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화교가 없는 나라

딸기21 2018. 12. 9. 17:10
728x90

내게 '화교'는 '주현미와 하희라'다. 중학교 때였나, 주현미라는 트로트 가수가 대박 히트를 쳤는데 그가 화교라고 해서 다들 신기해했다. 말 그대로 신기한 일이었다. 외국인을 볼 일이 별로 없는, 이주민이나 경계인이나 주변인을 본 적이 없는 당시의 한국 중학생에게 주현미는 화교의 대표였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교학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국인은 아니지만, '외국인=서양인=미국인'으로 인식되던 때에 '우리 안의 외국인' 혹은 '한국인같은 외국인'은 그리 눈길을 끄는 대상은 아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중국어 수업을 들었다. 진짜 외국인, 독일인 유학생이 어설픈 동작으로 한자를 칠판에 쓸 때마다 우리는 키득거렸다. 강사 선생님이 어느 날 강의실 창밖을 보면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는지 알은체를 했다. 돌아서서 강의로 돌아오더니 창밖으로 지나간 사람이 당시 중문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주현미 동생"이라고 했다. 이렇ㄱ 다시 '화교=주현미'의 공식을 확인했다.


두번째는 하희라. 다 아는대로 탤런트 하희라는 화교였다. 더군다나 하희라는 여고생 때부터 또래 소녀들에겐 유명했던 연예인이었다. 대학교 때 월간 <말>지에 하희라의 인터뷰가 실렸다. 아마도 총선을 앞둔 때였던 것같다. 왜 그 잡지가 하희라의 인터뷰를 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누구를 찍을 것이냐'는 물음에 하희라가 "투표권이 없는데 누구를 찍겠다고 결정할 수 있느냐"며 약간 신랄한 어조로 반문했던 내용은 기억에 남아 있다. 아, 여기서 태어나 자랐어도 화교에겐 투표권이 없구나. 그 때 알았던 것 같다.


하희라는 한국인과 결혼해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한국은 대만 대신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을 헌신짝처럼 버렸다...면서 화교들이 오성홍기가 새롭게 내걸린 과거의 주한 대만대사관 앞에서 울던 모습이 언론을 장식했다. 


10여년 전에 역사학자들의 글을 모은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라는 책을 읽은 게 화교라는 존재에 대해 티끌만큼이나마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분단 이후 한국이 초강경 반공국가가 되면서 한국 화교들 또한 '자유중국'을 모국으로 삼은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그런데 한국이 중국과 손잡고 대만을 버렸을 때 그들이 느꼈던 충격에 대해 처음 알았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가 경제권을 갖지 못한 나라'라는, 그 정도로 배타적이고 화교를 많이 못살게 굴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저 책을 읽으면서 살짝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올해 꼭 기록해 두고 싶은 책, 두 번째. 이정희의 <화교가 없는 나라>(동아시아).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한국 학자가 화교의 역사를 묶어냈다. 올해 두꺼운 책을 읽겠다고 애를 쓰다 보니 권수로 따지면 독서량이 많지 않았다. 그 중에 의미 있는 것이 적지 않았지만, 근래 읽은 채 가운데에는 이 얇은 책이 내겐 단연코 1등이다. 


매년 음력 5월 23일 서울 마포구 연희동 안산 자락길에 자리잡은 오무장공사에서는 엄숙한 제사가 거행된다. 이들이 제사를 지내는 대상은 오장경이다. 그는 이홍장의 부장으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절강제독과 광동수사제독에 임명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3000명 병사를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조선의 구식군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체포하여 중국 톈진으로 압송하고, 명성황후를 다시 권좌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고종은 임오군란 진압에 도움을 준 오장경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25쪽)

오무장공사는 1979년 을지로7가 3번지에서 현재의 한성화교중학 뒷산으로 이전됐다. 한국에서 오무장공사를 '국치의 유적'이라 하여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한국정부가 당시 대만대사관과 협의를 거친 끝에 이전비용을 제공하는 대신, 대만대사관이 화교중학 뒷산으로 옮기는 것에 동의했다. 

한국화교에게 오장경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가 데리고 온 군역상인은 오장경의 비호하에 서울에서 활발한 상업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오장경이 임오군란을 진압한 덕분에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1882년 10월 양국간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다. 이 장정은 중국인의 조선 이주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개항장에서 거주 및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이후 중국인의 조선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조선화교 사회가 형성된다. 한국화교가 매년 오무장공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26-27쪽)


1883년의 화교인구는 166명이었고 1893년에는 2182명으로 급증한다. 1907년에는 7739명에 달했다. 1910년에는 1만1818명으로 처음으로 1만명을 넘었다. 1920년대 들어 조선화교 인구는 노동자와 농민의 급속한 유입으로 급증했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화교의 절반이 귀국하지만 다시 가족단위로 되돌아오는 화교가 늘어나 1944년에는 7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해방 당시 한국화교는 약 1만2000명, 북한화교는 약 6만명이었다. 북한 지역에 화농과 화공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정정불안과 중국 대륙의 국공내전으로 한국에 이주하는 중국인이 1만여명에 달했다. 한국화교는 1949년 2만명을 넘은 반면 북한화교는 본국 귀국과 한국 이주로 4만여명으로 감소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3만명의 화교가 중국으로 귀국했다. 한국화교는 고향인 산동성과 하북성이 공산화돼 귀국할 수 없었고 새로운 '조국'인 대만으로 이주한 화교는 소수에 불과했다. 한국화교 인구는 자연증가의 변화만 있었다. 1976년 3만2436명으로 최고를 기록했고 그 이후는 미국 이민법 개정과 화교경제의 침체 그리고 한국정부 및 사회의 차별 등으로 미국, 대만 등지로 재이주하는 화교가 증가해 한국화교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한국화교(구화교)의 현재 인구는 2만 명도 되지 못한다. (34-35쪽)


책은 화교에 초점을 맞추고 한반도 화교의 역사, 중화요리와 양복점 이발소 주단포목상점 솥공장 등등 화교 경제 얘기를 술술 풀어놓는다. 화교의 경제활동은 내겐 구한말부터 일제 점령기까지의 흔치 않은 인류학적 스케치처럼 읽혔다. 일제 시기에 화교가 농사를 짓는 '종이 온실'이 있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일제강점기 중화요리점은 세 종류가 있었다. 먼저 종업원이 20~40명 되는 '고급 중화요리점'이 있었는데 서울의 아서원, 사해루, 금곡원, 대관원, 열빈루, 인천의 중화루, 동흥루, 공화춘, 평양의 동승루, 동화원, 홍승루, 대구의 군방각, 부산의 봉래각 등이 여기에 속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비밀리에 열린 곳은 아서원이고, 나석주가 서울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기 위해 화교로 가장하고 식사를 한 곳은 공화춘이었다. 1940년 소파 방정환의 전집 출판기념회가 개최된 곳은 열빈루였다. 화교 중화요리점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음은 '중화요리음식점'이다. 종업원은 대체로 2~10명으로 주요 메뉴는 우동, 잡채, 양장피, 만두 종류였다. 호떡집은 주인 혼자 혹은 가족 2~3명이서 같이 장사한다. 호떡 하면 밀가루피에 설탕을 넣어 구운 것을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식 떡(빵)의 종류는 꽈배기, 계란빵, 참깨빵, 국화빵, 공갈빵 등 매우 다양했다. 

화교가 경영하는 중화요리점은 중국 특유의 합과(합자)조직으로 창업했다. 자금을 제공하는 자본가인 '동가'와 노동력과 기술을 제공하는 '서가'로 나뉘어, 경영은 서가의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동가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다. 동가와 서가가 미리 정한 지분대로 이익금을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42-44쪽)


화교 중화요리점의 독점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63년 전국의 중화요리점은 2178개인데 이 가운데 95%가 화교에 의해 경영되고 있었다. 한국정부의 중화요리점에 대한 각종 규제가 1960년대 들어 강화됐다. 1968년 외국인토지법의 개정으로 화교의 영업용 점포의 토지는 50평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함으로써 고급 중화요리점의 개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여기에다 중화요리점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세금이 부과되고, 같은 장소에서 장기간 영업할 경우 영업연한에 비례하여 세금이 가산되었다. 세무공무원은 화교의 취약한 법적 지위를 악용하여 돈을 요구하는 일까지 빈발했다.

화교 중화요리점에서 기술을 습득한 한국인이 중화요리점을 개업하고, 부동산 소유제한에 발목 잡힌 화교는 점포를 확대할 수도 없었다. 화교 중화요리점의 업주가 식당을 접고 해외로 재이주한 것은 바로 이러한 비정성시의 사정이 있었다. (48-49쪽)


이어, 그 유명했다는 아서원의 몰락 스토리가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기업의 이름과 함께.


롯데호텔의 부지 가운데 을지로 1가 181~4번지와 181-5번지의 부지는 1974년 4월 이전까지 아서원이 자리한 곳이었다. 아서원은 서광빈이 합자로 1907년에 설립한 고급 중화요리점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아서원의 고객에는 조선총독부이 고위 관리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미군 고급장교와 김구, 이승만, 그리고 대만의 석학인 임어당, 손문의 아들이자 행정원장을 지낸 손과도 있었다.

1969년 2월 서광빈의 무남독녀가 롯데재벌에 아서원을 6000만원에 매각하면서 5년에 걸친 소송사건이 벌어졌다. 아서원은 서광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중국 전통의 합자회사였다. 아서원 주주측은 편의상 그의 개인 이름으로 위탁등기 해둔 것에 불과하다며 이를 입증할 각종 서류를 제출했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주주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서원 주주 측과 한국화교 사회는 대법원의 판결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들은 롯데라는 막강한 경제력을 등에 업은 재벌과의 싸움에서 돈 때문에 패소했으며, 화교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불공정한 판결과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아서원 주주 측의 패소는 한국에서 화교가 살아갈 희망을 빼앗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의 3대 중화요리점이었던 태화관과 대관원도 아서원에 뒤이어 문을 닫았다. (50-52쪽)


일전에 본 쑨리 주연의 중국드라마 '꽃 피던 그해 달빛(那年花开月正圆)'에는 청나라 최고의 여성 사업가를 모델로 삼은 '주영'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실제 역사와 어느 정도나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 속 주영은 배운 것 없지만 수완 좋은 과부다. 남편 집에서 하던 장사를 이어받아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세우는데, 주식을 발행해 투자를 받고 당시 청나라를 드나들던 외국 상인들과 계약을 하고 당시엔 낯설기만 했을 '은행'과 '금융'에 눈 뜨는 식으로 묘사된다. 열강에 이리저리 치이고 뜯기던 청나라의 여성 상인을 영웅처럼 묘사해놓은 것을 보니 쇠락을 덮으려는 약간의 국뽕처럼 보이긴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상인들의 활동을 보니 화상들은 역시나 화상이었고, 청나라는 물론이고 심지어 조선도 세계무역에서 동떨어진 외딴 섬만은 아니었다. 화교 포목점이 줄줄이 문을 열어 한반도 내 상권을 장악하고 비단과 면직물을 팔았다는데, 역설적이지만 우리 머릿속에서 '정체된 것'으로 자리잡고 있는 조선에서도 물류는 흐르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대목들을 읽고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재미가 쏠쏠했다.


화교 주단포목상점 역사는 중국인의 조선 이주 초기인 1883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서울과 인천에 광동성과 산동성에서 진출한 화교 주단포목상점이 잇따라 개업했다. 이들은 상해에서 영국산 면직물, 중국산 비단과 삼베를 대량 수입해 판매했다. 조선 진출이 빨랐던 일본인 상점을 맹렬히 추격해 점차 시장을 빼앗아갔다. 화교 주단포목상점은 조선 전체의 상점 가운데 약 20퍼센트, 조선 전체 판매액의 30퍼센트를 차지했다. 

대형 상점인 유풍덕은 서울에 본점, 인천 부산 군산 등지에 지점을 두었다. 서울 본점의 점원은 30~40명이나 되었으며... 일본 오사카, 상해, 연태 등지에서 주단포목을 수입하여 인천, 부산, 군산의 지점을 통해 판매했다. 일본산 면직물은 조선 내에서 판매했을 뿐 아니라 중국으로 재수출하기도 했다. 

이런 대형 주단포목상점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합과 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재동, 즉 자본주는 대부분 본국에 있고 조선에 거주하는 자는 적었다. 거래 및 업무 일체는 지배인이라고 칭해지는 장궤에게 경영 전권이 맡겨졌다. (70-71쪽)


'짱개'라는 비칭은 이 '장궤'에서, '짱꼴라'는 일본어 장코로(淸國奴)에서 나왔다는 설명이 뒤따라 붙는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에서 쌀농사는 주로 안휘성 회하 이남에서 지었기 때문에 북쪽에선 밀이나 수수 같은 곡식과 채소를 많이 키웠다고 한다. 특히 산동성은 파, 부추, 시금치, 마늘, 고추, 연근, 미나리, 토란 등의 생산액이 중국 전체 성 가운데 1위이며 지금도 1만의 채소품종 자원을 보유한 세계 3대 채소생산 기지의 하나라고. 이미 일제 때부터 여러 종류의 채소를 섞어 키우는 경쟁력 높은 화교 농민, 즉 화농들이 오늘날의 북한 땅에 들어와 농사를 많이 지었다고. 화농에 대한 한 구절이 재미있어서 옮겨 놓는다.


화농은 채소밭 일각에 작은 수원을 만들어 언제든지 관개를 할 수 있도록 설비를 갖추었고, 비닐이 없던 때에 종이로 하우스를 만들어 겨울인데도 채소를 재배할 수 있었다. (108쪽)


중일전쟁 시기 화농인구가 증가한 원인은 조선총독부 정책과 관련이 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은 병참기지로서 대량의 채소를 군에 공급할 수 있는 적합한 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조선은 1930년대에도 수요 채소의 상당액을 일본에서 수입했다. 1937년 노구교 사건 직후 화농이 본국으로 대량 귀국하자 대도시를 중심으로 채소가격 급등을 초래해 주민 생활을 곤란하게 했다. 총독부는 채소자급자족의 달성을 긴급 정책과제로 정했다가, 화농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해방 후에도 화농의 채소재배는 이어졌다. 화농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과 일본인 지주에게 차지료를 지불하고 채소를 재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미군정청은 1948년 화농의 경작권만 인정하고 소유권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 1961년 외국인토지법 시행을 전후해 농지 소유를 제한받았다. 화농은 새 농지를 취득할 때 한국인의 명의를 빌려 등기한 경우가 많았는데 나중에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한 사례도 많았다. 이런 제약이 화농을 위축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 채소재배의 현대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1970년대 들어 화농 '왕서방'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한중 수교 이후 중국 산동성에서 재배된 채소가 한국에 대량으로 수입되고 있다. (110-111쪽)


저자는 오래 전부터 살았던 화교를 구화교, 1990년대 이후 들어온 이들을 신화교라 부른다. 구화교는 분단 때문에 북한화교와 한국화교로 나뉜다. 신화교 중에는 한족과 조선족이 있는데, 다른 나라의 화교와는 달리 한국의 화교는 조선족 비중이 크다. 이유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대림차이나타운 얘기는 좀 놀라웠다. 조선족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대림2동의 경우 재한 조선족이 2015년 현재 주민등록 인구의 90.6%라고. 대림1동은 34.2%, 대림3동은 26.1%. 대림동의 두 초등학교는 재한조선족 학생 비율이 3~4할. '세계에서 한족이 아닌 중국의 소수민족이 중심이 된 유일의, 최대 규모의 차이나타운'이라니. 조만간 한번 가봐야겠다.


인천과 서울 대림동, 한국의 대표적인 차이나타운 두 곳에서부터 출발하는 책 후반부에서는 한국과 북한과 중국이 얽히며 동아시아 현대사로 확장돼 나간다. 한반도가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면서 화교도 남북으로 나뉘고, 양쪽 모두에서 배척당하며 소멸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화교, 스파이부대로 동원된 화교, 중국-대만의 정부가 바뀔 때마다 휘둘리는 화교학교의 교과서 등등. 친일과 항일,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던 화교의 처지와 함께 한국 사회에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화교가 다시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우리가 '우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주자의 역사다. 


마지막으로, 화교 배척사건에 관한 한 구절.


1927년 이리(익산)에서 시작된 화교 배척사건이 일어났고, 1931년 비공식적으로 200명 넘게 숨진 화교 공격이 다시 일어났다. 그 과정이 참...


이러한 참사는 1931년에 재발했는데 사건의 규모는 1927년 사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조선일보'가 1931년 7월 2일 오후 중국 길림성 장춘 만보산 근처에서 조선인 농민이 중국 관헌과 충돌해 다수 살상되었다는 호외 신문을 발행했다. 이른바 만보산사건이다. 김이삼 조선일보 장춘특파원이 직접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전해들은 정보로 쓴 오보였다. 이 호외 기사가 발행된 직후 인천, 서울에서 화교습격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화교습격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최대 피해지는 평양이었다. (198-199쪽)


예나 지금이나 그 신문의 오보와 선동이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 만보산사건은 중국 당국의 재만 조선인 탄압과 일제의 조선인과 중국인 이간책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서술돼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길림성 장춘 만보산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이 사건으로 촉발된 1931년 화교배척사건에 있다. 조선화교 200여명이 살해되고 화교경제가 초토화된 이 중요한 사건을 남북한의 근대사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 (221쪽)


그리 두껍지 않지만 근대사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고 생각할 것들을 던져준 재미난 책이었다. 이 저자의 <한반도 화교사>가 동아시아에서 출간된 것같은데 좀 비싸고 두꺼워보이니 내년을 기약. 우리 가족이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가는 이태원 양꼬치집, 늘 덤으로 음식을 하나씩 더 주시는 흑룡강성 출신 조선족 신화교 아주머니와 청년에게 올 연말엔 꼭 초콜릿을 선물해줘야지.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