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 대한 책들은 꽤 많이 나와 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를 주로 다룬 책은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 2년 전쯤 메디치출판사에서 나온 캐런 앨리엇 하우스의 <사우디아라비아>(방진영 옮김)라는 책을 '선물'받았다.
이 '선물'이 몹시 고마웠던 이유가 있다. 당시 국제부에 있었기 때문에 업무에 도움이 될 책이었을뿐 아니라, 편집자가 포스트잇에 곱게 적은 메모가 속지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편집국에서 약 3년을 '학생'으로 일하다 편집자로 일하게 됐어요." 책을 만들고 보내준 편집자는 우리 회사에서 '알바'로 일하던 이였다. 그러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메모에는 '천천히 읽어주세요'라고 써 있었고, 그래서 ^^;; 천천히 읽었다. 이제서야 읽었으니. 그 사이에 사우디 내부 상황이나 사우디를 둘러싼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책의 중심인물인 압둘라 국왕이 세상을 떠나 살만이 즉위했으며 그 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 실세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석유회사 아람코 주식을 팔아 경제를 현대화한다고 했지만, 이란과 맞선다며 예멘을 공격해 인도적 참사를 만들고 지역을 아수라장으로 몰아간 것이 더 눈에 띈다. 사우디의 '개혁'과 '성평등'은 지렁이 걸음 수준이다.
그런 상황에서 몇 년 전 압둘라가 느리긴 하지만 나름 개혁을 해보겠다며 안간힘을 쓰고 있던 때에 쓰인 책을 읽으니 묘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재미있기도 했다. 저자는 미국의 '매우 종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여성 저널리스트다. 여성이기 때문에 사우디를 오랜 시간 취재하면서 현지 여성들과도 접촉할 수 있었고, 사우디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스스로 소개한다. 사우디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를 훑으면서 그들의 좌절감과 분노, 순응과 무기력, 한계와 위험성을 두루 살폈다.
드러난 것은 작지만 밑에선 부글부글 끓는 젊은이들의 분노.
드러난 것은 작지만 밑에선 차올라가는 여성들의 개혁 요구.
드러난 것은 작지만 밑에선 쌓여가는 경제적 불평등.
드러난 것은 작지만 밑에선 계속 늘어나는 교육에 대한 갈망.
드러난 것은 작지만 한계에 부딪친 이슬람주의와 종교의 족쇄.
드러난 것은 작지만 그래도 조금씩 '위로부터의 변화'를 이끌려는 압둘라.
하지만 인터넷 사용자가 아무리 늘어도 여전히 무기력한 젊은이들.
여전히 배울 곳도, 나설 곳도 없는 여성들.
왕실의 '시혜'에 의존해 살아왔고 '더 많은 시혜'를 요구할 뿐인 서민들.
남녀 불문하고 기업에 취직해 일할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코란 암기' 교육.
종교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나, 너무나 종교적인 사람들.
아무리 개혁을 내세운들, 여전히 왕실의 생존이 최대 목표인 알사우드 가문.
그 밑에서 굴종과 순응과 무기력이 뼛속 깊이 배인 사우디인들.
저자가 들여다본 사우디는 미로나 미궁 같은 곳이다. 그 내부에는 갈등과 불안과 위협과 극단주의가 있다. 어둡고, 축 늘어져 있다.
사우디 국민들 사이에 사회에 퍼져 있는 수동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국왕이 붐비는 도로에 검문소를 하나 세운다. 아무도 불평을 제기하지 않는다. 안보국 직원에게 검문소에서 신원을 파악하라고 지시한다. 여전히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번엔 사람들을 세워놓고 신원을 확인한 뒤 표를 발부하도록 시킨다. 차들이 기다랗게 늘어선다. 그러나 어떠한 공개적 항의도 벌어지지 않는다.
국왕은 사람들을 줄을 세워 때린 다음, 신원을 확인하고 표를 발부하라고 지시한다. 마침내 한 사람이 분통을 터뜨린다. "그 줄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렸습니다. 적어도 직원이 두 명은 나와서 우리를 때려야 줄이 빨리 줄어들 것 아닙니까." (68쪽)
저 '농담'을 소개한 대목을 읽다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사우디가 그토록 싫어하는 이란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 왕실은 사람들을 '매를 맞으면서도 참고 밥을 얻어먹는 사람들'로 만들었지만 그 모순이 밑에서부터 끓어오르고 있고, 결국 왕실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사우디의 어느 공항이든, 수하물 관리자는 방글라데시나 인도, 파키스탄 출신이다. 택시를 타면 기사 대부분은 파키스탄 사람이다. 호텔에 도착하면 경비가 보안검사를 하는데 십중팔구 예멘 출신이다. 파키스탄 출신 도어맨이 인사하고, 레바논 출신 남자가 접수처 뒤에서 미소를 짓는다. 로비에서 커피를 제공하는 웨이터, 호텔 방을 청소해주는 사람은 대부분 필리핀 사람이다. 사우디에 도착한 지 한 시간이 넘도록, 출입국관리소를 제외하고는 사우디 사람을 마주치기 어렵다. 사우디에서 3명 중 1명은 외국인이다. 사우디의 침체된 민간부문 종사자 10명 중 9명은 사우디 출신이 아니다.
이런 외국인 8500만명은 대부분 2등 시민으로 대우받는다. 이들의 삶은 스폰서(카팔라 Kafala)에게 지배당한다. 직장을 바꿀 때도 스폰서의 허가가 필요하다. (249쪽)
표면적으로 왕국 전체는 우장한 호텔처럼 기능한다. 국민들은 태어나면서 수속을 밟고 방에 덩그러니 남겨진다. 자기 주변을 돌보는 일에는 거의 자부심을 느끼지 않다가, 그저 호텔의 외국인 고용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요구하기 일쑤다. 사우디는 과거 30년 간 5개년 계획을 통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경제 다각화에 실패했다. 사우디라는 5성급 호텔은 퇴보를 거듭해 국민 대다수에게는 그저 그런 모텔 체인으로 전락했다. 오로지 왕족과 일부 유력 사업가들만 호화로운 삶을 영위할 뿐이다. (251쪽)
민간 부문에서는 빈라덴, 올라얀, 자밀, 마흐푸즈, 알라지 같은 소수 대기업이 서비스 부문을 점령하고 있다. 서비스 부문은 건축 및 부동산이 좌우하고, 건축 및 부동산은 정부 지출에 크게 의존하므로, 다시 석유 매장량에 의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결국 이 대기업 가문의 운명은 대부분 알 사우드 왕가와의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러나 왕국 바깥으로 자산을 다양하게 분산해놓은 덕분에 이들 개인의 재산은 정부 계약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260쪽)
9.11 때부터 관심 많았던 투르키 알파이살 부분은 인상 깊게 봤다. "투르키 왕자는 파이살 가문 특유의 강경하고 쌀쌀맞은 생김새로 사우디인들에게는 꽤나 친숙하다." 투르키는 주미대사로 일하다 반다르 쪽과의 암투에서 밀려 15개월만에 사임했다. 저자는 "투르키 왕가의 방대한 국제 경험은 사우디의 또 다른 낭비된 자산"(216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24년간 정보국장을 지내면서 미국 CIA와 협력해 아프가니스탄에 '무자히딘'을 보낸 것까지 투르키의 공로라고 칭찬하는 저자의 안목이란.
나라를 말아먹은 사우드 국왕, 사실상의 궁정쿠데타로 뒤이어 즉위한 파이살 국왕 부분도 재미있게 봤다.
파이살 왕세제는 금욕적인 인물이었다. 독실하고 근면하게 생활했다. 오후에 먹는 사과 조각의 개수에 이르기까지 종교를 일상화했고, 개인적인 의식을 고수했다.
1958년 사우디 재정은 파산했다. 왕가 형제들의 대표가 파이살에게 국가 개혁 정부의 수장을 맡고 통치권을 위임받으라고 요청했다. 국민들은 이 사실을 메카 라디오의 종교방송을 듣던 중 알게됐다. 파이살 왕세제가 정부 인계 발표를 한 것이다. 파이살은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국가 현금보유량을 알아봤지만 317리얄(100달러)이 전부였다.
이후 6년 간 형제들의 통치권 줄다리기로 국가는 내전 위기까지 몰리고 만다. 사우드는 권력 이양을 거부하다가 1963년 마침내 왕궁을 근위대로 둘러싸기에 이른다. 당시 안보장관이었던 술탄은 군대를 경계태세로 돌렸다. 당시 국가방위군 수장이었던 압둘라 역시 군대를 소집했다.
파이살은 평소처럼 매일 출근했다. 차를 몰고 왕궁을 지나칠 때면 사우드의 근위병들이 기관총을 들고 왕세제를 눈으로 좇았다. 어느 날 파이살은 멈춰 서서 근위병에게 물었다. "먹고 마실 것은 충분합니까?" 이 단순한 말이 전환점이었다. 그 후 파이살이 출근할 때마다 근위병들은 거수경례를 했다.
가족들은 울라마에게 판결을 부탁했다. 울라마는 사우드가 자발적으로 왕세제에게 권력을 넘겨주었으니 철회할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왕가의 노인들은 울라마에게 이 판결을 파트와로 규정하길 요청했다. 파트와를 발표하자마자 7000여명의 모든 왕자들이 지지를 표명했다. (330-331쪽)
저자가 책에서 언급하는 사람들 중 이미 나예프는 갔고 그 아들 MBN도 숙청당했다. 왕위 계승 서열은 바뀌었고 손자 세대 국왕 즉위가 코앞에 와 있다. 술탄도 죽었고 반다르도 무대에서 내려갔다. 압둘라가 시작한 교육캠페인, 여성 대학 등등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상은 늘 바뀌고, 사우디도 어쩔 수 없이 바뀐다. 그런데 바뀌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저항하는 이들이 그 사회에 드러누워 버티고 있다. 변화의 요구와 필요성, 그걸 소화해내지 못하는 왕실과 사회. 모순된 두 가지 서로 다른 힘이 부딪치면?
사우디엔 파국이 올까? 옛소련이 무너졌듯, 무바라크와 카다피가 쫓겨났듯, 알사우드 왕실이 무너지고 '사우디의 봄'이 올까? 혹은 '3세대 국왕 체제'로 이행해 MBS가 어떤 방향으로든 사우디의 체질 변화를 이끌어내고 (그리 아름답지 않은 목적지에라도) 안착할 수 있을까? 사우디의 '완만한 변화'는 가능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상황은 비관적이다. 하지만 사우디의 미래가 비관적인 것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저자가 사우디에서 밀착 취재를 오랜 시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각은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우디 얘기를 읽을 수 있었고, 재미도 있었다. 사우디 이슬람 지도자들 사이에도 외부로 많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것, 여성들의 움직임에도 눈길이 갔다. 전반적으로 번역도 깔끔하고 편집자가 꼼꼼하게 챙기며 만든 책이라는 게 눈에 보여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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