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토니 주트, '포스트워 1945~2005'

딸기21 2019. 2. 1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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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김두식 교수님의 <법률가들>을 어마어마하게 재미있어 하면서 읽었는데 정작 정리를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도 아는 내용이 없던 것들이라 어느 부분을 어떻게 정리해놓아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번째로 읽은 책은 어마무시한 책. 토니 주트의 <포스트워 1945~2005>(조행복 옮김. 플래닛)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확실한 미래로 뛰어든 유럽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한마디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사를 망라한 것이라 보면 된다. 두 권으로 돼 있는데 모두 합해 각주와 옮긴이의 말을 빼고도 1351쪽. 두께도 두께이지만 내용이 진짜 방대하다. 



'전후 시대'라 규정한 1945~1953년까지를 다룬 1부에서는 전쟁의 유산이 유럽의 전후질서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특히 냉전의 고착화 속에 미국이라는 압도적인 존재에 유럽 각국들이 어떻게 대응해나갔는지를 설명한다. 이어지는 1971년까지의 시기는 역시나 미국의 껍데기 밑에서 유럽이 안정을 찾고 풍요로워지는 과정을 다뤘다. 


서너해 동안 새 전후 유럽사를 담은 책들을 좀 읽었다. 딱히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분야에서 눈길을 끄는 책들이 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게 그 소리인가? 아무튼 그 중에서 이 책이 압권인데,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유럽사를 다룬 책들에서 절반에 못 미치는 분량만을 차지하던 동유럽 공산권에 대해 상세하게 풀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헝가리 사태, 체코와 폴란드에서 벌어진 일 등등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좌파 진영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동쪽과 서쪽의 상호작용을 비중있게 다뤘다. 마크 마조워의 책은 동서 구분 없이 유럽의 여기저기를 현란하게 오가는 인상인데, 이 책은 동서남북을 순서대로(?) 오가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순서대로(!)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느낌.


전후 서유럽이 파시즘과 학살에 대해 어떻게 침묵했고 어떻게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 했는지를 시니컬하게 비판한 것도 눈에 띈다. 당대의 사회문화적 현상을 많이 소개한 것도 강점. 저자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인가보다. 


3부는 1971년부터 1989년까지의 시기인데 제목이 '퇴장 송가'다. 공산독재정권들의 퇴장만이 아닌 한 시대의 퇴장. 구질서의 종말 뒤 2005년까지를 그리는 4부는 '몰락 이후'다. 그 뒤에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을 대충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1~3부에 비해서 4부는 재미가 덜했다.


번역은 정말 엉망이다. 대체 왜 총리를 꿋꿋하게 국내 번역자들이 '수상'이라고 쓰는지 얼마전 페이스북에 규탄 포스팅을 했었는데, 이 책의 번역자는 정말로 '토니 블레어 수상' '앙겔라 메르켈 수상'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bbc방송은 왜 그리 고집스럽게 '영국방송협회'라 해놨는지. 이건 그냥 예를 든 것뿐이고, 전체적으로 문장은 목에 턱턱 걸리며 번역이 잘못됐다 싶은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편집자가 전체를 다 훑어봤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탈자도 적잖게 눈에 띈다. 


그럼에도 번역의 모든 난맥상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역작임. 진작에 읽었어야 했는데, 하며 계속 한숨 쉬면서 읽었음.


유대인들은 전성기 빈 그 자체였던 미술과 음악, 연극, 문학, 언론, 사상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빈은 폭력적으로 유대인들을 쫓아내 도시 동편으로 추방하고 그 기억을 말살했다. 그 폭력은 현재의 빈에서 엿보이는 떳떳하지 못한 침묵을 설명해 준다. 전후의 빈은 전후 서유럽처럼 입에  담기 어려운 과거의 맨 꼭대기에 세워진 위압적인 건축물이다. 동유럽이 복귀했어도 과거는 여전히 입에 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말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1989년의 격변) 그 후 3년이 지나 오스트리아는 전후에 힘들여 확보한 자율성을 포기하고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유럽연합이 유럽의 일들을 해결하는 힘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동유럽 혁명들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1999년 10월, 빈을 방문한 나는 서부역을 뒤덮은 외르크 하이더의 자유당 포스터들을 보았다. 하이더는 나치 군대의 '명예로운 인물들'을 공개적으로 찬양했는데도 그해 투표의 27퍼센트를 획득했다. 지난 10년간 자신들의 세계에서 발생한 변화들에 대한 동료 오스트리아인들의 불안과 몰이해를 잘 이용한 결과였다. 빈은 서유럽의 나머지 지역들처럼 대략 반세기 동안 유지된 침묵을 깨고 역사에 다시 진입했다. (20~21쪽)


프랑스의 공적 생활에서 토지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그리고 농촌의 표가 지닌 현실적인 중요성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던 프랑스 정부는 가격보전 정책을 유지하면서 해외 시장을 찾으려 애썼다. 이 문제는 프랑스가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의 주된 관심은 해외의, 특히 독일(혹은 영국)의 육류와 낙농품과 곡물시장에 진입할 때 받을 특혜였다.

프랑스는 독일의 비농산품 수출에 자국 시장의 개방을 약속하는 대가로 국내의 농업보증제도의 짐을 동료 회원국에 효과적으로 전가시켰고, 그럼으로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과도했던 장기적 부담을 덜어냈다. 유럽경제공동채의 그 유명한 공동농업정책(CAP)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공동농업정책은 1962년에 시작되어 10년간의 협의 끝에 1970년에 공식화되었다. 유럽의 정찰 가격이 상승하자 유럽에서 생산된 모든 농산물이 너무 비싸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차후 유럽경제공동체는 매년 회원국의 모든 잉여 농산물을 '목표' 가격보다 5~&퍼센트 낮은 수준에서 구매하게 된다. 그리고 보조금 지겁을 통해 공동시장 밖에서 더 낮은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잉여생산물을 해소하게 된다. 각국은 자국 농민에게 원하는 것을 주었고, 그 비용의 일부는 도시의 소비자들과 납세자들에게 전가했다. 

생산량은 특히 정책혜택을 받은 품목에서 수요를 크게 초과했다. 정책은 현저하게 왜곡되어 프랑스의 대규모 농업기업이 특화하곤 했던 곡물과 가축에 유리했던 반면, 남부 이탈리아의 농민들이 재배하는 과일과 올리브, 야채에는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았다. 

1960년대에 세계 식량가격이 하락하자 유럽경제공동체의 식량가격은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에 묶여 버렸다. 유럽의 옥수수와 소고기 판매액은 공동농업정책이 시작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판매액의 200%에 달했고 버터는 400%에 달하게 된다. (504~506쪽)


동유럽 주민들은 이제 공산주의 체제의 약속을 믿지 않았지만 부득이 그 체제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동유럽인들에게 1956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누적된 실망의 정수였다. 탈스탈린주의를 약속함으로써 잠시 부활했던 공산주의에 대한 기대는 소멸했다. 서방의 구원자들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헝가리 사태 이후 지배적인 정서는 냉소적인 체념이었다.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동유럽 주민들이 이제 침묵했고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흐루시초프 시대의 소련 지도부는 조만간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지역에, 기이하게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 헝가리에 일정 정도의 자유화를 허용했다. 누구에게도 공산당을 신뢰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 지도자들을 신뢰하라는 요구는 더욱 없었다. 다만 최대한 반대 표명을 자제하라는 요구만 있었을 뿐이다. 

그 결과로 등장한 '굴라시 공산주의' 덕에 헝가리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헝가리 사태에 대한 기억으로 적어도 다음 10년 동안은 다른 소련 진영에서도 안정이 확보되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제도는 한때 갖추었던 급진적이고 전향적이며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모두 잃었다. 이제는 단지 감내해야 할 생활양식일 뿐이었다. 

1992년 11월 11일 보리스 옐친은 헝가리 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이렇게 인정하게 된다. "1956년의 비극은... 소련 정권의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헝가리 사태) 33년 뒤인 1989년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서 자유시대로의 이행을 축하하던 수십만 명의 헝가리인들은 또 다른 이장 의식을 거행했다. 이번에는 임레 너지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이장이었다. 너지의 묘 앞에서 발언한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수상이 되는 청년기의 빅토르 오르반이 있었다. 오르반은 군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1956년에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오늘의 청년에게서 미래를 빼앗았다." (531~533쪽)


독일 재계의 핵심적인 기반은 전쟁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독일 제품은 기술적으로 발전된 고부가가치 제품의 전형이었으며, 가격이 아니라 좋은 품질 때문에 판매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종전 후 첫 10년 동안은 경쟁 상대가 거의 없었다. 

독일의 사업 비용은 더 효율적인 새로운 방법을 찾는 데 지속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절감되었다. 고분고분한 노동자들 덕이 컸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사실상 무진장 공급되는 저렴한 노동력- 동독에서 탈출한 숙련된 젊은 기능공, 발칸 출신의 반숙련 기계공과 조립공, 터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들어온 비숙련 노동자-에게서 이익을 보았다.

1960년대에 독일의 자동차 회사는 품질과 신뢰성으로 명성을 얻는 데 성공했다. 슈투트가르트의 메르세데스 벤츠와 뮌헨의 베엠베 같은 회사는 우선은 국내에서 그리고 점차 외국에서도 거의 고정된 시장에 갈수록 더 비싼 차를 판매할 수 있었다. 앞서 나치가 그랬듯이, 서독 정부는 그러한 '국가대표 선수'를 지원했다. 초기에는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을 해주어 보호했고, 또 은행과 기업의 결합을 장려하여 독일 회사들이 투자에 쓸 자금을 언제라도 공급할 수 있게 했다.

폭스바겐의 경우 그 토대는 이미 1945년에 마련돼 있었다. 회사는 1939년 이전에는 자원을 무한정 공급받았다. 대량생산되는 가정용 소형차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을 때 국내에서 폭스바겐 비틀의 경쟁상대는 사실상 없었으며, 고정된 저가에 판매됐는데도 비틀은 이익을 냈다. 나치 덕분에 폭스바겐에는 청산해야 할 빚이 전혀 없었다. (584~585쪽) 


영국에서도 영국자동차(BMC)라는 국가대표 선수가 존재했다. 영국자동차는 훗날 레이랜드 자동차와 합병하여 브리티시 레이랜드 공사를 탄생시키게 된다. 그러나 (독일과의) 유사성은 여기서 끝났다. 종전 이후 영국 정부들은 특히 영국자동차에 해외에서 최대한 많은 차를 판매하도록 촉구했다. 영국자동차는 의도적으로 신속한 출고를 위해 품질관리를 게을리했다. 그 결과 품질은 조악해졌는데 처음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49년 영국은 나머지 유럽 전체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더 많은 승용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구매자들은 더 좋은 국산자동차가 생산되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영국산 자동차를 내버렸다. 

게다가 영국 자동차회사들은 런던의 심한 정치적 압력에 못 이겨 공장과 물류센터를 비경제적인 지역에 건설했다. 공적인 지역 경제에 부응하고 지역 정치가들과 노조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영국 정부는 제조회사들의 비효율성을 적극 조장했다. 1970년이면 유럽과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이 영국 회사들의 시장을 넘겨받았고 품질과 가격에서 그들을 밟고 올라섰다. 1970년대 초의 석유파동, 유럽경제공동체 가입, 그리고 마지막까지 보호되었던 자치령과 식민지 시장의 중단으로 영국의 독립적인 자동차 시장은 결국 종말을 고했다. 1975년에 영국에서 유일하게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던 브리티시 레이랜드가 쓰러졌고, 몇년 뒤 이익이 날만한 부분은 베엠베가 헐값에 인수하게 된다. 자율적인 영국 자동차부문의 쇠퇴와 소멸은 영국의 경제적 경험 일반을 대표할 수 있다. (584~585쪽)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일관성이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들은 해마다 전체 투표이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으며, 그 결과 수십 년 간 중단 없이 정권을 담당했다. 1945년에서 1968년 사이에 덴마크 정부의 열에 여덟은 사회민주당이 이끌었고, 같은 기간 다섯 차례 구성된 노르웨이 정부에서 세 차례에 걸쳐 사회민주당 정부가 집권했으며 네 차례 수립되었던 스웨덴 정부는 모두 사회민주당 정부였다. 인적 구성에도 연속성이 존재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는 특정한 이점을 상속받았다. 해외 식민지나 제국주의적 야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사회적으로 동질적인 소규모 국가들이었으며 오랫동안 입헌 국가를 유지했다. 

스칸디나비아는 역사적으로 가난한 곳이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노사 관계는 만성적인 분규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양국에서 파업 빈도는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들었다. 대공황 시기 동안 이 지역의 실업은 고질적이었다. 스웨덴에서 위기는 폭력적인 대결을 낳았다. 특히 1931년 오달렌에서는 군대가 제지 공장에서 발생한 파업을 진압했다. 

스칸디나비아가, 특히 스웨덴이 두 차례의 대전 사이에 유럽 변경의 경제적으로 침체돼 있던 다른 사회들이 걸었던 길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 공은 대부분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대체로 독일 사회주의 운동과 기타 제2차 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 운동들과 과격한 교리와 혁명의 대망을 공유했었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이를 포기했으며 1930년대가 지나는 동안 자본과 노동 사이의 역사적 타협을 통해 나아갔다. 1938년 살트시에바덴에서 스웨덴 고용주와 노동자 대표들이 협약에 서명했는데 이는 향후 스웨덴의 사회적 관계에 토대를 놓게 된다. 살트시에바덴 협약은 1945년 이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형성된 신코포러티즘적 사회협력의 전조였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로 추정된 유권자들에게 아무런 환상도 품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타협에 열려 있었다. (597~598쪽)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당은 유럽의 거의 모든 사회당이나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농촌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 때문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전간기에 고초를 겪은 중부 유럽과 남부 유럽의 빈곤한 농민들은 나치나 파시스트, 농업 포퓰리즘에는 준비된 지지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유럽의 북쪽 끝에 있던 농민과 벌목꾼, 소작농, 어부는 똑같이 고초를 겪었으나 점차 더 많은 숫자가 사회민주당을 지지했다. 사회민주당이 농업 협동조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이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사적 생산과 집단적 목적, '후진적' 농촌과 '근대적' 도시를 가르는 사회주의적 구분을 희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은 장기간 존속하여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적녹' 동맹은 다른 곳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모범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전통적인 농촌 사회와 산업 노동자가 손을 맞잡고 도시화 시대로 진입하는 도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는 단지 여러 정치운동의 하나가 아니라 근대성의 형식 그 자체였다. 1945년 이후에 전개된 스칸디나비아 복지국가들의 기원은 1930년대의 두 가지 사회협약에, 즉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의 협약과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협약에 있다. (599~600쪽)


주민 수가 노르웨이와 덴마크 인구를 합친 정도였던 스웨덴은 단연 스칸디나비아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공업화가 가장 진척된 곳이었다. 1973년 스웨덴의 철광 생산은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생산량을 합한 것에 견줄 만했고 미국의 거의 절반에 달했다. 제지와 펄프 생산, 해운에서는 세계 제일이었다. 노르웨이의 사회민주주의가 오랫동안 빈곤한 사회의 부족한 재원을 정리하고 할당하며 분배함으로써 존재했다면, 스웨덴은 1960년대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축에 들었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는 공동선을 위해 부와 서비스를 분배하고 균등하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1918년 이후 핵심 신조와 정책을 늘 국가소유의 장점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에 두었던 영국의 노동운동과 달리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사적 개인에게 자본과 주도권을 맡겨놓는데 만족했다. 영국자동차 같은 사례가 스웨덴에서 되풀이된 적은 없었다. 볼보와 사브, 기타 사기업은 흥하든 망하든 자유로이 내버려두었다.

실제로 스웨덴의 산업자본은 서유럽 그 어느 곳보다 더 적은 소수의 개인 수중에 집중되었다. 정부는 사사로운 부의 축적이나 상품과 자본 시장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노르웨이에서도 15년간 사회민주당 정부가 통치한 후에 국가가 직접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경제부문은 기독교민주당의 서독보다 사실상 더 작았다. 그러나 덴마크와 핀란드에서 그랬듯이 이 두 나라에서 국가가 했던 일은 가혹한 누진세를 거두어 사적 이윤을 공익을 위해 재분배한 것이었다. (601~602쪽)


(1960년대에) 공산당 정권들은 무엇보다 안정에 관심을 쏟았다. 부상 중인 세 가지 모델이 있었다. 첫 번째 모델인 '카다르주의'는 쉽게 전파될 수 없었다. 헝가리의 상황은 독특했다. 카다르는 여행에 굶주린 동포들 앞에 순응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서 번영하는 서구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흔들어 보였다. 관료와 전문가로 구성된 교육받은 전문기술인 사회는 다른 무엇보다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데 실용적인 관심을 가졌다. 진정한 해방은 생각할 수 없었으나 억압으로 회귀하는 일은 정말로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두 번째 모델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로 한층 더 독특했다. 유고슬라비아가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서 가사 상태에 빠져 있게 된 것은 이데올로기적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50년대와 60년대가 지나는 동안 티토는 의사결정 과정을 일부 분산시켰고 공장과 노동자의 '자율'을 실험하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혁신 조치들은 경제적 필연성은 물론 인종적, 지리적 분열로부터 탄생했다. 스탈린과 절연한 덕에 티토는 소련 방식의 산업 근대화가 노정한 온갖 오류를 답습해야 한다는 압박들 더 이상 받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가 비판자들에게 꼭 더 부드럽지만은 않았으나,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다루는 데에서는 더 유연했다. 유고슬라비아인들은 부유하지 않았고 자유롭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밀폐된 체제에 감금돼 있지도 않았다. '티토주의'는 억압적이었다기보다는 답답했다.

세 번째 길은 '민족적 스탈린주의'로서 알바니아가 선택한 길이었다. 알바니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편집증 환자가 전제적으로 통치한 가난한 폐쇄 사회였다. 이것이 점차 루마니아의 모델이 되었다. (702~703쪽)


흐루시초프는 루마니아를 매우 싫어하여 국제 노동 분배에서 루마니아에는 유일하게 농업적인 역할을 떠맡기려 했다. 그렇지만 부쿠레슈티는 더 부유한 선진 공산주의 경제들에 원료와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로 격하될 생각은 없었다.

루마니아는 헝가리 폭동을 진압하고 폭동 가담자들을 투옥하는 데 편의를 제공했다. 그 덕에 소련군은 1958년에 루마니아 영토에서 철수했고, 루마니아는 점점 더 독립적인 길을 걸었다. 루마니아는 게오르기우 데지와 차우셰스쿠 시절에 모스크바와 중국의 싸움에 연루되기를 거부했으며 심지어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자신들 영토에서 기동훈련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루마니아 공산당이 집권 중에 명백히 비루마니아적인 기원을 보충했던 방법들 중 하나는 당을 민족주의라는 외투로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이를 시작한 사람은 게오르기우 데지였으며, 차우셰스쿠는 단지 조금 더 진척시켰을 뿐이다.

이 전략은 외국에서 훨씬 더 성공했다. 공산국가 루마니아의 국제적 이미지는 의아스러울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부쿠레슈티 사람들은 단순히 모스크바와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서유럽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찬미자들을 끌어모았다.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체제는 특히 사악하고 억압적이었다. 루마니아는 다른 위성 국가들과는 대조적으로 내부의 반대세력에 전혀 활동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방 정부들은 루마니아의 독재자들을 비난하기는커녕 할 수 있는 모든 격려를 보냈다. 1967년 1월에 루마니아가 소련의 거부를 무시하고 서독을 공식적으로 승인했을 때, 관계는 훨씬 더 가까워졌다. 리처드 닉슨은 1969년 8월에 부쿠레슈티를 방문하여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공산 국가에 발을 내딛었다. (703~705쪽)


프랑스 공산당은 낡은 사상을 온전히 버리지 못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지도했는데 이들은 1956년의 사건으로부터 진정으로 거리를 둔 적이 없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차라리 형편이 나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팔미로 톨리아티에서 엔리코 베를링구에르까지 지적이고 매력적인 지도자들을 갖는 축복을 받았다. 두 나라 공산당은 다른 모든 공산주의 조직처럼 소련의 자금에 크게 의존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공산당은 소련의 엄청난 조치를, 특히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최소한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는 했다.

베를링구에르는 기독교민주당에 대한 철저한 반대를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수호에 헌신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이른바 '역사적 타협 compromesso storico'이다. 이러한 전환은 한편으로는 1973년 칠레 쿠데타의 충격 때문에 이뤄졌다. 칠레 쿠데타로 인해 베를링구에르와 공산당 지식인들은 공산당이 의회 다수를 차지하더라도 결코 단독으로 정부는 구성할 수 없으리라고-미국에 의해서든, 이탈리아 군부와 재계, 교회 내의 동맹자들에 의해서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일시적으로 선거에서 이득을 가져왔다. 공산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는 꾸준히 증가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체제' 정당으로 등장할 준비를, 어쩌면 대안적인 예비 정부로서 등장할 준비까지도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새로운 방식과 성공을 배우려 했던 프랑스 공산당의 노력은 '유러코뮤니즘'으로 알려졌다. 이 용어는 1975년 11월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페인 공산당의 회합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일시적이나마 매력적이었음을 입증했다. 

서유럽 공산당들이 역사의 부담을 극복하고 당을 일종의 좌파 민주주의 운동으로 재정립하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미사여구의 교의들을 버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소련 공산체제와의 결별을 매우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했는데, 이는 베를링구에르와 카리요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815~816쪽)


브란트가 1974년 간첩 사건으로 사직했을 때 수상 직을 이어받은 자들,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와 기독교민주당의 헬무트 콜은 동방정책의 일반적인 노선에서 전혀 이탈하지 않았다. 이들은 독일의 전후 국경선을 인정한 모스크바 조약에 서명한 뒤에 브란트가 했던 말을 받아들였다. "오래전부터 도박으로 날려버린 것 외에 이 조약으로 잃을 것은 없다."

서유럽에게는 독일이 동유럽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퐁피두가 모스크바 조약에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영국에 고무적인 제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프랑스는 결국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확고하게 서유럽의 제도에 닻을 내리겠다는 독일의 약속에 양보했다. 

두번째 지지층은 경계선 양측의 독일인들이었다. 상당수 독일인에게 브란트의 동방정책인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1969년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건 전화 통화는 50만건이었지만 20년 뒤에는 4000만건이 되었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의 전화 통화는 1970년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1988년이 되면 연간 1000만건 수준에 도달했다.

1963년 이후 동독은 서독 정부에게 돈을 받고 정치범들을 '팔아' 넘겼고, 액수는 대상자의 가치와 자격으로 결정되었다. 1977년 서독 정부는 동독 교도소의 수감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1인당 9만6000마르크에 가까운 액수를 지불했다. 새로운 정책의 외교적 성과에는 국경을 넘는 가족 재결합의 제도화도 있었는데, 대가로 동독 당국은 1인당 4500마르크를 추가로 청구했다. 어떤 추산에 따르면 동독이 3만4000명의 수감자를 석방하고 2000명의 아이들을 부모와 재결합시키고 25만건의 가족 재결합을 관리하는 대가로 서독 정부로부터 뽑아낸 총액이 1989년까지 30억 마르크에 육박했다. 

동방정책의 세 번째 지지자는 당연히 소련이었다. 서독과 러시아가 일단 폴란드의 새 국경선이 불변이라는 데 합의하고 서독 정부가 인민민주주의 체제들을 승인하는 데 동의하자 두 나라는 공통의 기반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73년 5월 브레주네프가 본을 방문했다. 브레주네프와 슈미트는 서로 공유한 전쟁의 경험들을 정감 있게 회상하기까지 했다. 추억은 환영이었을지 몰라도, 이해관계의 공유는 매우 현실적이었다.  (820~823쪽)


그리스는 충성의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았다. 1947년 2월, 파리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도데카니소스 제도를 아테네에 양도해야만 했다. 그리스는 마셜 플랜으로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은 수혜자였다. 그리스 군대는 운 좋게도 실질적인 지원을 풍족하게 받았다. 군대의 역할은 과연 결정적이었음이 입증된다. 그리스 군대는 8년 간의 전쟁을 거치며 비타협적인 반공주의, 군주주의, 반민주주의 성격을 띠었으며 1952년 가입한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미국에 대한 충성은 자국의 정치제도자 법에 대한 것보다 더 확고했다.

군대는 전후 그리스의 정치생활에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0년대 초 전국 선거에서 승리한 '그리스인의 대회' 당은 내전에서 정부군 사령관을 맡았던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가 이끌었다. 군부는 1963년까지 콘스탄티노프 카라만리스를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지지했다. 카라만리스가 통치하는 그리스는 경제적으로 침체됐고 매우 부패했지만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1963년 5월 좌파 의원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가 테살로니키의 평화집회에서 연설 중 습격당했다. 닷새 뒤 람브라키스의 죽음은 좌파와 이제 막 형성되든 평화운동에 정치적 순교자를 만들어주었고, 여섯 달 뒤 선거에서 카라만리스는 점차 증가하고 있던 도시 중간계급이 지지하는 중도정당인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의 중도연합에 근소하게 패했다.

새 다수당은 1961년 선거에 이용된 장비에 대한 일체 조사를 요구했고, 의회와 젊은 국왕 콘스탄티노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결국 파판드레우는 계략에 말려들어 사임하였다. 여러 임시 수상이 뒤를 이었는데 누구도 의회에서 안정적인 과반수를 확보할 수 없었다. 1967년 4월, 야당인 급진민족연합은 독자적으로 소수 정부를 수립했고 국왕이 의회를 해산하고 새 선거 실시를 선포할 때까지 집권했다. 선거에서 좌파가 더 약진할 가능성이 커지자 군대 내 우파 장교단은 '공산당의 위협'을 구실로 내세우고 민주주의 제도의 역량 부족과 정치인들의 무능을 지적하며 4월 21일 권력을 장악했다.

게오르기오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이끄는 장교단은 아테네와 몇몇 도시에 탱크와 공수부대를 투입해 정치인과 기자, 노조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일상의 주요 거점을 모두 장악했다. 콘스탄티노스는 로마로 피신했다.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혁명평의회로부터 수상에 임명된) 파파도풀로스는 거의 1000명에 가까운 공무원들을 해고하고 좌파와 중도파 정치인들을 투옥하거나 추방하며 그리스를 숨 막힐 듯한 7년의 세월 속으로 고립시켰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반현대적이었던 대령들은 신문을 검열하고 파업을 불법화하며 미니스커트와 현대 음악을 추방했다. 또한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사회학과 러시아어, 불가리아어에 대한 연구도 금지했다. (831~834쪽)


너무나도 그리스다운 군부 정권.

포르투갈 부분은 통 몰랐던 것들이라 재미있게 읽었다.


살라자르는 차우셰스쿠처럼 빚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으며 매년 공들여 예산의 균형을 맞추었다. 광적인 중상주의자였던 살라자르는 유달리 많은 금 보유고를 유지했으며 이를 투자나 수입에 사용하지 않도록 유의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은 빈곤에 빠졌고 주민 대다수는 북부의 작은 가족농장이나 남쪽의 대농장에서 일했다. 포르투갈은 대체로 1차 산품의 수출이나 재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수출품에는 자국 국민도 포함되었다.

포르투갈을 전쟁에 말려들지 않게 했고 탐욕스러운 시장자본주의와 폭력적인 국가사회주의 사이에서 잘 이끌었다는 것이 197년죽기까지 살라자르의 당당한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살라자르는 국민을 너무나 성공적으로 최악의 시장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에 노출시켰다. 물질적 불평등과 이윤 착취는 유럽의 다른 어느 곳보다 두드러졌으며, 1969년까지도 성인의 18%만이 피선거권을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

국내에 반대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저항은 나라에서 유일하게 독립적인 기관이었던 군부에서 나왔다. 군대의 급여는 좋지 못했다. 살라자르는 부족한 재원을 임금에 쓸 수는 없었고, 대신 가난한 군 장교에게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 여성과 혼인할 것을 적극 권장했다. (840쪽)


1947년과 1958년 두 차례의 군부 쿠데타 시도는 쉽게 진압됐다. 개혁성향을 지닌 장교들은 협력자나 대중적 기반이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은 1961년에 변했다. 인도 정부가 포르투갈 식민지 고아 Goa를 병합했고 앙골라에서는 무장폭동이 발발했다. 고아의 상실은 국민적 굴욕이었으나 아프리카의 반란은 훨씬 더 심각했다.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속주'에는 앙골라, 기네비사우와 카부 베르드 제도, 모잠비크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중 앙골라가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인구가 600만명에 못 미치는 앙골라에 50만명에 가까운 유럽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철, 다이아몬드, 근해유전 등 자원 때문에 살라자르는 마지못해 앙골라에 미국 회사 걸프오일 등 외국인의 투자를 허용했고, 60년대에 앙골라는 포르투갈에 경제적으로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무장 폭동은 공공연히 일어났다. 리스본은 1967년 대응폭동 전략을 개시했다. 통제 가능한 거대 촌락들로 주민들을 재정착시키는 것이었다. 1974년 100만명이 넘는 농민이 이주했다. 이 계획은 앙골라 사회와 농촌 경제에 오래도록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폭동을 진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841쪽)


기네비사우와 카부 베르드에서는 3만명 넘는 포르투갈 군대가 카리스마 넘치는 아밀카르 카브랄 휘하의 1만 명의 반란군과 게릴라전을 벌였지만 아무 성과 없이 발만 묶인 꼴이 되었다. 1970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전쟁으로 연간 방위비의 절반을 허비했다. 군 복무 연령대의 포르투갈 남자 넷 중 하나는 아프리카에서 근무하기 위해 징집됐다. 1973년 그중 1만1000명이 아프리카에서 사망했다. 사망률은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미군이 감내해야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인기없는 정부를 위해 이국 땅에서 '더러운 전쟁'을 수행하는 데 대한 군부의 불만이 점점 더 커져갔고, 초급 장교들과 그 가족들의 불만에 신세대 사업가들의 불만이 덧붙여졌다. 사업가들은 조국의 미래가 아프리카가 아니라 유럽에 있음을 이해했다. (842쪽)


1974년 4월 25일, 군대운동(MFA) 장교들이 살라자르의 후계자인 마르셀루 카에타누와 동료들을 내쫓고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목적은 민주화와 식민지 해방, 경제개혁이었다. 쿠데타는 별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며 군 참모차장을 역임하고 기네비사우 총독이었던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이 혁명평의회를 이끌게 되었다. 비밀경찰이 폐지되고 모든 정치범이 석방되었다. 언론의 자유가 회복되었고 사회당과 공산당 지도자들이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으며 공산당 조직은 거의 반백년 만에 합법화되었다. 스피놀라는 7월에는 아프리카에 식민지에 완전한 자결권을 부여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1년 안에 모든 식민지가 독립했다. 식민지 해방은 앙골라에서 군대가 철수하고 폭력 충돌이 일어난 결과로 75만명에 달하는 유럽인들의 포르투갈 귀환을 재촉했다. 

스피놀라의 보수적인 성향은 젊은 동료들과 충돌했고 결국 1974년 9월 사임했다. 이후 14개월 동안 포르투갈은 완전한 사회혁명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군대운동과 알바루 쿠냘의 비타협적인 레닌주의 공산당의 전폭적인 지지로 은행과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었으며 대규모 농업개혁이 남부의 곡물 생산지 알렌테주에서 이행되었다. 그러나 중부와 북부에서는 농업개혁이 환영받지 못했다. 북부 농촌과 소도시는 또한 가톨릭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1974년의 포르투갈 혁명가들은 본질적으로 30년대 스페인의 농촌 과격파가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북부의 소농들은 혁명가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총선에서는 마리우 소아르스가 망명 정당으로 창설한 사회당이 38퍼센트를 득표해 최대 승자가 됐다. 11월 8일 건축노동자들이 제헌의회를 포위했고 2주 동안 '리스본 코뮌'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북부와 남부 사이에 내란이 시작되리라는 말도 있었다. 선거결과는 이미 혁명장교들에 치욕을 안겨 주었다. 

(842~843쪽)


1976년 포르투갈 군부는 쿠데타 이후 실질적으로 2년 동안 나라를 통제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사회당은 다시 제1당이 되었으며 소아르스는 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구성했다. 민주주의의 전망은 어두웠지만 소아르스는 살아남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군대는 막사 안에 머물러 있었고 군 내부 정치 파벌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었다. 

군부는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지는 않았다. 1976년 헌법에 따라 혁명위원회가 거부권을 보유했다. 그러나 이후 2년 동안 의회가 헌법을 수정하여 행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2982년에는 혁명위원회 자체를 폐지했으며 반자본주의 성격을 조용히 제거했다. 이후 20년 동안 사회당과 그 반대파인 아니발 카바수 실바가 이끄는 중도적인 사회민주당이 교대로 집권하게 된다. (846~847쪽)


카라만리스, 스피놀라, 아돌포 수아레스(스페인)는 몇 년 뒤의 고르바초프처럼 모두 자신들이 해체시키는 데 기여한 구체제의 특징적 생산물이었다. 보수 정치인들이 한때 자신들이 충성을 바쳐 봉사했던 권위주의적 제도를 해체할 수 있었던 것은 지지자들을 안심시켰기 때문이다. 거런 다음에는 소아르스, 곤살레스, 파판드레우 등 사회주의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불가피하게 때로 온건하고 인기 없는 경제정책을 펼치면서도 지지자들에게는 급진파의 신임장이 온전함을 납득시켰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스는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면서도 '서방'에 그다지 어려움 없이 진입하거나 재진입할 수 있었다. 공통의 반공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냉전의 제도들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들과 군사독재나 교권 독재 사이에서 소통과 협력을 증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특히 스페인에서 신흥 중간계급은 패션스타일뿐만 아니라 야심에서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의 경영자와 사업가, 기술자, 정치가, 공무원을 표본으로 삼았다. 권위주의적 통치에서 벗어나는 이행을 촉진시킨 요인은 무엇보다 이행의 기회였다. 한때 뒤만 바라보았던 엘리트들은 이제 북쪽을 쳐다보았다. 지리가 역사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듯했다. (862~863쪽)


많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볼 때,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기점으로 카르파티아에서 볼가 강까지 퍼져 있던 13세기 왕국 키예프 루스는 제국의 핵심적 정체성에 러시아만큼이나 필수적인 구성요소였다. 그러나 그 지역의 물적 자원이 더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고려사항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전체 면적의 2.7%밖에 안 되지만 주민의 18%의 고향이며 국민총생산에서는 거의 17%를 생산해 러시아에 다음가는 2위였다. 해체 직전의 소련에서, 석탄 매장량의 60%와 강철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티타늄 매장량의 절반 이상이 우크라이나에 있었다. 유별나게 비옥한 그 토양은 가치로 계산해 소련 농업생산량의 40% 이상을 책임졌다.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에서 우크라이나가 갖는 중요성은 지도부에도 반영됐다. 흐루시초프와 브레주네프는 러시아인이지만 동부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체르넨코는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우크라이나 '쿨라크'의 아들이었고, 안드로포프는 우크라이나에서 국가보안위 의장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결과 최고권력자에 올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소련 지도부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주민들이 특별한 배려를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공화국으로 배낸 역사의 대부분 동안 내부 식민지로 취급됐다. 천연자원은 착취됐고 주민은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1930년대에는 거의 종족 학살에 가까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의 산물은, 특히 식량과 철금속은 과도한 보조금이 지급된 가격으로 연방은 다른 지역으로 선적되었다. 

지역의 폴란드 주민들은 폴란드에서 강제로 쫓겨난 우크라이나인과 맞바꿔 서쪽으로 내쫓겼다. 이러한 주민 교환으로, 그리고 지역 유대인 사회 대부분이 전시에 절멸된 까닭에, 소련의 기준으로 보면 이 지역은 매우 동질적이었다. 1990년 러시아 공화국에 100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존재했고 그 중 31개의 소수민족이 자치지역에 거주했던 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주민의 84%가 우크라이나인이었다. 나머지는 대체로 러시아인(11%)이었고 소수의 몰도바인, 폴란드인, 마자르인, 불가리아인, 그리고 유대인 등이 있었다. 유일하게 의미 있는 소수민족인 러시아인이 동쪽의 공업지대와 수도 키예프에 집중됐다는 사실이 아마도 더 핵심적인 문제일 것이다. (1057~1058쪽)


우크라이나 북쪽에 있는 벨라루스는 우크라이나와 유사한 민족적 정체성이나 전통을 갖지 못했다. 아주 짧은 기간 존속했던 1918년의 '벨라루스 공화국'은 외부의 승인을 전혀 받지 못했고 많은 시민들은 러시아나 폴란드, 리투아니아에 더 강한 충성심을 느꼈다.

대규모 농업보다는 목축에 더 적합한 습지였던 벨라루스는 전쟁으로 황폐해졌다. 벨라루스는 화학과 아마포,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발트해로 연결되는 주요 가스관과 통신선이 지나는 전략적 위치로 전후 소련 경제에 기여했다. 1990년 7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가 '주권국'임을 선언했을 때, 키예프에서도 그랬듯이 민스크에서도 지역의 노멘클라투라는 모스크바의 사태를 지켜보며 신중히 움직였다.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사이에 끼어 있는 몰도바는 매우 흥미로운 또 다른 경우였다. 문제의 영토는 차르 체제에서는 '베사라비아'로 더 잘 알려진 지역으로 20세기 동안 전쟁의 운명에 따라 러시아와 루마니아 사이를 오갔다. 450만명의 주민은 주로 몰도바인이었지만,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소수 민족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으며 적지 않은 수의 불가리아인과 유대인, 집시, 가가우지아(흑해 근처에 거주하며 투르크어를 말하는 정교도)도 있었다. 따라서 민족 정체성은 매우 불확실했다. (1060~1061쪽)


(옛 유고연방 내전에 대해) 서방 언론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가들이 공공연하게 취한 견해에 따르면 발칸은 희망이 없는 곳으로 불가사의한 싸움과 먼 옛날의 원한이 뒤섞인 가마솥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여섯 개의 공화국과 다섯 개의 민족, 네 개의 언어, 세 개의 종교, 두 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돼 있는데 단일 정당이 이 전부를 결합시켰다. 1989년 후에 일어난 일은 단순했다. 솥뚜껑이 제거되자 가마솥이 폭발했다. 미국 국무장관 로렌스 이글버거는 1992년 9월 이렇게 말했다. "보스니아인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이 서로 죽이는 일을 그치기로 결심할 때까지 외부 세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몇몇 역사가와 외국의 관찰자들은 정반대로 설명한다. 이들은 오히려 발칸의 비극이 대체로 외부 국가들의 과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과거의 유고슬라비아 영토는 200년 동안 외부의 개입과 제국적 야심 때문에 타자의 이익을 위해 정복되고 분할되고 이용되었다. 터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이 그 나라들이었다. 외세의 무책임한 간섭이 지역의 어려움을 더욱 악화시켰다. 예를 들어 독일 외무장관 한스 디트리히 겐셔가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조급하게' 승인하지 않았더라면 보스니아는 결코 선례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며 베오그라드는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고 10년 간의 재앙도 피할 수 있었을 거라는 논리였다.

두 가지 해석은 외견상 양립할 수 없음에도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두 해석 모두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의 역할은 축소시키거나 무시한다는 점이다.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운명의 희생자 아니면 타자의 조작과 실수에 희생된 자들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는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었으며, 이 점에서 다른 공산 국가들의 해체와 유사했다. 비극의 압도적인 책임은 독일이나 다른 외국 정부가 아니라 베오그라드의 정치인들에게 있었다.

1980년 티토가 여든일곱 살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1945년에 티토가 새로 짜 맞추었던 육슬라비아는 객관적인 실체였다. 연방 국가의 지휘부는 세르비아 내의 두 자치지역(보이보디나와 코소보)과 여섯 개의 공화국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각 지역들은 저마다 매우 다른 과거를 지녔다. 북부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주로 가톨릭 지역이며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보스니아도 그보다 기간은 짧지만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인 적이 있었다. 남부의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는 수백년 동안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주로 그리스정교도였던 세르비아인 외에 다수의 이슬람교도가 존재했다. (1085~1087쪽)


이러한 역사적 차이는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줄어들고 있었다. 경제 변화는 그때까지 서로 부딪치 일 없어 농촌 사람들이 부크바르나 모스타르 같은 도시들에서 만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지만 사회적, 인종적 경계를 넘어 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기도 했다. 공산주의의 신화는 전시의 기억과 분열에 눈을 감고 귀를 막으라고 요구했다. 티토 시절의 역사 교과서는 과거에 벌어졌던 유혈 내란에 관해 신중한 태도로 침묵했다. 이런 공인된 침묵은 실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1981년, 사라예보에서 주민의 20%는 스스로 '유고슬라비아인'이라고 생각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체가 서로 중첩되는 소수민족들로 짜인 융단이었다. 1991년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인은 58만명으로 그 공화국 인구의 12%를 차지했다. 같은 해 보스니아는 이슬람교도가 44%, 세르비아인이 31%, 크로아티아인이 17%를 차지했다. 자그마한 몬테네그로에도 몬테네그로인과 세르비아인, 이슬람교도, 알바니아인, 크로아티아인이 뒤섞여 살았다. 

유고슬라비아 내의 '민족' 단층선은 제대로 정의된 적이 없었다. 마케도니아인은 마케도니아어(약간 변형된 형태의 불가리아어)로 말한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가 쓰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의 '세르비아' 형태와 '크로아티아' 형태 사이의 차이는 작았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세르비아는 키릴 문자를 쓰고 크로아티아어와 보스니아어는 라틴 문자를 쓴다. 그러나 두 '언어'는 동일하다. 

가톨릭 크로아티아인들과 정교도 세르비아인들 사이의 구분은 과거 우스타셰 정권이 가톨릭을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에 맞서는 무기로 이용했던 2차 대전 때 훨씬 더 중요했다. 겉으로는 이슬람교도인 다수의 보스니아인들은 철저하게 세속화되었고 어쨌거나 이슬람교도 알바니아인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모든 알바니아인들이 다 이슬람교도인 것도 아니었다. (1088~1090쪽)


세르비아인들이 알바니아인들을 싫어한 반면, 유고슬라비아 북부에서는 무기력한 남부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증가했는데 이는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 문제는 민족이 아니라 경제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그랬듯이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부유한 북부는 점차 가난한 남부에 분노했다.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 코소보는 각각 전체 인구에서 약 8%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1990년에 작은 슬로비아가 유고슬라비아 전체 수출의 29%를 생산했던 반면 마케도니아는 겨우 4%, 코소보는 1%를 생산했다. 슬로베니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르비아의 두 배였으며 보스니아의 세 배, 코소보의 여덟 배였다. 슬로베니아의 문맹률은 1988년 1%도 되지 않았지만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에서는 11%였고 코소보에서는 18%였다. 

이러한 수치들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이미 유럽공동체의 덜 부유한 나라들과 같은 반열에 올랐음을 시사한다. 반면 코소보와 마케도니아, 농촌 지역의 세르비아는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의 일부와 매우 유사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공동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점차 반항적으로 변했다. (1092~1093쪽)


1990년 4월에 치러진 슬로베니아 선거에서 대다수 유권자가 아직도 유고슬라비아 안에 머무는 데 찬성하기는 했지만 기존의 연방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비공산당 계열의 반대파 후보들도 지지를 얻었다. 다음달 이웃 크로아티아에서는 새로운 민족주의 정당이 압도적 다수를 확보했고, 그 지도자인 프란요 투지만이 공화국 대통령 직을 넘겨받았다.

12월 사소했지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지도부는 밀로셰비치의 명령을 받아 연방 직원들과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체불 임금과 상여금을 지급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인출권 전체의 50%를 아무런 권한도 없이 압류했다. 인구는 전체 주민의 8%밖에 되지 않았지만 연방 예산의 4분의 1을 담당했던 슬로베니아는 격노했다. 다음달 슬로베니아 의회는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한달 내에 크로아티아 의회도 똑같이 행동했다. (1097~1098쪽)


차라리 유고슬라비아 '전쟁들'이라고 해야 옳다. 다섯 차례의 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베니아 공격은 몇 주 만에 끝났다. 연방군은 철수했고 이탈하려는 국가가 떠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후 크로아티아와 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세르비아계 소수민족 사이에 훨씬 더 잔혹한 전쟁이 이어졌다.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정확히 말하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군대가 반란군을 지원한 이 전쟁은 이듬해 국제연합의 중재로 휴전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휴전은 불안정했다. 1992년 3월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인과 이슬람교도가 독립을 가결한 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은 새로운 국가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보스니아로부터 스릅스카(세르비아) 공화국을 도려내는 자업에 들어갔다. 이 때도 역시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다수의 보스니아 도시, 특히 수도인 사라예보를 공격하여 지원했다.

1993년 1월에는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인과 이슬람교도 사이에 별도의 내전이 발발했다. 일부 크로아티아인이 자신들이 지배했던 헤르체고비나 지역에 작은 나라를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이 나라는 곧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분쟁들이 종료된 후 코소보에서 전쟁이 터졌다. 다른 곳에서 사실상 전부 패배한 밀로셰비치는 코소보로 되돌아와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쓸어내고 추방하려 했다. 이러한 계획은 1999년 봄 나토군이 세르비아에 전례 없는 공격을 감행하고 나서야 저지될 수 있었다. (1099쪽)


비극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갈 만큼 많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국제연합은 초기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부트로스 갈리는 보스니아 사태를 '부자의 전쟁'이라고 칭했다. 프랑스는 세르비아에 사태의 흐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데 분명히 주저했고, 조금이라도 관여하지 않으려는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보스니아 주둔 국제연합 보호군 사령관인 프랑스의 베르나르 장비에 장군은 스레브레니차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에 대한 공습을 개인적으로 금지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모든 네덜란드 병사들이 안전하게 빠져나올 때까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거점에 대한 나토의 모든 공격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런던은 결국 개입을 촉구하는 미국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 결정적인 사건들이 전개되던 최초의 몇 년을 유럽공동체나 나토의 직접적인 개입을 조용히 방해하면서 보냈다. 1992년 11월 보스니아인들의 유입이 절정에 달했을 때 런던은 어떤 보스니아인도 비자 없이는 영국을 여행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사라예보에는 비자를 발행할 대사관이 없었다. 

미국이 발칸의 사건들에 집중하는 데는 긴 시간을 소요했지만 일단 관여한 뒤로는 확실히 일을 주도해나갔다. 그러나 미국도 머뭇거리기는 매한가지였다. 대다수 미국 정치인들은 이 전쟁해서 '이용할 개'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토군을 배치한다는 생각은, 혹은 미국이 지금까지 싸워본 적이 없는 주권국가의 내정에 개입한다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1114~1116쪽)


크로아티아 무장세력은 민간인에 대한 무수한 폭력에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된 주된 책임은 세르비아인들과 그들이 선출한 밀로셰비치에게 돌려야 한다. 다른 공화국들은 밀로셰비치의 권력 장악 욕구 때문에 연방에서 이탈했다. 

베오그라드의 행위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재앙이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의 크라이나 지역에서 땅을 잃었으며 독립국 보스니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세르비아인이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최대의 패배자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불가리아나 루마니아가 생활수준과 미래 전망에서 세르비아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세르비아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 때문에 세르비아의 책임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와 치른 전쟁에서 드러난 섬뜩할 정도로 잔혹한 행위와 병적인 가학증은 세르비아 남성들, 특히 젊은이들의 것이었다. 

보스니아에 세르비아가 선전활동에 이용할만한 과거사가 있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기억을 일깨우고 조작하고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사람(밀로셰비치)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 전쟁들은 민족적 자연발화로 발발하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밀려 넘어졌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됐던 것이다. (1117~1118쪽)


저자는 유럽의 '전후'를 이 지역의 역사에서 '하나의 시대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이전 시대의 잔영이었던 시기'로 본다. 이런 관점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또한 '전후가 끝난 뒤의 시기'가 좀 더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관점으로 봤을 때 중요한 것은 시대구분이 아니라, 그 '잔영 같은 시기' 동안 묻어두었던 '과거'를 유럽이 다시 들춰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히틀러가 한 짓도, 스탈린이 한 짓도, 대체로 다 묻어두고 각자 갈길을 가보리라 했는데 이제 그 길이 합쳐졌으니 이쪽저쪽 피해와 가해가 얽힌 역사를 더이상 '묻지도 듣지도 않고' 뭉뚱그려 넘어갈 수는 없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럽의 모습은, 안팎의 외부자들(무슬림 이주민들)을 공동의 적으로 돌리며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못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 


돌이켜 보건대 전후 몇 십 년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한때는 이데올로기적 양극화가 고착된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이해되었지만 이제는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 시기는 1914년에 시작된 유럽 내전의 연장된 에필로그였으며, 히틀러의 패배와 그의 전쟁이 미결로 남긴 사업이 최종적으로 해결되기까지 40년간 지속된 휴지기였다. 

1945년에서 1989년까지의 세계가 사라지자 그 세계의 환상은 더 또렷이 드러났다. 전후 '경제기적'은 적지 않은 성과였지만, 당대인들이 한때 과도하게 기대한 것처럼 끝없이 성장하는 번영으로 완전히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회복은 냉전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냉전 덕분에 가능했다. 소련 제국의 그림자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위협처럼 유럽을 줄어들게 했지만 남은 유럽에게는 통합의 혜택을 부여했다. 

전후 서유럽은 고치 안의 곤충처럼 행복했지만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소련 제국이 붕괴된 뒤) 동쪽에 있는 장래의 '유럽 시민들'의 좌절된 기대에 부응하라는 요구를 받아 갑자기 취약해진 듯했으며, 대서양 건너편의 강대국과도 더는 자명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유럽 공동의 미래를 구상하면서 서유럽인들은 또다시 대륙 동쪽에 광대한 변경이 있음을 인정해야 했고, 그래서 부득이 유럽 공동의 과거로 끌려들어갔다. (1220~1221쪽)


기억은 본래 논쟁적이고 당파적이다. 한 사람의 인정은 다른 사람의 탈락을 뜻한다. 기억은 과거로 안내하는 길잡이로서 충분하지 않다. 전후 초기의 유럽은 의도적으로 잘못된 기억에 의존하여 건설되었다. 유럽이 하나의 생활양식임을 잊었던 것이다. 1989년 이후에는 그 대신 보상적 기억 과잉을 기반으로 건설되었다. 말하자면 제도화된 공적 기억이 집단적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다. 첫 번째 유럽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으며, 두 번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억은 스스로 확인하고 강화하지만, 역사는 그런 기억과는 달리 세계를 각성시키는 데 이바지한다. 역사가 제시해야 하는 것의 대부분은 불편하고, 심지어는 파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는 진정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고쳐 가르쳐야 한다. 

과거들이 유럽의 집단적 자의식 속에 차지한 자리는 유럽통합이 거둔 업적의 하나였으며 그 통합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단 없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분명 사라질 업적이다. 

다가올 미래에 우리가 아우슈비츠의 화장장으로부터 일종의 유럽을 건설해내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기억할 수 있으려면, 오직 역사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 끔찍했던 과거의 자취와 상징으로 결합된 새로운 유럽은 놀라운 업적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유럽은 그 과거에 영원히 저당 잡혔다. 유럽인들이 이 생명선을 유지하려면, 과거가 현재에 계속해서 조언하고 도덕적 목적을 제시할 수 있으려면, 세대가 바뀔 때마다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이다. '유럽연합'은 역사에 대한 응답일 수는 있지만, 절대로 역사를 대신할 수는 없다. (1348~1351쪽)


남북이 합쳐지면, 아니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화해 정도만 하게 된다 해도 우리 역시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 묻지도 듣지도 않았던 서로의 과거와 서로 사이의 과거에 대한 일들일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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