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티모르 섬의 ‘마마 알레타’

딸기21 2022. 4. 19.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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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에 있는 티모르. 면적 3만km2의 동서로 길쭉한 섬이다.

 

동쪽 절반은 인도네시아로부터 힘겨운 투쟁 끝에 독립해 2002년 나라를 세운 동티모르이고 서쪽 절반은 인도네시아 땅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이스트누사텅가라 주이지만 흔히 서티모르라고 부른다.

 

Aleta Baun / One Earth

 

알레타 바운 Aleta Baun(1966~)은 서티모르 몰로 지역의 토착민이다. 그가 사는 를로바탄 마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숲에서 소와 말을 돌본다. 알레타도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가축을 키우고 산을 오르고 숲에서 놀았다. 그의 삶은 마을 공동체와 떼어놓을 수 없다. 어릴 적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마을 여성들이 돌아가며 알레타를 키웠다. 아버지는 ‘아마프’라고 불리는 부족 지도자였다. 몰로 부족사회에서 아마프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동시에, 땅과 사람들을 지키는 책임을 진다. 

 

‘몰로’는 마을 사람들의 터전인 무티스 산을 지키는 신화 속 여신의 이름인데 그것이 땅 이름이 되고 마을 이름이 되고 주민들의 이름이 됐다. 주변 토착민 부족들은 비와 날개, 생명을 주는 신이 무티스 산에 산다고 믿는다. 서티모르의 대부분이 산성 토양인 것과 달리 몰로는 땅이 비옥하고 숲이 울창하다. 13개 강이 무티스 산에서 흘러내려와 일대를 적신다. 몰로 토착신앙에서 여성은 신성한 존재이며 여성의 이름을 딴 지명이 많다. 토착민들에게 대대로 전해오는 가르침대로 알레타 역시 어릴 적부터 나무는 자신들의 영혼이자 지켜야 할 존재라고 배우며 자랐다. 

 

“땅은 살, 물은 피, 숲은 핏줄”

 

198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알레타는 마을 학교의 교사로 일했다. 월급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 후에는 지역 가톨릭 대학의 교수인 존 캠벨-넬슨 신부의 집안일을 해주고 돈을 벌었다. 캠벨-넬슨 신부는 알레타를 지역 단체와 연결해주면서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했다. “자연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둬야 해, 언젠가 마을을 위해 필요할 때가 올 거야”라는 신부의 가르침을 따라 알레타는 1992년 ‘여성의 목소리 센터 Sanggar Suara Perempuan’라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게 됐다. 

 

www.researchgate.net

 

알레타의 말을 빌리면 “몰로 사람들은 땅과 영적으로 연결돼 있을 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땅은 살이고, 물은 피이고, 바위는 뼈이고, 숲은 핏줄이며 머리카락이다. 그 중 하나라도 파괴되면 사람은 죽는다.”

 

땅이 망가지고 물이 더러워지고 바위가 쪼개져나가고 숲이 잘라지는 그런 위기가 정말로 마을을 덮쳤다. 이들이 기대어 사는 무티스 산은 대리석, 망간, 금이 나오는 곳이고 주변엔 유전과 가스전도 있다. 그러나 자원은 자연이 주는 축복이지만 때로는 저주가 되기도 한다. 특히 지구 상 대부분의 힘 없는 토착민들에게는 저주가 될 때가 많다. 몰로 사람들이 그런 토착민들 가운데 하나였다. 자신들의 풍요로운 땅에서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동의나 금전적인 보상도 없이 조상들의 땅이 파헤쳐지고 삶이 망가지는 일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지방 정부는 주민들과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무티스 산에서 대리석 채굴을 허가하기 시작했다. 숲이 잘려나가 산사태가 일상이 됐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강물을 마시고 밭에 물을 대왔는데, 산사태로 하천들이 오염되면서 특히 하류 마을 사람들이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나무가 잘리고 산이 파헤쳐지는 것을 알레타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은 1996년이었다. 3년 후 그는 여성들 세 명과 함께 채굴을 중단시키기 위해 뭔가 하기로 결심했다. 집과 마을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항의의 표시를 하려면 마을과 광산 사이를 6시간씩 걸어서 오가야 했다. 그들은 현수막을 내걸지도, 광업회사 사무실을 점거하지도 않았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가장 잘 하는 일로 맞서자고 마음 먹었고, 그것이 바로 직물짜기”였다. 

 

Mama Aleta Inspires at the 2014 Summit on Women and Climate. /Goldman Environmental Foundation

 

뒤에 자카르타글로브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했듯이 그들은 “그저 조용히 옷감을 짰다.” 알레타를 비롯한 150명의 여성들이 2006년부터 1년 동안 채석장의 대리석 바위에 앉아 전통 옷감을 짜는 시위를 했다. 광산기업들과 지방정부에는 눈엣가시였다. 기업들은 현상금을 내걸었고, 알레타를 죽이려 한 자들도 있었다. 세 아이를 데리고 숲에 숨어들어가야 했던 적도 있었다. 다리에는 칼자국이 남았다. 마을 사람들은 몇 번씩 체포됐고 심하게 구타를 당한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알레타는 주민 수백 명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마을 원로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됐다. 1년 뒤 광부들은 떠났다.

여성은 토착문화의 기둥

 

알레타는 “시위를 시작하면서 여성들이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여성들도 시위를 함께 하면서 땅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들이 몰로 문화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했다. 여성들이 숲에서 먹거리와 약초와 염료를 구해 생계를 잇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성들이 협상에 나서는 것이 절실하고 또 유리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남성들이 전면에 나섰더라면 폭력적인 사태가 벌어졌을 수 있고 더욱 거센 공격을 받았을 터였다. 

 

여성들이 채석장에서 시위를 하는 동안 남성들은 집에서 요리하고 청소하고 아이들을 돌봤다. 멀리 떨어진 섬의 끝자락에서 벌어진 시위에 시선이 쏠렸고, 이들의 전통 직물이 언론에 소개됐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정부는 결국 2010년 몰로의 광산 채굴을 모두 중단시켰다. 

 

Inside the weaving protests of West Timor. /Mongabay

 

자원을 채취하는 것은 사람들이 쓰기 위해서다. 채굴된 원료로 만든 물건을 쓰면서 채굴에 반대할 수 있을까? 자카르타글로브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알레타가 했던 답변이 인상적이다. 

 

“대리석으로 무엇을 만드는 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사는 우리에게는 대리석이 어떤 혜택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것만 팔고,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은 팔지 않는다. 산을, 강을, 나무를 팔 수는 없다.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들이니까. 하지만 옷감이나 옥수수, 우유는 팔 수 있다.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알레타와 몰로 토착민들은 대리석을 파내지 않아도 잘 살아왔고, 대리석 광산이 문을 닫은 뒤에도 잘 살고 있다. 2010년부터 몰로 주민들은 이웃 부족민들과 함께 광업회사들을 상대로 한 승리를 기념하는 문화 축제를 열고 있다. ‘광산 따위는 없어도 생명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알레타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여성들은 투쟁을 이끌면서 가장 심각한 핍박의 대상이 되곤 한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싸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심의 초점은 기후변화 대응을 넘어 ‘기후정의’ 쪽으로 점점 향해가고 있다. 거기에는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정부과 싸우는 것, 삶과 공동체에서 대안적인 해결책을 만드는 것, 기득권 남성들의 정치권력에 맞서 새로운 상상을 실천으로 만드는 것이 포함된다.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결국 지구 환경을 지키는 가장 큰 무기인 것이다.

 

Marble Mining in Indigenous Mollo Territory. /Environmental Justice Atlas

 

토착민들의 권리와 이익을 더 잘 지켜내기 알레타는 2011년에는 트리퉁갈 수라바야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2013년에는 골드만 환경상을 수상했고 3년 뒤에는 인도네시아의 독립 지도자 얍 티암 히엔의 이름을 딴 권위있는 인권상 Yap Thiam Hien Award을 받았다. 그러나 마마 알레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서티모르 전역의 지역단체들과 함께 전통 숲 지도를 만들고 있다. 땅에 대한 원주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언제 비집고 들어올지 모를 광산 채굴이나 상업적 농업, 석유나 가스 개발의 위협으로부터 땅을 지키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그를 ‘마마 알레타’ 즉 어머니라 부른다. 환경운동가들은 ‘인도네시아의 아바타 avatar’라 칭한다. 힌두교 신앙에서 아바타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신의 화신이다. 

 

무엇보다 마마 알레타는 미래 세대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다. 2021년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 António Guterres에게 보내는 서한 공모전에서 인도네시아의 대학생 나디아 자피라 Nadya Zafira가 수상을 했다. 자피라는 서한에서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불평등과 기후 위기를 언급하면서, 특히 원주민 사회와 젊은이들이 소외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의 서한은 “조상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마마 알레타 바운에게서 배운 특별한 지혜를 이야기하고 싶다. 돌은 뼈이고 물은 피이며 숲은 핏줄이고 땅은 살이다”라는 말로 문장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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