인물이 훗날 조지아의 대통령이 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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