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1914-1949
To Hell and Back Europe, 1914-1949
이언 커쇼. 류한수 옮김. 이데아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의 <유럽>을 읽으며 1월 한달을 보냈..........다기보다는, 1월에 읽은 책이 <에밀>을 빼면 이언 커쇼의 유럽사 책 2권뿐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유럽사 책을 몇 권 봤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진행 과정이 이제야(!) 좀 이해된다고 할까. 아시아 분야에서 중앙아시아가 블루오션;;으로 인기를 끌듯이, 근래(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유럽사 책들은 동유럽에 초점을 많이 맞추고 있는데 이 책도 그렇다.
분량도 충분(?)하고 내용도 충실한 책이었다. 첫 권은 1949년까지를 다루고 있으니 아무래도 1차, 2차 세계대전 중심인데 동유럽 쪽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제목이 '죽다 살아나다'라는 것이 매우 인상적임. 마크 마조어의 <암흑의 대륙>을 좀 더 쉽게 서술한 버전이라고 봐도 될 듯.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두루두루 다루려 애쓰고 있고, 다소간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여성들의 현실을 지적하려는 저자의 의지도 눈에 띈다.
여기서는 오로지 이 수십 년에만 나타내는 포괄적 위기에 맞물린 4대 요인을 찾아낸다. 첫째,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의 폭발. 둘째, 거세고도 조정 불가능한 영토 개정 요구. 셋째, 격심한 계급 갈등. 넷째, 자본주의의 장기 위기.
그 어느 요인도 제1차 세계대전의 제1차적 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각 요인의 새로운 독성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산물이었다. 이제 그 요인들의 치명적 상호 작용은 엄청난 폭력의 시대를 낳았고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23쪽)
1914년 7월 30일에 차르는 마침내 총동원에 동의했다. 베를린에서 이제 군사적 필요가 외교적 고려를 압도했다. 7월 31일에 전시상태 선언이 발령되었다. 독일의 핵심 관심사는 사회민주당이 반드시 전쟁을 지지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독일은 방어전쟁을 하도록 강요되었다고 보여야 했다. 이 정당화를 러시아의 총동원이 제공했다. 독일은 12시간 시한의 최후통첩을 러시아에 보냈고 8월 1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같은 날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해서 동원을 했다. 이틀 뒤인 8월 3일에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이 단호하게 중립을 선언했다면 전면 전쟁이 방지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레이의 파멸적인 망설임은 외교가 주도권을 발휘할 여지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궁극적으로 영국은 독일이 유럽 대륙을 지배할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벨기에의 중립을 존중하라는 영국의 최후통첩이 독일군이 8월 4일 중립국 벨기에 안으로 들어가면서 무시되었을 때 선전포고를 할 계기가 영국에 주어졌다. 얄궂게도 위기를 촉진하는 행위를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8월 6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해서 대열강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참전했다. 닷새 뒤에 프랑스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했고 영국이 하루 더 뒤에 마침내 선전포고를 했다. 이제 세르비아는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본 행사가 시작할 참이었다. (79-80쪽)
각 열강은 자국의 미래를 두려워 했다. 이 두려움은 어느 정도는 내부의 민주화 압력과 사회주의로, 아니면 두려워하던 대로 제국의 파열로 끝날 수 있는 거센 민족주의 요구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그 열강들은 대개는 서로를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독일은 특히 러시아를 두려워했고,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독일이 발칸반도와 근동을, 그리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치는 자국의 중대한 경제 생명선을 통제할까 두려웠다. 1870년에 프로이센에 침공당했던 프랑스는 독일에 피해망상에 가까운 두려움을 품었다. 영국은 상업 패권의 상실과 독일의 유럽 지배를 두려워했다. (81쪽)
유럽 대륙의 각 맞상대들은 공격이 으뜸이라고 상정했다. 공격이 결정적인 승리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신속하게 승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전쟁은 필수적이고 정당하다는 믿음, 그리고 그 전쟁이 단기전일 거라는 자기위안적 가정은 지배계급을 훌쩍 넘어서 많은 국민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것은 전면 전쟁에 들어가자 각 교전국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왜 그리 열광했고 심지어 아주 신나 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84-85쪽)
이 전쟁은 이전의 어떤 전쟁보다도 산업화된 대량 살육전이었다. 인간 육체가 살인 기계와 맞섰다. 독일군이 1915년 봄 이프르 부근의 연합군 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독가스를 전개한 뒤로 독가스가 널리 쓰였다. 1916년에 영국군 대공세의 일부로 전차가 솜Somme에서 첫선을 보였고 1918년에는 주요 일선 부대에서 사용되었다. 잠수함이 연합국의 해상 운송에 맞선 독일의 전역에서 1915년 이후로 주요 병기가 되었으며 해전의 성격을 바꿨다. 특히 항공기 과학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크고 작은 도시의 민간인이 공중폭격을 당할 무시무시한 가능성이 생겼다. 1914년 8월 6일에 독일의 체펠린 비행선 한 대가 벨기에의 리에주에 떨어트린 폭탄은 그 맛보기였다.
전시 프로파간다가 대중매체를 이용해 민족 전체에 대한 혐오를 주입했다. 교전국은 자국민을 새로운 방식으로 동원했다. 전쟁은 총력화하고 있었다. 프랑스 언론은 1917년에 총력전이라는 새 용어를 만들어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진정으로 전 지구적인 최초의 전쟁이어서 모든 대륙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된 까닭은 얼마간 특히 영국의, 그리고 프랑스의 세계 제국 때문이었다. 두 나라 모두 전쟁에 자국의 제국을 동원했다. (96-97쪽)
1918년 10월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잔존 부대가 비토리오 베네토에서 이탈리아군에 참패한 뒤 제국은 빈사 상태였다. 군대가 이제 해체되었다. 카를 황제가 10월 하순에 부대원들이 각각의 민족 군대에 합류하는데 동의했다. 10월 하순에 비상한 속도로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가 될 것이 자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있었다. 카를 황제는 권력을 마지 못해 포기하고 망명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 5세기가 끝났다. (166쪽)
튀르크의 전시 지도자들이 독일 잠수함 한 척을 타고 오데사로, 결국은 베를린으로 도주하면서 패전한 뒤에 이어서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의 소유령이 대부분 1870년대에 독립하고 1912년과 1913년에 발칸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유럽의 영토를 최종적으로 상실한 데다가 남쪽으로 줄어들어 터키 자체로 재편되었다. 위태롭게 둔중한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 지나치게 힘을 쓰다가 버텨내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으며 캅카스에서 영토를 얻으려는 시도에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동에서 1916년 이후에 일어난 아랍인의 반란은 오스만의 행정이 제국의 남부에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추산은 튀르크의 사망자 수를 높게는 250만 명으로 잡는데 이것은 영국 사망자 수의 3배다. 곧 튀르크는 독립 전쟁으로 빨려들어갔다. 1923년에 만신창이인 한 나라가 우여곡절 끝에 주권 독립국가로서 폐허를 딛고 나타났다. (667쪽)
독일의 복구에 없어서는 안 될 토대는 초인플레이션으로 거덜 난 통화의 안정화였다. 이 안정화에 연계된 것이 1920-2923년의 경제적, 정치적 분란 대부분의 뿌리에 있는 전쟁 배상금이라는 골치아픈 쟁점의 조정이었다.
1923년 가을에 미국의 금용인 찰스 게이츠 도스가 의장으로 있는 국제 전문가위원회가 전쟁 배상금 재검토에 착수했다. 도스 안 아래에서 점진적으로 분할 납입금을 늘리는 단계를 거쳐 배상금 지금이 훨씬 더 감당 가능해졌다. 문제는 전쟁 배상금을 갚을 돈이 주로 외국 차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쏟아져 들어오던 그 차관은 대부분 미국에서 왔다. 도스 안은 전후 세계에서 경제 우위가 미국으로 돌이킬 길 없이 옮겨졌다는 가장 명백한 표시였다. 영국의 전 지구적 차원의 경제 지배는 끝났다. (266-267쪽)
이때쯤이면 1930년대 초엽의 대공황이 문화의 분수령으로 판명되었다. 그 위기의 충격 아래 새로운, 위협하는 현대적인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대표적인 문화 양식에 대한 공격이 파시즘이 보유한 병기고의 강력한 일부가 되었다. 이 반응은 독일에서 가장 극심했다.
파시즘적인 우파가 지닌 호소력의 문화적 기반은 시계 바늘을 신비로운 전통 시대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아니라 ‘전통적’인 문화적 가치의 이미지를 원동력 삼아 유토피아적인 대안적 미래상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였다. 이 미래상 자체는 그 방식에서는, 즉 과학기술의 진보를 정치 목표에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근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근대성’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전 유럽에 확산된 자유주의적 다원주의, 개인주의, 민주주의, 자유라는 사상들을 철저히 거부하는 근대성이었다.
아방가르드 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괴리는 대다수 사회에 공통이었다. 더 불길한 것은 그 두 문화를 민족 쇠락의 징후로 비난하는 문화적 비관론이었다. (311쪽)
1920년대에 국제연맹은 동유럽을 가로질러 줄지어 이동하는 난민 수만 명을 돕는 역할을 했다. 또한 국제연맹은 초인플레이션으로 거덜 난 통화의 안정화를 거들 대규모 채권을 제공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가부도를 모면하는 일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심지어 대공황 동안과 이후에도 국제연맹은 전염병과 싸우고 인신매매를 막고 세계무역의 조건을 개선하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업무를 계속했다. 그러나 강제로 평화를 유지하고 필요하다면 평화를 강제한다는 그 핵심 목적에서 국제연맹은 완전한 실패적으로 판명되었다.
실제로는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첫 국제 질서 교란이 일어났다. 1931년 9월에 일본이 만주를 점령했던 것이다. 이 만행을 규탄하려고 중국이 국제 지지를 호소했을 때 국제연맹은 뒤늦게 조사단을 만들어서 그 문제의 전체 배경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제안했다. 거의 한 해를 들여 보고서를 작성했고 마침내 일본의 행위를 고발했다. 일본의 침략은 세계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이 1933년 2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게 한 것 말고는 효과가 없었다.
이것은 국제연맹을 주도하는 양대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의 허약상을 널리 알렸다. 영국의 해군력을 극동에서 유지한다는 것은 이미 과도하게 확장된 영국의 방어 자원에 추가로 압박을 가한다는 뜻이었다. (428쪽)
폴란드는 독일이 점령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념의 실험장이었다. 서프로이센과 포즈난과 오버슐레지엔 지역이 독일제국에 병합되어서 독일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전에 프로이센의 일부였던 영토를 단지 그냥 복원하지 않고 꽤 많이 확장했다. 이 지방은 주민이 압도적으로 폴란드계일지라도 이제 무자비하게 ‘독일화’될 터였다. 폴란드 중부와 남부가 ‘폴란드 총독령’이라고 불렸고 “인종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개체”를 내버리는 쓰레기장으로 여겨졌다. 폴란드인 경멸은 독일에 널리 퍼져 있었다. 히틀러 스스로가 폴란드인을 “사람이라기 보다는 짐승”이라고 서술했다.
기아 선생의 배급제가 시행되었다. 폴란드 문화는 근절되고 폴란드가 국가라는 관념은 일절 소멸되고 폴란드 지식인은 제거되거나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질 터였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용 절멸수용소가 되기 한참 전에 폴란드인에게 극단적 공포의 장소였다. (599쪽)
독일이 1941년 4월에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 뒤 새로 만들어진 국가인 크로아티아에서 자기들을 위해 더러운 짓을 해 줄 다른 이들을 찾았다. 독일이 우스타샤 파시스트들의 지도자인 안테 파벨리치를 우두머리로 삼아 세운 정권은 표현할 길이 없는 공포의 통치를 펼쳤다. 파벨리치의 목표는 크로아티아에서 200마뉴명에 이르는 세르비아인의 3분의 1을 가톨릭 신자로 만들고 3분의 1은 내쫓고 3분의 1은 죽여서 세르비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정치 폭력이 오랫동안 흔한 일이었던 곳에서조차 그 같은 인간적 재앙은 전에는 전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우스타샤는 1943년까지 사람을 40만 명 남짓 죽였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를 넘겨받았을 때 예전의 유고슬라비아에 있었던 민족 적대감을 확실히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스타샤의 이 무지막지한 만행은 전쟁 이전의 어떤 단계에서 존재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심한 민족 혐오를 낳았다. (604-605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위한 다른 어딘가가 발견되어야 했다. 폴란드에 있는 살육 장소로 대거 강제 이송하는 프로그램이 1942년 초엽에 등장하고 있었다. 이 때쯤이면 살육 방법으로 대량 총살보다 이동 가스실과 고정 가스실이 더 선호되었다. 가스실 차가 1941년 12월에 가동하기 시작했고 가동을 중지할 때까지 유대인 15만 명쯤을 죽였다. 1942년 3월과 4월에 폴란드 유대인이 동부의 베우제츠와 소비부르로 실려가서 고정 가스실 에서 죽고 있었다. 6월에 바르샤바 근처의 트레블링카가 그 뒤를 이었다. 트레블링카는 폴란드 유대인을 모조리 없애버리기를 목표로 삼은 라인하르트 작전의 일환으로 여름까지 작동한 3대 절멸수용소의 세 번째 수용소였다.
이 세 수용소에는 노동의 요소가 없었다. 사실상 수용소는 잘못된 명칭이다. 경비병 그리고 가스실과 시체 소각장에서 주검을 처리하는 더러운 일을 해줄 특별노무대로 잠시 보류된 약간의 재소자를 빼면 거주자가 없었다. 라인하르트 작전의 수용소는 그곳으로 보내진 유대인을 죽인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 했다. 도착한 뒤 몇 시간을 넘긴 이가 거의 없었다. 1943년 가을에 문을 닫을 때까지 이 수용소에서 주로 폴란드인인 유대인 175만 명 쯤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 동안 살육된 전체 총수의 거의 반인 270만명 쯤의 유대인이 1942년 한 해 죽임을 당했다. 대다수가 라인하르트 작전 수용소에서 죽었다.
1943-1944년의 주요 살육 단지는 아우슈비츠였다. 1942년 이후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대인의 태반은 폴란드 외부에서 왔다. 아우슈비츠는 유럽 전역에서, 즉 슬로바키아 프랑스에서 시작해 벨기에와 네덜란드로 그리고 곧 다른 나라들로 확장된 유대인 강제 이송이 1942년 개시되었을 때 이미 거대한 강제수용소에 겸 노동수용소였다.
강제 이송된 이들은 대개는 아우슈비츠에 있는 모체 수용소에서 2km 떨어져 있는,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더 큰 보조 수용소인 비르케나우로 보내졌다. 1942년 5월 이후로는 노동할 수 없는 유대인이 노예노동을 할 수 있는 유대인과 분리되어 곧장 가스실로 보내졌는데 가스실의 살인 용량은 하루에 5000구에 가까운 주검을 태울 수 있는 새 시체 소각장이 1943년에 지어졌을 때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최대의 강제 이송이 마지막 강제 이송이었는데 그것은 1944년 봄과 여름에, 즉 독일의 헝가리 점령 뒤에 이루어진 헝가리 유대인의 강제 이송이었다. (615-617쪽)
(독일 군인들의) 모호한 희망은 1944-1945년에 사라졌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도 의미를 지녔다. 무엇보다도 동부에서 자기와 전우가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지를 알고 있기에 계속 싸운다는 것은 버틴다는 것을 뜻했다. 복수심에 찬 붉은 군대가 승리한다면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틀림없이 파괴될 터였다.
독일의 군사 동맹국에 전쟁의 의미는 훨씬 덜 명확했고 사기를 유지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주로 루마니아인인 비독일인 군인 69만 명이 1941년에 소련 침공에 가담했다. 소련군에 사로잡힌 비독일인 추축국 군인이 거의 30만 명이었다. 독일의 동맹국들에는 싸워서 목숨을 잃어가면서 쟁취할 가치가 있는 사회나 체제의 명확한 미래상이 없었다. 탈영은 흔한 일이었고 사기 저하는 걷잡을 수 없었고 통솔력은 형편없었다.
돈 강에서 싸우고 있는 이탈리아 군인들도 자기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주 궁금해 했다. 이탈리아 군인 대다수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차츰 차츰 그들은 무솔리니가 밉살맞은 독일인에게나 어울리는 전쟁에 자기를 끌어들였다고 느꼈다. 그들이 패배한 대의를 붙들고 계속 싸우기보다 항복하기를 선호한 것은 아주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1943년 9월에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자기 나라 북쪽은 독일군에, 남쪽은 연합군에 점령당하자 이탈리아인은 자기 자신, 가족, 고향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이념적 대의를 위해서는 끈질기게 싸울 태세를 갖추었음을 보여줬다. (628-629쪽)
거대한 다민족 전투 조직체인 붉은 군대의 군인에게 전쟁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다. 미학력자 출신으로 원시적 조건에서 살다가 온 이가 대다수였다. 보병 4분의 3이 농민이었다. 많은 이가 싸워야 했기 때문에, 선택권이 남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을 모면할 수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싸웠다. 그러나 붉은 근대의 그토록 놀라운 전력과 사기가 두려움 하나만으로 지탱되었을 리 없다. 그들의 동기부여에서 이념이 한 역할을 얕잡아 보면 잘못일 것이다.
그것은 그저 애국심은 아니었다. 애국심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은 서로를 보완했다. 군인은 볼셰비즘으로 훈육되었다. 붉은 군대 군인에게 자기가 수행하고 있는 것은 방어 전쟁, 정의의 전쟁이었다. 그것은 강력한 동기 부여였다. 그 전쟁은 실질적 의미를 지녔다.
서유럽 연합군 전투원에게 전쟁은 단일한 의미로 환원될 수 없었다. 전쟁이 터진 뒤에 영국과 프랑스와 폴란드에 곧 영연방 자치령이 가세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가 막대한 병력을 내놨다. 인도만 해도 250만 명을 내놨고 이들은 주로 일본군과 벌이는 전투에서 전개되었으며 북아프리카 식민지는 1942년 이후에 프랑스 군사력의 재확립을 위한 기지를 내놓게 되었다. (630-632쪽)
리히텐슈타인과 안도라와 바티칸 같은 조국과 더불어 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터키 에이레 단 6개 중립국이 용케도 비교적 별 탈 없이 빠져나갔다. 그렇지만 그 나라들의 중립 노선은 제각기 달랐다. 이념 성향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노선을 정했다. 그 노선은 훨씬 더 큰 정도로 전략적 필요성과 경제적 이점의 결과였다.
국민의 4분의 3이 독일어 사용자인 스위스는 독일이 침공이 올 가능성을 걱정했고 간접적으로 분쟁에 끌려 들어갔다. 독일이 나중에는 연합국이 스위스 영공을 거듭 침범했다. 그리고 양편 다 스위스 은행을 이용 했다. 식량과 연료를 수입해야 할 필요성은 스위스가 독일과 교역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정밀기계 수출은 독일의 전쟁 수행 노력을 도왔다. 스위스 은행은 다량의 독일 금을 보유했는데, 점령된 나라들에서 강탈한 그 금의 대부분은 전쟁에 크게 중요한 원료를 다른 중립국에서 사는 데 쓰였다.
스웨덴의 중립은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심하게 훼손되었다. 영국의 봉쇄로 교역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것이 전쟁 초기단계에 스웨덴과 독일의 무역이 크게 늘어나는 이유가 되었다. 스웨덴에 절실하게 필요한 석탄은 독일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병력과 무기의 통과를 허용하면서 중립이 깨졌다. 독일군 병력이 1941년에 소련 공격에 앞서 스웨덴을 거쳐 핀란드로 수송되었다. 그러나 스웨덴은 전쟁 후반기에 스위스처럼 중요한 첩보를 연합국에 제공했다.
포르투갈은 중립이면서도 독일보다 연합군을 선호했다. 대조적으로 프랑코는 훗날 자신의 영리한 지도력으로 스페인이 전쟁에 말려들지 않게 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추축국 편에 서서 참전하려고 안달했다. 주요 원료 수출품이 독일로 보내졌고 독일 잠수함이 스페인에서 연료를 재보급하도록 허용되었고 2만 명에 가까운 스페인인이 자원에서 동부 전선에서 독일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결국은 독일이 질 것이 뻔해지고 식량과 필수품을 연합국이 차단 하는 바람에 정신이 확 들자 프랑코는 차츰 태도를 바꿔서 자국의 중립이 연합국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허용했다.
터키는 전쟁 초기에는 비록 참전하라는 모든 압력에 저항했을지라도 연합국을 선호했다. 터키의 입장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국의 전쟁 수행 노력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터키는 독일이 1941년에 자국의 국경까지 다가오자 독일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독일의 승전에 대비하는 보험성 필수대책이었다. 터키는 1945년 2월 23일에야 순전히 상징적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639-6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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