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우리가 몰랐던 ‘쿠르드족’

딸기21 2019. 10. 1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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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가 시리아 북부를 침공했다. 쿠르드의 군사력을 무력화하는 게 목적이다. ‘미국에 배신당한’ ‘국가 없는 비운의 민족’ 쿠르드가 세계의 이슈로 떠올랐다. 쿠르드는 어떤 민족일까. 이란, 이라크, 터키, 시리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천만 명의 쿠르드인들은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돼 왔을까.

 

터키군의 침공을 피해 시리아 북부에서 도망쳐온 쿠르드족 주민들이 16일 이라크 북부 두호크의 브라다스르슈 난민촌에 도착하고 있다. 두호크 EPA연합뉴스


존재조차 부정된 터키의 쿠르드
 

8000만명에 이르는 터키인의 18%, 즉 인구 5명 중 1명은 쿠르드족이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터키 쿠르드족의 역사는 학살과 탄압으로 얼룩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분열되면서 아랍과 함께 쿠르드 사이에서도 민족주의가 불타올랐다. 터키가 북쪽의 강국 러시아와 대립하던 때에 터키 내 쿠르드족은 ‘친러시아 세력’으로 의심받았고, 아르메니아인들과 함께 학살을 당했다.
 

이후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쿠르드족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독립국가 수립을 돕겠다고 했던 미국 등 서방은 쿠르드를 배신했다. 2년 뒤 터키공화국이 출범했다. 1930년대 독립을 향해 싸웠던 쿠르드의 ‘아라라트 봉기’는 무참히 진압됐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터키 군부는 쿠르드어를 말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금지시켰다. 심지어 ‘쿠르드’라는 말 자체도 쓸 수 없었다.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것이다. 1990년대까지도 각국의 터키 대사관들은 주재국 미디어에 쿠르드 이슈가 나오면 항의를 했고, 쿠르드족이라는 소수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 명절 ‘노루즈’를 기념하는 이란의 쿠르드족들. 사진 위키피디아


1993~94년엔 쿠르드족과 앗시리아계 주민 3200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터키 군부와 연계된 살해단의 소행으로 추정되지만 진상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에 저항해온 무장정치조직 헤즈볼라가 터키 정부 편에 서서 쿠르드족을 공격하고 주요 인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쿠르드와 아랍은 어떻게 다를까
 

아랍인과 유대인은 ‘셈어’ 계열의 언어를 쓴다. 이와 달리 쿠르드는 이란에서 갈라져나왔고, 언어도 인도-유럽어족으로 분류되는 이란계 언어다. 종교로 봤을 때에도 쿠르드는 아랍보다 다양성이 강하다. 수니파 무슬림이 대부분이지만 시아파 계열 소수종파인 알레비파가 적지 않다. 이 밖에 야르산, 야지디, 조로아스터,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를 믿는 이들이 섞여 있다.
 

쿠르드의 존재는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민족집단으로서 정체성이 굳어진 것은 12~13세기 무렵으로 보인다.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칼리프 살라후앗딘(살라딘)이 쿠르드족으로 알려져 있다. 살라딘이 문을 연 아유브 왕조 시절엔 쿠르드가 칼리프 제국의 궁정에서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파비 왕조의 압바스 칼리프 시절인 16세기부터는 반란세력이자 아랍의 진압대상으로 바뀌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이슬람 칼리프 살라딘


쿠르드는 ‘좌파’라는데
 

터키에서 쿠르드 분리주의가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1980년 군부 쿠데타 와중에 걸출한 쿠르드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이 쿠르드노동자당(PKK)을 만들고 무장투쟁에 나서면서였다. 망명과 체포, 석방의 곡절을 겪어온 오잘란의 사상은 ‘오잘라니즘’으로 불리며 쿠르드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자유주의적 분권주의’를 주창해온 오잘란은 미국 사회주의 이론가 머리 부크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결성한 PKK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물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현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의 주축이었던 쿠르드애국동맹(PUK)도 좌파 성향이 강했다. 내전 과정에서 2012년 세워진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 자치정부 역시 ‘코뮌’ 성격의 공동체를 중시하며, 이 때문에 ‘반시장적인’ 좌파 성향이라고 공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여성차별에 반대하며 이슬람주의와 선을 긋는 것도 좌파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다. 시리아 쿠르드 자치정부의 수반은 여성이고, 이라크 쿠르드군 페슈메르가에는 여군 부대가 있다. 

터키 쿠르드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은 쿠르드 분리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99년 케냐에서 체포돼 터키로 넘겨져 수감됐다가 2006년 터키 정부와 쿠르드노동자당(PKK)의 ‘평화협정’ 타결로 석방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1920년대 중동 지역에서 ‘범투르크주의’와 ‘범아랍주의’가 나란히 커질 적에, 둘 중 어느 쪽에도 끼지 않는 쿠르드족 상당수는 가까이 있는 소련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1946년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 있었던 이란의 쿠르드족은 ‘마하바드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친소련 정권을 세우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차별 적은 이란
 

근대 이전 시기에 오늘날의 이란 땅에는 쿠르드 왕조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가 하면 17세기에는 사파비 왕조와 쿠르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와 이란의 쿠르드족 처지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정치적 차별이 없지 않지만 언어·문화적으로 파르시를 쓰는 주류 이란인들과 거리감이 그나마 적고, 터키나 이라크에서처럼 극심한 탄압을 받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3000만~4000만명의 쿠르드족 다수는 아랍 주류와 같은 수니파이지만, 이란의 쿠르드족은 이란인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시아파다. 
 

1970년대까지 이란을 지배한 팔레비 왕조는 쿠르드족도 가리지 않고 중용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에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족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들이 사담 후세인 정권과 적대관계였던 까닭이다. 1997년 이란 대선은 세계의 관심거리였다. ‘개혁파의 기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당선된 그 해 선거에는 쿠르드족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하타미는 연임에 성공한 뒤 내각에 쿠르드 출신 장관 2명을 입각시켰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화학무기 공격으로 학살당한 쿠르드족들이 묻혀 있는 이라크 북부 할라브자의 묘지. 사진 GETTY IMAGES


모하마드 레자 라히미 전 부통령과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전 테헤란 시장 같은 쿠르드 출신 유명 정치인들도 있었다. 쿠르디스탄자유생명당(PJAK)이라는 무장투쟁 조직이 존재하고 분리주의자들의 봉기가 벌어진 적도 있으나 이란 쿠르드족의 대부분은 분리독립에 별반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형당한 ‘케미컬 알리’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을 탄압했다. 이란과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에는 ‘이란과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쿠르드족을 대량학살했다. 사담의 사촌이자 심복이었던 알리 하산 알 마지드는 쿠르드족 말살작전을 주도, 화학무기와 폭격을 가해 18만명 이상의 쿠르드족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88년의 ‘할라브자 학살’이다. 알리는 사린, VX 등 독가스를 써서 ‘케미컬 알리’라는 악명이 붙었다.
 

미국의 주도 아래 유엔은 1990년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해 정부의 대공능력을 무력화했다. 이 때부터 쿠르드는 사실상 자치를 누렸고, 2003년 이라크전쟁 뒤 새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쿠르드 자치지역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미국 조지 W 부시 정권은 이라크 침공 때 1990년대 사담 정권의 쿠르드족 학살을 거론하며 ‘인도주의적 군사개입’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알리는 이라크가 미군에 점령당한 뒤 몇 달 못 가 체포됐고 2010년 할라브자 학살 죄로 처형당했다.

 

왜 독일로 많이 갔을까
 

미 중앙정보국(CIA) 추산에 따르면 터키에 1800만명, 이란에 800만명, 이라크에 500만명의 쿠르드족이 있다. 시리아의 쿠르드족은 200만명이다. 유럽으로 간 이들도 적지 않다. 독일에 100만~150만명이 살고 있고 프랑스에도 15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1월 독일의 쿠르드계 이주민들이 쾰른 시내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터키의 시리아 쿠르드족을 공격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쾰른 DPA연합뉴스


독일에 쿠르드족이 많은 것은 노동이주가 흔했기 때문이다. 터키 노동자들이 1960년대부터 독일에 ‘초청노동자’로 많이 옮겨가서 정착했는데 그들 중 다수가 쿠르드계였던 것이다.

 

독일에 사는 시리아·이라크 출신 쿠르드들은 ‘시리아인, 이라크인’이라는 정체성을 갖지만 터키에서 온 쿠르드인들은 터키인으로 불리길 거부하고 ‘쿠르드 아이덴티티’를 고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자자(Zaza)’라는 방언을 쓰는 터키 출신 쿠르드족은 독일에서 ‘자자 쿠르드’로 불리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이 벌어지고 쿠르드가 이슬람국가(IS)와 터키를 동시에 상대하는 상황이 되자 2014~2015년 독일의 쿠르드족이 시리아 쿠르드 진영을 지지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쿠르드는 이스라엘과 친하다?
 

이스라엘은 1960년대부터 이라크 쿠르드족을 도왔다.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쿠르드를 학살할 때 이스라엘과 세계의 유대인 커뮤니티들은 쿠르드족을 돕자는 국제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라크에 자치정부가 들어선 뒤 이스라엘과 쿠르드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2004년 미국 잡지 뉴요커는 “이스라엘 군·정보요원들이 이란, 시리아, 이라크의 쿠르드 지역에서 전투원 훈련과 작전을 지원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스라엘은 부인했다.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는 2005년 마수드 바르자니 대통령 시절에 이스라엘과 관계를 더욱 밀착시켰다. 독립국가가 아니므로 ‘수교’라 할 수는 없지만 바르자니의 이런 행보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아랍국들의 눈총을 받기에 충분했다. 당시 바르자니는 “이스라엘과 만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라크 쿠르드 군대인 페슈메르가는 IS와의 싸움에서 시리아 쿠르드민병대(YPG)와 함께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한참 전인 2006년 영국 BBC방송은 “이스라엘이 페슈메르가의 훈련을 지원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쿠르드지역과 이스라엘 양측에 쿠르드계 유대인, 유대계 쿠르드인이 존재한다. 이라크 쿠르드의 유력 가문인 바르자니 집안이 유대계 쿠르드족이다. 이스라엘엔 쿠르드계 유대인 15만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쿠르드는 월드컵에 나갈 수 있을까
 

독립국가가 없으므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월드컵에 출전 못하는 작은 나라나 소수민족들의 ‘대안 월드컵’인 ‘비바 월드컵’에 2008년부터 출전하고 있다. 유럽의 작은 왕국 모나코, 이탈리아의 ‘파다니아’, 남프랑스의 ‘오시타니아’, 북키프로스 축구팀이 쿠르드의 경쟁상대들이다. 

 

이란은 레슬링으로 유명한데 쿠르드족 선수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런던 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터키의 태권도 선수 누르 타타르도 쿠르드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