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워싱턴이 건네준 ‘팁’ 덕분에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테러 시도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크렘린은 29일(현지시간)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를 하면서 테러 대응을 비롯한 관심사들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크렘린은 언론보도문에서 “러시아 측이 제안해 두 정상이 통화를 했다”면서 “푸틴 대통령은 정보기관 간 채널을 통해 러시아 내의 테러를 막을 정보를 전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테러 대응에서 계속 협력하기로 합의했으며 ‘일련의 관심사들’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했다.
“테러 정보 전해줘서 감사”
푸틴 대통령이 사의를 표했다는 ‘테러 정보’는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최근 적발된 테러 음모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타스통신 등 러시아 언론들에 따르면 연방보안국(FSB)는 지난 27일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러시아인 2명을 테러 음모 혐의로 체포했다. 이들은 신년 연휴 기간에 이 지역의 ‘군중 밀집지역’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FSB는 “미국 측 파트너들로부터 이 공격에 관한 정보들을 미리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2017년 4월에 체첸 이슬람조직의 지하철 폭탄테러로 15명이 숨진 적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이었던 크림반도를 병합한 뒤 갈등을 겪고 있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 행정부는 푸틴 대통령의 측근들과 최대 기업 가스프롬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기관들을 경제제재 대상에 올렸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두 나라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 대해 끊임 없이 호감을 표시해왔다.
푸틴 대통령이 테러정보를 공유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크렘린이 보도문까지 낸 것은, 미-러 간 협력이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내년에 양국 관계가 개선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푸틴 대통령은 2017년에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이슬람국가(IS)가 폭탄테러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미국 측으로부터 입수해 사전에 막아낼 수 있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를 보낸 적 있다. 하지만 시리아 사태나 우크라이나 문제 등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올 한해 바빴던 러시아
올해 미-러 관계는 곡절이 많았다. 지난 4월말~5월 초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을 만났고, 이어 양국 정상이 일본 오사카 주요20개국(G20) 회의에서 얼굴을 맞댔다. 하지만 9월에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불거져 피오나 힐 국가안보회의 선임보좌관이 물러나면서, 백악관과 러시아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사라져버렸다.
내년 5월 러시아의 승전기념 행사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주요 정상들이 일제히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 때 러시아를 찾아 푸틴 대통령과 머리를 맞대게 된다. 하지만 현재로선 크렘린이 미국의 비위를 맞추려 할 것으로 전망하긴 힘들다.
올 한 해 푸틴 정부는 새로운 외교 파트너들을 만들면서 국제무대에서 미국에 계속 도전해왔다. 푸틴 대통령은 올해 10월 아프리카 43개국 정상을 휴양지인 소치에 불러모아 정상회의를 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베네수엘라와 군사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Tu-160 전략폭격기를 파견했고, 모잠비크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 군사자문관을 보냈다.
러시아와 중국의 교역 규모는 내년에 2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2010년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경제협력에 합의하면서 ‘10년 뒤 교역규모 2000억달러’를 제시했는데, 그 목표치가 달성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갈등에 발목을 잡힌 사이에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갈수록 깊어졌다. 지난 2일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 개통은 이를 상징한다. 러시아는 미국이 ‘스파이’로 낙인 찍은 중국 테크기업 화웨이와의 협력도 계속 강화하고 있다.
트럼프 재선 바라며 미국 지켜볼 듯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의 중동전문가 마리아나 벨렌카야는 러시아가 중동에서도 발판을 구축했음을 지적했다. 러시아가 중동에 만들어놓은 것이 ‘카드로 만든 집’이 아닌 확고한 진지임을 계속 과시하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는 시리아를 넘어 팔레스타인과 이란, 걸프 아랍국들과도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중동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러시아의 움직임은 무엇이 됐든 미국과의 갈등을 부를 수밖에 없다.
힘 빠진 유럽을 상대할 때에도 러시아가 몸을 낮출 가능성은 낮다. 러시아가 최근 발트해 지하를 지나는 ‘노드스트림2’ 가스관을 개통했으나, 우크라이나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독일에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이 가스관은 해빙의 계기가 되기보다는 미국의 반발만 불렀다. 러시아가 가스를 무기로 미국과 유럽 사이를 갈라놓은 셈이었다. 러시아가 최근 우크라이나와의 갈등을 풀기 위한 제스처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경제적 필요에 따라 유럽에 ‘실용적으로’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푸틴 대통령은 내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하길 바란다는 뜻을 사실상 공개적으로 피력해왔다. 지난 19일 푸틴 대통령은 미 하원의 트럼프 탄핵에 대해 “완전히 지어낸 억지로 탄핵을 할 수는 없다”면서 트럼프 편을 들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내년 미국 대선을 주시하며 상황을 지켜보려 할 것이고, 미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나설 것 같지는 않다고 모스크바타임스는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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