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양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 외교장관이 해임됐다. 현지언론 마다가스카르트리뷴은 18일 리샤르 란드리아만드라토 외교장관의 모든 일정이 취소되더니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전격 해임됐으며 국방장관이 당분관 외교부 일도 맡아 한다고 보도했다.
이 나라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2019년 안드리 라조엘리나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로 외교장관이 4번 바뀌었다. 해임된 란드리아만드라토는 경제재정부 장관을 지낸 사람인데 그 때도 구설에 올라 물러났다. 지난 3월 내각에 복귀했을 때에도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해임은 늘 있어온 정치 다툼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유엔 총회에서 대통령과 총리의 승인 없이 러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했다가 물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유엔 총회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지역의 '주민투표'를 명분 삼아 이들 지역을 합병하려 하는 것을 규탄하는 결의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143개국이 찬성표를 던졌고 란드리아만드라토 장관도 거기에 동참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해임됐다. 대통령은 사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쫓겨난 장관은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유엔 결의안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에서 '중립적인 입장'이며 우크라이나 위기와 관련된 결의안에서 그전까지 매번 기권했다.
[마다가스카르트리뷴] Ministère des affaires étrangères : Richard Randriamandranto limogé
마다가스카르에서는 2009년 마르크 라발로마나 당시 대통령이 강압적 통치로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쫓겨나면서 정치적 위기가 벌어졌다. 한국 기업이 이 나라 농지의 절반을 헐값에 임대하는 계약을 한 것도 당시 위기의 한 원인이었다. 그 때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이 아프리카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무력 사용’을 우려한다며 정부의 시위 유혈진압을 비판한 것은 지금 돌아보면 웃지 못할 코미디다. 정권이 축출된 뒤 기업인 출신의 라조엘리나 현 대통령이 2014년까지 5년 동안 군을 등에 업고 임시 대통령을 맡았다. 그 뒤 수도 안타나나리보 시장을 지내다가 2018년 대선에서 이기고 이듬해 취임했다. 정치적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대통령은 비과학적인 치료법을 주장했고, 2021년 극심한 가뭄으로 '기후변화 기근'이 닥쳤을 때에나 사이클론이 강타했을 때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비난을 받았다.
라조엘리나와 러시아의 밀착관계는 4년 전 대선 때부터 두드러졌다. 미국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 공작원들이 그 선거 때 마다가스카르 거리에서 ‘현금이 가득한 배낭’을 들고다니며 언론과 유권자들에 공공연히 뇌물을 뿌리고 다녔다. 당시 기사에는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그 측근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마다가스카르 대선에 영향을 미친 정황이 소개돼 있다.
[뉴욕타임스] How Russia Meddles Abroad for Profit: Cash, Trolls and a Cult Leader
러시아 뉴스를 보아온 사람에게는 낯설지 않은 예브게니 프리고진, 그의 이름이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케이터링 회사를 운영하면서 ‘푸틴의 셰프’라 불렸던 사람이다. 미국의 제재를 오랫동안 받고 있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기 직전 유럽연합(EU)도 제재 대상에 올린 인물이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인터넷연구대행사’라는 러시아의 수상쩍은 조직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유리한 가짜뉴스들을 퍼뜨렸는데, 일종의 ‘댓글알바 사업단’인 그 조직을 운영한 사람이 그였다. 시리아 내전 때 러시아는 독재정권을 지원했고, 바그너라는 민간군사회사가 용병들을 시리아에 보냈다. 근 10년 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시아 민병대’를 자처하며 분란을 일으켜온 것도 바그너의 용병들이다. 이 회사도 프리고진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마다가스카르에까지 팔을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400km 떨어진 섬나라다. 면적이 58만㎢로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고, 국가 기준으로 보면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섬나라다. 오랫동안 생태계가 고립돼 진화했기 때문에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연다큐멘터리에 곧잘 등장하는 곳이지만 정작 그 섬나라에 사는 사람들 상황은 좋지만은 않다. 원래 토착민은 오스트로네시아계, 아시아 쪽에서 온 섬사람들이었지만 9세기쯤 아프리카에서 반투족 이주자들이 건너와 정착했다. 부족 단위로 흩어져 있다가 19세기 초에 메리나 고원지대 엘리트들이 전국을 장악하면서 마다가스카르 왕국으로 통합됐다. 하지만 100년이 못 갔고 1897년 프랑스 식민지가 됐다. 1960년 독립했지만 지금도 토착언어인 말라가시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쓴다.
[구정은의 '수상한 GPS'] 마다가스카르와 갈라파고스 사이
생태관광과 농업을 내세우고 있지만 2020년 1인당 실질GDP가 1500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이다. 2800만명의 인구 가운데 대다수가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고, 정치위기와 기후재앙과 팬데믹을 거치면서 경제사정은 근 몇년 새 계속 더 나빠졌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는 나오지 않고 전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 40%에도 못 미친다. 개발된 자원도 별로 없다. 2000년부터 미국이 ‘아프리카 성장기회법(AGOA)’이라는 것으로 면세혜택을 줘서 느리게나마 섬유제품을 수출하며 경제성장을 했지만 지원조치는 10년만에 끝났다. 2014년 정권이 축출되기 전까지 이런 나라를 상대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은 ‘민영화와 자유화’라는 정책을 강요했다. 정치위기 안팎으로 GDP는 11%나 줄었고 외화 수입은 바닐라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는 왜 이 나라에 관심을 기울여왔을까. 크렘린과 마다가스카르의 수상한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가 2019년 폭로됐다. 푸틴에게 밉보여 곤욕을 치르고 영국 런던으로 쫓겨난 러시아 기업가 미하일 호도르콥스키가 후원하는 단체가 정보들을 입수했고, 영국 신문 가디언이 받아서 공개한 것이다. 당시 폭로된 문건들을 보면 러시아는 아프리카의 10여개국 정권과 밀착관계를 구축하고 군사협정을 맺었다. 냉전이 끝난 뒤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접었던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 병합 뒤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아프리카에서 '우군 만들기'에 나선 것이었다. 미국이 2007년 ‘아프리카사령부’를 만들어 군사기지를 늘리고 중국을 견제하며 영향력을 키우려 한 것이 러시아를 자극한 측면도 있다.
러시아의 아프리카 작업을 물밑에서 주도한 것은 역시나 프리고진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옛 식민통치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반서방 감정을 부추기는 일을 프리고진이 맡았다. 러시아 정부의 비호 아래 바그너의 용병들이 들어가 이들 아프리카 국가의 정권을 지킬 병력을 훈련시켰다.
[가디언] Leaked documents reveal Russian effort to exert influence in Africa
사하라 사막 남쪽의 내륙국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북부 이슬람 지역과 남부 기독교 지역으로 갈라져 내전이 일어났는데 바그너 용병들과 러시아 군인들이 ‘평화유지’ 명목으로 배치됐다. 러시아 기업들은 이 나라를 발판으로 광물 거래를 확대했다. 아프리카 중부에 드넓은 땅을 가진 콩고민주공화국에도 러시아 군사전문가들과 무기가 들어갔다. 수단에서는 남부 소수민족을 학살해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던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을 러시아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밀어줬다. 러시아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알 바시르는 끝내 축출됐지만 말이다. 프리고진의 수하들은 인도양의 또 다른 섬나라 코모로를 찾아가 프랑스와의 갈등을 부추겼다. 10여개국에 러시아 의료진을 보내며 인도적 지원의 모양새를 내기도 했다.
러시아는 2019년 첫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를 열어 50여개국 지도자를 불러모았다. 또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범아프리카적인 자각’을 일깨우려는 선전전도 계획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뒤 세계의 이목을 끈 러스키 미르(Russkiy Mir), 즉 러시아를 중심에 둔 세계관인 푸틴의 유라시아주의의 복제판이었다. 모로코에 본사를 둔 웹사이트 ‘아프리카 데일리보이스’, 마다가스카르에서 운영되는 프랑스어 뉴스서비스 ‘아프리카 파노라마’ 등이 러시아의 선전도구로 계획됐다. 다만 ‘프리고진 이니셔티브’로 불린 이런 프로퍼간다 작업들이 실제로 얼마나 진척됐는지는 불투명하다.
러시아 측은 협력 수준에 따라 아프리카 국가들에 등급을 매겼다. 우간다와 적도기니, 말리는 협력을 키워야 할 나라들이었고 리비아와 에티오피아는 '협력이 가능한 나라'로 분류됐다.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협력 수준이 높은 나라들이었다.
마다가스카르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수단과 함께 협력 수준이 '최고'인 나라들로 표시됐다. 문건들은 라조엘리나가 대선에 승리한 것이 '회사(바그너)의 지원'에 힘입은 것임을 명시했다. 러시아는 발행부수가 200만부에 이르는 이 나라 최대 신문을 후원하며 여론을 조작했다고 한다. 처음에 러시아는 6명의 대선후보에게 고루 손을 내밀었다가 막판 흐름을 보고 라조엘리나에게 지원을 몰아줬는데 이것이 먹혀들었다. 마다가스카르는 사회주의 성향의 정부가 집권했다가 1992년 무너진 뒤 서방 쪽으로 기울었는데 러시아가 다시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실제로 라조엘리나는 크렘린의 후원에 적극 호응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미심쩍은 ‘라조엘리나 암살 음모’가 적발돼 프랑스 국적자 2명이 체포됐는데, 일각에서는 러시아 측이 개입된 정치공작으로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뒤에도 마다가스카르는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을 계속 강화했다. 지난 3월 말 두 나라는 5년 단위의 군사협력협정을 갱신했는데 여기에는 마다가스카르의 무기 구입과 군수품 개발, 군 장병 훈련과 장비유지를 러시아가 돕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무기체계가 BRDM-2 장갑차, 미그 MiG-21 전투기, 안토노프 수송기 등 옛소련 시절의 무기들로 구성돼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디펜스웹] Madagascar and Russia strengthen defence ties
라조엘리나 정부는 "우리는 모든 나라와 협력한다"며 중립을 내세웠고,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해 러시아와의 협정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 협정이 알려지고 바그너와의 관계가 도마에 오르자 "그 회사는 이 나라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며 부인했다. 하지만 마다가스카르는 원했든 원치 않았든 신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꼴이 돼버렸다.
그렇게 된 나라가 아프리카에 이 섬나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유엔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벨라루스, 북한, 시리아, 니카라과 등 35개국이 러시아를 비난하는 결의안에 찬성하지 않았는데 절반이 아프리카 국가들이었다. 라프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7월에 아프리카 4개국을 돌았는데 그 중 이집트를 제외한 3개 나라는 결의안에 반대했으니, 외교전이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아프리카 전체로 보면 26개국은 찬성했고 18개국은 반대했다. 4개국은 기권했다.
다른 대륙에 비해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방 편에 서기를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푸틴의 아프리카 투자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힘을 앞세운 열강들에 수탈당한 역사의 피해자로서 ‘지구적 부정의’를 비난하며 배상을 요구해온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의 이런 행보는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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