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졌지만 이긴 시민들…홍콩의 '세 번째 싸움'이 남긴 것

딸기21 2019. 11. 2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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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이공대 앞에서 25일 무장경찰들이 시위대를 감시하고 있다.  홍콩 AP연합뉴스

 

중국 중앙정부에 맞선 ‘송환법 반대’로 시작된 홍콩 시민들의 싸움은 반년만에 당국의 무력진압으로 귀결됐다. 송환법은 보류됐고 구의원 선거는 ‘민주파’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양측 모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마천루와 쇼핑몰의 홍콩은 사라졌다. 점령과 봉쇄에 부서진 대학과 상점가, 실탄을 쏘는 경찰과 방독면을 쓴 시위대의 이미지가 홍콩을 덮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중국전문가 리처드 부시는 ‘홍콩을 위한 레퀴엠’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알던 홍콩은 더이상 없다”고 썼다.

 

분노한 청년들은 갇혔고, 빈부 격차는 그대로이고, 민주주의는 중국에 막혔다. 그래도 홍콩인들은 험난한 길을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베이징을 대변해온 홍콩 당국은 무능했고, 중국은 상처 입은 공룡이 됐다.

 

중국 대 홍콩, 세 번의 싸움

 

홍콩 시민들은 행정당국과 베이징의 중앙정부를 상대로 1997년 중국 귀속 이래 세 차례 큰 싸움을 벌였다. 첫번째는 2003년 둥젠화(董建華) 당시 홍콩 행정장관이 추진한 보안법에 맞서 50만명이 거리로 나섰던 ‘7월 행진’이었다. 결국 보안법 통과를 막아냄으로써 시민의 힘을 보여줬지만, 이 사건은 중국 정부의 경계심을 키운 계기도 됐다.

 

두번째는 2014년 우산혁명이었다. 행정장관 선거에 중국이 개입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이 불거졌으며 대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둘러싼 근본적인 대립이 드러났다. 이미 경제적으로 본토와 홍콩이 결합돼 있던 상황이라 친중국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홍콩인’들의 저항은 거셌고, 당시 시위를 이끈 청년들은 2년 뒤 입법원 선거에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뒤에 이들을 의회에서 내쫓고 피선거권까지 빼앗으며 정치적 제거작업을 했다.

 

홍콩 청년들이 25일 이공대 앞에서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주라는 글이 적힌 종이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홍콩 AP연합뉴스

 

3번째로 벌어진 이번 싸움에서는 양측이 강대강으로 맞붙어 서로에게 타격을 줬다. 시위대는 ‘이공대 봉쇄’ 이후 극심한 탄압 속에 사실상 궤멸됐지만 시민들은 구의원 선거에서 민주파에 승리를 안겨주며 중국 정부에 항의를 표출했다. 식민주의의 유산인 동시에 ‘금융자본주의의 꽃’이었던 홍콩은 이 과정에서 ‘체제 갈등의 격전장’으로 변해버렸다. 이번 싸움은 이전 두 차례 대립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더이상 일국양제가 본토와 홍콩의 공존을 보장해주는 틀이 될 수 없다는 걸 결정적으로 보여줬다.

 

중국의 억압적 통치뿐 아니라, 이번 시위는 홍콩 내의 빈부격차에 대한 청년층의 반발이 섞이면서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시위대의 요구는 거리에서 투표소로 옮겨갔다. 하지만 베이징도, 홍콩 당국도, 뚜렷한 지도부 없이 움직였던 시위대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는 못했다. 청년들은 중국에 반발했지만 홍콩의 내부 모순은 그대로 남겨뒀다.

 

지난해 국제구호기구 옥스팜의 ‘공공과 민간의 부(富)’ 보고서를 보면 홍콩의 빈부격차는 45년만에 최대였다. 상위 10% 홍콩 부자들은 매달 하위 10%가 버는 돈의 43.9배를 벌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보도에 따르면 홍콩 최상위 갑부 21명의 재산은 총 1조8300억 홍콩달러(약 274조원)다. 1~5위 부자가 2016년과 2017년 받은 배당금만 236억 홍콩달러였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자유경제를 지향하는 홍콩에서 이런 불로소득에 대한 세금은 없다.”

 

홍콩 도심 센트럴지구의 루이비통 매장 앞에서 25일 시위대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점심 집회를 하고 있다.  홍콩 EPA연합뉴스

 

문제는 ‘정치적 통로의 부재’

 

베이징 지도부와 홍콩 비즈니스 엘리트들의 결탁은 여전히 굳건하다. 지난 21일 홍콩 대기업 20곳과 경제인단체들은 구의원 선거를 사흘 앞두고 시위대에 ‘진정’을 촉구하는 광고를 여러 매체에 게재했다. 홍콩을 대표하는 토착 기업들은 대개 부동산 회사들이다. CK애싯, 핸더슨토지개발, 순훙카이, 시노랜드, 그레이트이글홀딩스, 뉴월드개발 등 대표적인 부동산 개발회사들이 광고에 이름을 올렸다. 포브스 추산 세계 28위 갑부 리카싱이 소유한 CK애싯은 홍콩에 고밀도 건물을 지어 돈을 벌지만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케이먼섬에 서류상 본사를 두고 있다.

 

억만장자의 돈이 늘어나는 것과 빈민이 늘어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옥스팜의 2017년 홍콩 빈곤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인구 734만명 중에 137만명이 빈민이다. 특히 아이들 4명 중 1명, 노인 3명 중 1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아간다. 부자들이 계좌를 늘리는 동안, 보통사람들에게 늘어난 건 임대료와 공공주택에 들어가기 위한 대기 기간뿐이다. 지난해 9월 기준으로 공공주택에 들어가려면 5년반을 기다려야 하고, 환자들이 공립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78주를 대기해야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홍콩의 소득분포도는 ‘중간이 뻥 뚫려 있다.’ 중위소득자는 적고 하층과 상층만 많은 구조라는 것이다. 집을 사려면 25~30년을 모아야 하는데, 중국이 약속한 일국양제 기간은 2047년까지다. 28년이 지나면 ‘사회주의화’되는 것이다.

 

 

모든 사건의 배경을 경제에서 찾는 것은 옳기도 하지만 그르기도 하다. 앞서 8월 폴 찬 홍콩 재무장관은 저소득층을 위해 돈을 풀겠다는 ‘당근’을 내놨다. 그러자 시민들은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후보가 내세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패러디한 “바보야, 문제는 경제가 아니야(It’s NOT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로 응답했다. 극심한 부의 편중이 사태의 배경에 있다지만, 중요한 것은 부의 집중 자체가 아닌 ‘정치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시민들 목소리를 대변하고, 정책을 만들고, 격차를 줄일 행정을 펴나갈 정치집단이 형성되는 것을 중국 정부가 기를 쓰고 막고 있는 탓이다. 정치적 통로가 없다는 데에서 나온 좌절감이 시민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동네 선거인 구의원 선거에 시민들이 열정을 보인 것은 의회가 간선제의 장벽에 막혀 있기 때문이었다. 구의원 선거 이후 내년 입법원 선거를 거치며 조금씩 제도를 고쳐나간다 해도, 홍콩의 민주주의는 ‘중국이 민주화되는 속도’에 계속 연동될 수밖에 없다.

 

‘무능한 대리인’과 중국의 고민

 

이번 사태는 홍콩의 ‘친중파 연합’, 즉 캐리 람 행정장관으로 대표되는 베이징의 대리인들이 얼마나 무능한지도 보여줬다. 정치평론가 앨리스 우는 SCMP 25일자에 실린 글에서 “사법의 독립성이 도마에 올랐는데 우리의 법무장관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실제로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테레사 청 홍콩 법무장관이 뉴스에 등장한 것은 지난 14일 영국에서 반중국 시위대에 부딪쳐 부상을 입었다는 것뿐이었다. 송환법을 고집하다가 시위에 부딪친 캐리 람 장관은 충돌이 격해지자 시위대와 “대화로 풀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달 초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한정(韓正) 상무위원을 잇달아 만난 후에는 베이징의 꼭두각시로 변해버렸다.

 

지난 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상하이엑스포에서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상하이 신화연합뉴스

 

1932년 쑨원의 부인 쑹칭링의 주도 아래 결성된 중국민권보장동맹은 상하이에서 민권선언을 발표했다. 대문호 루쉰, 철학자 차이위안페이 같은 지식인들은 이 선언에서 국민당 1당 독재와 여론 통제, 불법 체포를 비난하면서 정치범 석방과 불법체포·고문 금지, 인권침해 조사와 보고서 발간, 표현·집회·언론의 자유를 촉구했다. 홍콩과 상하이를 오가며 활동해온 소설가 미시사란은 홍콩프리프레스 기고에서 “이번 시위를 통해 질서 있는 도시 생활, 소득 증대, 법치 같은 ‘거짓말’들이 낱낱이 드러나버렸다”면서, 87년 전의 선언문이 일깨운 가치들이 지금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베이징과 홍콩 양측 모두를 향한 요구였다.

 

그러나 베이징이 쑹칭링과 루쉰이 제시한 길로 갈 것 같지는 않다. 2012년 7월 홍콩 시민 수만명은 중국이 강요한 교육 커리큘럼이 ‘홍색 세뇌교육’이라 거부하며 대규모 시위를 했다. 그러나 지난 8월 시 주석은 홍콩과 마카오에 “애국심”을 다시 요구했고, 공산당 지도부 회의에서 애국주의 교육을 늘려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미시사란의 글이 적힌 온라인매체 홍콩프리프레스는 2015년말부터는 본토에서 웹사이트 접속조차 차단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위는 다수의 사상자를 남겼다. 당국으로선 사건을 조사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지난 8월 유엔이 중국에 요구했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사한다 한들 시위대와 시민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중국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질 것이다. 시 주석이 캐리 람 체제를 계속 끌고갈 것인지 재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해외 언론들은 보고 있다. 무엇보다 큰 숙제는 ‘일국양제’라는 깨져나간 약속을 어떻게 봉합하느냐다. 각국 정부들은 중국 눈치를 보느라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세계에서 반중국 시위가 일어났다. 이 또한 중국에는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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