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좁은 회랑'에 들어가려면

딸기21 2021. 3. 3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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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의 <좁은 회랑>(장경덕 옮김. 시공사)을 끝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재미있게 봤고, 한번 재미있게 읽은 저자의 책은 더 읽는 것이 버릇;;이라 이 책도 고민 없이 구입. 뭐,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길게 설명할 정도로 정교하거나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았던 듯.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정치 질서의 기원>을 지난해에 읽었는데 그것과도 느낌이 좀 비슷하다. 동서양의 기나긴 역사를 풀어주면서 나름 여러 문명권/나라의 사례를 비교분석한다. 그런데 한 문명권/나라에 대한 지식은 파고들어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 세상 어느 문명/나라가 이렇다 저렇다 단칼에 자를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겠는가.

 

분석틀에 맞춰서 요점을 뽑아내려면 단순화를 피할 수 없는데, 그렇다 보면 결국 틀에 맞춘 인상이 강해진다. 저자 '맘대로' 분석을 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역사적 사실이나 현재진행중인 과정들 가운데 취사선택해서 뽑아내는 기준이 저자의 정치적 성향에 많이 좌우될 수밖에 없고, 틀에 맞춘 해석이라는 인상은 더욱더 강해진다! 읽다 보니 내가 잘 모르는 지역의 이야기에서는 도움 되는 디테일이 많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틀린 것들도 조금 눈에 띄고, 그 몇 개의 오류들에 저자의 가치관이 많이 개입돼 틀에 구겨넣은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어쩐지 다른 부분들에도 오류와 왜곡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솔론의 개혁에 이어)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주적 통제를 실현하려면 규범의 우리를 더 약화시키고 부족중심의 정치 권력 기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대담한 조치를 통해 네 부족이 솔론의 400인 평의회를 차지하고 있던 체제를 없애고, 아테네 영웅들의 이름을 딴 10개의 새 부족이 추첨으로 선정한 사람들로 구성된 새로운 500인 평의회로 대체했다. 각 부족은 평의회에 50명씩 대표를 보낸다. 각 파벌은 트리티스(부족의 3분의 1')로 불리는 세 개의 작은 단위로 나뉘며, 이 각각의 단위는 다시 데메deme로 불리는 지역 정치 단위들로 세분됐다. 지역 단위의 체제가 만들어진 것 자체만으로도 국가건설 과정에 있어 중요한 진전이었으며, 이는 기존의 친족 기반 정체성의 잔재를 사실상 완전히 제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개혁의 효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새로운 시민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자신의 데메 이름으로 지칭하도록 만들었다.”
엘리트층에 맞선 시민들의 정치 권력을 더 확대하기 위해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의 시대에 있었던 기관들의 구성원 자격에 대한 계급 제한을 없앴다. 평의회는 이제 30세 이상 모든 남성 시민들에게 개방됐고, 각 평의원은 1년 동안만, 그리고 평생 두 번까지만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아테네 남성들은 일생의 어느 시점에 평의원이 될 수 있었다. 평의회의 의장은 무작위로 선정하고 24시간만 활동하도록 해서 대부분 아테네 시민들이 어느 시점에는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100쪽)


솔론이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됨. 

 

솔론은 이렇게 생겼구나. 

 

1943년 독립 후 레바논은 한 번도 인구 총조사를 하지 않았다. 1943년 합의된 국민협약의 기초가 된 인구 조사가 1932년에 한 차례 있었지만, 그 후에는 전혀 없었다. 1932년 인구 총조사에서는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51퍼센트를 차지해 레바논의 시아파와 수니파, 드루즈파 무슬림 사회보다 근소하게 우세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민협약은 다양한 집단 간 권력을 배분함으로써 이런 인구 지형을 인정했다. 대통령은 언제나 마론파 기독교인이 돼야 하고, 총리는 수니파 무슬림, 국회의장은 시아파 무슬림에게 돌아가야 했다. 국회 부의장과 부총리는 언제나 그리스 정교를 믿는 기독교인들 몫이고, 군 참모총장은 드루즈파 무슬림이 돼야 했다. 국회 의석은 6대 5의 비율로 기독교도가 무슬림에 우세하게 고정됐다.
예상대로 이 협약은 결국 믿을 수 없을 만큼 허약한 국가를 낳았다. 부재하는 리바이어던 아래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나라에서 권력은 국가가 아니라 개별적인 지역사회에 있다. 이 국가는 보건이나 전력 같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지만, 지역사회는 제공한다. 국가는 폭력을 통제하거나 법을 집행하지도 않는다. 시아파 무슬림 단체인 헤즈볼라는 자체적으로 사설 군대를 보유하고 있고, 베카밸리의 여러 무장 세력들도 그렇다.
치열한 권력 분점으로 모든 공동체가 다른 이들이 뭘 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게 됐다. 그에 따라 모든 집단이 무엇이든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것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게 됐고, 이는 정부의 끔찍한 교착상태로 이어졌다. 교착상태로 의사결정이 불가능해지면서 뻔히 예상되는 결과가 초래됐다. 특히 공공서비스에서 문제가 생겼다. 2015년 7월 나메에 있는 주요 쓰레기 매립지가 폐쇄됐다. 정부는 대안이 없었고, 쓰레기는 베이루트에 쌓이기 시작했다. 즉각 행동에 돌입해야 할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125~126쪽)

 

저자들은 국가를 독재적 리바이어던(억압적인 국가), 족쇄 찬 리바이어던(민주적 통제를 받는 국가), 종이 리바이어던(무늬만 국가), 부재의 리바이어던(무정부/실패한 국가)으로 나눈다. 시민사회가 견제해 국가에 족쇄를 채워야 발전이라는 '좁은 회랑'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일에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그 국가-사회의 역사를 비롯한 디테일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국가도 사회도 제각기 스스로를 강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둘은 '레드퀸의 경쟁'을 벌여야 하고, 이 과정에서 서로 균형을 잡아야 제 기능을 하면서 족쇄를 찬 리바이어던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요지다.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살펴보는데, 레바논은 그중 부재하는 리바이어던의 한 예로 거론했다. 레바논을 국가가 '부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권력분점과 그로 인한 교착상태는 악명 높은 게 사실이니.

 

[구정은의 ‘수상한 GPS’] 레바논 방문한 마크롱과 '아랍의 목소리' 페이루즈

 

[구정은의 ‘수상한 GPS’]레바논 방문한 마크롱이 만난 가수, '아랍의 목소리' 페이루즈

전염병에 초대형 사고까지 겹쳤는데 정치권은 갈라져 있고 경제는 무너진 레바논.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 나라를 찾아 개혁과 단합을 호소했다. 이대로 분열과 불안이 계속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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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루트66.

 

건국자들은 권리장전을 연방의 입법에만 반영하고 각 주의 입법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데 동의했다. 흑인에 대한 한심한 차별과 지배는 남북전쟁과 1865년 노예제도 폐지 후에도 오래 계속됐다. 이 차별적인 규범 중 터무니없는 사례 중 하나는 '일몰 타운'의 존재다. 일몰 타운은 해가 진 후 흑인들이 (그리고 이따금 멕시코인과 유대인들 또한)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자동차의 나라인 미국에서 사람들은 66번 국도를 달리며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모두가 쾌감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1930년 66번 국도가 지나는 89개 카운티 중 44곳에 ‘일몰 타운’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다 뭘 먹거나 볼일을 보고 싶은데 식당과 화장실이 백인 전용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차별은 너무나 심해서 1936년 뉴욕 할렘 지역에서 우체국 일을 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빅터 그린은 일종의 의무감으로  흑인 운전자 그린북 Negro Motorist Green-Book 을 발행했다. 흑인 운전자들에게 해가 진 후 어디에 들어갈 수 있는지, 혹은 어디에서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자였다. 마지막 판 발행일은 1966년으로 나와 있다. (138~139쪽)

 


트럼프 시절에 쓴 책이라 미국에 대한 분석도 많이 들어가 있다. 국가가 떠안는 대신 '민관 협력'방식으로 간 미국의 선택과 그로 인한 한계에 대한 설명들이 눈길을 끔. 

 

1990년 조지아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다당제 선거가 실시됐다. '원탁회의-자유 조지아'라는 연합이 공산당에 맞서 3분의 2에 달하는 표를 얻었다. 1991년 5월 조지아는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원탁회의의 지도자 즈뱌드 감사후르디아가 85퍼센트를 득표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러 소수집단은 조지아 민족에 지배를 당할까 걱정했고 분리 독립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1992년 1월 감사후르디아는 나라에서 도망쳤고, 수도 트빌리시는 대부분 두 군벌, 즉 므크헤드리오니Mkhedrioni라는 준군사 조직의 우두머리 자바 이오셀랴니와 국가수비대 수장인 텡기즈 키토바니의 손에 들어갔다. 어느 시점에는 티빌리시에서만 열두 개나 되는 민병대와 무장 세력이 있었다. 일종의 국가가 있었지만, 사정은 전쟁 상태나 별 차이가 없었다. 수도는 파상적인 폭력과 약탈, 범죄, 강간에 시달렸다. 독립을 선언한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아자라와 삼츠헤-자바헤티 같은 곳은 완전한 자치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결국 내전이 시작됐다.
1993년 봄 군벌들은 정당성을 확보하고 해외 원조와 자원에 접근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보여줄 얼굴이 필요했다. 1992년 셰바르드나제는 조지아 국회의장이 됐다. 군벌들의 구상은 간단했다. 셰바르드나제가 국가원수가 되고 그들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셰바르드나제는 키토바니를 국방장관에, 이오셀랴니를 군의 자율 조직인 긴급대응부대 사령관에 앉혔다. 이오셀랴니의 인맥 중 한 명은 내무장관이 됐다. 하지만 그다음에 미끄러운 비탈이 시작됐다.
평의회는 곧 군벌과 정치 엘리트들이 들어와 훨씬 더 큰 기구로 발전했고, 그렇게 확대된 기구는 셰바르드나제가 관리하기 쉬워졌다.
셰바르드나제는 키토바니와 이오셀랴니에게 충성하던 민병대 출신 인사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돌려놓으려고 그들을 국가기구의 공식 직위로 승진시키기 시작했다. 민병대 출신들이 비공식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뇌물을 짜내는 데 가담할 수 있는 백지수표를 받게 되면서 엄청난 부패가 만연했다. 군벌들은 자신들의 정권이 국제적으로 존중받고 원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셰바르드나제를 권좌에 앉혔으며, 바로 그 때문에 셰바르드나제의 장악력은 세졌다. 실제로 국제적 지원은 셰바르드나제를 통해 이뤄졌다.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시장경제를 유지해야 하며, 시장경제는 곧 민영화와 규제를 의미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셰바르드나제가 갈수록 늘어나는 자신의 충성파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해 조작할 수 있었다. (175~177쪽)

 

조지아 부분 재미있음. 

 

[동유럽 상상 여행 51] '색깔 혁명'의 파도가 휩쓴 2000년대의 동유럽

 

51. '색깔 혁명'의 파도가 휩쓴 2000년대의 동유럽

51. '색깔 혁명'의 파도가 휩쓴 2000년대의 동유럽 2003년 11월 3일, 지금은 '조지아'라고 나라 이름...이 아니고 '발음'을 고친 그루지야에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Eduard Shevardnadze 대통령의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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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족쇄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사회에 뿌리 박힌 '규범의 우리'를 깨는 문제. 따라서 여성과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없애는 과정이 중요함.

 

1838년 캐롤라인 노턴은 ‘유아보호법에 따른 어머니와 아동의 별거에 관한 소고’라는 소책자를 냈다. 그녀는 잉글랜드 법상 아버지는 자녀를 낯선 사람에게 넘겨줄 수도 있지만, 어머니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녀의 사례가 극적인 홍보 효과를 낸 덕분에 의회는 1839년 유아와 유아보호에 관한 법을 통과시켜, 일곱 살 미만 어린이에 대해서는 어머니 쪽에 일부 발언권을 줬다. 캐롤라인 노턴은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1854년에는 ‘잉글랜드의 여성을 위한 법’을 출간해 현상 유지를 위한 법의 불평등과 위선을 드러냈다. 1857년 의회는 이혼법Matrimonial Causs Act을 통과시켜 여성들이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1870년에는 기혼 여성 재산법이 제정됐다.
노턴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1792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저작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명백히 지적한 잉글랜드 법의 근본적으로 차별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여성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나중에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영향력 있는 지지자를 얻었는데, 1869년에 출간된 그의 책 ‘여성의 종속’은 법적,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 여성의 완전한 평등을 강력히 촉구했다. 노턴의 승리와 밀 같은 인물의 지지는 이와 같은 규범들의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투표권과 정치적 대표성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엄청난 경제적 차별을 겪었다. 이런 상황은 1918년 30세 이상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었을 때 바뀌기 시작했고, 1928년에는 마침내 모든 성인 여성들이 선거권을 갖게 됐다. (326~329쪽)

 

저자들은 중국에 좀 부정적임. 하긴, 특히 시진핑 체제 들어와서의 행태를 보면.

 

정부와 법체계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법가와 유가) 두 철학의 융합 그리고 상앙과 공자 사이의 어느 지점을 오가는 진동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진폭의 어느 곳에 있든 역대 정부는 세 가지 기본적인 원리에 동의했다. 첫째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의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교리로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황제의 군주적 지배 아래 백성들에게 조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나 발언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 황제는 언제나 법 위에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관리로 두고 그들이 국가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황제가 바라는 대로 사회를 지배하는 데 필요했다. 마지막 핵심 원리는 황제가 백성의 복리를 엄려하고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일종의 사회계약이 돼 국가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세 가지 통치 원리를 충족할 수 있도록 권력 기구를 조직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그 조직은 완벽하게 작동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미시적 관리와 강제력을 위주로 한 상앙의 모형과, 사회에서 더 멀리 물러나 훌륭한 통치의 본보기를 만드는 데 힘써서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공자의 전략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있었다. 2,000년에 걸쳐 중국은 주기적으로 상앙의 모형을 재도입하려는 다양한 시도에 맞닥뜨렸는데, 가장 최근의 사례는 1949년 이후 권력을 잡은 공산주의자들이 집단농장의 형태로 자신들의 방식으로 정전제를 실행한 것이었다. 현대에 공자 모형이 구현된 것은 1978년 이후 덩샤오핑 체제 아래서 집산화가 반전되고, 중국 지도자들이 공자가 말한 덕치의 원리에 배치되는 부패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중국에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보려면 이와 같은 법가와 유가 사이의 역사적 진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353~354쪽)

 

<대진제국 4> 봐야 하는데...

 

어떤 면에서 이 체제는 훌륭하게 작동했다. 중국은 세계 2위 경제국으로 컸고, 1978년 이후 연평균 약 8.5퍼센트씩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면서 세계 모든 지도자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국가의 후원을 받고 국가의 변덕에 휘둘리기 쉬운 독재적인 성장이며, 공산당의 도덕적 리더십이 중국 경제를 지속적인 성장으로 이끌어 가리라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독재적 권력이 어떻게 사적 이득을 위해 쓰이며 유인을 훼손할 수 있는지는 2004년 베이징의 시우슈이 시장을 폐쇄한 데서 잘 드러난다. 시우슈이는 1985년 정부가 교역과 시장에 대한 규제를 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번화한 야외 시장이었다. 그러나 지방정부 관리들은 이 시장을 폐쇄하고 새로 지은 실내 상가로 옮기도록 했다. 신축 상가는 한 사업가가 정치적 인맥을 이용해서 건축하고 관리하는 곳이었고, 이 사업가는 새 시장에서 영업할 권리를 경쟁입찰 방식으로 팔았다. 그에 따른 이득 중 일부를 지방정부 사람들이 나눠 가졌다고 믿는다 해도 터무니없다고 할 수는 없다.
또 하나의 사례는 향진기업에서 볼 수 있다. 향진기업은 1980년대의 혁신으로, 본질은 민간기업이지만 흔히 지방정부가 소유했다. 굉장히 성공적이었던 향진기업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 10년 동안 완전히 사라졌다. 중앙의 정치인들이 주로 지방에 있는 향진기업들과 경쟁하기를 바라지 않는 대규모 국영기업들을 우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향진기업들은 정치적 결정에 따라 짓눌리고 소멸해버렸다.
이는 중국에서는 제국 시대와 똑같이 재산권은 정치적인 시혜에 크게 의존하며, 독립적인 사법부도 없고 정치적 엘리트에게도 평등하게 법을 적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다는 더 일반적인 문제의 일면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업가들이 재산권을 지키는 방법은 청 왕조의 사업가들과 같은 방식으로 국가 내부에 진입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388~389쪽)

 

중국에 도입된다는 '사회적 신용'이라는 것은 아직 어떤 방식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지만. 개미그룹(Ant Financial)의 '참깨신용(Zhima Credit)' 같은 것들 보도가 나오던데 어떻게 되려나. 좀 들여다봐야겠다.

 

Chinese women show the scores of their Zhima Credit of Alibaba's Ant Financial on their Apple iPhones in Hangzhou City on May 9, 2016. (AP / Imagechina)

The complicated truth about China's social credit system

 

사회적 신용이라는 사고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적용되고 그것이 자유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위구르족 무슬림 수백만 명이 사는 중국 신장에서 볼 수 있다. 위구르족은 기술적으로 가장 강도 높은 국가의 감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차별과 억압, 대규모 구금을 겪어왔다.
사회적 감시의 첫 번째 물결이 밀려온 것은 2014년 ‘인민을 방문하고, 인민에게 혜택을 주고, 인민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공산당원 약 20만 명을 신장으로 보냈을 때였다. 두 번째 물결은 2016년 감시자 11만 명을 '한 가족으로 단결하자’는 운동의 선봉으로 이곳에 보냈을 때 밀려왔는데, 그들은 가족 구성원이 투옥되거나 경찰에 피살된 가정에 배치됐다.
2017년에는 세 번째 물결로 100만 명의 요원들이 밀어닥쳤다. 아침에는 ‘형제와 자매들’이 공산당 지역본부 앞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시진핑 주석의 '신 중국 비전’에 관한 학습에 열심히 참석했다. 위구르 사람들은 끊임없이 충성심을 점검하는 감시를 받았다. (394쪽)

 

러시아도 저자들이 거시기하게 보는 나라.

 

1991년 여름 옐친은 새롭게 생겨난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예고르 가이다르에게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하도록 맡겼고, 가이다르는 다시 아나톨리 추바이스에게 국유산업의 민영화를 이끌게 했다. 1992년 말 추바이스는 대기업 매각을 시작했다.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은 주식 29퍼센트를 바우처 경매 방식으로 팔아야 했으며, 1992년 10월 러시아 성인은 각자 지역 스베르뱅크 지점에서 불과 25루블을 주고 액면 1만 루블의 바우처를 발급받았다. 1993년 1월까지 러시아 국민 중 약 98퍼센트가 배정된 바우처를 받아 갔다. 이 바우처는 팔 수도 있고 특정 기업들이 민영화될 때 주식을 청약하는 데 쓸 수도 있었다.
1992년 12월 첫 경매가 열렸다. 약 1만 4,000개 기업이 경매를 단행했다. 그러나 실제로 민영화 기업들의 자산 대부분은 엄청나게 할인된 가격에 내부자들에게 넘어갔다. 이미 광범위하게 분산된 지분도 다시 소수에 집중됐다. 1994년 종업원들은 평균적으로 러시아 기업의 지분 50퍼센트를 소유했다. 그러나 1999년 이 비율은 36퍼센트로 떨어졌다. 2005년에는 대기업과 중견기업, 통신업체를 통틀어 단 한 명이 주식의 절반을 소유한 기업이 71퍼센트에 이르렀다.
민영화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심했던 부분은 ‘국유주식 담보대출' 거래였다. 1995년 에너지와 자원 부문에서 가장 값나가는 국유자산이 옐친의 재선 선거자금을 대기로 약속한 사람들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그 거래가 구체적으로 작동한 방식은 이랬다. 정부는 주로 에너지부문에 몰려 있는 고수익 국유기업 열두 곳의 지분을 은행 대출용 담보로 이용한다. 그런데 정부는 사실 부채를 갚을 의도가 전혀 없었다. 1996년 11월부터 1997년 2월까지 정부는 유코스, 시단코, 수루구트네프테가스의 지분을 팔았는데, 경매 때마다 외부자의 입찰이 무시되거나 자격을 잃은 가운데 은행들이 주식을 샀다. 옐친은 재선된 후 이 거래에 밀접하게 관련된 블라디미르 포타닌과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를 정부에 불러들였다. 베레조프스키와 또다른 올리가르흐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전국 텔레비전 방송국 두 곳을 통제하면서 미디어계를 지배했다. (472~473쪽)

민영화, 특히 국유주식 담보대출 거래가 초래한 불평등은 러시아의 핵심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소수의 손에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개혁 과정의 정당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했다. 그리고 푸틴의 리더십 아래 활기를 되찾은 KGB가 너무나 쉽게 경제와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줬다. 러시아는 회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독재적인 소비에트 국가의 붕괴가 러시아를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긴 했지만 러시아의 국가를 길들이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러시아는 소련이 중단됐던 지점으로 되돌아가, 사회에 대한 독재적 통제를 냉큼 복원했다. (476쪽)

타지키스탄과 폴란드, 러시아의 차이는 분명하다. 소련이 지역의 씨족들과 동맹을 통해 통치했던 타지키스탄은 국가와 사회가 취약한 가운데 어떤 제도적인 정치 참여 수단도 없이 체제 전환 과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재앙이 뒤따랐다. 러시아는 국가 권력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폴란드는 국가 권력이 약해짐에 따라 회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 수 있었으며, 타지키스탄은 국가가 완전히 붕괴하면서 내전과 씨족 간 분쟁 이 뒤따르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479쪽)

 

재미난 부분 또 하나, 코스타리카를 과테말라와 비교한 것.

 

코스타리카는 식민지 시대 내내 주변부였다. 토착민은 거의 남지 않았고, 캐낼 만한 귀금속이나 다른 광물들도 없었다. 독립할 때 이 나라의 인구는 6만~7만명이었는데 대부분 중앙 계곡의 고지대에 살았다. 식민지 경제는 대체로 저개발 상태였다. 그러므로 독립 당시 코스타리카에는 강력한 엘리트도, 지배적인 도시나 타운도 없었다.
네 곳의 중심지인 카르타고, 산호세, 알라후엘라, 에레디아는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 타운들은 경쟁하면서도 협력할 수 있었다. 1821년 식민지 수도인 카르타고의 시의회는 어떻게 독립을 선언할지 논의하려고 다른 여러 도시의 의회를 초청했다. 그해 10월 주요도시 네 곳은 우야라스와 바르바, 바가세스와 더불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시의회 공동 결의문’을 발표했다. 그해 12월 그들은 화합의 협정 Pacto de la Concodia을 체결해 민중이 선출한 일곱 명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위원회 형태의 통치기구를 만들었다. 이 기구는 주요 도시 네 곳을 돌아가며 소재하도록 했다. 이들 도시는 열린 시의회 형태인 카빌도 아비에르토 회의를 통해 훨씬 더 광범위한 정치 참여를 허용했다. 
이 나라가 가진 유일한 자산은 개발되지 않은 넓은 땅이었다. 정치인들은 이 점을 잘 파악했다. 1821년 산호세는 땅에 울타리를 치고 작물을 길러 수출할 수 있는 이라면 누구에게든 공짜로 토지를 나눠줬다. 중앙정부는 1828년과 1832년, 1840년에 커피를 재배하는 소규모 자작농에게 토지 소유권과 보조금을 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1856년까지 모든 공유 토지가 매각됐다. 도시들은 저마다 토지를 싼 값에 팔고 커피 생산을 장려함으로써 노동력과 이주민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코스타리카는 실제로 중앙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수출한 나라다. 코스타리카에 큰 지주계급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초기 토지 분배의 형태 때문이었다. 대신 코스타리카의 경제적 엘리트들은 대단한 금액은 아닐지라도 자금을 대고 작물을 구매하고 수출하는 데 집중했다. 과테말라에서 너무나 널리 퍼져 있던 각종 강제노동을 위한 연합이 코스타리카에서 나타난 적은 없었다. 커피 사업에 뛰어든 부유한 가문들도 일반적으로 널리 분산돼 있었다. 어떤 것도 소규모 자작농의 커피 경제를 궤도에서 이탈하게 할 수 없었다. (487~489쪽)

 

그러나, 저자들의 주장과 달리 베네수엘라에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음. -_- '좌파' 깎아내리기가 좀 심함.

 

 

[정리뉴스]베네수엘라 ‘용병 침투작전’, 미국 배후설 정말일까

미국이 베네수엘라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용병을 보냈다고 베네수엘라가 주장하면서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발단은 지난 3일(현지시간) 수도 카라카스 주변에 있는 라과이라는 곳의 바닷가에

ttalgi21.khan.kr

 

나이지리아는 언제나 관심 대상. 나이지리아가 갈라지거나 피튀기게 싸우거나 더 무너지지 않고 잘 해나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반가운 일. 그런데 이 책에서는 나이지리아 전체가 아니라 라고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네. 아는 전문가가 있나보다.

 

나이지리아 군부는 더는 권력을 장악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1999년 그들은 권력을 내놓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올루세군 오바산조가 대통령에 선출됐다.
라고스에서도 선거가 있었는데, 볼라 아흐메드 티누부라는 사람이 라고스주 지사로 선출됐다. 그는 취임하면서 예상치 못한 일을 했다. 정치적인 협력자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대신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존경받는 법학 교수가 검찰총장이 됐고 시티뱅크 경영자가 경제기획예산위원회 직책을 얻었다.
재정은 파산 상태였고 중앙정부가 석유판매로 얻은 빈약한 자원을 배분하는 것은 믿을 만하지 않았다. 티누부는 과세당국의 인력 1,400명을 물려받았지만, 그중 전문 회계사는 열세 명에 불과했고 세무사 면허가 있는 이는 여섯 명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티누부는 전형적인 캐치-22 상황에 직면했다. 세금 수입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세금을 걷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해법은 전자 납세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징세원들에게 현금을 내는 대신 전자적으로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그는 이렇게 하면 부패의 소지를 줄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민간기업에 징세체계를 맡겼다. 그들은 잠재적 납세자의 데이터베이스를 개발하고 세금을 걷는 대가로 세수의 일정비율을 가져갈 수 있었다.
세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돈을 가지고 티누부와 그의 비서실장으로 후임 주지사가 되는 바바툰데 라지 파숄라는 관료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고,2003년에는 유능하고 잘 훈련된 인력을 고용한 반쯤 자율적인 과세기관인 라고스주 국세청을 출범시켰다. 주로 개인소득세에서 나오는 이 주의 세수는 급증해서, 1999년에는 불과 50만 명의 납세자에게서 약 1억 9,000만달러를 거뒀으나 2011년에는 400만 명 가까운 납세자를 상대로 12억 달러를 거두게 됐다.
세수 기반이 확대되면서 온갖 일에 자금을 댈 수 있게 됐는데, 그중 하나는 모든 주민을 라고스주 주민등록국에 등록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또 하나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다. 쓰레기 수거 차량 대수는 2005년 63대에서 2009년 763대, 2012년 1000대 이상으로 늘어났다. 주민들을 협박하고 약탈해왔던 지역 깡패들이 대부분 사라지면서 이 도시는 훨씬 더 안전해졌다. 교통사고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던 오토바이 택시는 도시와 라고스주 대부분 지역에서 금지됐다. 경전철을 비롯해 새로운 기반시설이 곳곳에 생겨났다. 1999년에는 도시에 새로 설치되는 가로등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가로등을 켤 전력이 없어서 설치가 무의미했을 것이다. 2012년 이 도시는 전력을 확보했고 새 가로등 1,217개가 설치됐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빈곤선 아래 인구 비율은 57퍼센트에서 23퍼센트로 낮아졌다. (718~720쪽)

 

2010년, 나의 라고스.


오래 전 라고스 기억이 새록새록. 거기서 보낸 4박5일은 내 생애 가장 답답한 출장이었는데... ㅎㅎ
암튼 나이지리아가 잘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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