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올해 꼭 적어두고 싶은 책, 히가시 다이사쿠 <적과의 대화>

딸기21 2018. 12. 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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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들 중에, 대중적으로 화제가 되지는 않았더라도 정말이지 너무 재미있어서 꼭 기록해두고 싶은 것이 두 권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히가시 다이사쿠라는 저널리스트 출신 일본 학자가 정리한 <적과의 대화>(서각수 옮김. 원더박스)라는 책이다.


부제는 '1997년 하노이, 미국과 베트남의 3박 4일.' 책 표지는 팜플렛처럼 단순하다. 초록색 바탕에 테이블이 그려져 있고, 한글 제목과 영어 원제(MISSED OPPORTUNITIES?)가 적혀 있다. 저자인 히가시 다이사쿠는 한자 이름이 東大作이다. 이름이 '대작'이라니. 책은 '대작'이 아닌 얇은 분량의 기록 겸 취재기이지만 어느 대작 못지 않게 흥미롭고 여러 문제들을 던진다.




저자는 NHK에서 일하며 시사다큐 프로그램들을 만들다가 캐나다로 유학해 국제정치학을 공부했고 유엔 평화유지 전문가로 아프가니스탄과 동티모르 등에서 근무했다. 특히 2009~2010년에는 유엔 아프가니스탄지원단(UNAMA)에서 유엔 정무관으로 일했다고 한다. 지금은 일본 조치대학 교수라고. 옮긴이는 오래 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새로 쓴 일본사>의 공저자라고 해서 괜히 더 반가웠다.


1995년 4월, 베트남전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회고록-베트남의 비극과 교훈>이라는 책을 냈다. 맥나마라는 이 책에서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과오'였음을 인정했다. 이 사실 자체로 미국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그 전쟁이 잘못된 전쟁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당시의 전쟁 책임자가 문서로 '선언'하다시피 했으니 아마도 반발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솔직하다면 솔직하게 맥나마라는 그 전쟁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인정했고, 미국의 세계패권 전략과는 마치 아무 관련이 없었다는 듯이 '순진하게' "그 전쟁을 왜 막을 수 없었을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미국과 베트남이 과거의 일은 과거로 돌리자며 다시 국교를 수립한 직후였다.


"그 무렵 베트남에서는 이미 정부 고관이 맥나마라의 회고록 영어판을 입수해서 돌려 읽고 있었다. 모두들 맥나마라의 적극적인 반성의 변에 놀랐다고 한다. 회고록 베트남어판은 베트남 국내에서 그후 2년간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게 된다. 이 책은 맥나마라의 정식 사죄로 받아들여졌다." (33쪽)


책 한 권이 계기가 되었고, 몇몇 학자들이 가세하면서 맥나마라 측이 베트남에 '대화'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맥나마라처럼 베트남전쟁에서 직접적으로 큰 역할을 했던 '당시의 인물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 허심탄회하게 그 전쟁의 본질을 얘기하고, 그 전쟁을 왜 막지 못했는지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1901년 프랑스가 건설한 이 호텔은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후 '통넛호텔(통일호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된 후에도 외국 특파원과 외교관이 하노이에 체재할 때는 대부분이 통넛호텔에 투숙했다. 1972년 5월에서 12월에 걸쳐 미국은 평화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격렬한 공습을 되풀이했다. 특히 12월 18일부터 12일간에 걸친 이른바 '크리스마스 폭격'으로 하노이 시가지의 일각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존 바에즈가 세계에 반전을 호소하기 위해 하노이에 체재한 것도 이 시기였다.

방공호 안에서 바에즈는 기타를 들고 '위 쉘 오버컴'을 부르고 또 불렀다. 이때 바에즈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당시 일본전파뉴스 특파원이던 하시다 신스케였는데, 그는 황급히 녹음기를 틀어 그녀의 노래를 수록했다. 하시다는 2004년 이라크 전쟁 취재를 위해 이라크에 갔다가 사망했다.

통넛호텔은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자본이 들어와 이름도 '메트로폴 호텔'로 바꾸었다. 이 호텔을 무대로 미국 측 지도자와 베트남 측 지도자가 역사적인 대화를 가진 것이다. (52-53쪽)


격렬한 전쟁을 치러 숱한 생명을 대가로 지불했던 당사국들, 그 당사자들의 대화가 쉽고 매끈하게 이뤄질 리는 없다. 그럼에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대화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졌다. 책은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이 대화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기록을 뒤쫓고, 당시의 대화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되묻는 내용으로 돼 있다. 전쟁, 대화, 그 후의 취재 내용이 섞여 있는데 어느 한 단락도 흥미롭지 않은 게 없다. 


참가자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대화에 임했을까? 미국측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하노이 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과거 국무부 외교관으로 비밀 평화협상의 담당자이기도 했던 체스터 쿠퍼에게 그때의 심경을 물어보았다.

"나는 1968년까지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비밀 평화협상의 성립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매일같이 워싱턴의 반전 데모에 참가했고, 나와의 관계도 매우 긴장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이해해줬기 때문에 가족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필사적인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쟁을 끝나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69년 공화당으로 정권이 바뀌고 나는 국무부를 떠났습니다. 그 때 베트남 전쟁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낸 후 나는 전쟁에 관련된 모든 자료, 노트, 그리고 사진을 처분하고 잊어버리자고 결심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내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좌절이었습니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잊히지가 않는 겁니다. 무수한 의문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어요. 왜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는가? 그때 하노이 정부는 우리의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했고, 왜 협상을 거절했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66-67쪽)


존슨 대통령은 1966년 1월 말에 북폭 재개에 나선다. 이후 북폭과 지상군 투입은 확대일로를 달리게 되지만 전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맥나마라는 국방장관으로서 군사작전 재개를 결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비밀협상을 통한 사태 타결을 도모하는 복잡한 입장에 처했다. 결국 군사작전도 비밀 평화협상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 왜 평화협상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는가? 맥나마라에게는 그것은 과장이 아니라 실로 평생의 물음이었다. (147쪽)


그 개인에겐 '좌절'이었는지 몰라도, 폭격을 받은 이들에게는 심리적 상처로 끝나지 않은 엄청난 참사이고 재난이었다. 하지만 이런 '비대칭적인' 피해를 인정한다 해도 미국 측 참가자들의 솔직한 심경 토로는 눈길을 끈다.


"하노이 땅을 밟은 것은 갖은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게 대해줘서 우리들은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거리에 40대 후반에서 50대 전반의 남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30년 전에 우리와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던 겁니다."

참가자들은 전쟁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고, 그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가슴에 끌어안고 적과의 대화의 날을 맞이한 것이다. (67쪽)


대화의 계기를 만든 맥나마라는 베트남 쪽 인사들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 잘못됐다고 하면서도, 미국의 의도를 베트남이 오판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목표가 하노이 정부 자체의 파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들 케네디 정권에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당시 우리들의 정세 판단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소위 '도미노 이론'의 공포"였다고 인정한다. 북베트남을 싸그리 깔아뭉개 없앨 계획은 아니었지만 연쇄 공산화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까닭에 오판을 했고, 공산주의 세력은 "강고하게 단결된 일사불란한 조직체"라고 오해를 했고, 중국과 소련의 균열 따위는 이해하지 못했고,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 역시 버마나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전체의 통일적 운동의 일환으로 봤다는 것(72~73쪽)이다.


미국은 그토록 당시 상황을 잘 몰랐고 그저 폭격을 퍼부었다고 말하고는 뒤에 와서 베트남 사람들 앞에 "당신들도 우리를 오해했다"고 하니 베트남 쪽에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겠다. 


[응우옌꼬탁(당시 북베트남 외무차관)] 미국의 정세 판단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에서 최대의 문제는 미국이야말로 세계의 경찰관이라고 자처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측에서 보자면 미국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왜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을까요? 미국뿐 아니라 당시 초강대국들은 베트남을 둘로 분할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응오딘지엠을 사이공 정부의 대통령으로 앉히고 어떤 폭정을 펼쳐서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사더라도 정권을 유지하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인민들의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은 응오딘지엠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드디어 군사개입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리하여 미국과 북베트남은 전면 대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줄거리입니다. 그다지 커다란 수수께끼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76쪽)


[쩐꽝꼬(당시 북베트남 외무부 대미정책국 국장)] 맥나마라씨는 케네디 정권 시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 원인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트루먼부터 닉슨까지 다섯 명의 역대 미국 대통령의 오해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케네디 정권은 그때까지 이어져 내려온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계승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오해한 4가지는 1)베트남의 통일만이 우리 베트남인들의 최종목표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2)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목표가 국가의 해방과 독립이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3) 베트남과 다른 국가들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도미노 이론은 완전한 잘못이다. 4) 베트남과 소련 및 중국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상호의존 관계였지, 결코 중국이나 소련에게 지시·명령을 받는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77-78쪽)


베트남 측의 '반격'은 제3세계 탈식민국가의 지도자들, 미국과 맞짱 떠 승리한 역전의 영웅들이 가진 시각을 보여준다. 베트남인들은 "맥나마라씨가 말하는 판단미스나 계산착오는 미국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베트남에게는 싸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더불어, 맥나마라가 아쉬워한 '잃어버린 기회들' 역시 미국의 잘못으로 잃게 된 것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평화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폭격을 퍼붓는 것은 미국인들의 발상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었고, 베트남 쪽에서는 미국이 폭격을 멈추기 전에는 대화 의지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고. 


베트남 사람들이 보기에 "폭탄이 떨어지는 이상 전쟁 자체는 틀림없이 진짜인데 미국이 제안하는 평화안은 가짜가 많았"고(152쪽), 북폭 위협 속에서 평화협상에 응할 수는 없었다. 미국은 캐나다 영국 이집트 가나 알제리 등등의 여러 인물들을 동원해 협상을 얘기했지만 하노이에서 보기엔 선전술일 뿐이었다. 맥나마라는 이런 날선 비판에 대해 "미국의 협상 노력은 결코 선전 따위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만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155쪽)라고 말한다. 


다시 문제는 반복된다. 미국은 오만함 때문에 폭격을 하면서 평화협상을 시도한 것이고, 싸우는 상대의 상황과 인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베트남 측은 맥나마라의 '솔직한 고백'을 베트남식 솔직함으로 맞받아친다. 


[응우옌칵후인(당시 북베트남 외무부 대미정책국)]우리는 평화를 바랐고 북폭이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북폭은 우리를 분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분노, 너무 커다란 분노 때문에 북폭을 받으면서 협상을 한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이 굴욕을 갚기 위해서는 남베트남의 지상전에서 미국군을 박살내는 것밖에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제로 그 후 우리는 승리했고, 당신들은 베트남에서 철수했습니다. (158쪽)


[쩐꽝꼬] 베트남이 잃은 것은 미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왜, 왜, 우리가 그렇게도 격렬한 폭격을 받으면서도 협상 제안에 응하지 않았는지 당신은 압니까? 독립과 자유만큼 고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인은 노예의 평화는 받아들이지 않아요. (185쪽)


100만 명이 죽는데 베트남 지도부는 아무렇지도 않았느냐는 맥나마라의 반문에는 저자조차 어이없다는 느낌을 감추지 않는다. 연간 100만명의 이르는 베트남인들을 죽인 미군의 최고사령관 입에서 나올 소리냐는 것이다. 이런 대화 자리라도 가질 수 있었던, 당당히 하고픈 말을 할 수 있었던 베트남인들이 살짝 부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잃어버린 기회들'로 거론되는 내용은 잘 몰랐던 것들이라 적어놓는다. 1945~46년 호찌민이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 아쉽게도 트루먼을 비롯해 미국 지도부는 호찌민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두번째는 1954년 제네바회의. 인도차이나의 전쟁을 끝낼 회의였고 2년 뒤 자유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으나 미국은 응오딘지엠이라는 허수아비를 남베트남에 앉히는 것으로 대응했다. 세번째는 1961-62년의 라오스회의. 베트남은 '중립화'라는 합의를 통해 미국의 '도미노 공포'를 잠재울 수 있다고 봤다. 맥나마라도 1997년의 대화에서 이를 잃어버린 기회의 하나로 꼽는다. 네번째는 1969년, 전쟁이 격화된 시기에 미국이 패전 가능성이 짙어졌음에도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더 끌었던 것. (81-82쪽)


2003년 저자는 취재 내용을 NHK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방송했고 KBS에서도 그 프로그램을 들여다가 방송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저자의 말로는 "일본의 디렉터가 만든 프로그램을 한국의 방송국이 그대로 방송한 초유의 사례"였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했다고 한다.


저자는 프로그램에 소개한 내용을 책으로도 펴냈는데 그것이 다시 시간이 흘러서 한국어판으로 나오게 됐다. 일본에서 책이 처음 나온 때와, 한국에서 출간된 때 사이에 짧지 않은 시차가 있다. 저자가 책을 쓸 때에는 미국이 대테러전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 한국에선, 그리고 세계에선, 대테러전은 이미 한풀 꺾인 '지난 시기의 일'로 여겨진다. 조지 W 부시의 시대가 지나가고 버락 오바마 정권의 8년 집권기마저 끝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저자는 아프간 전쟁이라는 상황을 책에서 여러번 언급하면서 베트남전 당사자들의 '적과의 대화'가 전쟁 예방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특정한 어떤 전쟁에 주는 시사점이 아니더라도, 책의 내용 자체가 재미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보응우옌잡 장군의 코멘트가 실려 있다. 장군은 하노이 대화장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대화 참가자들이 모두 함께 그를 찾아갔다. 북베트남군 최고사령관이자 부총리, 디엔비엔푸의 영웅, 베트남전 승리의 주역인 장군은 맥나마라와 악수를 나눴다. 저자는 뒤에 장군을 찾아가 따로 인터뷰를 했다. 전후 30년이 흘러 하노이 대화를 바라보는 장군은, 일본에서 찾아온 저널리스트에게 '미국과 화해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했고, 베트남이 그런 미국을 물리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였나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승리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했던 많은 미국인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패한 것은 펜타곤을 비롯해 전쟁을 수행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국인과 베트남인이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8쪽)


늙은 군인은 전쟁의 교훈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적을 이해하라는 것, 상대가 적일지라도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 그 두 가지 모두에서 실패함으로써 20세기 중반 베트남은 피로 물들었다. 


탈식민의 역사를 보는 미국(서구)과 베트남(탈식민국가)의 시각 차이, 당시 인도차이나 상황에 대한 각자의 오판, 어찌 보면 지엽적이고 돌발적인 '우연한 사건'들이 겹쳐져 전선의 현장 지휘관들의 행동을 결정짓고 그것이 전쟁이라는 큰 사건마저 좌우하게 되는 상황, 그 모든 과정을 뒤늦게나마 되짚어보기로 마음 먹은 양국 전쟁 관련자들의 결단, 대화에서 오간 전쟁에 대한 기억과 이견들, 견해차를 그대로 둔 채 대화를 끝내야 했던 이유 같은 것들이 쭉 이어지면서 결국 책은 '열린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나로서는 잘 알지 못했던 베트남전쟁에 대해 조금이나마 주워들을 수 있었던 게 수확이었고, 이런 대화의 기록을 뒤늦게나마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게 몹시 좋았다.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가, '잃어버린 기회'를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붙잡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어찌 보면 가망없어 보이는 바람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런 희망을 가지고 진지하게 접근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약간은 낙관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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