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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카르팡티에 등, '지중해의 역사'

딸기21 2016. 8. 22.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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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히고 묵히던 책을 휴가 때 끝냈다. 장 카르팡티에 등이 쓰고 엮은 <지중해의 역사>(강민정, 나선희 옮김. 한길)>. 두꺼운 만큼 내용도 알차다. 


프랑스 학자들이 ‘지중해의 역사’를 훑었는데 시간의 길이도 길고, 공간의 범위 또한 넓다. 그리스, 로마로부터 시작해 멀리는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까지 포괄하는 중근동을 적잖게 건드리고 있고,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까지 종횡무진 넘나든다. 



아쉬운 것은, 숱하게 많은 지명이 나오는데 옮긴이 주석이 없다는 것. ‘한길 히스토리아’ 브랜드로 나왔는데 이 정도 책이라면 번역자가 힘들더라도 지명마다 최소한 어느 대륙, 지금의 어느 나라 어디쯤인지는 주석을 달아줬어야 했다. 책머리 컬러 화보 대여섯 장 들어간 것 빼고는 모두 흑백인데 가격은 3만5000원. 책값이 아깝지는 않으며 번역도 매끄러우나, 지리적 설명이 없는 것이 옥에 티다. 


1998년에 나온 것이라 뒷부분은 좀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들이 있으나 읽는 데에는 전혀 지장 없으며, 이슬람주의로의 회귀와 테러 위협 등을 경고한 것이 오히려 이 시점에 더욱 눈에 띈다. 


저자들은 범세계주의가 지배해온 지중해 주변에 20세기 들어와 독립국가들이 등장하고, 이 과정에서 ‘단일성’이 강화됐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20세기의 후반부에 이주 흐름과 함께 다시 소수 집단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잡종 형성’이 눈에 띈다고 지적한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소수집단이 매개자가 되고 융합에 기여할 수 있는지”, 이슬람 소수집단이 “오랜 세속화 과정을 겪은 유럽 문화권에 편입되면서 종교의 현대화를” 이뤄낼 수 있는지 묻는다. 더불어 “유럽은 다양성을 확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1998년의 물음에 대해 2016년의 세계는 어떤 대답을 주고 있을까? 유럽에서 일어나는 문화 충돌,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반감, 테러 공격을 보면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이 저자들의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지브롤터 해협의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지브롤터 해협의 입구를 일컬어 고대인들이 부르던 명칭)은 지중해적인 상상력 안에서 세계가 둘로 나뉘었던 지리적인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다스리고자 했던 ‘내해’와 그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외해’라는 두 세계로 말이다. 지중해는 이렇게 해서 안전지대가 되었고 지중해를 횡단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틀이 되어주었다.

지중해의 역사는 발견의 시대에서 소유의 시대로 옮겨간다. 해안지대의 국가들은 해안의 지배권, 통행구역, 항로 등의 문제에서 우위를 확보하고자 한다. 페니키아인들은 남쪽 해안을 거의 독점하고 지브롤터 해협을 차단한다. 반면 그리스인들과 에트루리아인들은 지중해의 서쪽과 중앙 해안을 서로 나눠 갖는다. 폐쇄적인 공간이었던 지중해는 점차 이곳을 소유하고자 하는 세력들 간에 해상전이 벌어지는 대립의 장으로 변화한다. 

결국 고대 지중해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분리된 바다를 통합하여 소유하려는 원리를 파헤치고, 여러 지역으로 분할된 지중해가 단일한 지중해 즉 로마인들이 지칭하던 ‘우리의 바다’ 로 전환되는 과정을 집대성하는 작업인 것이다. 

(34-35쪽)



기원전 814년 티루스의 페니키아인들이 튀니지에 건설한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를 점유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리스에서 각종 제도가 갖춰지고 이탈리아에서 에트루리아인의 도시들이 발달하던 시기에, 지중해 서쪽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카르타고가 급성장하면서 지중해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이 시기에 지중해에서는 정기적인 교역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중해 일대의 단일성을 예고하는 최초의 신호는 문자에서 드러난다. 페니키아에서 22자로 단순화된 알파벳을 사용한 새로운 문자체계가 나타나 정차 지중해 사람들에게 보급되었다. 그 최초의 증거는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아히람 왕의 석관에 새겨진 문자(기원전 1100년경)다. 

이 문자는 빠르게 전파되는데, 먼저 근동지역과 특히 그리스인들에게 전파되고 이어 에트루리아와 라틴족에게 퍼진다. 지중해 세계에서 강력한 문화적 유대를 만드는 구체적인 신호는 바로 문자를 통해서 나타났다. 이로써 기원전 8세기부터 이 지역에서는 역사적 진보의 발판이 마련된다. 

(51쪽)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의 로마 군대는 여러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베리아 반도 북쪽과 알프스 산맥과 도나우 강 일대를 통합한 것이 그 대표척인 예다. 이러한 합병정책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중해를 둘러싼 모든 국가들이 로마에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으로 합병된 지역 가운데 하나는 106년에 로마의 영토가 된 아라비아 나바테아왕국의 페트라였다. 

(125쪽) 



갈리아의 양모, 소아시아와 이집트의 리넨(아마포), 베이루트와 시돈 혹은 티루스의 비단, 시돈의 유리 제품, 코린토스의 청동 등 고급 사치성 상품들이 교류되기도 했다. 더 먼 국가들과도 교역이 이루어졌다. 아프리카에서는 페잔에서 가라만테스로 다양한 물품들이 수송되었는데, 특히 가라만테스는 중앙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 사이의 면세 통과 지역이었다. 상아와 보석, 노예, 특히 원형경기장에서 경기에 사용될 야생 동물들이 아프리카에서 공급되었다. 

또 로마 선박들은 아프리카 동부 연안의 잔지바르 섬까지 자주 드나들었다. 1세기에 저술된 <에리트레아 해로 떠나는 대항해>를 보면 로마가 이 지방에서 상아와 금, 코뿔소의 뿔 등을 사들인 사실이 잘 묘사되어 있다. 

로마인들은 또한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 즉 지금의 예멘 지역인 행복의 아라비아(사바왕국의 별칭)와도 교류했다. 이 지역은 인도산 물품들을 교류하는 역참으로 이용되었는데, 예멘과 지중해 사이의 대상 무역을 보장해준 사람들은 나바테아인이었다. 이 교역을 통해 그들이 얻었던 이윤의 흔적을 눈부신 페트라의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팔미라의 거주민들 역시 페르시아 만과 지중해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들은 페니키아의 항구와 메소포타미아 저지대 사이의 길을 관리했다. 

(138-139쪽)



3세기부터 지중해 연안은 위기와 변화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제정 초기부터 발트 해 연안에서 내려온 게르만족들이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경계지대에 압력을 가했고, 로마는 이들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따라 군대를 증강 배치했다. 2세기 이후부터는 새로운 침입자 고트족이 나타나 이미 정착해 있던 게르만 민족들 간의 영토 분배를 방해했다. 고트족의 진군을 저지하려던 데키우스 황제는 싸움에 패하고 251년에 살해당했다. 이때부터 고트족은 자유롭게 흑해와 에게 해 연안의 도시들을 약탈하고 유린했다. 

같은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파르티아왕조가 전복되고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들어선 것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인 사산왕조는 조로아스터교를 기반으로 하여 세워진 국가였다. 샤푸르 1세의 통치기부터 사산왕조는 로마제국의 동방 접경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60년, 전투에 패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에데사 근방에서 샤푸르 1세의 포로가 되었다. 이 지역 도시들의 부의 원천인 대상로를 로마제국의 뒤를 이어 안전하게 지켜준 것은 오데나투스와 이후 제노비아 여왕에 의해 건설된 팔미라왕국이었다. 

(149-150쪽)



로마제국에 속해 있다는 생각은 동일한 종교 공동체에 속한다는 의식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 4~5세기에 가톨릭 사제들은 황금기를 맞았다. 가톨릭 대교구들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본당은 지중해 연안의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에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정교의 교의를 보호함으로써 자기 세력의 종교적인 근거를 마련한다. 가톨릭교회의 패권에 대한 증거로서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지중해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높고 아름다운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동전에는 뒷면이 있게 마련이다. 지나친 중앙집권과 절대정권에 대한 불신과 위험 요소들이 세 가지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먼저 종교적인 차원에서 콘스탄티노플에 의해 공고히 다져진 우위 서열은 결국 로마와 최근 재정복된 지역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리스도 단성론자들에 대한 강제적이고도 엄격한 정교 교의는 동지중해 지역(시리아, 이집트)의 원성을 샀다. 재정적인 차원에서는 지중해 지역을 재정복하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희생이 따랐고 정책적인 차원에서는 특히 동쪽의 풍요로운 시리아와 이집트 같은 지방들을 대상으로 과도한 세금이 징수되었다. 군사적인 차원에서는 군사력이 지중해에 치중되었기 때문에 육군이 무시되었고 가장 위협받고 있는 국경지대에 대한 방어체제가 약화되었다. 

북쪽 국경은 570년경에는 도나우 강 중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아바르족과 같은 시기에 발칸 반도에 침투해 들어온 슬라브족에 의해 점차 잠식당했다. 동쪽 국경의 경우, 7세기 초에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진출하여 시리아와 이집트 그리고 소아시아를 휩쓸었다. 626년에 감행된 페르시아와 아바르족의 합동 공격은 콘스탄티노플과 제국의 존재 자체를 위협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은 여전히 바다의 주인으로 남았다. 

(175-177쪽)



예언자를 계승한 메디나의 칼리프 4인(632~661)의 지배 아래서, 이슬람교도들은 아라비아 전역의 주인이 되었다. 페르시아제국을 붕괴시키는데 박차를 가한 이슬람교도들은 이라크,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북쪽을 손에 넣었다. 또한 비잔틴제국의 영토였던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정복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661년, 칼리프의 통치관할구는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사촌인 무아위야가 알리를 암살하고 세운 우마이야왕조에 넘어갔다. 다마스쿠스에 정착한 우마이야왕조(661~750)는 메디나의 선발 원정대와 같은 방향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그들은 동쪽으로는 부하라 · 사마르칸트 · 카불 · 인더스 강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카스피 해 · 코카서스 해 · 토로스 산맥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7세기 말에 마그레브까지 정복하게 된다. 711년에는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베르베르족 군대가 해협을 건너 에스파냐의 자발 알 타리크( ‘타리크의 언덕’ 이라는 뜻으로, 훗날의 지브롤터 해안)에 상륙한다. 그들은 과달레테에서의 단 한 번의 승리로 톨레도의 서고트족 왕국을 몰락시키고 이베리아 반도의 항복을 얻어낸다. 

(182쪽)



9세기는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와 마문(재위 813~833)의 세기였다. 영토가 최대한 팽창했을 뿐만 아니라 아바스왕조의 아랍-이슬람 대제국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제국의 영토가 인더스 강에서 대서양까지 확대되고 제국의 중심은 메소포타미아가 된다. 이 지역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주민들과 상인들의 자유로운 통행권이 비대하게 확장되었다. 이것은 9세기에서 10세기에 알 야쿠비나 이븐 하우칼 같이 길을 따라 여행한 아랍 지리학자들의 묘사라든가, 카이로에 거주하면서 이란과 에스파냐까지 교역의 범위를 넓힌 유대인들의 자료를 통해 증명된다. 이 시기는 상인들의 전성기였다. 

둘째, 인도나 중국 등 외부 세계에 널리 개방되었다. 중국과 인도의 비단, 향료가 페르시아 만과 홍해 같은 해상로를 통해 혹은 중앙아시아의 대상들을 통해 들어왔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피혁, 모피, 밀랍과 노예들이 볼가 강을 거쳐 카스피 해로 들어왔다. 수단의 금은 사하라 사막을 건너 마그레브로 들어왔다. 

셋째, 이 지역 도시들의 가치가 높아졌다.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하고 지중해 근처의 도시들이 이슬람화하면서 독특한 건축양식이 유행했다. 성지 도시들(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둥), 계승되고 확장된 도시들(다마스쿠스, 쿠파, 푸스타트, 카이르완 등), 정치적 목적에서 건설된 도시들(바그다드, 사마라, 페스 등). 모든 대도시들은 구역마다 여러 개의 이슬람 사원과 대사원을 갖추고 있었다. 메디나의 저택에서 유래한 건축양식은 8세기 초에 다마스쿠스의 거대한 사원 건축의 표본이 되었으며 그 후에는 전 이슬람 세계와 카이르완과 코르도바에까지 퍼졌다. 길게 펼쳐진 개방형 정원은 기도회를 관장하는 우두머리인 ‘이맘’의 회당으로 연결된다. 

이슬람사원은 점차 재판소, 여행자용 숙소, 병원, 도서관, 학교 등 다양한 복합건축물의 핵심이 된다. 사원과 병원의 장식을 위해 당시에는 부차적으로 여겨졌던 예술이 발전하여 전 이슬람 세계에 모자이크, 도자기, 서예 같은 예술이 중요하게 자리 잡는다. 

(193-194쪽)



그들의 목적은 무엇보다 앎이었다. 8~10세기 사이, 바그다드에서는 아바스왕조의 장려정책에 힘입어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의 유신들을 바탕으로 학문이 발전했다, 아랍인들은 철학·의학과 고대의 학문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하여 발전시켰으며, 페르시아·인도와 중국의 요소들을 가미하여 수학과 천문학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아랍최고의 위대한 철학자인 킨디(801~866)는 철학적 이성과 이슬람교 신앙을 양립시켰다. 그들의 풍부한 지식과 이성적 사유는 이라크에서 지중해 세계를 관통하여 에스파냐와 지중해 서쪽의 기독교 세계에까지 전파된다. 

그러나 아바스왕조는 거대한 영토 그 자체가 분열의 원인이었다. 결국 10세기에 힘의 균형을 회복했던 지중해 세계는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196쪽)



8세기가 되자, 다양한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지중해의 이슬람 세력권인 에스파냐와 마그레브에서 정치적인 분리 움직임이 가속화한다. 그러나 바그다드의 경우에는 이러한 분열과 저항의 움직임이 직접 칼리프 권력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9세기에 시리아와 이집트에서는 칼리프 휘하의 투르크족 용병들이 왕조를 세운다. 10세기에 분리의 조짐은 새로운 경향을 맞는다. 알리와 파티마의 후예들로 여겨지는 시아파 아랍 왕조인 파티마왕조는 베르베르족의 도움으로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왕조를 전복시킨다. 파티마왕조의 우두머리인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는 910년에 카이르완에서 칼리프로 공인된다. 

910년은 이슬람 세계가 대대적으로 분열한 해로, 단일한 칼리프 관할구 시대가 종말을 맞는다. 929년에 아브드 알라흐만이 코르도바에 세 번째 칼리프 구역인 후(後)우마이야 왕조를 세우면서 각지에서 분열이 잇따랐다. 에스파냐의 수니파는 자신들의 경쟁자인 마그레브의 시아파에게 그 어떤 우선권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한편 바그다드의 시아파 칼리프 구역인 아바스왕조는 이란의 시아파 왕조인 부이왕조와 경쟁했다.

이러한 파괴적인 정치는 경제 영역에서 보장된 자유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것은 또한 각 세력 간의 균형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비잔틴제국 이후 패권을 거머쥔 아랍-이슬람 제국의 시대는 비잔틴제국이 부활하고 이집트 파티마왕조가 세워지고 에스파냐 이슬람 세력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중세 이탈리아가 출현하면서 지중해에서의 역할 재분배로 이어졌다. 

(197쪽)



비잔틴교회의 영향력이 점차 지중해 일대를 넘어 북쪽으로 확대되면서, 발칸 반도에서 로마교회와 경쟁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곳은 바로 라구사(지금의 두브로브니크) 주변의 아드리아 해로 통하는 항구적인 경계지대였다. 서쪽의 헝가리인과 크로아티아인은 로마교회에 종속되어 있었고 동쪽의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은 동방정교회에 속해 있었다. 

비잔틴제국은 969년에 안티오크를 정복함으로써 지상의 경계를 유프라테스 강과 시리아 북쪽까지 넓혔고 바다에서는 961년에 크레타 섬을, 969년에 키프로스 섬을 차지했다 

11세기 초에 비잔틴제국은 불가리아왕국을 전멸하고 도나우 강의 국경지대를 다시 차지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에게 해와 혹해,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사이에서 제국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맞게 된다. 

그사이에 지중해 남동쪽에 새로운 이슬람 세력이 나타난다. 수단의 황금으로 부가 축적되고 수도사들의 전도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이프리키야의 파티마왕조가 969년에 이집트를 점령한다. 파티마왕조는 푸스타트 부근에 카이로라는 신도시를 건설한 뒤, 그곳에 970년 알아즈하르 사원을 세우고 973년에는 시아파 칼리프의 본거지를 카이르완으로부터 옮겨온다. 

(198쪽)



서지중해의 에스파냐 이슬람 지역에서 아브드 알라흐만 3세(재위 913-961)와 알하캄 2세(재위 961~976)가 집권한 10세기는 코르도바의 칼리프가 지배력을 발휘한 위대한 세기였다. 이슬람 세계의 끝에 독립적으로 위치한 알안달루스 왕국에는 이슬람 세계의 모든 풍요로움이 집약되어 있었다. 정교한 관개시설을 갖춘 농업과 놀랄 만큼 수준 높은 수공엄이 발달했다. 상업은 물론 중동지역과의 원거리 교역을 통해 지중해 무역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알안달루스는 양질의 금화를 발행하여 사용함으로써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알안달루스의 다민족(에스파냐계 로마인, 서고트인, 유대인, 아랍인, 베르베르인 등) 및 다종교(이슬람교, 유대교, 모사라베[아랍 지배 하의 에스파냐 기독교도]) 체제는 아랍과 이슬람 전체의 여행자, 사상가, 철학자, 예술가들을 매혹시켰다.

알안달루스의 도시들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다. 톨레도와 세비야, 인구 30만 명을 헤아리는 대도시인 코르도바 등이 발전한다. 코르도바는 40만 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과 785년에서 988년 사이에 세워진 웅장한 이슬람 사원들, 인근 마디나트 알자흐라에 칼리프들이 지은 궁전으로 유명하다. 

(199쪽)



무라비트왕조는 1070년경에 마라케시를 건설하고 수도로 삼는다. 베르베르족은 무와히드왕조 시대에는 마그레브 전체에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도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사들, 기사들, 모험가들(프랑크족)의 재탈환 야망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새로운 침입자들은 1212년에 라스 나바스 데 라 톨로사에서 무와히드왕조의 군대를 붕괴시키고 11세기 말에는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점령한 뒤 에스파냐의 이슬람 세력에 그라나다 지방만을 양도하게 된다. 결국 반도의 나머지 전 지역은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포르투갈이라는 네 개의 기독교 왕국으로 분열된다. 

(210쪽)



소아시아에 투르크족이 침입하고 발칸 반도에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민족주의가 강화되면서 위기를 맞은 비잔틴제국은 12세기에 지중해 서쪽 국기들의 야심 때문에 희생되고 만다. 특히 시칠리아, 노르만족의 야망은 대단했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경제 분야에서 야망을 보였다. 베네치아가 대표적인 경우다. 베네치아는 노르만족에 대항하여 비잔틴제국에 출자했던 자신들의 함대를 활용하면서 엄청난 특권을 취했다. 7세기 이래로 아랍인들이 정복하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을 라틴 세력은 베네치아 함대를 이용하여 1204년 4월 13일에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플랑드르 출신의 보두앵 1세가 라틴제국의 초대 황제에 오르고 베네치아인이 대주교에 지명되면서 제국은 십자군과 베네치아 사이에서 분할된다. 니케아 주변의 소아시아 해안으로 퇴각한 잔존세력은 제노바인들의 도움으로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재점령하고 팔라이올로구스 왕조를 세움으로써 제국을 재건한다. 그러나 1204년의 충격으로 인해 비잔틴제국은 결코 다시는 부흥하지 못한다. 

비잔틴제국과 아바스왕조가 쇠퇴하고 1258년 몽골 제국에 의해 결정적으로 제거됨으로써 새로운 세력이 지중해 외부에서 밀려들어오게 된다. 북유럽에서 들어온 봉건국가들, 아프리카에서 들어온 베르베르족의 왕국,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분파인 투르크족 등도 지중해를 변화시킨 요인이었다. 

(214쪽)



비잔틴교회의 건축양식이 개화한 것은 9~11세기 사이였다. 비잔틴교회의 건축물은 중앙의 둥근 천장과 사각의 틀 안에 새겨진 그리스 식 십자기를 특징으로 한다. 그리스와 불가리아에서 카파도키아에 이르기까지 비잔틴제국의 곳곳에 이러한 형식의 수많은 교회당들이 세워졌다.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장식된 화려한 내부와 소박한 외벽이 어우러진 이 건축양식은 동방정교회의 신앙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같은 시기에 라틴 기독교는 로마의 바실리카식 전형과 멀어지면서 서양 예술의 특징을 드러내는 새로운 교회 건축양식을 추구한다. 이 양식에 따르면 교회당은 중앙홀 성가단, 측랑(십자형 교회당의 좌우 날개부)을 갖추며 건물의 꼭대기는 라틴식 십자가와 둥근 천장과 탑과 종루로 장식된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영묘(靈廟)와 함께 특히 11세기부터는 마드라사와 같은 작은 건축물들이 중앙에 배치된다. 셀주크왕조는 수니파의 시각이 강화된 전문학교나 이슬람사원을 겸한 학교들을 세웠는데, 이것은 이란 지방에서 들어온 건축 요소인 ‘이완’과 함께 점차 전 이슬람 세계에 퍼져나간다. 또한 소용돌이 형식의 이란식 첨탑이 중동과 이집트에 나타나고, 이란식 도자기가 이슬람 세계에서 중요한 예술로 자리 잡는다. 가정용 도자기만큼이나 건축 장식으로도 유명한 이 도자기 예술은 마그레브와 안달루시아에서 만개한다. 그리고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로 전파되어 마르세유와 이탈리아에까지 이른다. 특히 이슬람 예술의 특징인 초록색과 갈색의 장식 도자기가 많은 사랑을 받는다. 

(219쪽)



안달루시아에 세워진 나스르왕조는 기독교 세력의 레콩퀴스타에 맞서 1492년까지 유지된다. 이 왕조는 극도로 세련된 이슬람계 에스파냐 미술양식에 따라 그라나다에 알함브라 궁전을 건설한다. 나머지 세 왕조는 페스, 툴렘센, 튀니스에 자리 잡으면서 마그레브의 미래의 지도를 형성한다. 그것이 곧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다. 세력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경쟁 세력이 많았던 이 세 왕조는 이탈리아, 에스파냐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손쉬운 희생물이 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들은 수세기 동안 최고의 지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14세기에 모로코에서 태어난 지리학자 이븐 바투타와 튀니스에서 태어난 역사학자 이븐 할둔은 아랍문화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233쪽)



프랑스는 18세기 내내 에스파냐의 뒤를 이은 지중해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부각시켰다. 프랑스의 외교정책은 거의 한결같이 오스만투르크제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이루어졌다. 동지중해에서 오스트리아의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지중해에서 프랑스의 힘은 툴롱이라는 기지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툴롱의 병기창은 18세기에 선도적인 기업이 되었다. 1783년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는 인원이 4,000명까지 늘어났다. 

(281쪽)



1530년, 카를 5세는 로도스 섬에서 추방당한 예루살렘의 요한기사단에게 1282년 이래로 아라곤의 봉토였던 몰타 섬을 상으로 주었다. 1565년 5월 18일, 3만 명의 오스만투르크 군대가 몰타 섬에 쳐들어왔다. 요한기사단과군대는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타의 지휘 아래 거세게 저항했다. 승리는 요한기사단에게 엄청난 힘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몰타 섬은 150년 동안 번영을 누렸다. 

1798년 재판소에서 몰수한 부동산을 보면 몰타 섬 주민들의 놀라울 정도로 범세계적인 특성을 잘 알 수 있다. 몰타 섬에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남슬라브족,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이베리아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17세기에 몰타 섬은 절정에 달한 바로크 예술의 영원한 ‘전시장’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기사단의 부가 큰 역할을 했다. 

기사단의 명성은 카라바조를 1607년 몰타 섬에 오게 만들었다. 그는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기사단에 입단을 희망했다. 그래서 지도자인 알로프 데 비냐쿠르는 그를 ‘명예 기사’로 받아들였다. 그때 그는 15개월에 걸쳐 5개의 뛰어난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참수당한세례자 성 요한’도 그 시기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카라바조는 얼마 가지 않아 싸움과 유혈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래서 자격을 박탈당한 채 몰타 섬을 떠나야 했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거기서 곧 사망했다(1610).

(365-367쪽)



유럽의 자본은 주로 운송과 관련된 기초 공사에 사용되었다. 철도는 그만큼 전략적인 것이었다. 철도 건설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자들의 경쟁관계를 더욱 부채질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독일에 바그다드 철도 건설 허가권을 내주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은 1854년에 최초의 치관을 들여왔다. 차관 도입은 이내 습관처럼 되어서 1855년부터 1875년까지 14차례에 걸쳐 차관이 들어왔다. 

차관은 간혹 군주들이 사치품에 대한 취향을 충족시키거나 윤택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연 화려한 축제 때문에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빌려온 자본이 유럽에서는 유통조차 되지 않는 상품을 사는 데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튀니스의 베이는 사용이 불가능한 대포나 노후한 배를 사들였다. 그런 반면 유럽의 자본을 개혁이나 현대적인 군대를 창설하고 학교를 설립하는 데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차관에 대한 이율이 점점 더 높아지고 차관이 수차례 반복 도입되면서 파산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1881년 튀니지가 프랑스의 보호령 아래 들어가고, 1882년 영국인들이 이집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결과를 낳았다. 1863년 제국 내에 설립된 오스만투르크제국은행은 국책은행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의 민간은행이기도 했다. 1881년, 제국이 파산 위기에 직면하자 국채관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국채관리위원회는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번갈아 가며 주재하고, 채권자 대표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사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426쪽)



오스만투르크제국 출신의 전통 엘리트들은 슬그머니 들어와서 자신들을 밀어낸 유럽 엘리트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무스타파 카즈나다르는 튀니스 베이들의 궁정에서 자라났다. 1836년 아흐메드 베이에 의해 카즈나다르의 지위에 오른 그는 1873년까지 36년 동안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런데 그는 튀니지인이 아니었다. 그는 1817년 키오스 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으로, 그리스 독립전쟁의 혼란 속에서 체포되었다가 콘스탄티노플에 팔린 다음 다시 튀니스로 팔려 왔던 것이다. 

헤레딘 파샤의 인생 역정 또한 역사를 말해준다. 그는 1825년에서 1830년 사이에 태어난 시르카시아(러시아 남부 카프카스 산맥의 서북쪽지역) 출신의 맘루크로, 무스타파처럼 콘스탄티노플에 팔렸다가 1840년 무렵에 튀니스로 왔다. 짧은 시간 내에 아흐메드 베이의 궁정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카즈나다르의 딸과 결혼한 그는 1873년에 카즈나다르를 몰아내고 1877년까지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술탄의 명을 받아 1878년부터 1879년까지 대재상으로 있었던 콘스탄티노플에서 생을 마쳤다. 사회적 지위 상승의 동의어나 다름없는 개인들의 이민도 유럽이라는 존재가 지닌 영향력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로샤이드 다다는 1814년 레바논에서 출생했다. 마론파 가문 출신인 그는 1858년 프랑스로 피신했다가 1860년에 귀화했다. 베이의 행정 서기였던 그는 훗날 튀니지의 재정을 파탄으로 이끈 대규모 차관이 1863년에 도입될 당시 협상위원 중 한 명이었고 그 과정에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그의 형제 기운데 한 명은 다마스쿠스의 대주교였으며, 그의 사촌 가운데 한 명은 마르세유의 상인이었다. 

(430쪽)



오귀스트 마리에트의 역정은 다소 달랐다. 루브르 박물관의 하급 직원이었던 그는 고대 문명에 매료되어 1850년에 이집트 파견 근무를 자원했다. 사카라에서 여러 차례 발굴 작업을 시도한 그는 1850년대 초 프랑스에 수백 개에 달하는 상지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1852년과 1853년의 2년 동안에 걸쳐 무려 6,000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루브르 박물관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1858년 사이드 파샤는 그를 이집트 고문화재국장으로 임명했다. 마리에트는 이집트를 위해 이집트 고대의 보물들을 관리했으며 1863년에 카이로 박물관을 지었다 

마리에트의 운명은 유럽의 문화적 지배를 잘 말해준다. 엘리트들의 이주는 유럽 국가들에게 지중해의 경제와 재정, 심지어는 문화까지도 통제하게 만들었다. 베르디 오페라가 거둔 성공은 베르디 자신이 민족적 열망을 표현한 이탈리아를 초월하게 되었다. 1870년 태수인 이스마일의 이름으로 베르디에게 오페라를 청탁하여 계약서에 서명한 것은 바로 마리에트였다.

(432쪽)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것이라기보다는 지중해의 것에 더 가까웠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시 풍경 때문이었다. 메메트 알리 광장을 중심으로 유럽풍의 시가지가 설계되었다. 그 광장에는 태수의 기마상이 세워졌다. 기마상은 파리에서 주조해 온 청동상으로, 장중한 받침대는 토스카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현대 이집트를 창시한 인물의 동상은 매우 상징적인 방식으로 합동재판소의 정면에 세워졌다. 합동재판소는 유럽인들과 이집트 국민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870년대에 설립되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포장도로(포석은 이탈리아나 그리스에서 수입되었다)들이 건설되었고, 그 주위로 대규모 선박회사와 은행과 멋진 상점들과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449쪽)


살로니카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스미르나의 신비주의자인 사바타이가 마치 메시아와도 같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경청했다. 술탄은 그를 감옥에 넣었고 그는 1666년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 이후 수백 가구가 이슬람교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 배교자(터키어로는 ‘아포스타트’)들은 겉으로는 이슬람교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사바타이의 사상을 계속해서 실천했다. 이들은 19세기 말에 이슬람교 인구의 거의 절반, 다시 말해 1만 5,000명에서 2만 명에 이르렀다. 이 배교자들은 도시의 특별구역에 살고 있던 소수의 투르크인 집단에 점진적으로 합쳐졌는데, 최초로 서구의 비종교적인 자유사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리고 그들이 만든 프랑스-투르크학교에서 1908년 혁명의 근원이 된 청년투르크당이라는 그룹(지식인과 공무원으로 구성되었다)이 조직되었다. 살로니카에서 태어난 무스타파 케말은 배교자들 사이에서 생활했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초의 대혼란이 살로니카에서 발생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왜 살로니카였을까? 경제적인 성장과 교역의 증가가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경제활동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그리고 학교나 신문사를 많이 세운 살로니카의 대다수 유대인들이, 내부로부터 오스만투르크제국을 개혁하려는 투르크인 반란군의 의지에서 자신들의 면모를 새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살로니카의 유대인들은 청년투르크당과 마찬가지로 오스만투르크제국이 그대로 유지되고 다양한 공동체들이 공존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454-456쪽)



19세기는 마르세유가 가장 크게 성장한 시기다. 19세기 동안 마르세유는 자신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켰으며 새로운 모습과 운명을 창조해냈다. 1850년 무렵 마르세유에는 새로운 방향이 설정되었고, 구식 도시라는 티를 벗게 해줄 중요한 요소들이 자리 잡았다. 즉 생샤를 역과 철도가 완성됨으로써 마르세유가 리옹과 파리에 연결될 수 있었다. 구 항구의 북쪽에는 졸리에트라는 정박지가 건설되었다. 

마르세유는 자체적으로 그들만의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마르세유의 경관에는 이중적인 의미, 즉 역사적인 깊이와 함께 당시 도시가 품고 있던 야심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의지는 새 성탕의 양식에 잘 드러나 있다. 마르세유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도시였다. 시청에 새겨진 글귀에는 마르세유가 “포카이아의 딸이자 로마의 누이이며 카르타고의 경쟁자이자 아테네의 호적수”임이 공표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과거로부터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폐허까지도 다 사라져버렸다. 

(459쪽)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포한 나세르의 담화문>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오히려 수치스러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국민에 대한 착취다. ...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나는 오늘 우리가 높은 댐을 건설함으로써 명예와 영광의 요새를 건설하게 될 것을, 그리고 우리가 취해왔던 복종의 자세를 버릴 것을 여러분에게 당부한다. 우리는 이집트가 전체적으로 단 하나의 전선이며, 떼어낼 수 없는 한 덩어리의 국가임을 선언한다. 

... 우리는 점령과 착취의 흔적들을 없애고자 한다. 그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국가 안에 있는 한 국가를 없앰으로써 우리의 건물을 짓고자한다. 수에즈운하는 이집트의 이익을 위해 있는 것이지, 착취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크티사디 미스리>, 알렉산드리아, 1956년 7월 29일 일요일. 

(561쪽)



유럽인들과 근동사람들의 대이동은 독립에 따른 결과였다. 그들이 추방됨과 함께, 지중해 항구들에서 범세계주의라는 오랜 역사의 장은 막을 내리게 된다. 

(624쪽)



개인은 공동의 조상과 동족결혼과 한 지역에의 정착에 기반을 두고 있는 가부장적인 가족, 부족, 마을 집단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집단과 거기에 필요한 새로운 연대의식은 결코 무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소위 전통적인 기준들이 사용되었다. 

가문의 윤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인척관계와 국가제도 사이의 주도권 다툼은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하위문화와 사회 반대세력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마피아가 갖는 위력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마피아는 도시화 과정에서 원자화한 개인들을 연대의식이라는 망 안에 일치시키는 능력이 있었고, 자신들의 규범과 명예는 물론 파드로네(‘주인’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와 가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 나아가 오메르타(마피아 조직의 ‘침묵의 계율’)라는 원칙을 공유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의 위력은 바로 그러한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군대는 여러 아랍 도시에서 연대의식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그런가 하면 전통적인 사회유형(카바다)을 재활용했다. 그 사회유형은 어떻게 보면 작은 공동체를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몇몇 방위대나 청년조직의 우두머리이자 그 지역의 챔피언과도 같았다. 그렇게 해서 지중해의 문화와 사회에서 핵심적이었던 보호와 피보호 관계는 예전의 관계들이 와해되면서 새로운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사이의 유착관계가 남부에서 특히 더 강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을 이슬람교 중심의 아랍 세계가 가진 특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그러한 공동체가 갖는 영향력을 사회의 몇몇 현대적인 특정으로, 특히 인구와 관련된 특정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20~29세에 해당하는 성인들이 무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비율은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세대를 지나면 결코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626-627쪽)



유럽화한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이슬람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왔다. 그들이 종교는 반드시 축소되게 마련이라고 믿고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파문이 두려워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바로 그런 태도가 이슬람의 재정복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발전의 위기가 닥치자 그들의 사회적 정당성이 문제시되었다. 

아랍에서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지브 마흐푸즈는 1994년, 암살을 노린 한 이슬람원리주의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쓴 <우리 동네 아이들>은 금서로 결정되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이슬람의 복수전은 이슬람의 변함없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이즈티하드(이슬람 울라마들이 코란이나 하디스를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개별적 권리)와 개혁, 세계에의 적응과 개방의 노력과는 모순된 것이었다. 

(643쪽)



새로운 현실이 목격되고 있다. 이주를 통해 이슬람 문화권의 인구가 유럽에 뿌리내리면서 또 분산되었던 유대민족의 조직이 형성되면서, 지중해 두 연안지방에서 중개적인 상황과 잡종 형성이라는 현상이 자주 눈에 띄고 있다. 문학과 음악, 영화는 그러한 현상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수집단은 과연 어느 정도로 매개자의 역할을 해낼 수 있으며 또 융합에 기여할 수 있을까? 유럽에서 이슬람 소수집단이 처해 있는 상황(역사상 전례가 없는 상황이다)과 오랜 세속화의 과정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문화권으로의 편입이라는 현상은 종교의 현대화에 필요한 조건들이 될 수 있을까? 

유럽은 자신들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에스파냐는 마침내 ‘엘시드의 무덤을 두 번 돌려 잠그는’ 데 성공했으며 공동제의 자산을 계승하는 데 알안달루스왕국이 기여한 바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들이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고고학적이며 기념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데 위험이 있다. 지중해의 사회들은 대서양과 태평양 너머의 국가들이 지배하게 된 세계화의 물결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646-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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