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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누스바움, '세계시민주의 전통'

딸기21 2021. 5. 20.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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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도덕적으로 위험한 시대에,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출생이나 국적 같은 우연이 공동의 책임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상의 고귀한 전통에 대해 숙고해보면 다시 용기가 날지 모르겠다. 내가 이 책에서 탐구하는 철학적 전통은 이런 생각을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라고 부른다." 

 

마사 누스바움의 <세계시민주의 전통- 고귀하지만 결함 있는 이상>(강동혁 옮김. 뿌리와이파리)을 읽었다. 누스바움의 책은 처음 읽는 것이고, 사실 어떤 학자인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극적이진 않지만 찬찬히 설명해주는 좋은 책.

키케로, 그로티우스, 애덤 스미스의 글들을 중심으로 세계시민주의의 바탕을 훑고, 지금, 현대의 세계시민주의의 한계와 지향점을 짚는다. 구체적인 사례가 아니라 이론을 바탕으로 틀을 잡아가는 것이어서 오히려 더 재미있었음.

 

 

 

세계시민주의란 세계 공동의 시민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사는 곳이 어디든 우리 모두는 전 세계라는 단위에 속한 시민인 코스모폴리테스이기도 하며, 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민권이다. 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스토아주의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국제 인권운동에 이르기까지 이 철학적 전통을 추적한다. 이 전통은 고귀한 것으로서,우리에게 이기주의와 파벌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와 한층 높은 차원의 애착과 원칙의 세계에 참여하라고 요청한다. (13쪽)

 

정치적 자유도 공짜는 아니다. 이때도 세금은 언론, 결사, 양심의 자유를 하나마나한 말 이상으로 만드는 제도적 구조를 뒷받침한다. 세금제도가 미비한 국가에 방문하면 이런 문제가 생생히 느껴진다. 사람들은 물질적 자원이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분배되지 않는 한 정의의 의무와 관련된 영역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각국에 내재된 그런 문제들은 키케로의 기획을 일찌감치 곤란에 빠뜨린다. 부국에서 빈국으로의 자원 재분배가 없다면, 기본적 자유의 수많은 영역에서 전 세계 시민들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 점점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성은 매일 침해당하고 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공공질서와 공공의 안전을 유지하지 못하는 여러 국가의 단순한 무능 때문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정의의 의무를 정말로 신경쓴다면 우리는 그 때문에라도 물질적 원조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기본적인 인권에 관심을 둔다는 건 좋은 말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돈을 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의무와 소극적인 의무의 차이는 그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게다가 어떤 의무에 더 큰 비용이 드는지는 전혀 명백하지 않다. 동맹국 보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불의한 공격으로부터 자국민을 지키고자 군사적 준비 태세를 갖추는 일은 정의의 의무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극도로 비싸다. 아마 전 세계의 기아를 종식시키는 것이 좀더 한계가 명확하고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일 것이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고문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경찰에 의한 효율적인 보호를 확보하며 인신과 재산에 대한기본적인 안전을 보호하는 데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이 기본적인 물질적 필수품들을 제공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유사하거나 그 비용을 능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단일한 총체로서의 이 세계에 대해 정의의 의무를 지는 것은 찬성하지만 다른 국가로 돈을 재분배하는 것은 꺼려진다고 말한다면, 사실은 그들이 정의의 의무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60-61쪽)

 

현실에서는 각국의 ‘우리'들이 특권층과 압제를 당하는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급, 종교, 인종, 민족, 성별, 성적 지향성의 차이는 모든 국가에 있는 모든 사람의 삶의 기회에 속속들이 영향을 끼친다.
특정한 지역에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권리와 기회를 결정짓는 한 가지 요소다. (예를 들어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또 다른 요소다. 그리고 이 두 요소는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그러므로 국제적 의무에 관해 정말로 제대로 생각해보려면, 예컨대 타국의 성 인종 종교적 위계를 다룰 때는 우리에게 어떤 의무가 발생하는지, 우리의 자원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요구하는 유독 긴급한 의무가 있을 수 있는지 물음으로써 다양한 차이나 그와 연관된 불의도 고려해야 한다. (42쪽)

 

스미스는 스토아주의적 전통의 근본을 뒤흔들 만한 기여를 했다. 그는 계약과 교환의 관계 속에서 핵심적인 존엄성의 가치가 표현된다고 보았다. 그리스인들이 보통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물질적 관계는 비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 관계는 서로를 존중하는 합리성의 형태이거나, 최소한 그런 형태가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스미스는 <국부론> 전체에서 물질적 관계의 왜곡이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성 전체를 왜곡하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사람의 노동력이라는 재산은 스미스가 보기에는 “다른 모든 재산의 원초적 토대”, 그러니까 다른 모든 재산의 기원이 되는 핵심적 형태의 재산이다. 따라서 각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들인 재산은 재산 중에서도 "가장 신성하고 침해 불가능한" 형태다. 우리가 상호존중과 상호성을 통해 타인에게 의사를 표현하게 해주는 것, 개들처럼 알랑거리는 대신 존엄성 있는 인간으로서 거래하게 해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 재산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조건하에 있는 노동자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그들의 노동력을 원하는 방식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재산권에 대한 전형적인 위반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므로 기본적 정의의 침해다. (189쪽)

 

몇몇 종교들은 세상을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철학의 주장에 대해 훨씬 더 불편함을 느낀다. 그런 종교로, 나는 개신교의 대부분 형태를 꼽는다. 특히, 미국에서 아주 흔한 복음주의적 형태들 말이다.
동료 시민을 존중한다는 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교설에 따라 삶을 살아갈 선택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존 롤스가 ‘정치적 자유주의’ 이념이라고 부른 이런 이념은 정치제도에 아주 많은 것을 요구한다. 첫째, 이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종교적 믿음과 실천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보호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평등한 존중에는 모든 형태의 국교에 대한 경계심 어린 반대가 필요하다. 국교는,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외부자들에게 위계와 배제의 신호를 보낸다. 
셋째로, 여기에는 기본적인 정치적 원칙을 중립적인 언어로 표현할 것도 요구된다. 이 언어는 특정한 종교의 언어여서도 안 되고, 종교와 비종교 간의 광범위한 분쟁에서 어느 한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 원칙들은 표현을 자제해야 하며, 어느 한 전통에 속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알팍한 윤리적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종교적 자유를 충분히 존중하려면, 사회의 원칙은 시민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지 말아야하며 협소하게만 적용되어야 한다.
정치 철학자들은 바로 그 제한적인 공간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다원주의적 사회의 모든 시민이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입증될 원칙들을 지지하는 주장을 펼쳐야 하고, 이런 주장은 롤스가 “중첩된 합의”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모형을 따라, 철학자들은 완전히 종합적인 교설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평등한 존중의 기본적 가치를 지지하며 타인이 가진 선의의 관점을 기꺼이 존중하는 모든 시민들에 의해 포용될 원칙들을 추구해야 한다. 기본적인 정치적 원칙들은 전적으로 종합적인 교설로서가 아니라 롤스가 “모듈"이라고 부르는 것, 뭐든 간에 한 사람의 전적으로 종합적인 교설에 그 일부로서 덧붙여질 수 있는 부분적인 교설로서 발전되어야 한다. (260-261쪽)

 

대체 이런 공통의 영역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스토아주의 전통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내놓았고, 현대 인권운동은 그 답을 강력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답변이란 인간의 존엄성, 인간 평등, 인권 등의 윤리적 이념들이다.
나는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 이 목록에 인간적 역량을 덧붙이려 한다. 세계인권선언의 기안자들이 깨달은 것처럼 이런 이념들은 다른 면에서는 종교와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을 단합시킬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존엄성이라는 이념을 종교적 교설과의 연관 속에 해석할 것이고,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윤리적 이념 자체는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인간 역량의 목록을 만들 때 무엇이 가치 있는 인생인지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다원주의적 사회 내의 정치적 권리들이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정치적 목록을 협소하고 비형이상학적으로 정의했다. 세계시민주의가 보통 종합적인 윤리 교설로 정의되므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따른다는 건 (그런 식으로 생각되는) 세계시민주의를 정치적 원칙의 토대로 삼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262-263쪽)

초기의 국제주의자들은 국제법이 달성할 만한 것 이상의 효율성, 그리고 국가주권이나 인간 자율성과 양립할 수 있을 만한 것 이상의 규범적 역할을 국제법에 부여했다. 법사상가 에릭 A. 포즈너는 UN의 작용을 살펴보고 다양한 국제조약의 영향을 평가해보면서,실질적인 측면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분명 국제법이 유용한 역할을 해낸 면도 있을지 모른다. 기본적인 합법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주권국가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포즈너의 회의주의가 세계시민주의의 핵심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제기구와 국제규약은 본질적으로 세계를 설득하려는 규범적 선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것들은 강요되지 않고 법처럼 강제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가치를 띨 수 있다. 국제법과 국제규약은 형성되어가는 합의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각국의 시위자들이 국내의 정부에 압력을 가할 때 이들을 활용할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영향력은 어느 경우에든 규범적으로 선호할 만하다. 이런 방식이 시민의 자율성을 더 존중하기 때문이다. (264쪽)
구체적인 사례들은 이처럼 값진 영향력을 잘 설명할 뿐 아니라 법에 대한 포즈너의 기본적인 입장과도 일치한다. [일례로] 여성 인권의 진보를 어느 정도까지 CEDAW 등의 국제규약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이 딱히 적절한 질문이 아니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국제규약은 국제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며, 국제사회에서 이루어진 도덕적 작업은 사람들을 모아들이고 그들에게 만나서 생각을 교환하고 서로를 강화해줄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경우가 많다. CEDAW가 직접적으로 성취한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전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문헌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 여성들을 동원하고 여성의 평등을 확인한 일은 이 문서의 결함이나 그것을 실행할 때의 더 큰 결함들과는 관계없이 정치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값진 것으로 밝혀졌다.
간단히 말해, 국제 문서는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으며 세계 헌법에는 미치지 못한다. 내가 전개해온 그로티우스적 그림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 좋은 일이다. 이런 문서들은 설득력 있는 규범의 원천으로 머물며 헌법 제정, 입법, 사법적 해석 등을 포함한 국내 정책을 통해 강제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국제사회는 주로 설득에 의지하는 도덕적 영역으로 남아 있고, 오직 가끔만 진정으로 정치적인 영역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문서를 만들고 인준하는 절차가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문서는 연대와 공통의 목표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내고, 강력한 초국가적 운동들이 일어나 국내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한다. (267쪽)

 

해외 원조가 아무런 효과가 없거나 거의 효과가 없고, 오히려 종종 해로울 수 있다는 증거가 늘어가고 있다. 우리는 해외 원조가 생산적일 수 있는 조건에 대해 훨씬 많은 것들을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더는 하면 안 되는 것은, 원거리에서의 원조를 통해 우리의 의무가 구조적이거나 제도적인 변화 없이 정말로, 안정적으로 사태를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식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270-271쪽)

그렇다면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에게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믿지만, 동시에 그런 의무를 실제로 실천하는 일이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알고 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디턴이 말하듯, 베푸는 행위가 베푸는 사람에게 따뜻한 빛을 둘러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행복감은 확실히 주된 고려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달갑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자선 행위를 하고 기뻐하기보다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주체성을 존중해야 한다. 디턴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의 인생을 자동차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와 함께 연구하기 위해 다양한 국가에서 프린스턴으로 오는 학생들에게 디턴이 들려주는 조언은 단순하다. 돌아가서 자기 나라의 정치적 절차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273쪽)

 

그로티우스는, 세계가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집이라는 기본적인 생각과 인류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념이 결합하면 국가중심적 틀 안에서조차 이민 문제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했다. 그의 제안은 그의 시대에도 대담한 것이었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기본적인 통찰은, 우리가 인간성을 존중한다면 절박한 형편에 놓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삶에 필요한 생계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에 대한 원조를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원조를 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빈곤이나 박해 때문에 자신들의 원래 국가를 떠날 수밖에 없다면, 그들은 최소한 다른 나라에 일시적으로 머물 권리를 가져야 한다. 또한 혼인 계약을 맺을 권리를 갖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체류 기한을 잠재적으로 연장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어떤 민족집단도 특별한 긍정적 부정적 처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부국들에 잉여자원이 있고 다른 국가들이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그 잉여자원은 사실상 그 부국들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재산이라는 것이 그로티우스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현대 세계의 이민 문제에 대한 좋은 출발점이지만, 공식적 혹은 법적 이주와 불법 이주의 구분, 영주권과 시민권의 구분, 그 두 권리와 임시적인 이주 노동자 지위의 구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정치적 망명과 경제적 이민 사이의 구분 등 수많은 핵심적인 구분을 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지금은 모든 구분들이 인상적이고 다양한 철학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 첫째, 세계시민주의 전통이 인간 자율성의 도덕적 근거지로서 국가를 강력하게 옹호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국가에는 국가의 안보와 국가 정치적 문화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경험적 증거로 정당화되지 않았거나, 다원주의 혹은 이민이 전형적으로 제기하는 도전으로부터 지배적인 국가의 민족적 혹은 종교적 전통들을 지키려는 외국인 공포증적 정책들을 채택할 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의 의미는 (1) 받아들여지는 이민자들의 숫자를 제한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2) 영구적인 법적 지위를 신청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국가의 기본적인 헌법적 원칙에 따라, 그 법률하에서 살 의지를 표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미다. 그 외에, 경제적 안정성이 국가 안정의 이주 중요한 요소인 만큼 이주민의 숫자를 기술과 직업 기회에 따라 제한하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지 않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국가적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민자들의 수를 너무 낮게 유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2) 민족성이나 종교를 이유로 입국을 거부하거나 사람들을 강제 추방하는 것도 허용할 수 없는 일이다. 범죄에 대한 유죄판결을 근거로 한 추방도 가혹한 방식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276-277쪽)

수많은 국가가 활용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 프로그램은 보통 일군의 노동자들에게 합법적인 영주권을 주거나 시민권을 얻을 기회를 주지 않은 채로 일만 처리하는 방법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명확한 도덕적 변칙이다. 인생의 긴 기간을 어느 장소에서 살며 그곳 법에 따른 시민들은, 그로티우스가 주장하듯 그런 법을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자격이 있다. 사실상 이런 프로그램들은 지위는 물론 민족성이나 종교에 따라서 국민 전체로부터 분리된 영구적 계급을 만들어내고, 이들로부터 특권을 빼앗아 2등 국민으로 만들어버리는 더욱 심한 도덕적 악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는, 그로티우스가 명시적으로 옹호하는 권리도 부정당한다. 이 프로그램들은 가족의 통합, 영주권, 시민권을 얻을 기회를 허락하는 프로그램들로 점차 바뀌어야 한다.
최근에는 이주 노동자 프로그램들이 국가 간 재분배와 복지를 향상하는데 대단히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옹호되어왔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 프로그램이 이주자들의 송금을 통해 빈국의 복지를 현저히 향상시킨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현 상황이 기본적 가치를 싼값에 팔아버리는 대가로 얻기에는 너무 형편없는 것이다. (280쪽)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수많은 현대의 윤리적 주장이 다가가고 있는 결론들에 보다 깊이 있고 원칙에 입각한 명분을 제공한다. 전반적으로,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오늘날 세계의 도전과제를 해결하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전통이다. 이 전통은 도덕심리학의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있으나 그 결점은 교정될 수 있고, 이미 키케로와 스미스에 의해 교정되었다.
인권법 영역에서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아주 타당하다. 이 전통이 가장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세계, 즉 진화해가는 국제적 도덕성과 몇몇 국제법으로 묶여 있으되 그 집행은 주로 각국 내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원조의 영역에서,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다시 한번 우리의 생각에 좋은 지침이 되어준다. 이 전통은 공화주의적 제도와 그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에게 독선적인 온정주의를 피하는 것의 중요성을 경고하고 원조의 효율성에 관한 최고의 경험적 증거를 참조할 것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민이라는 까다롭고도 중요한 분야에서 세계시민주의 전통(특히그로티우스)은 우리 시대의 가장 논쟁적인 문제를 다룰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좋은 원칙들을 제공한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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