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딸기21 2009. 4. 16.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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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현의 온더로드-04]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 민주화 속의 난민화, 그 현장을 가다
유재현 저 | 그린비


* [황해문화] 2009 여름호에 실린 서평입니다


“네팔을 제외한다면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들락거렸던 나라들을 복기하듯 돌아다닌 여행이었다. 10년은 무언가를 변화시키기에는 턱없이 짧은 세월이었다. 아시아는 근본적으로는 변함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냉전의 붕괴와 한때 아시아 전역을 휩쓸었던 민주화의 열기, 그리고 짧게는 1997년 태국을 시작으로 아시아를 덮친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말레이시아의 암노(UMNO)는 여전히 강고했으며, 필리핀은 마르코스 독재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아로요 치하였고 신인민군은 무력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일당독재와 일인 독재의 그늘 아래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경제위기의 직격탄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태국은 시대착오적인 군주제와 군부의 망령 이래 휘청거렸고, 미얀마는 장기 군부독재의 잔혹한 후안무치함에 짓눌려 있었으며, 싱가포르는 리콴유가 완성한 기묘한 도시국가적 결벽증에 질식해 있었고. 홍콩은 중국공산당과 쉽지 않은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머리말 중에서)




국제부 기자 생활을 10년 넘게 해오면서 국제문제를 다룬 책이라면 물리도록 읽었다. 여러 지역을 다룬 역사책이나 정치 관련 서적들, 혹은 인도적 개입·기후변화와 환경·노동문제·난민문제 등의 개별 이슈를 다룬 책들을 수도 없이 접했다. 국제부 기자는 항상 ‘현장’에 목마른 법이다. 분쟁과 이슈가 있는 곳에 직접 가서 현장을 목격하고 그곳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기회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 ‘관광객’으로서는 찾아가기 힘든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신문사의 국제부 기자치고는 비교적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변명해 보지만,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외신이라는 ‘남의 눈’을 통해 세상을 봐야 하는 처지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늘 생각의 족쇄로 작용한다. 어느 한 나라, 지역의 역사적·정치적·사회문화적 배경을 어찌 쉽게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국제문제에서도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때로는 현장을 찾는다 해도 일주일 정도의 짧은 기간에 수박 겉핥기로 시민들의 몇 마디만 전해 듣고 돌아오기 십상이다. 


부족한 것들은 결국 책으로 때워야 하고, 스스로 꾸준히 지식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국내 필자들이 쓴 책은 일부러라도 피해 다녔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중동·아프리카 등 한국인들이 그동안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지역들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일단은 지역 문제에 대해 국내 학자들이 쌓아놓은 지식이 외국 학자들에 비해 낮았던 데다가 출간돼 있는 책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이 컸다. 

특히나 여행기 식으로 되어있는 책은 필자들에게는 죄송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들춰보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았었다. 지나다니다 본 풍경을 너무 대단한 것인 양 과시하듯 펼쳐놓는 것이 싫었고, 현지에 대한 ‘공부’ 없이 인상비평을 늘어놓은 것들이 독자인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아시아의 오지나 중동 혹은 아프리카를 다녀와서 ‘미국의 적은 우리 편’, ‘반서구적인 곳들은 좋은 곳’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발상을 늘어놓는 것을 보았기에 기대치가 한껏 낮아졌던 탓도 있다. 

‘아시아를 걸어온’ 작가 겸 저널리스트 유재현의 책은 머리말에서부터 내 선입견을 무너뜨렸다. 앞에 인용해놓은 머리말은, 이 책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님을 짐작케 했다. 한마디로 이 책은 10년 넘게 아시아, 아시아인을 고민해온 저자가 들려주는 ‘지극히 정치적인 아시아 여행기’다. 

책은 <유재현 온더로드>라는 시리즈의 네 번째 것으로,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무화과나무 뿌리 앞에서> 등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포착해온 저자의 오랜 아시아 순행(巡行)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버마), 네팔, 홍콩. 한권에 담기엔 너무 많은 곳들을 다루고 있어 짤막짤막하고 파편적이다. 하지만 기나긴 여정에서 지나치는 곳들, 저자의 이성과 감성에 꽂힌 것들이 하나도 가벼운 것 없이 너무도 무겁고 ‘정치적’이다. 

인도네시아에 가면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의 힌두교·불교 유적들을 주로 찾아가는 관광객들과 달리 이 사람은 자바섬 동부 솔로의 술탄 왕릉들 곁에 자리한 수하르토의 무덤을 향해 간다. 이어지는 행로는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가 우울한 말년을 보냈던 보고르의 대통령궁, 그리고 비동맹회의로 유명한 반둥의 기념관이다.

필리핀에서는 케손 시의 쓰레기산을 돌며 아시아의 도시가 안고 있는 거대슬럼의 단면을 짚는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는 ‘어제의 공산주의’가 ‘오늘의 땅투기’ 혹은 ‘자본주의의 음험한 네온사인들’로 바뀌어가는 장면을 포착한다. 네팔에서는 히말라야보다 더 ‘참신한’, 21세기 민주주의를 내세운 공산당의 실험에 주목한다. 

‘스케치’ 이상의 지식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부분은, 아시아의 어제와 오늘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분석들이다. 말레이시아에서 저자는 부미푸트라(말레이계 무슬림)와 나머지 국민들 사이를 갈라놓는 구조적인 차별에 관심을 쏟는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상대적 ‘안정’의 부리에는 2차대전 전 술탄군주제의 말레이계 지배세력을 온존시키고 중국계가 이끌던 좌파 세력을 초토화한 영국 식민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의 차별구조는 결국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태국에 이르면 저자의 말투는 유독 까칠해진다. 왕실모독죄라는 전근대적 법률, 아니 사실은 군부독재의 산물인 이 ‘근대적 법률’이 온 국민을 옭아매고 있는 현실이 저자를 너무나도 분노하게 만들었던 탓일까. 

태국에서는 탁신 치나왓 전총리를 지지하는 ‘친탁신’ 파와 ‘반탁신’ 파 사이의 대결이 몇 년 째 반복되고 있다. 저자는 국왕이 쿠데타를 사주·승인해 국민이 선택한 정부를 몰아내는 것이 정당화되는 태국의 현실을 과격한 어조로 비판하면서, “푸미폰 국왕은 미국과 군부의 후원 아래 수십 년의 성장을 통해 완성된 괴물”이라 지탄한다. 태국 사태에 대해 형식적 양비론 혹은 중계방송 식의 보도만 접해왔던 이들에게는 유재현식 해설이 과격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다(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더 네이션> 등 태국 언론들은 정부가 친탁신계 인터넷 사이트 60여개를 폐쇄했다는 기사들을 전하고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아웅산 수치와 달라이 라마의 영웅 신화에 대한 비판이다. 수치 개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고 있지만 미얀마의 모든 문제가 수치의 복권으로 해결되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얀마 문제 혹은 수치 여사에 대해서는 국내에도 이미 여러 종류의 책이 나와 있다.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분리운동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티베트 인권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중국 점령 이전 티베트 봉건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현대 중국의 통치가 더 진보적이고 더 낫다”고 단언한다. 

지난해 유혈사태로까지 이어졌던 티베트 봉기는 경제개발에 나선 중국 중앙정부의 자원 수탈에 맞선 ‘중국 민중’의 저항으로 보아야지 ‘티베트 대 중국’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달라이 라마의 봉건적 사고방식과 비민주성을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중국의 티베트 통치는 ‘민주적’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와 ‘달라이 라마’라는 신화를 깨뜨려야만 미얀마와 티베트의 현실과 미래를 직시할 수 있으리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아시아’인가. 왜 아시아의 ‘오늘’을 보아야 하는가.  


우문우답 같지만, 우리가 아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의 유산과 갈등, 전통사회와 현대의 충돌, 자본주의적 발전과 그로 인한 그늘, 청산되지 않은 독재와 민주화의 허상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제들이다. 우리는 유재현이 걸어 다닌 나라들과 똑같은 과정을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그래서 책에 실린 아시아인들의 삶의 모습들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일례로 인도네시아에서는 최근 이슬람 보수주의가 득세하고 있지만 그 한 구석 바탐에서는 섹스관광이 기승을 부린다. 


이슬람 정당을 이끌며 집권 연정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유수프 깔라 부통령은 몇해 전 “중동의 돈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급 빌라 지역에 과부촌을 만들자”는 주장을 해서 여성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샀었다. 보수주의의 얼굴을 한 이슬람의 두 얼굴을 비판하기 이전에, 여성들을 사고 팔아온 아시아라는 거대한 기지촌- 아니 ‘기지 국가’의 두 얼굴임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아시아의 오늘은 그렇게 어제와 이어져 있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와 연결돼 있다. 


역사의 현장에서 오늘의 단면을 짚어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저자는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서울의 도심에서 ‘백만 개의 촛불’을 보았다고 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고 자찬하는 서울의 현주소는 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야 하는 역설의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건설사업가 출신 대통령의 노골적인 부자 편들기 정책 때문에 철거민들이 숨져 나가고 인터넷조차 재갈이 물려진 이 나라에서 아시아 다른 나라들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시아의 민주화 시대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시대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렸고 시장과 경쟁, 경제발전이 다른 모든 가치, 특히 민주주의를 호도했다. 파시즘의 전통적 배양자였던 제국주의적 패권은 파시즘 대신 신자유주의를 공급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서 그 현상은 특히 두드러졌다. 전 통적 지배 세력들은 신자유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했고 의회를 장악했다. 노골적 파시즘은 청산되었지만 손은 바뀌지 않았다. 서구식 의회민주주의가 소수 지배 세력의 전통적 기득권을 포기하기는커녕 강화할 수 있는 방편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아시아를 보는 것은 곧 거울 속의 우리를 보는 일이다. 과거회귀적인 아시아의 오늘 속에 우리의 모습이 비쳐지는 것은 슬프다. 더 슬픈 것은, 10년 뒤 저자가 다시 내놓을(지도 모를) 책 속에 지금의 모습이 반복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역사의 배반, 그 악순환은 언제 깨어질까. 

가끔은 좀 거칠고, 가볍고, 냉소적인 어조들 말투 때문에 거슬렸던 적도 없지 않았지만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는 ‘여행기’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려 주었다. 해박한 지식과 아시아에 대한 애정, 그러나 동시에 냉정한 시선. 저자는 자신이 애정을 갖고 다녀온 곳들을 미화하지 않는다. 여행기로서는 대단한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