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북부 응헨의 빈촌에 살던 26살 팜티짜미라는 여성은 마을을 찾아온 이주 브로커를 따라 영국으로 향했다. 브로커는 “안전한 루트”라고 거듭 강조했다. 비행기나 자동차를 이용해 움직일 거라고 했다. 하지만 1만km의 여정 끝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말 그대로 싸늘한 죽음이었다.
지난 23일 팜은 런던 교외 그레이스에서 로리(대형 화물차량)의 냉동고에 갇힌 시신으로 발견됐다. 숨지기 전 그는 어머니에게 “숨을 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20살 응우옌딘르엉의 운명도 같았다. 일자리를 찾아 하틴 주의 고향을 떠난 응우옌은 팜과 함께 주검으로 발견됐다.
가격 따라 다른 루트
39명의 목숨을 앗아간 ‘냉동고 참사’의 희생자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인으로 추정된다. 영국 수사당국은 트럭 운전사 등 관련자들을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초장거리 불법이주와 인신매매 범죄조직들이 이슈로 부상했다. 데일리메일은 몇 달에 걸쳐 이동해야 하는 이런 불법 이주를 ‘희생자들의 컨베이어벨트’에 비유했다. 짐짝처럼 컨테이너에 실려 이동하는 이들 이주자들의 종착지는 유럽 대도시의 네일샵·마사지샵이나 식당, 혹은 성매매다. 그러나 은밀한 저임금 노동자로 팔려가기도 전에 이번 사건처럼 떼죽음을 맞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거 베트남인들이 밀입국을 많이 했던 곳은 주로 대만이었으나 근래 유럽으로 향하는 이들이 늘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베트남 북부 하이퐁과 쾅닌 지역 출신들의 불법 이주가 과거부터 많았는데 최근 응헤안, 쾅빈, 하틴 등 여러 곳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호치민시에서 활동하는 인신매매 근절 운동가 미미 부는 BBC방송에 “이 지역들에는 이주자들이 보내주는 돈에 의존하는 집들이 많다”고 말했다.
인신매매 브로커 조직들을 통해 유럽으로 가는 베트남인은 연간 약 1만8000명으로 추정된다. 영국의 베트남 교민은 약 3만명으로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잘 형성돼 있어 불법으로 들어온 이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쉽기 때문에 영국행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예근절 캠페인단체들에 따르면 밀입국에도 ‘프리미엄 루트’와 ‘이코노미 루트’가 있다. 프리미엄 루트는 베트남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비행기로 이동한다. 유럽연합(EU) 내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솅겐 비자를 받은 뒤 ‘안가’에 머물다가 영국으로 향하는데, 비용이 4만~5만달러나 든다. 한밤중 행군 등 험난한 루트를 거쳐야 하는 저렴한 육로 코스는 대개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을 지난다. 중국을 거쳐가는 사람들도 있다.
기간이 몇 달씩 걸리는 육로를 택해도 인신매매조직에 1인당 1만~1만5000달러를 내야 한다. 이런 돈을 내기 위해 고향 땅을 팔거나 일가친척에게 빚을 지기도 한다. 유엔의 한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인을 유럽에 들여보내면서 범죄조직들이 거두는 수익은 한 해에 3억달러 규모에 이른다. 미미 부는 “이동루트가 얼마짜리든, 영국에 들어가려면 마지막에는 대개 컨테이너나 페리에 숨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칼레의 정글, 도버의 트럭
스리랑카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같은 남아시아 출신들은 대체로 중부 유럽을 통과해 프랑스 칼레에서 배를 타고 영국의 도버로 들어간다. 칼레에는 일명 ‘정글’로 불리는 이주자촌이 있다. 프랑스 정부가 주기적으로 강제해산해도 되살아나곤 한다. 베트남인들 중에도 이 경로를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 지난 2월 칼레에서 싸구려 보트로 베트남인들을 영국에 실어나른 영국인이 징역 27년형을 선고받았다.
중국인들은 불가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 등을 거쳐 네덜란드나 벨기에로 갔다가 영국으로 향하는 루트를 많이 밟는다. 그러나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거쳐 유럽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2000년 7월 푸젠성에서 출발한 이주자 58명이 도버의 트럭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들은 벨기에 브뤼헤 항구에서 토마토 선박에 실렸고, 네덜란드 운전사가 모는 트럭을 타고 도버까지 갔다. 기사는 1인당 300파운드를 받고 이들을 태운 뒤, 밖으로 소음이 나갈까봐 컨테이너 환기장치를 꺼버렸다. 밀입국자들은 질식으로 숨졌고 기사는 살인죄로 14년형을 선고받았다.
2004년 2월에도 푸젠성을 출발해 영국으로 향한 중국인 최소 21명이 랭카셔 항구에 몰래 배를 대려다 파도에 휩쓸려 사망했다. 2017년에는 중국과 말레이시아 여성들을 데려가 영국 성매매 업소에 넘기려던 일당들이 감옥에 갔다. 개트윅 공항 부근 싸구려 숙소에 여성들을 대기시켰다가 체포된 주범은 당시 45세의 중국 남성이었다. 불법 성매매 알선 사이트들은 ‘시간당 100파운드 수입’ 같은 문구를 버젓이 내걸고 여성 이주자들을 모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푸젠성, 저장성 일대에선 1990년대부터 ‘사두(巳頭)’라 불리는 인신매매 범죄조직들이 기승을 부렸다. 합법적으로 비자를 받아 입국한 뒤 체류기간을 넘겨 머무는 사람들이 늘면서, 200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인 단체 밀입국은 줄어드는 추세였다. 하지만 밀입국 알선조직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근래에는 동북부 ‘중국판 러스트벨트(쇠락한 산업지대)’ 출신들의 유럽행 불법이주가 늘고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도착하면 빚더미에 노예로 전락
유로폴은 2015년 중국의 폭력조직들이 유럽의 성매매 업소, 마샤지샵, 네일샵 등에 불법 노동력을 공급하고 있다고 각국에 경고했다. 당시 유로폴이 지목한 루트는 동유럽과 발트국가들, 러시아를 거쳐 스페인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가는 경로였다. 2016년에는 포르투갈에만 1000명 넘는 중국인을 불법으로 들여보낸 악명 높은 인신매매범 ‘천샤오민’이 인터폴을 통해 수배됐다. 저장성 출신인 천샤오민은 자카르타 등 아시아에 거점을 두고, 중국계가 많이 사는 포르투갈 북부 마투시뉴를 근거지로 활동했다.
9개국 가짜 신분증에 곳곳의 부동산을 임대해놓고 차명계좌 45개를 이용했던 그는 밀입국 알선으로 500만 유로 넘는 돈을 번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2011년 체포됐는데도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갔고 2013년 풀려난 뒤 종적을 감췄다. 결국 2016년 460가지 범죄혐의로 궐석재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밀입국자들은 목적지 국가의 범죄자인 동시에, 인신매매의 피해자다. 범죄조직에 거액을 내야 하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빚더미에 앉은 노예로 전락하고, 이 때부터는 인신매매되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일반 여행객처럼 항공기로 들어오는 이주자들은 인신매매조직이 공항에서 ‘픽업’해 업소들에 넘긴다.
영국에선 21세기에도 사라지지 않은 ‘노예노동’이 몇 해 전부터 이슈가 됐다. 지난해 10월 영국 정부가 발표한 '현대의 노예 2018 연례 보고서'를 보면 노예상태의 노동자들은 점점 늘어나 2017년 5000명을 넘어섰다. 대부분이 밀입국한 이주자들이었다.
런던 외곽 베드포드의 얄스우드 이주자수용센터에는 강제노동에서 구출된 이주자들이 수용돼 있다. 구호단체 ‘난민 여성을 위한 여성재단’이 이곳의 중국인 여성 14명을 면담해보니, 가족 빚을 갚기 위해 중국서 팔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국에서 중국정보센터를 운영하는 에드먼드 예오는 가디언에 “범죄조직 우두머리들을 잡아야 참사를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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