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가 시리아 북동부를 공습해 쿠르드 민병대(YPG)를 폭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 지역에 있던 미군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터키의 공격을 묵인해준 것이다. 시리아에서 극단주의 조직 이슬람국가(IS)가 세력을 잃자, IS를 몰아내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쿠르드족은 토사구팽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터키의 공격 ‘묵인’한 미국
미국 백악관은 6일(현지시간) “터키가 시리아 북부에서 군사작전을 할 계획이지만 미국은 관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YPG가 주축이 된 ‘시리아민주군(SDF)’은 “미국이 우리 등에 칼을 꽂았다”며 반발했다. 쿠르드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키겠다며 라스알아인, 코바니 등 여러 곳에 거대한 텐트를 치고 ‘인간방패’를 만들었다.
터키는 자국 내 쿠르드족을 수십년간 박해했다. 터키군에 숨진 쿠르드 분리주의 진영 ‘전투원’은 4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터키군은 지금도 국경을 넘으면서까지 이라크에 피신한 쿠르드 전투원들을 공습하곤 한다. 이 때문에 시리아의 쿠르드족은 “터키 군이 들어오면 여기서도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며 두려워하고 있다고 알자지라방송은 전했다. 내전 와중에 터키로 피신한 시리아 쿠르드 난민이 10만명에 이르는데, 터키군이 군사공격을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터키로 가는 난민은 더 늘어날 수 있다.
미국에서도 섣불리 시리아에서 발을 빼려 했다가는 다시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CNN방송 등은 “미군이 철군하면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과 러시아를 돕는 짓이 될 것”이라는 전문가 분석을 전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트럼프 대통령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IS 전투원이 풀려나고 폭력이 재발하면 책임져야 한다’고 경고했다”는 해명을 내놨다. 미국 관리들은 “그 지역의 미군 50여명을 재배치한 것이지 ‘철군’이 아니다”라고 했다.
미국과 터키는 올 8월 쿠르드 지역과 인접한 지역에 ‘안전지대’를 만드는 방안에 합의했다. 무력으로 쿠르드 민병대의 군사활동과 이동을 막기로 한 것이다. 터키는 YPG를 분리주의 정치조직 쿠르드노동자당(PKK) 연계세력으로 본다. 미국은 그동안 터키가 YPG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아왔으나, IS의 위협이 거의 사라지자 손을 떼려 하고 있다. 폴리티코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에르도안과 통화하면서 안전지대 구상을 강조했으나 에르도안이 강하게 반발하며 공습을 주장했고, 결국 트럼프는 미군을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미 당국자는 폴리티코에 “국방부, 국무부와 논의해 이동시키기로 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트럼프가 쿠르드를 희생양으로 내줬다는 비난이 나온다.
커져가는 자치지역
2014년 IS가 ‘칼리프국가 수립’을 선언하고 잔학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하자 이라크에서는 북부 쿠르드자치정부의 정규군 페슈메르가가 앞장서 싸웠다. 시리아에서도 쿠르드족이 YPG 같은 민병대를 만들어 IS와의 전쟁을 주도했다. 전황은 복잡했다. 아사드의 정부군은 IS 소탕보다는 반정부군 진영을 공격하기 급급했고, 러시아와 이란은 아사드 독재정부 지키기에 주력했다. 미국 등 서방국들과 아랍국들도 지상군 투입을 거부하며 내전과 거리를 둘 적에 2만~3만명 규모의 YPG는 IS와 싸우면서 병력 1만2000명을 잃었다. 2017년 IS의 ‘수도’였던 라카를 탈환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도 이들이었다.
‘세계 최대 소수민족’, ‘술탄 살라딘의 후예’로 불리는 쿠르드는 이란 북부에서부터 이라크 북부, 터키 남동부, 시리아 북서부에 흩어져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 추산에 따르면 터키에 1800만명, 이란에 800만명, 이라크에 500만명이 산다. 시리아의 쿠르드족은 200만명이다. 독일 120만명, 프랑스 15만명 등 세계 각지로 이주한 이들도 많다.
‘비운의 민족’ 쿠르드의 위상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시리아 내전을 거치며 크게 달라졌다. 미국이 1991년 걸프전 뒤 사담 후세인을 압박하자, 이라크 쿠르드족은 미국과 유엔의 보호 속에서 북부에 자치정부를 꾸렸다. 이라크전 뒤 공식 인정받은 쿠르드 자치정부는 석유수입을 챙기면서 바그다드의 중앙정부보다 효율적으로 지역을 운영하고 투자를 유치했다. 터키나 시리아에서 쫓겨난 동족들을 보호하고 난민을 받았다.
쿠르드의 ‘수완’은 아랍인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다. 바그다드 정부가 IS에 대응 못해 쩔쩔매는 사이에 쿠르드 자치정부는 거대한 유전이 있는 키르쿠크까지 슬그머니 자치지역에 포함시켰다. 이 문제로 2017년 자치정부와 중앙정부 사이에 군사적 충돌까지 벌어졌고, 중앙정부가 키르쿠크를 다시 떼어갔다.
아랍과 다른 ‘쿠르드 정부’
시리아에서도 이라크를 본떠 사실상의 쿠르드 정부가 세워졌다. 2011년 내전이 시작되자 북동부의 쿠르드족이 결집했고 이듬해 아프린, 자지라, 라카, 데이르에조르 등지를 포괄하는 자치지역을 형성했다. 통칭 ‘로자바’라 불리는 이 자치지역은 면적이 5만㎢에 이른다. 쿠르드족 여성지도자 일함 에흐메드와 아랍계 지역 정치인 만수르 셀룸이 자치정부의 공동수반을 맡고 있고, ‘시리아민주협의회’라는 나름의 의회도 갖췄다.
곳곳에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쿠르드는 꾸준히 자치지역을 늘리고 병력을 키웠다. 종교적 극단주의에 맞서 세속주의를 지켜왔고, 아랍과 달리 여성차별도 줄였다. 이라크 페슈메르가의 여군들은 IS와 싸우며 명성을 얻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쿠르드족을 학살했던 할라브자라는 지역에서, 지금은 시장과 시의회 의장과 대학총장을 모두 여성이 맡고 있다.
쿠르드 정부는 민주주의를 진전시켰고 앗시리아계와 투르크멘계 등 영토 내 소수민족의 다양성도 인정한다. 일각에선 “자치정부도 권위적이고 ‘쿠르드화’를 추진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로자바 자치정부가 미래 시리아의 연방국가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게다가 로자바에는 시리아의 주요 유전과 농업지대가 집중돼 있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자치정부들이 손을 잡으면 온화한 기후와 유프라테스 강의 수자원과 거대한 유전들을 쿠르드족이 통제하게 된다.
터키는 시리아 IS 소탕작전을 돕는다면서도 쿠르드족 견제에 몰두했다. 이라크에 이어 시리아에서까지 쿠르드 정부가 현실화되자 불안해진 에르도안 정부가 무리수를 두려 하고 있으나, 쿠르드의 반격 또한 만만찮을 게 분명하다. 세계 여론도 터키 편은 아니다. 이라크 쿠르드매체 러다우는 “시리아민주군은 ‘무슨 대가를 치르든’ 로자바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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