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198

어제의 오늘/ 세계를 떠돈 예술혼의 귀향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은 1906년 12월 5일 평양의 돈많은 여관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찬송가 소리에 이끌려 동네 예배당에 다니면서 풍금을 손에 댄 안익태는 맏형이 일본에서 사온 바이올린에 푹 빠졌고, 평양 종로보통학교 입학 뒤에는 취주악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능숙하게 익혔을 정도로 음악에 소질과 흥미가 많았다고 한다. 집이 유복했던 덕에 여러가지 악기를 접해볼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복이었다. 1918년 숭실고등보통학교 입학 뒤에는 축음기와 첼로를 선물받았고 방학이면 서울에 와 캐나다인 선교사에게 특별 음악과외까지 받았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을 번안해 불렀던 임시 ‘애국가’를 접한 것은 3·1운동이 일어났던 이듬해 여름, 역시 서울에 와서 과외를 받을 때였다. 평양으로 돌아간..

어제의 오늘/홍콩이 중국에 돌아간 날

1일은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되돌아간 지 12년 되는 날이다. 1997년 7월 1일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주권환수식에서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아편전쟁으로 빼앗긴 홍콩의 주권을 근 100년만에 다시 찾아왔다”며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새천년을 3년 앞둔 홍콩에서는 기념식 며칠 전부터 밤마다 성대한 불꽃놀이와 축제가 열려, 21세기의 용으로 떠오르는 중국을 자축했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아시아의 금융·무역 중심지였던 홍콩이 공산주의 중국 하에 들어가 어떤 변모를 겪을지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전례없는 ‘일국양제(一國兩制)’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권 환수 12년을 맞아 홍콩의 국민교육센터는 최근 의미있는 여론조사..

어제의 오늘/베를린 봉쇄와 '사탕 폭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 편이 되어 싸웠던 미국과 서유럽 간에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 1948년 3월. 서방은 패전국 독일 내 자신들의 관할구역을 합쳐 하나의 경제단위를 만들기로 하고는 서베를린에 마르크화를 도입하는 등 ‘서독화’를 밀고 나갔다. 여기 반발한 소련은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를 박차고 나갔으며, 베를린과 서독을 잇는 철도와 도로·수로까지 차단했다. 6월 24일 소련은 미국·영국·프랑스와 소련 등 4국으로 구성됐던 베를린 행정위원회는 폐지됐다면서 “서유럽 연합국은 이제 베를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세계를 짓눌렀던 냉전의 서막이 된 ‘베를린 봉쇄’의 시작이었다. 봉쇄 사흘째부터 미국과 영국은 항공편으로 서베를린에 생필품을 공수했고, 수출길이 막힌 서베를린의 공업생..

어제의 오늘/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

1972년 6월 17일 미국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의 경비원 프랭크 윌즈는 후미진 계단 구석에 이상한 녹음기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이 건물 내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을 염탐하기 위한 도청 장치를 설치한 남자 5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범인들 중 한 명인 제임스 매커드의 수첩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측근의 백악관 사무실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미국을 뒤흔든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작이었다. 매커드는 중앙정보국(CIA) 직원 출신으로, 닉슨 재선위원회의 경비주임이었음이 드러났다. 수사당국은 매커드 등이 닉슨 측의 돈을 받고 민주당 대선후보 조지 맥거번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도청장치를 설치했음을 알아냈다. 경찰은 수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밥..

어제의 오늘/ 1992년 리우 환경회의 개막

1992년 6월 3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계 178개국 대표단과 국제기구 대표 등 8000여명이 참석하는 초대형 국제회의가 열렸다. 사상 최초로 열린 지구적인 차원의 환경회의였다. ‘유엔 환경개발회의’라는 이름으로 개막된 이 회의는 정부 대표들이 참가한 지구정상회담과, 환경단체들이 모여 구성한 지구포럼으로 이뤄졌다. 지금은 ‘지구온난화’니 ‘기후변화’니 하는 말들이 일상적으로 쓰이지만 당시만 해도 인간이 만들어낸 기후 재앙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일천했다. 훗날 ‘리우 환경회의’라는 약칭으로 불리게 된 이 회의는 기후변화 문제를 놓고 처음으로 세계가 머리를 맞댄 역사적인 자리였다. 각국 대표들과 환경운동가, 과학자들은 12일 동안 지구온난화, 삼림 보호, 동식물 보호, 개도국을 위한 ..

어제의 오늘/ 자와할랄 네루의 사망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인들의 독립에 대한 꿈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면, 네루는 그 이상을 현실화한 실천가였다. 간디가 전해준 영감과 상상력으로, 네루는 현대 인도라는 나라를 만들었다. 그 네루에 대한 일화가 전해져 온다. 네루는 1937년 인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던 국민회의 의장으로 세번째 당선됐는데, 당선 바로 전날 의원들에게 익명의 편지가 도착한다. “네루와 같은 인간들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안전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는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조금만 비틀어지면 얼마든지 독재자로 변신할 여지가 있다. 그는 독재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대중성, 강력한 의지, 정열, 자존심. 그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카이사르(황제)도 원하지 않는다.” 네루..

어제의 오늘/ 2002년 동티모르 독립

티모르는 인도네시아 옆에 있는 열대의 작은 섬이다. 18세기에 티모르를 점령한 포르투갈은 1849년 네덜란드에 섬의 서쪽 부분을 양도했고, 네덜란드 땅이 된 서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 속해 1948년 독립했다. 포르투갈령으로 남아있던 동티모르에서는 독립투쟁이 계속돼 75년 좌파 독립혁명전선(프레틸린)과 친 인도네시아 세력 간 내전이 벌어졌다. 프레틸린은 그해 11월 독립을 선언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에 위협을 느낀 인도네시아 수하르토정부는 좌파 정부 수립을 막아야 한다며 12월 동티모르를 무력 침공했다. 수하르토는 이듬해 7월 아예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해버렸다. 미국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구는 동남아 ‘반공 전선’에 선 인도네시아를 편들며 동티모르 합병을 묵인했다. 미국은 자기..

어제의 오늘/ '안디잔 학살'과 한국 대통령

2005년5월 13일,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동쪽 끝 안디잔 지역에서 정부 보안병력이 주민들에게 발포, 수백 명이 숨졌다. 이른바 ‘안디잔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의 희생자는 정부 발표에 따르면 187명, 주민들과 국제 인권단체들의 주장에 따르면 수백 명에서 많게는 5000명에 이른다. 지난해 9월 자유유럽라디오(RFE) 방송은 우즈베크 정보국 ‘내부고발자’를 인용해 “정보당국이 확인한 것으로도 1500명 이상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우즈베크는 1990년 옛소련에서 독립한 이래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1인 통치를 받고 있다. 20년째 장기집권하고 있는 카리모프와 그 딸, 사위 등 일가족이 나라 전체를 쥐고 있다. 세계 최대 목화생산국 중의 하나인 이 나라에서는 면화 기름(면실유) 판매조차도 카리모프 ..

어제의 오늘/ 에펠탑 공개

1889년 5월 6일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에펠탑이 완공돼 관람객들에게 공개됐다.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1832~1923)의 디자인에 엔지니어 모리스 쾨흘린(1856~1946)의 구조 설계로 지어진 철탑은 당시로서는 말 그대로 ‘획기적’인 건축물이었다. 3년간의 대역사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탑을 만드는 데에는 총 1만8038개의 쇳조각과 250만개의 쇠못이 들어갔다. 탑에 쓰인 철의 무게는 7300t, 비금속성 자재들까지 합치면 약 1만t의 자재가 소요됐다. 사각형의 밑변 길이는 각 99.3m이고 높이는 300m에 이르렀다. 후에 24m 짜리 철근 안테나가 덧붙여져서, 현재 높이는 324m다. 쇠로 만들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열에 많이 반응하기 때문에, 햇빛이 강할 때와 ..

어제의 오늘/ 도조 히데키 전범 기소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년 도쿄 고지마치에서 일본제국 육군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도조 히데키는 190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에 들어가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다.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해 2년만에 중위로 승진, 육군대학교 졸업 뒤 대위 승진, 중대장 승진. 1919년에는 스위스에서 주재 무관으로 일하기도 했고, 20년에는 소좌로 올라갔다. 이듬해 다시 독일에 파견돼 주재관으로 근무하는 등 당시 일본 ‘제국 군대’에서는 두드러지게 ‘서구화’된 인물이었다. 행정과 야전경험 모두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도조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이 됐고, 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됐다. 일 처리가 빨라 ‘가미소리(면도기’)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관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