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슬럼, 지구를 뒤덮다- 가난이 도시를 만났을 때

딸기21 2008. 7. 1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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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PLANET OF SLUMS
마이크 데이비스, 김정아 옮김. 돌베개




서울에서 달동네는 사라졌나? 아직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달동네를 지나쳐본지 오래된 것을 보면, 이젠 달동네는 서울의 풍경에서 거의 지워진 것 같다. 그 많던 달동네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모두 ‘개발’되고 ‘발전’ 해서 중산층이 되어 아파트로 이사 갔을까.

이렇게 쓰고 나니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이뤄진 달동네 제거작전, 서초동 꽃동네 비닐하우스촌을, 시대의 변화를 무색케 하던 봉천동 달동네, 봉천동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대학 후배의 얼굴(1970년대가 아니고 1990년대였다), 취재 차 찾아갔던 가리봉동의 쪽방들(세기의 전환을 코앞에 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인왕산 능선 밑 어지럽게 빨래가 널려있던 판잣집들(사라진 줄 알았던 이곳의 판잣집 동네를 다시 본 것은 2005년이었다).

사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의 달동네들은 그나마 양호하다. 난민들의 거주가 수십년 단위로 길어지면서 사실상 거대한 슬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린 아프리카의 난민촌들에 가본 적 있다. 나는 케냐 나이로비 주변의 악명 높은 슬럼가 시장(그 유명한 키베라 슬럼은 가보지 못했지만)에도 가보았다. 민병대들의 저항의 무대가 된 바그다드의 사드르 시티에서는 골목 초입을 기웃거리다가 ‘무서워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경험도 있다.

풍경들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후배가 보여준 사진들 속 방글라데시의 판잣집들과 내 머리 속 어릴 적 우리 동네, 보르네오섬의 강변 마을과 외신 사진에서 본 뭄바이의 다라비 슬럼 같은 곳들은 거개는 비슷한 이미지다. 도시와 가난의 결합, 슬럼.

저자는 오늘날 제3세계 도시들의 ‘전형적 풍경’이 돼버리다시피 한 대규모 슬럼들이 “전 지구적 정치 위기, 즉 1970년대 후반의 채무위기와 뒤이은 1980년대 국제통화기금 IMF 주도의 제3세계 경제 구조조정의 유산”이라고 지적한다. 산업이 성장하면서 농촌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들어 노동자가 되고 도시 슬럼을 형성하는 방식의 ‘선진국형 슬럼화’ 현상과는 분명히 다른 현상이라는 것. 오늘날 제3세계 슬럼의 주민들은 농촌에서 얻지 못할 무언가를 얻기 위해 도시로 온 것이라기보다는, 농촌에서의 삶의 기반을 잃은 탓에 등떼밀려 도시로 나오게 된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슬럼의 확대는 필연적이며, 세계의 도시들이 늘어나고 규모가 커지는 것과 슬럼의 확대는 동전의 양면이 된다. 아니, 메가시티의 출현은 그 자체로 슬럼의 확대 덕에 가능한 것이다. 지난 2월 “올해 전세계 인구 중 도시 거주자가 절반을 넘어설 것”이라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유엔은 2050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7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도시 거주민들의 과반수는 슬럼에 사는 빈민들일 것이다.

“미래의 도시는 이전 세대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 등으로 지어진 도시다. 21세기의 도시 세계는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싸여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 도시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살고 있는 10억 주민은 9000년 전 도시생활 여명기에 세워진 아나톨리아 정착촌 차탈회위크의 튼튼한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볼 것이다.” (33쪽)

어긋난 약속들, 도둑맞은 꿈들. 무단점유(스쿼팅)와 게이티드 커뮤니티. 이 둘은 글로벌 경제에 통합된 지구촌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주거형태의 두 극단으로 나타난다. 보르네오의 판잣집과 자카르타의 주상복합 아파트들, 요하네스버그 외곽의 거대한 빈민촌과 철조망 처진 블록들. 요즘 한국에서도 ‘타운하우스’가 유행한다던데. 지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가장 먼저 읽었던 <조류독감>의 경우 그다지 ‘일류 저술’은 아니었음에도, 아무튼 시각과 소재가 재미나고 요즘 시류에 맞을뿐더러 (시류를 다루는 일을 하는) 나의 관심사와도 당연히 맞아떨어지는 탓에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을 자꾸 읽게 된다. 굳이 같은 저자의 여러 책을 놓고 품평을 하자면, <조류독감>과 <빈곤의 역사><슬럼> 중에서는 역시 <조류독감>이 가장 떨어지는 편이었던 듯. <빈곤의 역사>는 역사학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연관된 사건을 밀도 있게 추적한 것이었다.

<슬럼>은 중언부언이 좀 있고 전문성이 떨어지지만 슬럼이라는 테마에 맞춰 도시 빈곤/주거 문제/정책적 대안/신자유주의 기구들의 훼방 등등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있다. 글로벌화 시대의 빈곤문제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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