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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부루마. '0년-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딸기21 2016. 7. 2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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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이안 부루마. 신보영 옮김. 글항아리

 

우리에게 낯익은 현대의 틀이 만들어진 1945년의 풍경들. 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을 경험한 아버지의 기억이라는 개인적인 사건에서부터 시작해, 그라운드 제로에 비견될 이어 제로(YEAR ZERO)’에 일어난 일들을 여러 사람의 글과 증언과 보도를 통해 펼쳐 보인다. 교과서에는 처칠과 루즈벨트와 스탈린이라는 3’만 등장하지만, 그 시기를 온전히 살아내야 했던 것은 폐허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던 세상 모든 사람들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 혹은 젠더에는 어떤 식으로 투영됐으며, 전후의 보복과 숙청과 단죄는 어떤 의식 속에서 이뤄졌으며, ‘희망의 아침을 맞아 미국과 영국 등 승전국들은 어떻게 패전국들을 문명화하려 했으며, 그 배경에는 어떤 사고구조가 숨어 있었으며 어떤 한계를 갖고 있었을까. 저자는 온갖 자료를 뒤적이며 이런 물음들에 답해가면서 그 한 해를 재구성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재미있었다.



아버지가 거의 죽을 뻔했던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새롭게 구축되는 데 일조한 세상은 바로 내가 자라온 세상이다. 우리 세대는 아버지 세대의 꿈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았다. 유럽의 복지국가, 국제연합, 미국식 민주주의, 일본의 평화주의, 유럽연합, 그리고 1945년에 만들어진 세상의 어두운 이면이다. 즉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중국 내전에서 떠오른 마오쩌둥, 냉전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사람들은 도처에서 서구, 즉 미국과 유럽의 몰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전후 직후에 드리워졌던 두려움이 희미해진다면 많은 꿈 역시 색깔이 바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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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여름, 해방된 나라에서 연합군 군인들이 겪은 일은 20년 뒤 비틀스가 왔을 때 일어난 일과 비견될 만하다. 당시 해방은 에로틱을 넘어 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타국의 지배와 패배는 일시적으로 남성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당시 네덜란드 역사가는 이런 상황을 “1940년 네덜란드 남자들은 군사적으로 두들겨 맞았고 1945년에는 성적sexually으로도 두들겨 맞았다고 표현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를 포함해 한때 점령당했던 수많은 국가의 남자들이 같은 경험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전쟁의 또 다른 결과는 많은 여성이 순종을 버렸다는 점이다. 여성들은 직장을 잡았고, 레지스탕스를 위해 일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임무를 맡았다. 그녀들은 당시 매우 탐탁찮게 여겨졌던 하미나이즈hominise(인류학 용어로, 고유의 개성적 인간이 되거나 탄생하는 것-옮긴이)였다. 그녀들은 남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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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더미와 배설물,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막사 사이를 운전해 가면서 군인들은 눈으로 직접 본 것들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이 이미지는 서구 언론에 보도된 최초의 실상이었기에 영국에서 벨젠은 나치 대량 학살의 주요 상징이 되었다.

의사와 의료 봉사자들은 더 많은 음식과 의약품, 의약 장비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고 상상조차 불가능한 규모의 질병과 기아에 맞닥뜨렸다. 군대는 항상 효율적인 기관이 아닌 데다 독일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늦은 4월 어느 날에는 이상한 구호품이 도착했다. 상당량의 립스틱이었다. 나중에 립스틱은 신이 내린 선물로 알려졌다. 영국 구급차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고닌 중령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강제수용소 사람들에게 립스틱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시트도 없는 침대에 잠옷도 없이 누워 있던 여성들도 주홍색 립스틱을 칠했고, 어깨 위에 걸친 담요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헤매고 다니던 여성들도 주홍색 립스틱을 입술에 칠했다. 마침내 누군가가 이 수용자들을 다시 인간으로 만드는 뭔가를 해냈다. 수용소 사람들은 이제 팔 위에 새겨진 숫자가 아닌 인간이 됐다. 그들은 이제 외모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 립스틱은 그들에게 인간성을 다시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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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처럼 성적 욕망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생존자들에게 인간성을 다시 만들어내는 기제였다. 1946년 네덜란드의 출생률이 높았지만 난민 캠프의 출생률은 더 높았다. 미국의 점령지에 있던 난민 캠프만 해도 750명의 신생아가 매달 태어났다. 미국의 점령지에 거주했던 18~45세 유대인 여성의 3분의 1 정도가 이미 출산을 경험했거나 임신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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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인, 일본인은 확실히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중국인과는 다른 경험을 했다. 외국군과의 접촉도 마찬가지로 달랐다. 아미스 Amis(미국 양키를 말하는 독일 속어-옮긴이)나 아메코 Ameko(미국 양키를 말하는 일본 속어-옮긴이), 영국군과 호주군, 캐나다군, 소련군은 해방자가 아니라 모두 정복자였다.

베를린에서 성매매 여성은 폐허의 생쥐Ruinenmäuschen로 통했다. 일본에서는 매춘이 처음부터 제도화되었다. 일본 당국은 일본군이 중국인과 다른 아시아인들에게 저질렀던 것처럼, 연합군들이 일본인에게 똑같이 할까봐 두려워했다. 일본이 항복하고 3일 뒤인 818일 일본 내무부는 지역 경찰서에 정복자 연합군을 위한 위안시설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여가유흥협회가 애국의 의무로 자기 몸을 희생할 여성들을 모집했다.


여가유흥시설은 희생을 무릅쓴 여성들이 누울 침대도 없이 급하게 만들어졌다. 성적 행위는 누울 공간도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도처에서 행해졌는데, 대개는 바닥이거나 급조한 매춘굴의 홀이나 복도에서 이뤄졌다. 좀 더 효율적인 시설을 만드는 데에는 몇 달이 걸렸다. 대규모 격납고 같은 매춘시설이 도표 인근의 후나바시에 세워졌다. 이 시설은 국제 궁전 International Palace, 또는 IP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IP는 공장 조립라인처럼 섹스를 제공했기 때문에 디트로이트 인근에 포드가 세운 전시 폭탄 공장의 이름을 따서 윌로런 willow run’으로 불렸다. 남성이 긴 건물 입구에 신발을 벗어놓으면 나중엔 반대편에서 잘 닦인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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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판이라 불렸던 자유계약 성매매 여성들은 백인 상대, 흑인 상대, 일본인 상대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온리(오직 한 명)’라 불렸던 일부 여성은 고객 한 명만 관리했다. 좀 더 난잡한 관계를 갖는 여성은 바타푸라이(나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맥아더 장군이 집무하는 본부 맞은편의 히비야 공원이나 인근의 유라쿠초 역 등 도쿄 중심의 특정 지역은 전형적인 판판의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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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히비야 공원에서 미군을 고르는 길거리 성매매 여성과, 키스신이 담긴 영화의 최초 상영 간에는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하지만 성적 유희에 대한 갈망과 섹스 냄새 짙은 팝음악의 높은 인기는 해방된 국가와 패전국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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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부분의 조직화된 복수는 공식적인 독려가 없다면 일어나지 않는다. 성적 욕망이 곧바로 난잡한 성관계로 이어지지 않듯이, 대규모 집단 폭력도 한 개인이 주도한다고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 역시 리더십과 조직화를 요한다. 놀라운 전후 후폭풍 중 하나는 많은 독일인이 다른 독일인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방인의 점령으로 고난을 공유했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서로의 목을 겨누고 달려들지 못했다. 독일인의 독일인에 대한 보복은 다른 민족에 의한 독일 보복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17)

 

독일인에게 직접 보복하고 싶어 한 폴란드인들 심리는 더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이마저도 일부는 계급적인 이득 때문이었다. 수 세기 동안 독일인들은 지금은 폴란드 영토가 된 실레지아나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살아왔다. 브로츠와프나 단치히 같은 주요 도시에는 대규모 독일인 주민이 있었다. 독일어는 의사나 은행가 교수, 사업가 등 도시 엘리트의 언어였다. 1945400만 명이 넘는 독일인들이 여전히 소련 군대가 침략한, 예전의 독일 영토에 살고 있었다. 거의 같은 숫자의 인구가 러시아인들의 행동을 전해 듣고는 겁을 먹고 서쪽으로 도망갔다. 남아 있는 독일인 인구를 추방하려는 계획은 19455월 이전에도 이미 명확했다.

연합국 지도자들도 이 정책을 승인했다. 이에 더해 스탈린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에게 독일인들이 스스로 도망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처칠도 194412월 영국 하원에서 가능하다면 추방도 하나의 방법으로, 가장 만족스럽고 오래 지속될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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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들이 19452월 얄타 회담에서 결정한 독일 인구의 대규모 축출과 강제 이주에 동반된 잔혹 행위는 폴란드인의 보복에 따른 결과만은 아니었다. 폴란드와 소련 국경지대,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가 된 동쪽에서부터 200만 명의 폴란드인 회의 Congress Poles’(1815년 빈 회의 결과, 제정 러시아 내에 독자적인 정치 체제와 군사력을 갖추게 된 왕국 출신의 폴란드인 집단-옮긴이) 인구가 독일인들이 깨끗이 청소된 실레지아와 그 인근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대개 신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독일인의 집과 직업, 재산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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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일인을 내세운 폭력 사례 중 최악은 의심할 여지없이 무장조직이 저질렀다. 그들은 강제수용소를 운영하고 죄수들을 고문할 뿐 아니라 무작위로 죽였으며, 때로 아무 이유 없이 죄수들을 공개 비판대에 세웠다. 무장조직은 급조되다 보니 대부분 비도덕적인 인사들을 모집했는데, 거기에는 나이 어린 범죄자들도 대거 포함되었다. 가장 악명 높았던 살인자는 람스도르프 수용소의 사령관 세자로 짐보르스키로, 겨우 18세였다. 어린이 800명을 포함해 6000명 이상이 그의 지휘 아래 살해되었다.


가장 악랄한 무장조직 인사 중 일부는 독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확실히 복수가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역시나 피에 대한 욕망은 물질적이면서 계급적인 질투로 인해 더욱 타올랐다. 교사나 교수, 사업가 그리고 기타 상위 부르주아 계급이 인기 있는 목표물이었다. 독일인 변절자로부터 정보를 받은 폴란드 경비대는 특히 고위 계층 죄수들을 고문할 때 즐거워했다. 1945년 여름은 계급적으로나 인종적인 측면에서 복수의 시기였다. 그리고 역시 상층부가 복수를 장려했다.

(139)

 


(아시아에서는) 적과의 협력 및 보복 문제가 다소 복잡해졌다. 전쟁 초기에는 동남아인들 사이에서 일본이 선전한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논리가 상당히 인기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같은 활동가들에게 일본과의 협력은 네덜란드 식민주의를 제거할 수 있는 최상의 방안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 눈에 수카르노는 적의 협력자였다. 네덜란드 입장에서 전후 인도네시아 독립을 수카르노와 협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네덜란드는 수카르노를 반역자로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45년 아시아인들은 복수의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지만, 이 분노가 항상 유럽 식민주의자들에게 직접 향한 것은 아니었다. 복수는 종종 간접적이었고, 일본 점령 이전의 다양한 부역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유대인으로 불리는 동남아시아의 중국인들은 일본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예를 들면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을 신뢰 하지 않은 일본은 말레이인들을 더 선호했다. 일본은 피식민국 사람들이 갖는 수치심과 열등감을 교묘히 악용해서 반서구, 반중 反中 감정을 자극했다.


전시에 말레이 반도의 반일 저항 세력 상당수는 중국에서 왔다. 레지스탕스는 중국 공산당과 당시 소수파에게 매력적이었던 공산주의의 국제주의에 고무 받았고, 말레이공산당 Malayan Communist Party 이 주도했다. 말레이공산당이 특별히 반말레이인 것은 아니지만 당원 대부분이 중국계였다. 전후에 반일 군대는 일본인에게 부역한 지역민에게 신속한 보복을 개시했는데. 보복 대상 대부분이 인도계나 말레이계였다. 반일 투쟁에서 반일 말레이인민군과 긴밀하게 공조한 영국 식민 정부가 10월 중국인들에게 말레이계와 동등한 시민권을 인정하자 말레이계는 조국에 대한 지배력을 잃을까 우려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말레이계 정치인들을 사로잡는 두려움이다.

(161)

 


코사크인의 사례는 더 복잡하다.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던 선입 장교들은 목하 육십 대였고, 이들은 나치의 소련 침공이 과거의 코사크 영토를 다시 찾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땅에서 18세기 용맹한 전사의 위상을 떨쳤던 조부 세대처럼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독일은 독일 편에서 싸운다면 이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전쟁 막바지에 독인은 인본이 동남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협력한 인사들에게 영토를 나눠췄는데, 그건 마지막 순간의 뇌물이었다. 코사크인들도 이탈리아 알프스 지방에 코사키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

(204)

 


실레지아와 프로이센, 주데텐란트에서 독일인들에게 가해진 행동은 독일이 다른 민족, 특히 유대인에게 가한 행동을 비춰주는 기괴한 거울이다. 이 지역의 독일인들은 공공장소 접근이 금지됐고, N(폴란드어 ‘Niemice’, 즉 독인인)이 새겨진 표식을 달아야 했으며 달걀, 과일, 우유, 치즈도 살 수 없었고 폴란드인과 결혼할 수도 없었다. 강제 송환 과정에서 독일인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일부 독일인 역사가들은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그 숫자의 절반 정도라는 반론도 있다. 무엇이든 간에 충분히 나쁘다. 그럼에도 모든 독일인을 말살하겠다는 체계적인 계획은 없었다.


소련 군대와 폴란드인, 체코인들에게 마구잡이로 성폭행 대상이 됐던 독일 여성들은 스스로를 독일어로 프라이빌트’, 쉬운 먹잇감이라고 칭했다. 어떤 권리도 없이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쉽게 목표물이 되었다. 실레지아는 1945년 여름 야생의 서부로 알려졌다. 독일령에서는 단치히로 불렸던 폴란드 그단스크의 행정관은 이를 골드러시라고 불렀다.


1945년의 인종청소는 강제 송환이나 노예화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1945년 체계적으로 파괴된 것은 많은 사람이 함께 누려왔던 독일 문화였다.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옛 영토이자 제국의 위대한 도시였던 브로츠와프, 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 렘베르크, 브륀, 체르노비츠, 프라하 등은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유대인들이 한때 발전시켰던 독일 고급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들은 이제 탈독일화되어야 했다. 거리와 상점 간판이 다시 걸렸고, 장소도 이름이 바뀌었고, 독일 도서관은 약탈당했으며, 기념비는 철거되었다. 교회나 공공건물에 있던 매우 오래된 비문도 지워졌다. 독일어 자체가 제거돼야 할 대상이었다.

(216)

 


전쟁이나 점령, 독재는 국가에 물질적 피해만 입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치적 정당성도 사라진다. 시민의식은 냉소주의로 잠식된다. 폭정 아래서도 가장 잘사는 사람들은 평판이 가장 나쁘고 가장 쉽게 부패한다. 반면 정당성을 지키던 사람들은 과도기에 이어 독재가 지속되면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이 같은 대표 사례가 바로 레지스탕스에 적극 가담한 극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전후에 묘하게 낭만화되었지만 사실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의 군사적 패배에 기여한 역할은 미미했다. 오히려 모반을 꾀하는 저항활동은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처절한 보복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229)

 

레지스탕스가 진짜 중요해진 시기는 전쟁이 끝난 뒤였다. 잘못된 것에 결연히 맞섰던 레지스탕스 영웅들은 살인 정권에 협력하고 묵인으로 일관했던 사회에 하나의 영웅담을 제공해주었다. 민주주의 재건은 이런 영웅담에 크게 의존했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레지스탕스의 역할은 좀 더 복잡했다. 이들이 저항해야 하는 전제주의가 두 개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을 주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종종 독일과 협력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한 레지스탕스 영웅은 우크라이나민족주의연맹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였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정교회 인사들은 반데라를 1941년 나치를 도운 파시스트로 간주했다. 반데라와 민족주의자들은 1944년 폴란드인 4만 명을 살해한 책임이 있다. 독일뿐 아니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반데라는 당시 나치 강제수용소에 있었다. 1959년 독일 뮌헨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반데라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KGB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230)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영웅 신화가 특히 중요했다. 프랑스 관료제와 경찰력, 사법부, 산업계 인사 그리고 심지어 예술가와 작가들조차도 비시 협력 체제와 매우 깊숙이 타협했기 때문이다. 1940618일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저항활동을 시작했던 드골 장군은 당시 프랑스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 초기 2년간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 활동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드골은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서 독일군을 제압한 뒤 파리를 해방시켰을 때 프랑스 군대의 선두에서 제복을 입고 자부심에 차서 진군했으며, 논쟁의 여지없는 국가의 상징적 인물로 프랑스에 복귀했다. 실제로 드골은 행진 과정에서 나치 출신 저격수의 총에 맞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누구도 상처 낼 수 없는 언터처블로 보였던 이 인사는 194510월 전후 첫 선거전까지 임시정부를 구성했는데, 임시정부에는 비시 정권 가담자 상당수와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레지스탕스 인사들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231)

 


일본에는 나치당 같은 정파도, 히틀러 같은 인물도.1933년 독일에서 일어난 쿠데타 같은 사건도 없었기 때문에 연합군 당국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초국가주의’ ‘봉건제를 뿌리 뽑아야 할 독초로 보았다. ‘군국주의봉건제’ ‘프로이센주의등을 마치 몸의 암세포처럼 도려낼 수 있다는 생각은 보수주의자보다 좌파 연합국 관료들에게서 더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236)


일본이 주도한 전쟁에서 주된 역할을 한 조직이 있다면, 그건 관료제다. 반대자들을 감시한 내무성과 전시 산업계획을 지배했던 상공성(전시에 군수성에 흡수됐다)이었다. 재무성도 정복한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자원을 착취하는 큰손이었다.


일본의 상황이 (독일보다) 다소 단순했던 것은 연합국 강대국 중 미국만이 비무장화민주화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적인 일본 통치는 일본 내각의 몫이었고, 일본 내각은 관료제에 스스로 개혁을 감행하라고 지시했다. 이들 조치는 매우 형식적이었다. 미국 뉴딜주의자들에게는 훨씬 더 심각하게 여겨지는 또 다른 목표물이 있었다. “미래 일본 경제를 오로지 평화적 목적으로만 끌고 가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은 제거되어야 했으며, “일본 무역과 산업에서 상당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기업과 은행의 연합은 해체되어야만 했다. 이 연합, 즉 재벌이 경제 분야의 주된 전쟁 유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기업가들은 쫓겨났고 재벌 기업은 갈가리 찢겼다.


맥아더 군정 내 뉴딜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였다. 재벌 해체와 토지개혁은 일본 농촌에 뿌리박힌 봉건제의 척추뼈를 부러뜨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일본 좌파가 미군정의 정책에 크게 고무되었다. 점령 기간 초기 몇 년간은 워싱턴이 좌파의 가장 친한 친구로 보였다. 여성 참정권과 파업권, 노사 간 단체교섭은 미국인들이 밀어붙인 위대한 혁신이었고, 일본인들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과 고등교육 분야에서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재벌은 추적한 반면, 관료제는 다소간 내버려뒀다는 점에서 미군정이 일본의 전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무지와 오해 때문이 아니었다. 새로운 일본 건설을 지원하고자 했던 이상주의적인 미국인 입안 설계자들과, 평화적 목적이기는 했지만 전시의 경제 통제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했던 일본 개혁 관료들사이에는 합일점이 있었다.


미군정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1948년에 90만여 명의 직업 경력을 재검토했고. 150만 건 이상의 설문지를 검토했다. 내무성은 해체되었고, 무장 병력도 해산되었으며, 관료 1800명이 숙청되었다. 하지만 대부분(70퍼센트)은 전직 경찰이었고, 내무성 출신 관료들이었다. 경제 관료들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군수성 출신은 단지 42명만 해고되었고, 재무성은 겨우 9명 해고했다. 만주국 노예노동 책임자이면서 군수성을 운영했고, 또 대동아공영권으로 알려진 일본 제국주의 기업의 설립 계획에 참여했던 인사는 체포되었지만, 결코 전범으로 정식 기소되지는 않았다. 그는 기시 노부스케였다. 그의 생애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전성기를 맞았고, 나중에는 일본 총리가 되었다.

(251)

 


일본 침략 당시 필리핀은 식민지도 아닌, 국가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일본은 혼마 마사하루 장군이 언급한 대로, 필리핀을 미국의 억압적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은 더 야만적 형태로 재식민지화했다" 1943년 조제 라우렐 필리핀 대통령이 독립 공화국을 공식 선언했지만 일본이 여전히 완전한 지배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모든 필리핀 정부 관료 뒤에는 일본인 고문이 있었고, 그 뒤에는 일본 군대와 무서운 헌병대가 있었다. 요약하면 필리핀 공화국은 가짜였다.


하지만 일본에 저항하는 강력한 레지스탕스 운동도 있었다. 반일 인민군을 의미하는 후크발라합 Hukbalahap은 일본인뿐 아니라 필리핀 대지주 가문을 적으로 삼고 있는 맨발의 농부 혁명가들이었다. 설탕과 코코넛 농장으로 부자가 된 지주들은 민주주의자로 위장하고 봉건 과두제로 나라를 통치했다. 가장 유명한 후크발라합 지도자는 소작농의 아들인 루이스 타루크였다. 또 다른 기상천외한 후크발라합은 펠리파 쿨랄라라는 거대한 제구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가명은 다양다양 Dayang Dayang이었다. 일본인조차도 다양다양을 두려워했다.


괴뢰 정부의 조제 라우렐과 그의 지지자들인 마누엘 로하스, 베니그노 아키노 등은 후크발라합이 전복하고자 했던 엘리트 지주 가문 출신들이었다. 일본에 복무했다는 점과, 반미 감정과 범아시아주의자 명분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이들도 확실히 협력자였다. 하지만 다른 서구 식민지의 아시아 민족주의 협력자들처럼 협력 동기는 복잡했다.

(253)

 


1938년 오카무라 야스지 장군 산하 군대는 화학무기로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을 살해했다. 1942년 오카무라의 초토화 정책은 중국인들에게는 삼광작전 三光作戰’(모두 죽이고, 모두 불사르고, 모두 약탈하라)으로 알려졌는데, 이 정책으로 2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15~60세의 모든 남자가 반일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일본은 조직적으로 젊은 여성들을 주로 한국에서 납치해 일본군 매춘굴에서 성노예로 일하게 했는데, 이 역시 오카무라가 제안한 일이었다.

(260)

 

중국 내전의 핵심은 만주였다. 일본인이 건설하고 운영해온 만주의 중공업과 핵심 광산을 먼저 확보하면 거의 난공불락의 위상을 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소련이 먼저 이곳에 도착하여 소련으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공업과 재정 자산을 약탈했다. 팔로군八路軍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점점 더 만주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고, 동조적인 소련 사령관들의 도움으로 일부 지역에서는 지역 행정부를 접수했다. 팔로군은 소련과의 긴장관계는 제쳐놓더라도 괴뢰국 군대 출신의 사악한 갱들뿐 아니라 지역의 지하 게릴라 세력도 처리해야 했다. 이 게릴라들 일부는 소련에 붙어 있었고, 일부는 지역 군벌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또 일부는 국민당소속이었다.

(261)

 

1945년 가을. 안둥(단둥)은 만주 출신 중국인뿐 아니라 한국인과 러시아인, 또 주둔 군인과 민간인만이 아니라 괴뢰 정부의 다른 지역에서 피난 온 7만 명의 일본인으로 가득 찬, 일종의 동북아시아의 카사블랑카 같은 국제도시였다. 일본인 민간 지도자들은 일본 여성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카바레’, 사실상 사창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여성들은 일본을 위해 스스로 몸을 희생하라고 요구받았다. 그들은 일본의 여성판 가미가제였다.

(262)

 

맥아더 장군은 매우 종교적인 인사였다맥아더의 전시 이론은 동양의 정신 Oriental mind’을 아이처럼 순수하면서 동시에 잔인한 것으로 간주할 만큼 대단히 조잡했다맥아더는 일본인 재교육을 운명처럼 확신하고 있었다맥아더가 즐겨 말하기를이 임무를 이끄는 안내자는 워싱턴과 링컨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였다허버트 후버는 도쿄 방문에서 맥아더를 성 바오로의 환생"이라고 청했다

하지만 미국인 총독은 일본 문화를 탐구하거나 일본 지역을 연구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맥아더는 대부분의 저녁 시간을 집에서 카우보이 영화를 보면서 지냈다맥아더의 통역관이었던 포비언 바워스는 맥아더가 일본에서 보낸 5년간 두 번 이상 만나 이야기한 일본인은 단 16명뿐이었고, 이 가운데 수상이나 수석 재판관, 일류 대학 총장 이하 계급은 없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다른 연합국이나 독일인들의 저항또는 지역 차로 인해 독일에서는 좌절되었던 시도가 미국이 전능하게 다스리고 있던 일본에서는 좀 더 성공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일본인을 순진한 미개인이자개종 가능한 단순한 영혼으로 간주한 최고사령관의 생각일 것이다.

(381)

 

히로히토 천황이 라디오에서 천황 역시 똑같은 인간임을 공표하도록 지시한 것도 나쁜 생각으로 보이지 않았다천황이 실제 말한 것은천황과 일본인들과의 유대는 천황이 신이라는 잘못된 관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미국은 만족했다대부분의 일본인도 천황의 담화에 놀라지 않았다일본인들도 천황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일본인들은 천황을 태양의 여신으로부터 내려온 통치자로 여겼고천황 역시 이를 한 번도 공식 부인하지 않았다어떻든 일본인들은 이 문제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극우 민족주의자들만이 강력 반발했다.

(387)



르노 자동차 창업자 루이 르노는 알려진 나치는 아니었다. 르노가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독일은 르노에게 끔찍한 선택지를 줬다. 르노를 다임러벤츠가 인수하고 모든 노동자를 독일로 후송하거나, 아니면 독일 무장 병력을 위한 차량을 제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르노는 후자를 택했다. 공산주의 레지스탕스들에게 르노는 기업가 반역자 중 최악이었고, 1급 주적이었다. 다른 기업가들이 거의 숙청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르노는 드골이 좌파에게 던져준 뼈처럼 희생양이 된 수 있었다. 르노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머리 부상으로 숨졌다.

(267)

 

적어도 뉘른베르크 법정은 법률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중적 분노에 이끌려 급히 진행되는 재판은 아니었다. 모든 과정을 밟았고 그래서 재판이 길어졌다. 지루하다는 의미는 그만큼 충실했다는 징후였다. 그런 점에서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 등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모델 삼아 창설되었다. 권태가 대중의 보복 계획을 막았다. 이것이 중요한 핵심이다. 1942년 전범 처벌을 위한 연합국 간 위원회가 9명의 망명정부 인사로 구성되어 런던에서 발족했다. 그들이 만난 장소 이름을 딴 세인트 제임스 선언은 일반 대중이 하는 보복 행위의 위험성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인식은 아직 미미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그런 인식이 없지는 않았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퍼져나가는 걸 원치 않았다. 소련은 1942년 유대인 학살에 대한 연합국의 비판에 동조하지 않았고. 전쟁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유대인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파시즘 희생자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하지만 소련 검사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대인 학살을 언급했다.

(306)

 

벨젠 재판에서 주목한 것처럼 기존 전범 관련 법률은 전쟁 행위 자체에만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39년 이전의 제3제국 문제나 한 민족에 대한 체계적인 멸종 정책을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법안이 필요했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이나 다른 무고한 민간인 학살에 관한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변명이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또 상부 명령으로 대량 학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도 받아들이면 안 되었다. 19458월 국제군사재판소 런던헌장에는 반인도주의 범죄라는 새로운 법적 범주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전쟁범죄에 대한 개념을 확대했다. 또 다른 참신한 법적 개념은 반평화 범죄였는데, 공격적인 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범죄를 다루는 법령이었다.
(307)

 


드골은 의심할 여지 없는 보수주의자로 레지스탕스 출신들이 정치적 권력을 잡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진보주의와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1945년 드골 정부는 르노 자동차 공장과 대형 은행 다섯 곳을 국유화했으며, 석탄과 가스, 대중교통도 국유화했다. 같은 해 12월 코냑 출신으로 전시 대부분을 워싱턴 D.C.에서 보낸 장 모네가 프랑스 경제 현대화 계획을 제출한 것도 드골 정부 때였다. 산업과 광업, 금융업을 정부가 책임지는 모네의 계획은 전형적인 계획경제 모델이었다. 계획경제가 더 나은 공정성을 약속한다고 믿었고, 또한 더 이상 유럽에서 재앙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길이었다. 전 유럽에서 이런 계획을 중시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레지스탕스 조직은 희망했던 정치권력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좌파가 꿈꿨던 이상의 상당수가 실제로 실행되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시칠리아와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에서는 동프로이센과 주데텐란트에서 독일인을 쫓아내는 방식으로 토지개혁이 시행됐고, 그 결과 농부 수백만 명이 자작농이 되었다.

(329)

 


처칠이 영국 또한 새로운 통합 유럽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1년 뒤 취리히 연설에서 처칠은 유럽합중국 United States of Europe”을 향한 열정을 표명했다. 하지만 처칠에게 통합 유럽은 영국 및 영연방 국가들 Commonwealth"과 그 우방국 및 지원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럽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은 매우 애국주의적인 견해로, 국가의 위대함은 통합된 유럽에서만 되찾을 수 있다는 관념이었다. 이는 상당수 비시 정권 출신 기술 관료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장 모네의 통합에 대한 꿈은 프랑스 국경을 초월하고 있었다. 특히 계획국가라는 착상은 모네의 프랑스에 대한 애국적 헌신이었다. 모네는 드골에게 계획국가만이 위대한 프랑스로 복귀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첫 번째 대형 사업은 경제를 국유화하고, 독일 석탄을 프랑스 공장으로 직송하는 방법으로 프랑스를 현대화하는 것이었다. 다음 프로젝트는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 이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였다. 그리고 꿈의 종착지는 완전한 통합 유럽이었다.

(331)

 


가장 원대한 계획의 설계자는 일본이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일본이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계획된 국가로, 일본의 범아시아주의에 있어 꿈의 궁전같은 곳이었다. 만주국은 의사 독립국가 형태를 띠었고, 공식적으로는 집단적 사회 정의와 평등주의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사실 만주국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일본이 건설한 광산과 공장은 중국인 노예노동에 의존하고 있었고, 일본 관동군 지배 아래서 중국인과 한국인들의 삶은 참혹했다. 경제 역시 군사정부가 엄격하게 통제했고, 친정부 일본 기업과 은행들이 정부 지원을 받는 구조였다.


1932년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수도는 일본인들에게는 신징 新京또는 신수도로 알려진 창춘이라는 기찻길 교차로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만주국이 세워지자 거의 즉각적으로 남만주 철도의 일본 설계자와 기술자 건축자 관료와 관동군이 새로운 아시아양식으로 가장 현대적이고, 효율적이며, 깔끔하게 정돈된 도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온통 눈으로 뒤덮이는 중국 북부의 평평한 풍경 위로, 새로운 도시의 건설이 만주국 내각의 후원 아래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5년 만에 새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원형 광장을 중심으로 바퀴살 모양으로 정확히 퍼지는 직선대로의 웅장한 설계는 새로운 아시아 양식의 웅대한 관료주의의 요새였다. 모든 작업이 수학적인 정확성 아래 이루어졌다. 매끈한 외관의 남만주 고속열차인 아시아 익스프레스에서부터, 당시 일본의 대부분 가정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혁신적인 공공주택의 수세식 화장실까지 모든 게 제대로 작동했다.

(335)

 


처음에는 다소 오해가 있었다. 사람들은 소련이 오고 있다고 생각해서 러시아 해방자를 영접하는 환영단이 서울 기차역에 나갔다. 대구와 광주, 부산 등 한반도 남단에서도 한국이 독립을 쟁취하는 데 도움을 준 소련에 감사를 표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소련 국기와 태극기를 흔드는 인파가 기차역에서 기다렸지만, 소련은 오지 않았다.


다른 일부는 식민지 압제의 주요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에 달려가서 망치로, 몽둥이로, 때로는 맨손으로 신사를 부쉈고, 나중에는 불질렀다. 처음에는 평양에서,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번져나갔고, 밤새 활활 타는 신사는 이를 신성시하던 일본인들에게 공포감을 안겼다. 일본인들은 폭행을 피해 달아났다. 하지만 한반도 북부에서는 나이를 막론하고 여성과 소녀들이 소련 군인들의 전리품이 되었다.

(340)

 

816일 아침, 서울에서 좌파 성향의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영국 트위드 양복을 즐겨 입던 한국의 레지스탕스 영웅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여기에는 일본 감옥에서 막 풀려난 공산주의자를 포함해 다른 애국자들도 참석했다

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천 명 앞에서 행한 여운형의 연설은 두 가지 점이 특이했다. 하나는 관대함이었다. “이제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떠나려고 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가게 합시다. 좋게 헤어집시다.” 그리고 유토피아를 강하게 강조했다. “과거의 우리 고통은 잊어버립시다. 우리는 여기 우리의 이 땅에 이성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영웅주의는 제쳐두고, 절대 깨지지 않는 단합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341)

 

조만식은 신사적인 데다 한국의 전통 복장을 주로 입고 있어서 한국의 간디로 알려져 있었다. 남쪽의 여운형처럼 조만식 계파에도 공산당 소속의 정치범 출신이 많았지만, 아직은 공산주의자가 지배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다


남과 북 모두에서 한국인들이 구성한 위원회가 일본 행정가들로부터 신속히 권력을 이양 받았다. 위원회 대부분의 인사는 공산주의자이거나 온건한 좌파였고, 또는 기독교인이거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동유럽, 서유럽처럼 한국에서도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좌파가 애국적이라는 신뢰가 있었다. 정부와 기업, 고등교육 기관의 보수주의자들이 현대화나 진보라는 명목으로 마지못해서 아니면 열성적으로, 또는 개인적 이득 때문에 대개 일본과 협력한 반면, 1910년 한국이 일본 제국으로 통합된 이후 레지스탕스는 강력한 좌파 편향이었다.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 엘리트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이나 반란은 한국의 전통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영향이 결합된 메시아적인 구석이 있었다.

(342)

 

한국인들에게 네버 어게인은 외세에 지배당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운형이 상상한 합리적인 낙원에서 사대라는 수치는 영원히 없어져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결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일본이 항복하고 몇 주 뒤 미군이 마침내 인천항에 상륙했을 때, 미군은 한국과 한민족의 열정에 대한 어떤 단서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존 하지 중장은 단지 인근 일본 오키나와 섬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책임자로 뽑힌 인물이었다.


하지 장군은 배에서 내리기 전에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온건한 인사인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으로부터 면담 요청을 받았다. 장군은 일본인이나 아마도 공산주의자의 야바위일 거라 의심하면서 여운홍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다음 날 서울에서 하지는 추가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본 행정부가 그대로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국인들은 분노했고, 이런 모욕에 항의해 거리로 몰려나왔다. 한국의 반응에 놀란 미국 국무부는 일본인들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재빨리 발표했다. 미국인들이 책임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미국은 충분한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어쨌든 일본인들은 자리에 그대로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는 한국인 대부분을 일본놈들 지배를 40년간 받으면서 강한 영향을 받은, 교육이 제대로 안 된 동양인...그들과는 거의 말을 나누기가 힘들다고 여겼다.

(345)

 


프랑스 점령지역의 핵심 도시는 지금은 손님을 거의 뺏긴, 온천으로 유명한 바덴바덴이었다. 프랑스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미국은, 프랑스가 (루스벨트가 항상 불신했던) 드골과 자유프랑스군이 존재했는데도, 나치 독일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못 한 이유를 들어 프랑스의 라인란트 점령에 반대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드골의 의지가 미국을 이겼다.


프랑스인들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보다 더 정복자처럼 행동했다. 군대는 규율이 잡혀 있지 않았다. 석탄 같은 국가 자원은 프랑스로 옮겨졌다. 나중에 무산되기는 했지만, 공업지대인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석탄이 풍부한 자를란트 등 독일의 일부 지역을 합병하려는 프랑스 정부의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연합국 중 어느 곳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은 폐기되었다.


프랑스가 라인 강 인근의 국경지대를 합병할 수 없다 하더라도, 중요한 뭔가가 그곳에서 곧 일어날 것이었다. 이 지역의 풍부한 석탄, 철강은 범유럽 기구의 통제 아래 놓이면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1951년 파리에서 설립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회원국들에 혜택을 췄다. 프랑스 점령지는 나중에 유럽연합으로 발전하는 기구의 탄생지였다. 이 지역 통치권을 공유하자는 계획은 프랑스에서 나왔다. 이를 공식 제안한 사람은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를 둔 룩셈부르크 태생의 프랑스 정치인 로베르 쉬망이었다. 가장 부유한 독일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공유하자는 데 합의한 서독 수상은 뀔른 시장을 역임한 콘라트 아데나워였다.

(377)

 

독일의 미래를 형성한 것은 문화나 교육, 정의, 하다못해 상식적인 예의범절도 아니었다. 유럽에서 강력한 민주주의를 건설할 필요가 있도록 만든 정치적 환경인 냉전과 독일 엘리트층의 기회주의, 미국의 이해관계, 로베르 쉬망의 표현대로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세계 평화를 진작하기위해 고안한 유토피아 프로젝트 등이었다. 통합 유럽은 프랑스, 독일뿐 아니라 기독교 민주주의의 꿈이기도 했다상당히 회의주의적 시각을 보였던 드골은 이를 샤를마뉴 사업의 재개로 비유했다. 현재 곤란을 겪고 있는 유럽연합의 미래가 뭘 가져다주든 간에, 통합이라는 꿈은 모든 재교육 프로그램을 합친 것보다 더 독일을 유럽 국가로 다시 뭉치게 하는 역할을 했다.

(379)

 


국제연합 사무국에서 일하는 영국 정보장교 출신 브라이언 어커트의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의 스테판 에셀이었다. 에셀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뒤 부헨발트와 도라로 보내졌었다. 그는 어커트와 같은 1917년에 태어났다


에셀은 독특한 가정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프루스트의 번역가이자 저명한 독일 작가였던 아버지 프란츠 에셀은 프랑스인과 독일인 간의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다룬 줄 앤 짐Jules et Jim’에서 줄의 실제 모델이었다. ‘줄 앤 짐은 나중에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영화로 제작하면서 유명해졌다. 어커트처럼 스테판 에셀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길 원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원동력은 강제수용소의 국제주의였다고 적었다. 다양한 국가와 계급 출신이 수용소에 함께 내팽개쳐졌고, 그것이 내게 외교를 하도록 추동했다"고 말했다. 에셀은 전쟁 뒤 3년간 최초의 세계인권선언을 작성하는 일을 도왔다. 에셀은 201395세에 숨졌다.

(395)

 

통화 제도는 1944년 뉴햄프셔 주에 있는 브레턴우즈라는 리조트 호텔에서 만들어졌다. 공식 명칭이 국제연합 통화·재정 토론회였던 회의는 두 가지 이유로 브레턴우즈에서 열렸다. 미 하원 은행통화위원회에 소속된 뉴햄프셔 주 상원의원이 회의에 목 참석할 필요가 있는 공화당의 대표적 통화 규제 반대자였고, 호텔이 당시에는 시골지역 숙박시설로는 드물게 유대인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406)

 


6월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앞두고 위기가 한 번 더 있었다. 이번에는 레반트에서였다. 프랑스군은 529일 다마스쿠스 거리에서 시리아인들과 싸우고 있었고, 고대 수도인 다마스쿠스뿐 아니라 알레포, 하마, 흠스에도 폭탄을 떨어뜨렸다


다음 날, 능숙한 외교 수완을 갖춘 시리아의 수크리 알-퀘와틀리 대통령은 호찌민, 수카르노와 같은 심경을 표현하는 편지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호찌민 등과는 달리 훨씬 더 많은 성과를 얻었다. 그는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프랑스인들이 독일과 싸우려고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무기를 사서 시리아인들을 죽이고 있다고 적었다. 미국은 1944년 시리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했었다. 그래서 알-퀘와틀리 대통령은 대서양 헌장과 4대 자유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썼다.


유럽 제국주의는 워싱턴에서 인기가 없었고, 프랑스 제국주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없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다소 이국적이었던 인도차이나와 달리, 중국을 대하는 것처럼 자애로운 가부장의 심정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는 선교에 대한 열정과 상업적 이해도 섞여 있었다. 베이루트의 아메리칸 대학, 예루살렘에서의 기독교 선교, 문호개방 경제정책 때문이었다. 영국군이 1941년 레반트를 점령할 당시 연합국들은 전후에 시리아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이미 약속한 터였기 때문에, 지금 알-퀘와틀리의 호소를 무시할 수 없었다. 처칠은 현장에 있던 버나드 패짓 장군에게 프랑스군을 막사로 격퇴시키라고 지시했다. 프랑스인들이 저항하기엔 숫자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이는 어려운 임무가 아니었다. 드골 장군은 앵글로색슨의 악랄한 음모라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표면적으로 시리아의 위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완벽한 실험이었다. 대서양 헌장과 국제연합 정신에 부응하는 정당한 사례였다.

(414)

 

영국이 진짜 원했던 것은 레반트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시리아가 프랑스에 도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상당히 즐거워했다. 프랑스의 폭력적 보복이 프랑스를 쫓아내기 위해 필요한 명분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상황이 1945년 초여름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시리아 사태에는 19세기 제국주의적 충돌을 떠올리게 하는 오래된 뭔가가 있었다. 어떻든 간에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는 아직 명확해지지 않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중동에서 우위를 잃고, 미국과 소련이 곧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런던에서는 영국과 미국이 국제연합의 후원 아래 군사기지를 구축해서 전후 세계의 치안을 공동으로 담당하기를 바랐다. 미국은 아시아, 영국은 중동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전후 초기 몇 달 만에 보다 비공식적인 제국의 흐릿한 형태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영국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바는 새로운 세계 질서하에서 영국의 역할이 얼마나 미미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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