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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핵과 인간>

딸기21 2023. 10. 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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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과 인간
정욱식. 서해문집. 13/8

 

 

넘나 훌륭한 책. 문재인-트럼프 시기의 희망적이었던 분위기에서 끝난 것이 아쉬울 수밖에. 윤석열 정부 들어와서 한미일 동맹 강화한다며 말 그대로 나라 팔아먹고 있는 꼬라지 보면 말이다.

"한국 대통령이 반북과 친미·친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으면 이는 미일동맹에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만다."

 



핵이라는 물리학의 결정체와 변화무쌍한 인간 의식이 만나면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핵은 관계다.
'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전쟁도 완전히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결론은 한국전쟁과 핵무기의 관계는 상당히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은 '세계 전쟁'이었다. 한국전쟁과 핵무기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단순히 과거사의 기술이 아니라 오늘날 한반도 핵문제를 역사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비핵화를 설계하는 데 주춧돌을 놓는 작업이다. 미국의 대북 핵 위협과 북핵의 뿌리는 바로 한국전쟁에 있기 때문이다.
-16-17

한반도 핵문제를 4개의 시대로 나누어 접근했다. 한반도에서 '제1의 핵 시대'는 미국 핵 독점 시기다. 1945년 한반도의 해방과 분단에서부터 미국이 전술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철수한 1991년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핵 시대 1.5'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1992년부터 6자회담이 결렬된 2008년까지를 이 시기로 삼을 수 있다. 미국의 핵독점이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핵개발에 나섰지만 외교적으로 해결을 도모했던 시기였다. 세 번째 시기는 협상은 사라지고 북한의 핵보유가 명확한 시기다. 시기적으로는 2009년부터 북한이 "국가 핵무력 건설 완성"을 선언한 2017년까지라고 할 수 있다. 분문에서는 이를 '한반도 제2의 핵 시대'로 규정한다. 끝으로는 2018년부터 시작된 '협상다운 협상의 시대'다. 
-18

두 가지 ‘상식'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미국의 원폭 투하가 진짜로 겨냥한 상대가 누구였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과연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결정적인 이유가 원폭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후자의 의문부터 따져보자. 번스타인은 "모든 사정을 고려해봤을 때 미국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예정되어 있었던 11월 이전에 일본이 항복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가 주목하는 일본 항복의 결정적 요인은 바로 '소련'이다.…일본은 폭격에 익숙해 있었고 원폭 투하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 고 이를 공식 확인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가 '최고위원회'를 소집하지 않은 것이 이를 뒷받침해준 다. 8월 9일 오전 소집된 최고위원회 회의에서도 나가사키 피폭 문제는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46-47

왜 조선인 사망률이 전체 사망률에 비해 2배 정도 높았던 것일까? 강제징용되어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이들은 대부분 허름한 공장 기숙사나 그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원폭이 바로 그 군수공장 인근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생존자 3만 명 가운데 2만3000명은 해방된 조선으로 돌아갔고 7000명은 일본에 남았다. 살아남은 조선인 피폭자 중 상당수는 일본인 피폭자들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자료에 따르면, 2009년 기준 일본인을 포함한 전체 피폭자 가운데 생존자는 약 26만 명이었다. 그런데 한국인 생존자는 1% 조금 넘는 27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인 피폭자 비율이 10% 정도였는데 생존자는 1% 남짓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만큼 원폭 투하국인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을 강제징용한 일본도, 그들의 조국인 한국도 한국인 피폭자를 외면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6년 4월 기준 국내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피폭자 가운데 생존자는 2501명이다. 2세 피해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복지부는 76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한국원폭2세환우회'에 등록된 피해자는 1300명 정도다. 수치상으로 따지면 한국은 세계 2위의 원폭 피해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잘 모른다.
-55

수소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에 놀란 많은 사람들이 반핵주의자로 돌아섰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조지 케넌과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1954년 3월 비키니섬 수소폭탄 실험의) 가공할 폭발력 앞에 인류 사회는 전율했다. 이들 가운데는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특별히 다르게 봐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핵무기 옹호자였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이 실험을 목도하고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영국은 더이상 살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 수소폭탄 실험 브라보(Bravo)'는 반핵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저명한 반핵 단체인 '분별 있는 핵정책을 위한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ee for a Sane Nuclear Policy)'와 비폭력행동위원회(Committee for Non-Violent Action) 등과 영국의 핵 폐기 캠페인(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그리고 초국적 단체인 퍼그워시(Pugwash) 등 저명한 반핵단체들이 생겨났다.
-77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배경에는 "자유 진영"의 강력한 반격이 없으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강하게 깔려 있었다. 이런 시각을 반영하듯 북한의 남침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전 지구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한반도 참전은 물론이고 대만 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했다. 필리핀의 게릴라 소탕작전을 지원하는 한편,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민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했다.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이 있고 이를 스탈린이 벌일 제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확신한 트루먼은 NATO 강화와 독일 재무장에도 박차를 가했다. 무엇보다 트루먼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에 행정부 내 강경파들이 작성•권고한 NSC-68의 승인을 유보했다가 한국전쟁 직후에 승인했다.
NSC-68은 전 세계 공산주의 봉쇄와 소련과의 일전을 겨냥한 대규모 군비 증강 프로그램이었다. 60년 후 〈AP통신>의 지적처럼, 한국전쟁은 "한반도 의 지속적인 위기를 가져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영원히 지구적 군사패권 국가를 지향하게 만든 전쟁"이었던 것이다.
-112-113

커다란 핵무기로는 북한과 같은 작은 나라를 공격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낀 미국은 작고 실전에서 사용이 용이한 전술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도 뒤질세라 핵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전쟁 이전까지 핵폭탄을 '종이호랑이' 에 비유했던 중국이 핵개발에 대한 인식을 바꾼 계기도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핵무기 역사에서 결정적 사건으로 작용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인종 차별주의' 논란이다. 미국의 무차별적인 대북 폭격으로 이미 아시아에서는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1950년 8월 영국 외무 장관은 미국의 무분별한 아시아 정책은 "아시아가 점차 서방에 등을 돌리고, 이는 소련에 이익이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도의 뉴데일리는 미국이 아시아에서만 핵폭탄을 투하한다고 주장했고, 〈뉴욕타임스>는 인도에서 반미 감정이 전례없이 고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시아인들의 반발이 UN을 통해 쏟아졌다. 필리핀 정부는 원폭 투하의 "도덕적 결과", 즉 "12억 아시아인들의 증오"가 미국을 향해 터져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외교관은 UN 주재 미국 대표에게 "아시아인들은 미국의 원폭 투하를 백인종의 유색인종에 대한 행동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의 네루 총리는 원자폭탄은 오직 아시아를 상대로 사용되는 무기라는 인식이 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질 것이기 때문에 원폭 사용을 피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141-142

한국전쟁이 미국의 핵전략에 미친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전술핵무기'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핵폭탄은 주로 소련의 대도시와 전략시설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한반도와 같이 영토도 좁고 대규모 군사•산업 시설도 거의 없으며, 미국이 "제한적인 목표"로 벌이는 전쟁 지역에서는 사용이 여의치 않았다. 작은 나라와의 전쟁에서 쓸 새로운 핵폭탄 개 발의 필요성을 느낀 미국은 전술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1952년 5월 미국 네바다주 사막에서 핵 대포(nuclear canon) 시험에 성공했다. 미국이 '전술용'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사용에 신중했던 분위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149

핵무기를 실전에서 승리를 보장해주는 '절대무기'이자 상대방을 길들일 수 있는 유용한 ‘외교 수단'으로 간주하는 정책 결정자들의 인식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 핵전략을 주조하는 데 인식론적 뿌리를 이룬다. 적의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공격에도 핵무기로 보복하겠다는 '대량보복 전략'의 역사적 뿌리는 바로 핵 위협이 한국전쟁을 끝냈다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자기만족적 판단에 있었던 것이다.
-161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국의 '대량보복' 전략 채택이었다. 그 핵심대상은 북한과 중국이었다. 덜레스는 1958년 4월 7일 펜타곤 고위관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대량보복" 전략을 고안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이 상정한 대량보복 전략은 동북아와 유럽에서 차이가 있었다. 미국은 "북한군이 비무장지대 남쪽을 대규모로 공격해오면, 1시간 이내에 핵무기 사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반면 유럽에서는 개전 초기에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181

저렴한 방법으로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을 유지하는 것이 핵무기를 이용한 '대량보복'에 있다고 판단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에도 착수했다. 그에게 "대량보복" 전략은 지상전의 대안이자 주한미군 감축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국의 핵 사용 위협이 한국전쟁을 종식시켰다는 아이젠하워의 믿음과 선전은 "대량보복 전략에 대한 회의론과 비판을 무 마시키는 데 유용한 수단"이었다. 또한 미국 안보전략의 핵심을 핵무기에 둠으로써 "펜타곤으로 하여금 재래식 군사력 증강에 경제성을 고려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아이젠하워가 제창한 '뉴룩'이다.
-182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면서 '제한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을 몸소 체험한 케네디 행정부는 핵 군비통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핵전쟁 전략을 수정한다. 제한 핵전쟁 전략으로는 전면적인 핵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른바 ‘상호확증파괴(MAD)' 전략을 공식화한 것이다.
-205

쿠바 미사일 위기는 북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은 1959년 1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우호협력상호지원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김일성이 1961년 7월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하고서야 비로소 체결됐다. 김일성이 자존심을 접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데는 남한에서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소련의 안보공약을 믿을 수 없 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결국 북한식 ‘자주국방'에 박차를 가한다. 1962년 12 월 조선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는 두 가지 핵심정책을 공식화했다. 하나는 '국방과 경제 병진노선'이고, 또 하나는 4대 군사노선 채택이다. 북한의 과도 한 군사화와 경제적 궁핍화의 씨앗은 바로 이때 뿌려졌다.
-206

김일성은 "국방에서의 자위"를 천명하면서 북한 전역을 파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깊이 지하철을 파고 전국 방방곡곡을 지하요새화하는 '대량 대피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거대한 병영국가로 변모해갔고 내부의 모순, 특히 경제난이 켜켜이 쌓여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북한은 미국이 남한에 대량 핵무기를 배치하자 군사력의 70%를 평양-원산 이남으로 결집시켰다. "적 껴안기" 전술, 즉 북한군을 한미연합군에 최대한 근접시킴으로써, 미국의 핵공격을 어렵게 만들어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대규모 남침 징후로 간주되면서 한반도의 군비경쟁과 군사적 긴장이 더더욱 고조되었다. 미국이 핵공격 계획을 깊숙이 논의할수록, 북한은 더 깊게 땅을 팠다. 미국이 전술핵을 한국에 전진배치할수록, 북한은 병력과 무기를 DMZ에 더더욱 근접시켰다.
-189

1954~1955년 미중 간 대만해협 1차 위기 때 날카롭게 대립했던 미국과 중국은 1958년 2차 위기에서는 정면충돌의 위기까지 겪었다. 중국이 대만해협을 봉쇄하려고 하자 미 공군은 중국에 핵무기를 투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핵무기가 고폭탄과 같은 재래식 무기라는 (공군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구분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던 아이젠하워가 놀랍게도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구분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소련의 반응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핵공격 위협과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마오쩌둥의 무모해 보이는, 그러나 일관되고도 단호한 입장에 아연실색했다.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미중전쟁이 발발하면 소련 역시 휘말릴 것으 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인 3억 명이 목숨을 잃더라도 "세월은 흘러 우리는 더 많은 아이들을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흐루쇼프는 "정말 역겹군"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안토닌 노보트니)는 "인구가 겨우 1200만밖에 안 되는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고 푸념했다.
헨리 키신저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대만해협 위기를 조장한 "마오쩌둥의 진짜 의도는 핵전쟁 위험을 크게 고조시켜 소련으로 하여금 중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지원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1차 대만해협 위기를 거치면서 소련이 중국의 핵개발을 적극 지원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소련은 미국의 핵공격 방어를 중국 손에 넘겨줌으로써 미래에 또다시 위기가 발생하면 말썽쟁이 동맹국(중국)과 거리를 두기 위해 중국의 핵개발을 돕기로 했다"고 분석했다.
-211-212

1969년 9월 닉슨은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와 비밀협약을 체결해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용인하는 대신, 이스라엘은 핵실험을 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핵보유를 선언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의 묵인하에 핵무기를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모델은 박정희가 핵개발을 결심하는 데 중요한 참고사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이스라엘에는 감아주었던 눈을 한국에는 부릅떴다. 한국이 일정 수준의 핵무장 잠재력을 갖는 것을 미국이 허용하리라는 청와대의 기대감은 물거품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핵개발 시도를 무산시킨 반면에,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 및 대북 군사태세는 강화해나갔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 내 미국 핵무기 배치의 공식 확인이었다. 또한 한미 양국은 1976년부터 ‘팀스피릿 훈련'을 시작했다. 대북 핵공격 훈련이 포함된 이 훈련은 박정희의 핵개발 포기와 미국의 안보공약 강화의 교환'이었다. 그런데 이 훈련의 실시 여부에 따라 이후 한반도 정세는 크게 출렁였다. '팀스피릿'이 한국의 핵개발을 저지하는 데는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북한의 핵개발을 야기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다.
-257-258

팀스피릿은 1976년부터 1993년까지 실시된 한미연합군사훈련이다. 최대 20만 명의 병력과 미국의 전략폭격기를 비롯한 핵공격 무기가 대거 투입되었고, 이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 북한은 팀스피릿을 핵전쟁 준비훈련으로 간주하고 훈련 때마다 사실상 전시태세로 돌입하곤 했다. 1993년에 김일성을 면담한 게리 애커먼 미국 의원은 "그가 팀스피릿을 거론할 때,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방정보국 국장은 의회에서 "북한은 팀스피릿 훈련에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라고 증언했다. 
-328

NPT는 ‘3개의 기둥'으로 이뤄져 있다. 비확산과 핵군축, 평화적 핵 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비핵국가의 핵무기 보유를 금지하는 비확산 의무는 IAEA에 의해 검증되고 이를 위반할 경우 UN 안보리를 통한 제재 대상이 된다. 반면 핵보유국의 핵군축 의무는 '선의'로 남겨둔 채, 어떠한 강제조항이나 검증체제도 없다. NPT를 가리켜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라고 일컫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NPT는 가장 이상한 조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물무기금지협약, 화학무기금지협약, 대인지뢰금지협약, 집속탄금지협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군축조약은 해당 무기의 개발·보유·실험·사용 등을 금지하고, 보유한 것은 폐기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NPT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이런 NPT의 결함은 다양한 보완책과 대안을 부각시켰다. 핵실험 금지 및 핵무기용 핵물질 생산 금지는 NPT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첫걸음이 다. 그러나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과 핵물질생산금지조약(FMCT)은 핵보유국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관련국들 사이의 이견으로 아직 발효조차 되지 않고 있다. ’비핵국가를 상대로 핵보유국이 핵무기 사용 및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과 핵보유국 간에도 핵무기 선제 사용을 금지하는 것을 국제법으로 만들자는 제안은 NPT 협상 당시부터 나왔다. 그러나 이 역시 핵보유국들의 반대로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핵보유국들의 성의 없는 태도에 분개한 상당수 국가와 국제반핵 평화단체들은 NPT를 대체할 새로운 조약 체결 운동에 돌입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2017년 7월 UN 총회에서 122개국의 찬성으로 채택된 핵무기금지협약(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이다. 이 조약은 핵무기 개발•실험•생산•제조•비축•사용 및 위협 등 모든 핵무기 관련 활동을 포괄적으로 금지할 뿐만 아니라, 기존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를 요구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하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공인된 핵보유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 스와 NPT 비회원국이면서 핵무기를 제조•보유하고 있는 인도, 파키스탄, 북한, 이스라엘은 협약 채택을 위한 협상부터 거부했다. 또한 NATO 회원국들도 모두 거부했다. 세계 양대 피폭 피해국이자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는 한국과 일본도 북한의 핵위협을 이유로 반대했다.
-273-274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에서 실제로 연소된 우라늄의 양은 800g 정도였다. 100만kW의 현대식 원자로가 1년에 태우는 우라늄양은 약 1000kg으로 히로시마 핵폭탄보다 1200배가량 많다. 죽음의 재도 이에 비례해서 만들어진다. 세슘-137로 비교해보면, 히로시마 원폭이 뿜어낸 양은 약 3000c138 였고,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방출된 양은 약 250만G, 그리고 100만kW 원전이 1년간 만들어내는 양은 약 300만ci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표준이 된 100만kW급 원전은 원자로 내부에서 300만kW의 열을 만들어내는데, 이 중 전기로 전환되는 양은 100만kW에 불과하고 나머지 200만kW는 바다에 버리는 구조로 운전된다. 원전의 효율이 이렇게 떨어지는 이유는 터빈으로 보내는 증기의 온도를 280°C 이상 올릴 수 없어서다. 반면 화력발전소는 500°C까지 올릴 수 있어 발전 열효율이 50% 이상이다. 원전은 바닷물을 냉각수로 이용하는데, 100만kW 원전 1기는 초당 바닷물 70톤의 온도를 7°C가량 상승시킨다. 도쿄대의 미토 이와오 교수는 “‘원자력발전소'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아. 정확히 말하면 '바다 데우기 장치'야"라고 지적했다. 
'죽음의 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인류 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 숙제이기도 하다. 핵 폐기물은 원전 전 과정에서 나온다. 무엇보다 사용후연료봉은 그 자체가 엄청난 방사능 덩어리다. 죽음의 재 가운데 반감기가 짧은 것으로 알려진 세슘-137은 30년이고, 플루토늄-239는 무려 2만4000년이다. 장갑, 옷, 장비 등 저준위 폐기물의 반감기는 300년이다. 사용후연료를 일컫는 고준위 폐기물은 무려 100만 년에 달한다.
-283

미국 국무부는 북한이 제출한 문서는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확인했다. 2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컨트롤 타워였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2011년 11월에 출간한 회고록 《더 이상의 영광은 없다(No Higher Honour)》에서 "북한은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대한 신고를 (우리가) 매우 수용할 만한 수준으로 준비한 것으로 보였다고 적었다.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역시 회고록에서 북한이 제출한 핵 신고서에는 "핵실험에서 사용한 플루토늄의 정확한 양을 포함해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 있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플루토늄 불일치 논란이 일단락되면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불렀던 부시는 임기 말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결단을 내렸다. 1992년 북한의 플루토늄 최초 신고가 정확했다는 것을 부시 행정부가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북핵문제의 최초 발단이 되었던 '플루토늄 불일치'를 완전히 새롭게 조명해야 할 이유는 분명해졌다. ‘북한이 1990년을 전후해 핵무기 1~2개를 만들 수 있는 10kg 정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상기한 내용은 북핵문제가 미국의 허위, 혹은 과장된 정보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329-321

1970년 NPT가 발효된 이후 국제 적으로 통용되는 국제법적 용어는 '비핵지대(nucear weapons free zone)'다. 그런데 왜 한반도에서는 비핵지대가 아니라 '비핵화(denuclearization)'라는 표현을 사용해온 것일까? 왜 미국은 "조선반도 비핵지대"를 거부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고집한 것일까? 남북한의 권리, 즉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는 제한하고 핵보유국인 미국의 의무는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는 미국을 비롯한 핵보유국의 의무사항은 단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비핵지대 조약에서는 핵보유국에 비핵국가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과 지대 내 핵무기 배치 금지 등을 포괄한다. "조선반도 비핵지대"에 동의하면 미국이 한반도와 그 인근에서 누려왔던 특권적 권리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질 터였다. 특권적 권리란 미국이 필요에 따라 핵 선제공격 옵션을 유지하고, 핵무기를 한국에 재배치하거나 일시적으로 경유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312-313

월포위츠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특기할 만한 인물이다. 그가 레이건 행정부 때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맡고 있을 때 일이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주 중국 부공사를 지낸 찰스 프리먼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1983년과 1984년에 걸쳐 남북한과 미•중이 참여하는 베이징 4자회담을 제안했다. 프리먼은 월포위츠의 강력한 반대로 4자회담이 번번이 무산되었다고 밝혔다. 
레이건 정부 국무부 차관보였던 월포위츠는 조지 H. W. 부시 행정부 때 국방부 차관으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상관인 체니와 함께 주한미군 감축계획을 중단하고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주도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국방부 부장관으로 돌아온 그는 네오콘의 일원으로 대북강경책과 한미동맹 재편을 주도한다.
-327

MD는 1990년대 이후 북핵을 비롯한 한반도 문제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의회는 1995년 클린턴 행정부에 '미국이 직면한 탄도미사일 위협에 대한 국가정보평가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요구에 따라 CIA, DIA, 백악관과 국무부의 정보부서 등이 참여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결론은 "미국 본토에 대한 즉각적인 탄도미사일 위협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발끈한 공화당은 초당적이고 독립적인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1996년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럼스펠드 위원회' 라고도 불린 '미국에 대한 탄도미사일 위협평가위원회'였다. 위원장으로 기용된 도널드 럼스펠드는 'MD 보일러"라는 별명을 얻고 있던 안보정책센터와 하이 프론티어의 고문을 맡고 있었다. 그 결과 1998년 7월에 나온 것이 바로 <럼스펠드 보고서>다.
-353

김대중 정부 출범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한미 양국에서는 흡수통일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지만, 이건 김대중의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흡수 통일론은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화해협력, 점진적인 통일론과 미일중러 4대국 평화보장론으로 구성된 DJ의 오랜 철학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또한 국가 부도 상태에 있던 한국이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북한을 흡수통일한다는 것은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경제적 자해조치로 간주되었다. 무엇보다 독일과 달리 한반도에서 흡수통일 시도는 제2의 한국전쟁으로 귀결될 위험도 컸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는 '게임 체인저'로 나섰다. 1998년 2월 출범과 함께 대북정책의 목표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 붕괴에 대비해 국제적 관리체제 구축을 목표로 두 었던 김영삼-클린턴의 4자회담 전략을 북한의 점진적 변화에 방점을 두는 방향으로 바꾸기로 하고 미국을 설득하기로 한 것이다. 동시에 4자회담에 종속되어 있던 남북대화를 분리해 상호보완적인 '병행 전략'을 채택한다. 흡수통일 배제, 무력사용 불용, 화해협력 추진을 3대 원칙으로 제시하고 국제공조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남북관계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던 것이다. 
-358-359

김대중 대통령은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도 한미공조를 중시했다. 김대중 정부는 미국의 가장 큰 우려사항, 즉 주한미군의 미래에 관 해 미국을 안심시켰다. 김정일에게 주한미군이 통일 이후에도 주둔하는 문제에 관해 동의를 받았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김대중은 아쉬운 결정을 하고 만다. 총선을 불과 3일 앞둔 4월 10일 남북정상회담 합의 소식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정상회담을 '총선용 신북풍' '퍼주기'로 비난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364

1차 남북정상회담은 MD를 요격했다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지정학적 파장을 몰고 왔다. 하지만 그해에 집권에 성공한 미 공화당 정권은 한반도 평화를 희생양으로 삼고 꺼져가던 MD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안타깝게도 김대중 정부는 이 점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381

이란과 북한 역시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이란은 민주적 요소를 갖고 있었고 북한은 미국과의 합의를 비교적 성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들 나라까지 '악의 축'으로 지목된 것일까? 〈뉴욕타임스>의 피터 베이커에 따르면, 부시의 연설문 초안에는 이라크만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콘돌리자 라이스와 스티븐 해들리(국가안보 부보좌관)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비칠 것을 우려해', 북한과 이란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시점에 북한은 핵과 미사일 관련 합의를 비교적 잘 지키고 있었다.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기로 한 제네바 합의를 이행해 부시 행정부로부터 중유도 받고 있었다. 
-388

라이스가 부시에게 발표를 권고한 내용은 이랬다. "미국은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해결을 추구한다. 대통령은 모든 옵션은 테이블 위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미국은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라이스의 메모를 받아든 럼스펠드는 사인펜을 들고 가장 중요한 대목, 즉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던 부분을 삭제한 것이다. 라이스는 "우리는 북한에 다자 간 회담을 제안했고, 다자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을 포함해 모든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적었다. 럼스펠드는 가장 중요한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을 포함해”라는 부분을 지워버렸다. 
-408

2007년 9월 6일 이스라엘이 시리아 건물을 공습했는데,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 시설이 북한이 지어준 흑연 감속로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북핵문제의 초점은 북한의 핵'개발'에서 '확산'으로 옮겨갔다. 미국의 독립언론인이자 연구자인 가레스 포터는 끈질긴 추적 끝에 파괴된 시설은 원자로가 아니라 폐기된 미사일 격납고였다고 밝혔다. 
-462

한국 대통령이 반북과 친미·친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으면 이는 미일동맹에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만다. 위키리크스 폭로에 따르면 오바마 당선 한 달 후인 2008년 12월 5일,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은 주한 미국 대사관 측과 오찬 회동을 갖고 이렇게 강조했다.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는 북한에 사용할 '광범위한 채찍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1월부터 미국이 제공한 북한의 로켓 발사 준비 정보를 유출하면서 대북 강경여론 조성을 도모했다. 미국은 검증 논란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의 10.3 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20만 톤 상당의 에너지 지원을 완료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검증 문제를 이유로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20만 톤 가운데 5만5000톤의 잔여분 선적을 계속 늦추고 있었다. 일본 역시 납치 문제를 이유로 중유 한 방울도 북한에 보내지 않고 있었다. 
오바마의 대북정책을 걱정했던 이명박 정부에 북한의 로켓 발사 움직임은 반전 카드로 활용됐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로켓 발사 시 UN 안보리 회부 및 제재 부과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482-483

2009년 4월 북한의 로켓 발사와 한미일의 강경 대응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있어서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우선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포용'에서 '봉쇄'로 전환됐다. 북한이 본격적인 핵 능력 강화로 나선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장거리 로켓 발사- 6자회담 거부 및 2차 핵실험- 플루토늄 재처리 재개 및 우라늄 농축 활동 발표 등으로 이어진 북한의 숨가쁜 행보는 북한의 핵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동북아 차원에서도 한미일은 MD를 고리로 3자 간 군사협력을 크게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을 야기하며 동북아에 또다시 냉전의 먹구름을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486-487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강력한 요구 속에 북한의 로켓 발사를 UN 안보리에 회부했다. 어떤 나라가 위성을 발사했다는 이유로 UN 안보리에 회부된 것은 처음이었다. 안보리는 이란에도 같은 규제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란이 2009년 2월 위성을 발사했을 때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란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던 오바마 행정부는 “유감"을 표하는 수준에서 자제했던 것이다.
북한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6자회담 전면 거부 및 영변 핵시설 재가동, 2차 핵실험 및 ICBM 시험발사 경고,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개발 시사 등 초강경 카드를 모두 내놓은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5월 25일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위성 발사->UN 안보리 회부-> 북한의 반발 및 핵실험- > UN 안보리의 추가 결의'라는 악순환의 공식이 만들어졌다.
아마도 북한은 2009년 들어 핵보유국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협상용 성격이 짙었다면, 이때부터는 핵무기를 손에 넣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494-495

이러한 피해, 특히 인명 피해 사실은 왜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베 정권은 2013년 '특정지정비밀보호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비밀을 누설한 사람은 최고 10년, 비밀을 보도한 언론인은 최고 5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또한 '암질환등록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방사능에 관한 의학적인 데이터와 정보 공유를 불법화한 것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IAEA, UN 원자방사선 영향에 관한 과학위원회, 후쿠시마현과 후쿠시마 의대가 비밀협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방사능 피해에 관한 의료정보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비밀의 장막을 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따른 피해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최대한 막아왔던 것이다. 주류 언론들도 이에 가세했다. 
-522

‘탈핵' 주권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먼저 한국이 핵무기에 의한 안보 의존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그 구체적인 선언으로 '북핵 해결 시 미국의 핵우산에서도 벗어나겠다'는 입장을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자체적으로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계속 보유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면서 북한과도 탈원전형 협력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국제무대에서 핵무기 사용이나 핵무기 자체를 금지하는 국제조약 체결 움직임에 적극 동참할 필요도 있다. 아울러 한반도 비핵화를 넘어 동북아 비핵지대 논의를 주창하고, 이를 주도하는 것 역시 한국의 '탈핵' 외교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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