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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글러, '인간의 길을 가다'

딸기21 2022. 2. 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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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길을 가다
장 지글러, 모명숙 옮김. 갈라파고스

사회학자로서 장 지글러가 생각하는 세계, 과거의 경험, 사회학에 대한 생각들 등등을 에세이처럼 썼는데 여러 주제를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좀 두서 없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도 생생히 숨쉬는 '좌파 학자'의 기운이랄까, 또 세계를 돌면서 보고들은 이 나라 저 나라의 비참한 상황을 향한 분노랄까, 그런 것이 참 좋다. 지글러의 책이 늘 그렇듯이.

뒷부분에서는 발생사회학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재미있게 읽었지만 스크랩은 우선 아프리카 부분만.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면 삶을 사랑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삶의 의미는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리는 것처럼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의미는 생겨나고 합성되면서 드러나는 것이다. 타자와 맺는 자유로운 관계에서 내게 없는 것을 없게 될 때 의미는 생겨난다. 따라서 상호관계, 즉 인간들이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아니라 경쟁하고 지배하며 착취하는 사회적 질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11쪽)
언어도 익명화라는 일반적인 경향을 따른다. 오래된 상징체계는 소멸한다. 발음나는 대로 중얼거리는 임시변통의 합의가 상징체계를 대신 한다. 새로운 음운 체계들은 말의 본래의 의미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 이 음운 체계들은 상품들의 생산, 옹호, 소비에 필수불가결한 인간들 간의 최소한의 합의를 유지하는 데만 도움이 된다. 오늘날에는 돈조차도 익명이다. 예전에는 돈이 “가난한 사람들의 피”였다.
로제 바스티드는 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오늘날 돈과 돈의 완벽한 구현인 상품은 모든 개성을 상실했다. 상품은 재화의 생산, 소비, 재생산, 새로운 소비를 둘러싼 터무니 없는 경주의 간단한 준거체계가 되었고 이 경주에서 재화는 재화로서의 질을 잃었다.” (140-141쪽)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는 피지배자들만 속이는 게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자주 그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이들 또한 기만한다. 오늘날 범대륙 은행 제국의 총재는 노동자, 청소부, 농민, 또는 직원이 보는 것과 같은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한다. 그는 그들과 인식의 범주가 같고, 같은 매체의 영향을 받는다. 오늘 확인할 수 있는 집단적 의식의 균질화는 오랜 역사의 결과다. (145쪽)


요즘 또 시끄러워진 모양이던데... 서사하라 문제.

서사하라는 1900년, 1904년, 1912년에 식민지 강대국 프랑스와 스페인이 체결한 조약들로 확정된 국경이 약 31만 평방킬로미터에 걸쳐 있다. 스페인이 1958년 모로코의 타르파야, 탄-탄, 구엘밈 주변 지역에서 물러난 이후 서사하라의 면적은 284,000 평방킬로미터다.
사라위족은 13세기에 예멘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풍성한 문화를 지닌 매우 복잡한 정치적 사회를 수립했다. 그 사회는 부족과 씨족보다 높은 유일한 상위기관인 이른바 ‘40인 협의회’가 있었다. 사라위족 주민을 구성하는 열 여덟 부족들의 우두머리가 모이는 회의는 오늘날까지 그렇게 불린다. 이 회의는 매년 알제리 남서부의 틴두프 고원에서 개최되고 며칠 동안 계속된다. 이 회의는 완전히 민주적인데 전통적으로 샘의 이용, 목초지 분할, 이주, 외부의 적들에 맞선 공동 방어 등에 대해 규정한다.
그렇지만 1976년 사라위족은 어쩔 수 없이 민족주의 조직인 사하라아랍민주공화국(DARS)을 건설하게 되었다. (187-188쪽)

사라위족 사회는 전사들의 인종적 출신에 대한 어떤 언급도 용인하지 않는다. 폴리사리오 전선은 부족 구조를 없애고 우두머리의 권력을 부쉈을 뿐만 아니라 부족들 간의 차이와 연합과 갈등이 있을지라도 이를 언급하는 것을 명확히 금지했다.
1885년 유럽 강대국들 간의 아프리카 분할을 결정한 베를린회의는 서사하라를 스페인의 영토로 선언했다. 서사하라가 카나리아 제도를 보호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제방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1967-1968년 마드리드는 인산염, 철, 석유, 우라늄 등의 매장량이 풍부한 식민지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탐색하고 구멍을 뚫고 몇몇 현지 부족장들을 매수하고 그들에게는 웃음거리인 지역 의회를 승인하고 남자들에게 월급을 지불하고 청년들을 위해 학교를 열었다. 사라위족은 자신들의 적을 점차 알게 되고, 외국과 관계를 맺고, 국제적·외교적 여론을 발견하고 다른 민족들의 해방 전쟁과 공통성을 확인했다. 1970년 6월 17일의 시위는 정치적 투쟁의 시작이었다. 이에 스페인 외인부대는 진압으로 답했다.
스페인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1973년 5월 10일 폴리사리오 전선이 창설되었다. 라바트 출신의 전 법학생 알 왈리 무스타파 사이드는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1975년 9월 스페인 정부는 알 왈리와 부대 철수를 놓고 협상했고 사라위족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10월 라바트에서 열린 아프리카연합 정상회의에서 모로코와 모리타니는 서사하라를 서로 분할하기로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독재자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사라위족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분할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1975년 10월 31일, 프랑스와 나중에는 미국에서도 지원을 받는 두 이웃 국가인 모로코와 모리타니에 맞서는 사라위족의 저항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자들은 무기를 잡았다. 5만명의 여성과 아이들은 도망쳐서 대탈출의 비극을 겪었다. 남은 사람들은 추방, 경찰의 테러, 구속, 대량 사살 등을 겪었다. 주거지는 네이팜탄과 인광탄이 투하되어 수천 명이 죽었다.
알제리 국경에서 궁지에 빠진 그들은 마침내 은신처를 발견했다. 알제리는 사라위족의 순교자 부족을 무조건 지원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1976년 2월 17일 틴두프의 바람이 몰아치는 하마다에서 사하라아랍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오늘날 사라위족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그들의 국가는 서구 강대국들과 모로코 식민지 세력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89-190쪽)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원민족' 문제에 대한 진단. 언제나 관심거리.

오늘날 특히 사하라 남쪽에서 실질적으로 집단 생활을 하는 아프리카의 종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늘날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우세한 사회적 형태는 원민족proto-nation이다.
원민족은 국민이 생성되는 노정의 단계가 아니고 또한 완성된 국민이 발전하다가 막힌 잘못된 형태도 아니다. 원민족은 독특한 사회적 형성물이다. 그것은 순전히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첫 번째 원인은 식민지 통치자에 대항하는 투쟁에 대한 국제 공산당의 무관심이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6차 대회에서 소비에트연방은 대단히 교조적인 강령이 채택되도록 했다. 식민지와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사회가 거치는 불가피한 발전단계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되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226-227쪽)

민주아프리카 연합의 의장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의 배신도 언급해야 한다. 그는 체이크 안타 디오프가 이끄는 민주아프리카 연합 내의 대학생조합에 저항했고 독립에 대한 모든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229쪽)

세 번째 원인은 2차 세계대전 때 서구의 전쟁 당사국들이 해외에서 온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투입한 것과 명백히 관련이 있다. 대체로 용맹하게 싸웠고 엄청난 손실을 입은 병사들은 상황의 부조리성을 갑자기 깨달았다. 이 전사들 대부분은 새로운 식민지 봉기의 전위부대를 조직했다. 1954년 11월 1일의 봉기를 조직하고 1962년 해방된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이 된 아메드 벤 벨라는 1944년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전투의 영웅이었다. 드골 장군은 벤 벨라에게 친히 표창했다. (233쪽)

탈식민화에서 형성된 아프리카 매판자본가는 식민지 협정과 오직 콘체른에 의존함으로써 존재한다. 유럽의 부르주아지와 달리 이 매판자본가는 국내의 봉건계급에 맞선 투쟁을 통해 생겨난 게 아니고 봉건 계급과 대립되지도 않는다.
또한 원민족은 범대륙 금융자본의 상징적 폭력체계와 단절하는 대안적인 의식에 토대를 두지도 않는다. 오히려 원민족의 부르주아지는 모방, 식민지 대도시들에서 유래하는 소비 습관의 재생산, 이국적 표준을 답습하려는 경향이 상당하다. 그렇지만 원민족들의 정치 지도자들이 전세계적인 제국주의 체제에 이미 통합되어 자국의 금융적, 경제적 착취를 허용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제국주의 조직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애쓴다.
원민족은 제국주의 역사에서 특수한 변화의 결과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제국주의 체계가 방향을 전환해 재구조화하고 새로이 균형을 잡으면서 원민족이 생겨났다. 그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냈고 또 항상 상징적 폭력으로 지배하는 토착민 계급에게 정식으로 권력을 넘겨 주기로 결정했다.
‘국민적’ 부르주아지도 경제와 무역의 국영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국영화는 그들에게 그저 식민지 시대에 생긴 특전을 토착민에게 넘겨주는 양도를 의미할 뿐이다. (236-237쪽)


우푸에부아니....

앙골라는 사하라 남쪽에서 나이지리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산유국이다. 대부분 국영인 10개의 광산은 다이아몬드의 76%를 채굴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포르투갈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고 1975년 11월 루안다 앞에서 쿠바 병사들의 지원 덕분에 남아프리카 원정부대를 격퇴한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의 해방군과 저항전선은 오늘날 부패한 패거리들이다.
2013년 국제통화기금은 신용대출돼 앙골라에 도착한 후 어디로 사라졌는지 오리무중인 340억 4000만 달러의 행방에 대해 정보를 요구했다.
다이아몬드는 대개 광산에서 직접 약탈하거나 불법 다이아몬드 채굴자인 가림페이루가 강탈한다. 앙골라 왕실과 그 공모자들은 스위스 세관과 함께 효과적인 합의점을 찾았다. 약탈한 다이아몬드를 제네바의 거대한 세관 보세창고에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이 다이아몬드는 위장 회사나 허수아비 대리인에게 넘겨져 시장에 유통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다이아몬드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제네바 공화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생산자인 셈이다. (234-235쪽)


원민족, 부족주의, 국가별 사례들.
그 가운데 잘 몰랐던 카메룬 이야기.

파리는 권력을 북부 출신의 전통적인 무슬림 군주 아마도 아하죠에게 넘겨줬다. 아하죠는 현 대통령 폴 비야에 의해 교체될 때까지 23년간 카메라 수도 야운데의 대통령 궁에 거주했다.
카메룬인민연맹(UPC)은 프랑스의 가식에 저항했다. 억압은 잔혹했다. 1970년 1월 15일 카메룬 서쪽의 바푸삼 중앙광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쉰 살의 에르네스트 콴디에가 헌병들에 의해 트럭에서 질질 끌려 나온다. 병사들이 발사 하는 순간 그는 ‘카메룬 만세!’를 외치고 얼굴이 먼저 바닥으로 거꾸러진다. 구경꾼들 가운데서 프랑스 장교 한 명이 나오더니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권총을 잡고 몸을 아래로 숙이고는 그의 관자놀이에 총을 2번 발사한다. 카메룬 해방전선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는 이렇게 살해되었다.
1960년 젊은 의사이자 카메룬인민연맹 의장인 펠릭스 롤랑 무미에는 제네바로 가서 외교적 지원을 받으려고 애썼다. 유엔에 정식 파견된 한 프랑스 ‘기자’가 그를 시내의 술집으로 초대했다. 저녁에 그는 심한 복통을 느꼈다. 그는 병원에 옮겨졌고 그곳에서 밤중에 죽었다. 그 기자의 신분이 곧 들통났는데 프랑스 국외 정보 방첩부 장교인 육군 대령 윌리엄 벡텔이었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경제학자이자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이며 식민지배에 저항한 투사인 카스토르 오센데 아파나는 1966년 적도의 정글에서 쫓기다가 콩고와 가봉과 카메룬의 국경 근처에서 살해당했다.
카메룬공화국은 훌륭한 문화와 용감한 종족들의 고향이다. 그러나 예전에 자행된 프랑스의 대학 살은 이 나라의 부패와 약탈, 그리고 주민 대부분을 괴롭히는 극심한 궁핍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저항운동도 조직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겨놨다. (244-246쪽)


비스마르크의 베를린회의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프리카.
이 문제는 참 궁금한데.... 독립의 봄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대체로 유럽 열강들이 그어놓은 국경을 인정. 은크루마가 주창한 범아프리카주의는 그 자체로 지역적 한계가 컸고 '대륙 전체'를 포괄할 수 없는 거였다 하더라도, 대부분 국가들이 국경의 재조정을 추구하지 않은 이유는 뭐였을까. 이 책에는 '국가들의 아프리카'라는 표현이 나오는 실체가 있는 모임이라기보다는 좌파-범아프리카주의 성향인 은크루마를 한 축으로 한 나라들/지도자들과, 우파-친서구 성향인 우푸에부아니 등의 그룹을 구분해 표현하기 위해 후자를 그렇게 이름붙인 것 같다.

비스마르크는 당대의 다른 정치가들과는 달리 식민지를 정복하는데 몰두하지 않았다. 그가 계속해서 유일하게 걱정했던 것은 자신이 1871년 드디어 이뤄냈지만 여전히 깨지기 쉬운 독일 통일과 독일 제국의 강력함과 명성을 공고히 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1885년 베를린회의를 소집했다. 베를린회의의 목표는 세계, 특히 아프리카의 식민지 질서에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는 “제멋대로의” 점령을 끝내고 유럽의 경쟁국들 간에는 “최초 정복자”의 권리가 유효하다는 점을 확정하려 했다. 또한 선박의 국제적 운항을 위해 큰 강들을 개방하고 노예무역을 방지하고 토착민 노동력의 사용을 통제하려고 했다. 약간의 국제적 관리도 도입되었다. 베를린회의는 살아있는 몸을 잘게 써는 식인종처럼 아프리카를 난도질했다. (248-249쪽)

1963년 5월 23일 아디스아바바에서 오늘날 아프리카연합의 전신인 아프리카통일기구(OAU)의 창립 회의가 열렸다. 가나 대통령 은크루마의 지휘 하에 통합된 하나의 아프리카 대륙을 꿈꾸는 추종자들은 세네갈 대통령 레오폴 세다르 생고르를 중심으로 ‘국가들의 아프리카’ 대표자들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이 대표자들의 뜻이 관철되었다. 결국 독립된 아프리카에서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OAU 헌장은 식민지 국경을 범하면 안 된다고 결정했다. 이로써 전통적인 집단적 정체성과 전승되던 위대한 문화의 단절이 성문화되었다.
민족의식이 싹트는 대신 많은 지역들에서는 부족주의가 지배했다. 현재의 모든 인종주의 형태 중에서 부족주의는 가장 무자비하고 가장 파괴적인 것 중 하나다. 부족주의는 원민족들의 집단적 의식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곳을 다스리는 인종집단들은 권력의 독점을 주장하며 독재 정부를 세우고는 자기들 각각의 부족 정체성의 이름으로 다른 인종집단들을 차별한다. (250-251쪽)

남수단공화국은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가장 오랜 민족해방투쟁을 거쳤다. 수단은 1899년부터 영국과 이집트가 공동 통치하는 식민지였다. 나세르와 자유장교단의 압박으로 두 나라의 공동 통치는 1956년 폐지됐다. 그러자 영국 식민지 세력이 수단에 사는 그리스도교 닐로트 종족들에게서 소집했던 에콰토리아 군단이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르툼의 무슬림 정권에 맞서는 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반세기를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젊은 누에르족과 딩카족 전 세대가 백나일 강의 늪지대와 정글과 사바나에서 투쟁 중에 죽고 산채로 화형 당하고 무슬림 군대의 포격과 폭탄에 부상당했다.
2011년 1월 15일 남수단의 자치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7월 9일 독립이 공포되었다. 딩카족의 살바 키르가 대통령이 되고 누에르족의 리에크 마차르가 부통령이 되어 국가 권력을 함께 넘겨받았다. 그러나 독립한 지 겨우 2년 남짓 한 2013년 7월에 인종적으로 다수인 딩카족이 단독 권력을 요구했다. 살바 키르는 마차르를 비롯해 누에르족의 모든 장관과 장군을 해임했다. 누에르족 가족들은 수천 명씩 수도 주바에서 달아났다. (252-253쪽)

무자비한 무슬림-아랍인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수단의 종족들은 비범한 용기를 갖고 결연하게 저항했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종교, 나라를 지켰다. 그런데 이 투쟁을 통해서는 어떤 조직적인 공동 의식도 생겨나지 않았다. 인종적인 소속을 뛰어넘은 민족의식이 태동하지 않은 것이다. 부족의 정체성은 예나 지금이나 최종 판단의 기준이고 최후의 피난처다.
승리를 쟁취해 외부의 압력이 더 이상 없어지자 공동의 전선은 해체되었다. 또 여러 인종집단들은 다시 각각의 집단적 의식을 조직할 수 있는 독점권을 넘겨 받았다. 나일강 종족들의 선진 문화는 아민 말루프의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서로에게 “흉악한 정체성”이 되었다. (25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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