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51

31. 1830년, 발칸 반도의 '검은 조르제'

31. 1830년 세르비아·그리스 혁명 뒤의 발칸 반도 어느새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고... 제국의 갈라진 틈을 거대한 균열로 만드는 것은 '봉기', 수탈당하던 사람들의 저항이겠지요. 1804년 베오그라드에서 투르크 주지사의 혹정에 시달리던 세르비아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차 세르비아 봉기라고 불리는 봉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스만 중앙정부의 대응이 참 희한합니다. 주지사 측과 민중들이 싸우는데, 일단 베오그라드의 혼란을 무마해야 하니 반란군에게 오히려 무기를 줘서 이기게 만듭니다. 주지사는 내팽개치더라도 일단 질서회복부터.... 라는 걸까요. 힘 빠진 제국은 변경의 소란에 이렇게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세르비아 반란군을 이끈 것은 돼지를 사고파는 일을 하던 조르제 페트..

30. 나폴레옹 이후, 1815년의 동유럽

30. 1815년의 동유럽, 신성동맹과 구시대의 종말 나폴레옹의 러시아 공격(1812년)은 재앙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 2년도 못 가 프랑스 제국은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연합군, 그리고 그들을 지원한 영국 등에 밀려 무너졌습니다. 연합 세력이 프랑스를 침공한데 이어 나폴레옹은 1814년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승리한 열강들은 비엔나에 모여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을 재편했습니다. 승자들의 이익나누기에서 동유럽은 중요한 몫을 차지했습니다.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승전국 연합은 유럽 지도를 자기들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그렸습니다. 또 자신들의 통치 하에 있는 모든 영토에 경찰국가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낡은 왕정 질서에 향후 어떤 위협도 가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

29. 19세기, '민족주의의 시대' 동유럽의 변화

4부 19세기-1918년 민족주의의 시대 PERIOD OF NATIONALISM 29. 1809년의 동유럽 어느새 시간은 흘러~ 흘러~ 19세기로 넘어옵니다. 2차, 3차 폴란드 분할이 이뤄지던 시기는 이미 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나 서유럽의 정치문화에 격변이 오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과 함께 혁명군을 통해 확산된 자유민주 ‘국가(nation)’라는 개념은 사뭇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폴란드인들의 ‘국가’는 이제 갈기갈기 찢겨나갔지만 국가와 국경이라는 망할놈의 개념은 신성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이 신성화는 국가라는 개념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인 동시에 ‘계몽’을 통해 퍼져나간 것이었습니다. 동유럽에서도 서유럽과 비슷한 양상의 정치적 자각이 일어났습니다. 밖에서..

28. 왕위를 내놓은 왕가, 찢겨나간 폴란드

28. 1772-1795년 폴란드 분할 폴란드가 정점에서 밀려나 쇠락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국가를 떠받쳐줄 통합된 사회정치적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까지 폴란드는 내부적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폴란드 귀족들은 너무 힘이 강해져 왕실의 권위에 맞먹으려 했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귀족 집단들을 서로 통합할만한 실질적인 단일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랍니다. 저야 뭐 잘 모르지만서도... 귀족들의 회의체인 '세임 Sejm'은 ‘자유거부권(Liberum Veto)’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정책을 무산시켜 행정을 마비시키기 일쑤였습니다. 이 자유거부권은 귀족들이 나약한 왕실을 윽박질러 얻어낸 것으로, 세임에서 단 한 명의 귀족이 반대해도 정책이나 법안..

27. 주정뱅이 술탄과 오스만 제국의 몰락

27. 17-18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쇠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정점에 올려놓은 술레이만 대제가 1566년 죽고 그의 아들 셀림2세가 즉위했습니다. 그런데 셀림2세의 별명은 '주정뱅이'였습니다. 영어로는 Selim the Sot 혹은 Selim the Drunkard... 아버지의 영어식 호칭이 Suleiman the Magnificent 인 것과 비교하면 참 얼굴 팔리는 별명입니다. 덕망 있는 군주의 치세가 끝나면 꼭 이렇게 쇠퇴를 재촉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지요. 그것이 어디 개인의 문제이겠습니까마는. 술레이만 대제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은 점차 안팎에서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안으로부터의 쇠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창 융성하던 시기의 오스만 정부가 갖고 있던 독특한 구..

26. 합스부르크가, 동유럽의 '새로운 태양'

26. 16-17세기 합스부르크가의 부상 어릴 적 읽은 순정만화나 역사책에 많이 나오던 합스부르크.... 꽤나 오랜 기간 유럽을 지배했던 왕실이죠. 합스부르크가가 형성된 것은 11세기 무렵. 합스부르크가는 14-16세기 중·동부 유럽의 패권을 놓고 경쟁한 여러 왕가들 중에서는 시기적으로는 마지막으로 부상한 세력입니다. 원래 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 시절 오늘날의 스위스 동부 일대에 봉토를 갖고 있던 독일계 귀족 가문 중 하나였는데, 영주들 중에서도 무명인 축에 속했다고 합니다. 이 가문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273년 루돌프 백작 Rudolf I 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1273-91년 재위)가 되면서부터였습니다. 당시 독일의 선거후들은 루돌프가 특출난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를 황..

25. 폴란드, 스웨덴, 코사크, 러시아... 폴란드와 러시아의 기나긴 악연

25. 16-17세기 폴란드의 성쇠 한동안 머물렀던(?) 투르크제국과 이스탄불을 떠나, 다시 폴란드로 가봅니다. 야드비가 공주와 야기에워 공의 결혼을 통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합쳐지면서 '정략결혼을 통한 왕실-국가간 결합'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했지요. 1565년 루블린 조약으로 통일이 공식화되면서, 폴란드 귀족들의 관료 체제가 리투아니아 귀족사회에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왕자공주 혹은 왕과 여왕의 결혼이 '나라끼리의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몽땅 다 끼리끼리 결혼한 것도 아니고... 리투아니아는 이후 모든 영역에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됐다고 보는 것이 역사가들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일방적인 관계라는 게 있나요. 폴란드인들은 리투아니..

24. 터키의 이스탄불, 예전의 모습은 어땠을까

24. 16-17세기의 이스탄불 요즘 이스탄불 탁심 광장 재개발에 반대하는 시위 소식이 많이 들려왔지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시위대와 만나 재개발 공사를 '일단 중단하겠다'고 함으로써 잠시 소강국면을 맞고 있는 듯합니다만. 이스탄불... 콘스탄티누스의 도시에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그리고 오스만투르크 제국 아래에는 이스탄불로. 이 도시처럼 찬란한 도시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어요. 오래전 이스탄불을 여행한 뒤에 "세상 어느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도시는 저마다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고요? 하지만 이스탄불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터키가 자랑하듯 '두 대륙이 만나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그 역사와 문화와 풍경은..

23. 적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았던 오스만의 지배자, 술레이만 대제

드디어 가까운 시대??로 접어듭니다! 23. 16세기 중반 유럽에서 정점에 오른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드디어 이 사람의 시대가 됐습니다. '술레이만 대제'로 알려진 술탄 술레이만1세 Süleyman the Magnificent (1520-66년 재위)... 술레이만은 '솔로몬'의 터키식 명칭이죠. 술레이만 치하에서 오스만 제국은 유럽으로의 팽창을 계속합니다. ‘노예 군단’으로도 불렸던 잘 훈련된 예니체리 보병부대와 기병부대를 필두로 한 술레이만의 군대는 유럽의 적들과 만나 연전연승을 거뒀습니다. 군사적 성공을 거듭하며 그의 제국은 다뉴브 분지 깊숙한 곳으로 영토를 늘렸습니다. 술레이만은 유럽의 지배자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습니. 오스만 제국에서는 그의 통치 기간 건축, 예술, 법학, 문학, 외교..

22. 나라를 넓힌 폴란드와 '야기에워 체제'

22. 14-15세기 폴란드의 팽창 오늘은 14~15세기 폴란드로 가봅니다. 이 시기에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그럭저럭 안정됐고, 문화적으로도 번영을 구가합니다. 하지만 북쪽에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발트 해 연안에서부터 내려오는 튜턴 기사단과 점점 늘어나는 독일계 이주민 집단으로 인해 혼란이 조금씩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독일계 이주민이 세력화하면서 폴란드의 포메라니아(폴란드어로는 Pomorze- 여기를 참고하세요) 통치권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폴란드 내륙에서 발트 해로 접근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게 됐습니다. 갈수록 강해지는 튜턴 기사단과 폴란드인들 사이에 14세기 내내 충돌이 심해졌지만 폴란드 정부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름이 예쁜 포메라니아... 이런 곳이로군요 ^^ 지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