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킨스에 대한 애정을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의 책을 읽으면 늘 속이 시원하고 즐겁고 유쾌하고 통쾌하다. <이기적 유전자>와 <악마의 사도>, <눈먼 시계공>, <만들어진 신>에 이어 도킨스의 책을 읽는 것은 다섯권째인 듯. 하지만 사실 정확히 기억은 안 남.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은 분명 읽은 것 같은데, 도킨스의 <에덴의 강>을 읽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a
휴가 때 벽돌베개 만한 부피를 자랑하는 <지상 최대의 쇼>(김명남 옮김. 김영사)를 들고 갔다. 여행에 가지고 다니기엔 버거운 크기이지만 읽는 즐거움이 무게와 두께를 상쇄해주고도 남는다. 여담이지만 이번 휴가에는 도킨스와 함께 굴드의 <판다의 엄지>도 가져갔다. 2002년 이미 세상을 떠난 굴드의 책은 오래 전, 그러니까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옛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굴드의 비판은 신랄하다.
반면에 신랄하기로는 굴드보다 몇 만 배는 더할 도킨스가 <지상 최대의 쇼>에서는 굴드에게 한껏 경의를 표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굴드를 경외하지는 않았어도, 이전 도킨스의 글들을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두 사람의 애증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도킨스가 굴드 사후에 쓰인 이 책에서 얼마나 굴드에게 경애심을 보이고 있는지 대번에 알 것 같다.
<악마의 사도>에서 도킨스가 굴드에 대해 표현한 것을 다시 끄집어내 본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나는 태양이 지쳐서 하늘 저편으로 넘어갈 때까지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우리는 만났을 때에는 성의를 다했지만, 우리가 가까웠다고 주장한다면 솔직하지 못한 말이 될 것이다.
<지상 최대의 쇼>에서 도킨스는 다윈의 진화론이야말로 생명을 설명하는 원리임을, '진리'임을 설파한다. 한국에서라면 별로 상상할 수 없지만(아니 어쩌면 개독들의 준동 속에 곧 상상해야만 하는 상황이 펼쳐질 지도;;) 여전히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가설)'일 뿐이라는 자들과 창조론을 설파하는 자들이 수두룩한 미국(그리고 영국)의 독자들을 향해 "제발 그따위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박물관이나 가봐"라고 외치는 책이다.
도킨스는 '이론'은 대체 무엇인지에서 출발해, 자연선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으며(당연하지) 심지어 인간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교배'를 통한 인위적 선택을 말한다. 자, 이렇게 내가 알아먹기 좋게 완충지대부터 깔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잖아, 하면서. 유전자는 어떻게 발생을 규정하는가, 새로운 종은 어떻게 태어나는가(지리적 격리 등)... 생명체의 '군비경쟁'까지 훑고 나면 진화론의 굵직한 뼈대는 얼추 스쳐간 셈이 된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이것이다.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신랄한 유머도 재미있지만, 틱타알릭 이야기처럼 정이 가는 소재들이 적잖게 들어 있어서 더욱 반가웠다. 틱타알릭 연구결과가 공개됐을 때 정말 난리도 아니었지! 뒤에 닐 슈빈의 <내 안의 물고기>도 무지무지 잼나게 읽었다.
치타 이야기도. 아프리카에서 치타의 사냥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눈 뜨고 놓쳤다! 왜냐? 도킨스의 설명처럼, 그들은 무지무지하게 빨랐다. 저기 두 마리가 있네, 둘은 젊은 수컷들이야, 하는 레인저의 설명을 듣던 중에 갑자기 먼지가 일더니... 어느 틈에 두 마리 치타는 다른 방향으로 휙 사라졌고, 그곳에서 얼룩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만 보였다. 내 느린 두 눈은 치타 두 마리의 엄청난 가속을 그만 놓쳐버렸던 것이다. 더불어, 늘 관심 갖고 있는 로크 새 얘기도 나온다!
도킨스와 굴드로 돌아가자니, 어쩐지 과학책에 미친 듯 열중했던 10여년 전의 기억들이 아스라이~ 최재천 교수님이 이화여대로 가시기 전 관악산 연구실로 찾아가 굴드-르원틴-윌슨-왓슨에 얽힌 생생한 일화를 들은 기억이. 더불어, 알라딘 MD 하다가 과학전문 번역가로 나선 김명남님에 대한 생각도. 도킨스-굴드-윌슨-왓슨 등등에 빠져 살았던 독자들이라면 이분이 <지상 최대의 쇼>에 쓴 역자 후기에 공감 10000배 엄지척!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정작 김명남 님은 <지상 최대의 쇼> 후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다신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코멘트를. ㅋ
학명이 헬리안투스 안누스(Helianthus annuus)인 해바라기는 북아메리카산 식물로. 야생 상태의 꽃은 쑥부쟁이나 커다란 데이지를 닮았다. 꽃이 큰 접시만 한 요즘의 해바라기들은 모두 품종개량된 것이다. 야생의 꽃은 작은 꽃이 많이 뭉친 형태였던 데 비해, 개량 해바라기는 보통 식물 하나당 꽃이 하나다.
러시아 사람들이 아메리카산 꽃을 육종하기 시작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사순절과 강림절에 기름을 써서 요리하는 것을 금한다. 그런데 나로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신학의 심원함을 교육받지 못한 몸이다 보니) 어떤 이유 때문인지, 해바라기씨 기름은 면제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최근의 선택적 해바라기 육종에 대한 여러 경제적 유인 중 하나다.
(72쪽)
바람에 의한 수분이 이화수분 기법의 한쪽(씀씀이가 헤픈 쪽이라고 해야 할까?) 극단이라면, 반대쪽 극단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법의 탄환’ 기법? 어떤 꽃에서 꽃가루를 묻힌 뒤 정확하게 그와 같은 종의 다른 꽃으로 날아가는 마법 탄환 같은 곤충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마법 탄환에 몹시 가까이 다가간 멋진 사례도 얼마간 있는데, 그 목록의 최상위에 난초가 있다. 다윈이 책 한 권을 바쳐 난초를 다룬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자연선택의 공동 발견자인 다윈과 윌리스는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안그레쿰 세스퀴페달레(Angraecum sesquipedale)라는 놀라운 난초에 주목했다. 두 사람 다 그로부터 주목할 만한 예측을 내놓았는데, 예측은 나중에 보기 좋게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 난초는 관 모양의 꿀주머니를 갖고 있다. 다윈의 줄자로 쟀을 때 그 길이는 28센티미터나 됐다. 이와 가까운 종인 안그레쿰 론지칼카르(Angraecum longicalcar)의 꿀주머니는 더 길어서, 약 40센티미터나 된다. 1862년의 난초 책에서, 다윈은 A. 세스퀴페달레가 마다가스카르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을 근거로, 틀림없이 ‘25~28센티미터의 돌출부가 있는 나방’이 존재할 거라고 예측했다. 5년 뒤, 월리스는 주둥이 길이가 얼추 그 조건에 맞는 나방들이 몇 있다 고 적었다(월리스가 다윈의 책을 읽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1903년, 다윈은 죽은 뒤였으나 월리스의 긴 생애는 아직 끝나지 않았던 그 해에, 다윈과 월리스의 예측을 만족시키는 새 나방이 발견되었다. 그 사실을 합당하게 기념하기 위해서, 녀석에게는 프레딕타(praedicta)라는 아종명이 주어졌다.
(77쪽)
곤충은 색각이 뛰어나지만 그들이 보는 빛스펙트럼은 자외선 쪽에 치우쳐 있고 붉은색은 빠진다. 당신의 정원에 길쭉한 모양의 붉은 꽃이 있다면, 야생에서 그 꽃은 곤충이 아니라 새에 의해 수정된다고 짐작해도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신대륙 식물이라면 아마도 벌새가, 구대륙 식물이라면 아마도 태양새가 수분해주고 있을 것이다.
우리 눈에 평범해 보이는 식물이 사실은 곤충들만 볼 수 있는 반점이나 줄무늬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외선에 색맹이기 때문에 그 장식을 보지 못한다. 많은 꽃이 자외선 색소로 꽃잎에 작은 활주로 같은 것을 그려서 벌들이 쉽게 착륙하도록 인도하는데, 사람의 눈에는 그것 역사 보이지 않는다.
(79쪽)
레이먼드 코핀저는 가축들이 풀려나서 야생으로 돌아간 뒤에 수세대가 지나면, 그들이 보통 야생 선조와 비슷한 상태로 복귀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생으로 돌아간 개들이 늑대 같아지지 않을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야생으로 돌아간 개들은 제3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거주지 주변을 알짱거리는 마을개(들개라고도 한다)들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이 점을 볼 때, 인간 사육가들이 택한 대상은 이미 늑대라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는 코핀저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늑대들은 이미 ‘스스로’ 개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을개, 들개, 아마도 딩고 같은 존재로.
(106쪽)
늑대들도 간혹 청소부 노릇을 하지만, 녀석들은 ‘도주거리’가 길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청소행위에 맞지 않는다. 어떤 동물의 도주거리를 재려면, 그 동물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가만히 접근해서 당신이 얼마나 가까이 갔을 때 녀석이 도망치는지 보면 된다.
우리 인간은 지나친 위험 회피의 문제를 쉽게 간과한다. 얼룩말이나 영양들이 사자가 시야에 뻔히 들어오는데도 기껏 경계를 늦추지 않을 뿐 태연자약하게 풀을 뜯는 광경을 보면, 우리는 혼란스럽다.
아마도 우리의 야생 선조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얼룩말들에게 더 크게 공감했을 것이다. 얼룩말처럼 그들도 잡아먹힐 위험과 아무것도 못 먹을 위험을 저울질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사자가 공격해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속한 무리의 규모를 감안할 때, 사자가 나 아닌 다른 구성원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몇몇 개체가, 유전적 우연에 의해, 평균보다 살짝 짧은 도주거리를 갖게 되었다. 녀석들은 위험을 약간 더 감수하는(용감하되 무모하지는 않은) 태도 때문에 위험을 회피하는 경쟁자들보다 더 많이 먹는다. 세대가 갈수록, 자연선택은 점점 더 도주거리가 짧은 개체들을 선호할 것이고 결국 녀석들은 인간이 던진 돌에 맞을 만큼 도주거리가 짧아질 것이다. 코핀저의 견해는 이런 식의 진화적 도주거리 단축이 개의 가축화 첫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위선택이 아니라 자연선택이 낳은 결과였다. 짧은 도주거리는 더 유순한 행동의 척도이기도 하다.
(108쪽)
은여우는 흔한 붉은여우 불페스 불페스(Vulpes vulpes)의 색깔 변종으로, 아름다운 털 때문에 가치가 높았다. 1950년대에 러시아 유전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Dmitri Belyaev)가 은여우 모피 농장의 운영자로 임명되었다. 후에 그는 리센코의 반과학적 이데올로기와 충돌하는 과학적 유전학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벨랴예프는 여우에 대한 사랑과 (리센코와는 다른) 진정한 유전학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고, 나중에 다시 시베리아의 유전학연구소 소장이 됨으로써 두 연구를 모두 재개할 수 있었다.
벨랴예프와 동료들은(실험은 벨랴예프가 죽은 후에도 이어졌다) 새끼여우들을 대상으로 표준화한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자는 새끼에게 손으로 먹이를 주면서, 쓰다듬거나 어루만지려고 했다. 새끼들은 세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집단III의 새끼들은 도망치거나 사람을 무는 녀석들이었다. 집단II는 사람의 손길을 허락하지만, 실험자에게 딱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가장 유순한 집단I의 새끼들은 실험자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하고 꼬리를 흔들면서 낑낑거리는 녀석들이었다. 실험자들은 새끼들이 자라기를 기다려, 가장 유순한 집단만을 체계적로 교배시켰다.
선택적으로 유순함을 육성한 지 고작 6세대 만에 여우들은 크게 달라졌다. 실험자들이 ‘가축화한 엘리트’라는 새 집단을 설정해야 할 정도였다. 이 녀석들은 “사람과 접촉하기를 바라고, 관심을 끌기 위해 끙끙거리고, 개처럼 실험자의 냄새를 맡거나 핥았다.” 유순함을 육성한 지 10대째에는 18퍼센트가 ‘엘리트였고, 20대째에는 35퍼센트, 30~35대에는 전체 실험군의 70~80퍼센트가 ‘가축화한 엘리트’ 개체였다.
유순함을 선택적으로 육성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가적 효과들이 뒤따랐는데, 그야말로 환상적이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개를 사랑했던 다윈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도 넋을 잃었으리라.
길든 여우들은 행동만 개 같아진 것이 아니라 모습도 개 같아졌다. 그들은 여우다운 털가죽을 잃었고, 웰시콜리 같은 흑백 얼룩무늬가 나타났다. 여우답게 쫑긋 섰던 귀는 개처럼 펄럭거렸다. 꼬리 끝도 여우답게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처럼 위로 섰다. 개를 닮은 이런 특정들은 그야말로 곁다리 효과였다. 벨랴예프의 연구진은 그런 특정들을 일부러 노린 적이 없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유순함뿐이었다. 개를 닮은 다른 특징들은 유순함을 낳는 유전자에 진화적으로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진화에 관한 일반적이고 중요한 교훈을 또 배운다. 우리가 동물의 한 특징을 놓고서 그 다윈주의적 생존가치가 무엇인지 물을 때, 잘못된 질문을 던졌을 가능성이 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고른 특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특징은 다형질 발현으로 함께 엮인 다른 특징에 ‘편승해’ 진화 과정을 함께 밟아온 것뿐인지도 모른다. 코핀저가 옳다면, 개의 진화는 인위선택만의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선택(초기의 가축화 단계 지배)과 인위선택(최근에야 전면에 등장)이 복잡하게 얽힌 과정이었다. 아마 이음매를 알기 어려울 만큼 매끈하게 이행되었을 것이다.
(112쪽)
그토록 광범위한 자릿수를 아우르는 시계들이 한결같이 지구의 나이를 46억 년이 아니라 6천 년으로 지목하게 만들려면, 물리법칙들을 얼마나 기발하고 복잡하게 뜯어고쳐야 할지 상상해보자. 그런 조작을 서슴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동기가 고작 청동기시대 사막 부족의 한 분파가 믿었던 창조 신화를 지지하기 위해서라니! 아무리 줄여 말하려고 해도, 한 사람이라도 거기에 속는다는 게 놀랍다.
(151쪽)
우리가 진화에 관해 배운 사실들 중 또 놀라운 것은, 진화가 몹시 빠르게 일어나는가 하면(이 장에서 확인했듯이), 어떤 상황에서는 몹시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화석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 중에서도 최고로 느린 것이 우리가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부르는 생물들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살아 있는 화석’은 완족류인 링굴라(Lingula)다. 완족류가 뭔지는 몰라도 상관없다. 만약 지구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재난이었던 페름기 멸종으로부터 2-3억 년쯤 전에 해산물 식당이 유행했더라면, 틀림없이 고정 메뉴였을 것 같은 녀석들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가 기억하기 쉽게 표현했듯이, 진화의 역사에서 완족류와 이매패는 “스쳐지나는 사람들”이었다. 소수의 완족류가 ‘대멸종(The Great Dying. 역시 굴드의 표현이다)’에서 살아남았는데, 현생 완족류 링굴라는 그 오른쪽의 화석 링굴렐라(Lingulella)와 굉장히 닮았다.
진화적 변화의 정도가 흘러간 시간에 반드시 정비례해야 한다는 자연법칙이 있다면, 생물들 간의 닮은 정도는 근연관계를 충실히 반영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조류 같은 진화적 달리기 선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새들은 파충류였던 옛 기원을 중생대의 먼지 속에 남겨둔 채 빠르게 진화했다. 게다가 진화 계통수에서 조류의 옆에 있던 이웃들이 우연히도 하늘에서 날아든 재앙 때문에 모두 죽어버렸으므로, 우리는 조류를 더욱 독특한 형태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반대쪽 극단에는 링굴라 같은 ‘살아 있는 화석’들이 있다. 이들은 변한 데가 너무 없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먼 선조들과 교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짝짓기용 타임머신을 발명해서 데이트를 주선한다면 말이다.
(195쪽)
동물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척추동물문을 여러 강으로 나눈다. 포유강, 조강, 파충강, 양서강 둥이 주요 집단의 이름이다. 그런데 분지학자(cladist)라고 불리는 몇몇 동물학자는 강에 대해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분류란, 어떤 강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공통선조 역시 그 강에 속하고, 그 집단 외부에는 그 공통선조의 후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흔히 파충류라고 불리는 집단은 이런 의미에서 좋은 강이 아니다. 적어도 통상적인 분류학에서는 파충강에서 조류를 배제하는데(새들은 별개의 조강을 이룬다), 보통 파충류라고 여겨지는 몇몇 파충류(가령 악어냐 공룡)는 다른 파충류(가령 도마뱀이나 거북)들보다는 차라리 새들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공룡들은 다른 공룡들보다는 새들과 더 가깝다. 그렇다면 ‘파충강’은 인위적인 분류다. 새들이 인위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분지군을 선호하는 학자들은 ‘파충류’라는 단어를 아예 쓰지 않는다. 대신 아르코사우루스(악어, 공룡, 새) . 레피도사우루스(뱀, 도마뱀, 뉴질랜드에 서식하는 희귀한 옛도마뱀), 거북류로 나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새들을 파충류에서 떼어낼 생각을 했을까? 진화적으로 조류가 파충류의 한 가지일 뿐인데, 왜 새들에게 ‘강’의 명예를 안겨줘도 좋다고 판단했을까? 생명의 계통수에서 조류의 가까운 이웃이었던 녀석들, 조류의 바로 옆을 둘러썼던 파충류들이 우연히도 멸종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종류에서는 새들만 남아서 행진해왔기 때문이다. 새의 가까운 친척들은 모두 오래전에 멸종한 공룡들이었다. 만약 공룡 계통이 폭넓게 생존해왔다면, 새들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새들이 척추동물문에서 별개의 강으로 격상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파충류와 조류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는 어디에 있나요” 같은 질문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219쪽)
‘어류’가 땅에 올라왔다고 말할 때, 그 ‘어류’는 ‘파충류’와 마찬가지로 자연적 집단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어류는 배제를 통해 정의된다. 어류는 땅에서 살아가는 척추동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척추동물을 가리킨다. 척추동물의 초기 진화 역사가 줄곧 물에서 진행되었으므로, 척추동물 계통수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가지들의 대부분이 아직 바다에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송어나 다랑어는 상어보다는 사람과 더 가깝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어류’라고 부른다. 폐어나 실러캔스는 송어나 다랑어보다는(물론 상어보다도) 사람과 더 가깝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어류’라고 부른다. 상어조차도 칠성장어나 먹장어보다는(한때 다양하게 번성했던 무악어류 집단에서 유일하게 현대까지 살아남은 녀석들이다) 사람과 더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어류’라고 부른다.
우리가 먼 친척인 상어를 한쪽으로 밀어내면, 포유류는 현생 경골어류(연골어류인 상어와 달리 골격이 있는 물고기들)를 포함하는 자연적 집단에 속한다. 경골어류 중에서 가시지느러미 어류(연어, 송어, 다랑어. 에인절피시 등 상어가 아닌 거의 모든 물고기라고 볼 수 있다)’를 또 한쪽으로 밀어내면, 우리는 육상 척추동물과 이른바 엽상 지느러미 어류를 포함하는 자연적 집단에 속한다. 우리는 바로 이 엽상 지느러미 어류에서부터 생겨났다. 엽상족 어류는 오늘날 폐어와 실러캔스만으로 격감했다(‘어류’ 중에서 ‘격감’했다는 것이지. 땅에서는 오히려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육상 척추동물들을 변형된 폐어나 다름없다). ‘엽상족’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들의 지느러미가 보통 물고기들의 가시지느러미보다는 우리의 다리를 닮았기 때문이다.
J. L. B. 스미스는 실러캔스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의 제목을 ‘오래된 네 발(Old Fourlegs)’ 이라고 지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생물학자로서 스미스는 실러캔스에게 세계적인 주목을 안긴 장본인이다. 1938년 남아프리카의 한 트롤어선이 살아 있는 실러캔스를 최초로 낚은 극적인 사건에 대해,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룡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해도 이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러캔스는 회석으로는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공룡의 시대 이후 멸종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223쪽)
연구진은 어느 곳이 최적의 탐사지인지 면밀하게 따져본 뒤, 캐나다 북극권에 있는 적절한 연대의 후기 데본기 암석을 조심스럽게 선택했다. 그들은 그곳으로 향했고, 동물학계의 보물을 캐냈다. 틱타알릭(Tiktaalik)!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이뉴잇어로 ‘큰 민물고기’를 뜻하는 말이다.
종명은 로제에(roseae)인데, 여기에 관해서는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씀드릴 경고의 이야기가 있다. 오래된 붉은 사암’의 빛깔, 데본기에게 이름을 빌려준 데본 지역의 그 빛깔, 페트라의 빛깔이겠거니(‘영겁의 반만큼 오래된, 붉은 장밋빛 도시여’!) 그러나 아뿔싸, 나는 이만저만 틀린 게 아니었다. 사진은 장밋빛이 과장된 것이었을 뿐이고, 그 명칭은 북극 탐사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한 후원자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내 안의 동물학자(내 안의 물고기라고 해야 할까?)는 감동으로 말문이 막혔다. 장밋빛 색안경을 낀 탓이기도 했겠지만, 좌우간 나는 내 직계 선조의 얼굴을 대면하고 있다고 상상했다 물론 그것은 비현실적인 상상이었다. 하지만 별로 장밋빛을 띠지 않은 이 회석은 아마 내가 만날 수 있는 존재들 중에서 영겁의 반만큼 오래된 내 직계 선조에 가장 가까운 녀석일 것이다.
(231쪽)
철저하게 육상화했던 동물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육지 환경에 맞추어 힘들게 재편성했던 도구들을 다 버리며 말이다. 바다표범과 바다사자는 절반만 돌아갔다. 그들은 고래나 듀공 같은 극단적인 사례의 중간 형태가 어땠을지 보여준다. 고래(우리가 돌고래라고 부르는 작은 고래류도 포함한다)와 듀공과 그들의 가까운 친척인 매너티는 육상생물이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머나먼 선조들처럼 완벽한 수생동물로 돌아갔다.
이 외에도 육지에서 물로 돌아간 동물로는, 늘 물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 기간을 물에서 보내는 것들까지 포함하면, 민물달팽이, 물거미, 물딱정벌레, 악어, 수달, 물뱀, 물뒤쥐, 날지 못하는 갈라파고스 가마우지, 갈라파고스 바다이구아나, 물주머니쥐(남아메리카 대륙의 수생 유대류), 오리너구리, 펭귄, 거북이 있다.
분자유전학적 증거를 볼 때 고래와 가장 가까운 친척은 하마고, 다음은 돼지, 다음은 반추동물들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역시 분자적 증거를 볼 때 하마는 다른 우제류(돼지나 반추류들)보다는 고래와 더 가깝다는 것이다.
하마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아직 땅에 발을 붙이고 있기 때문에 먼 친척인 육상 반추동물들과 닮은 모습을 유지했다. 반면에 고래는 바다로 떠남으로써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분자생물학자들 말고는 생물학자들조차 고래와 하마의 근연성을 놓쳤던 것이다.
(233쪽)
배아 발생의 전 과정이 이처럼 정교하고 연쇄적인 사건들을 거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유전자들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다. 유전자들이 아미노산 서열을 결정하고, 그것이 단백질의 삼차구조를 결정하고, 그것이 소켓 같은 활성 부위의 형태를 결정하고, 그것이 세포의 화학반응을 결정하고, 그것이 배아 발생 과정에서 세포가 ‘찌르레기 같은’ 행동을 하도록 결정한다. 그렇기에 복잡한 연쇄적 사건들의 시작점에서 유전지에 차이가 발생하면 결국 배아 발생 방식에도 차이가 빚어지고, 따라서 성체의 형태와 행동에도 차이가 발생한다. 그 성체가 생존과 번식에서 어떤 성공을 거두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결정된다.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327쪽)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는 한때 남반구에 있었던 거대한 곤드와나 대륙의 일부였다. 남아메리카, 남극 인도, 오스트레일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곤드와나는 약 1억 6,500만 년 전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와 남극과 함께 동곤드와나 대륙을 이루고 있던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동쪽으로부터 잡아당겨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남아메리카는 아프리카 서쪽으로부터 잡아당겨져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떨어져 나온 동곤드와나는 나중에 또 갈라졌다. 그래서 마다가스카르는 9천만 년 전쯤에 인도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타조와 코끼리새의 선조는 마다가스카르와 인도가 붙어 있을 때 등장했다가 물로 갈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마다가스카르라는 큰 뗏목에 남은 녀석들은 코끼리새로 진화했고, 인도라는 좋은 배를 타고 간 타조의 선조들은 (인도가 아시아와 충돌해 히말라야 산맥을 솟구쳐 올렸을 때) 아시아 땅을 밟은 뒤에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그래서 타조는 오늘날 주로 아프리카에서 발을 구르며 살고 있다(그렇다, 타조 수컷은 발을 쿵쿵 굴러서 암컷의 이목을 끈다),
코끼리새는 안타깝게도 이제 찾아볼 수 없다(그들이 발을 굴렀다면 확실히 땅이 울렸을 텐데 그 소리를 옷 듣는 것이 안타깝다). 큰 타조보다 훨씬 더 육중했던 이 마다가스카르 거인새들은 신드바드의 두 번째 항해에 등장하는 ‘로크’ 새의 기원일지도 모른다. 코끼리새는 정말 사람이 탈 수 있을 만큼 컸지만, 날개가 없었다. 그러니까 전설이 말하는 것처럼 신드바드를 태우고 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380쪽)
광합성은 10억 년도 더 전에 박테리아들이 발명했고, 지금도 대부분의 광합성을 초록 박테리아들이 담당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 할 수 있느냐 하면, 엽록체(잎사귀 안에서 광합성 작업을 실제로 수행하는 작은 초록 엔진)가 사실은 초록 박테리아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이다. 엽록체는 식물세포 안에 있으면서도 박테리아처럼 독립적으로 증식하기 때문에, 잎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살면서 잎의 색깔을 내준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테리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원래 자유생활을 하던 초록 박테리아가 식물세포에 편승한 뒤, 결국 오늘날의 엽록체로 진화한 듯하다.
대사를 담당하는 박테리아도 한때는 자유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더 큰 세포 안에서 번식하게 된 것으로, 우리는 이들을 미토콘드리아라고 부른다.
(499쪽)
포유류 중에서 가장 빠른 달리기 선수 다섯 종은 치타, 프롱혼(미국에서 종종 ‘영양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아프리카의 진짜 영양과 가깝지 않다), 누(월더비스트라고도 하며, 이것은 영양처럼 생기지 않았지만 진짜 영양류다), 사자, 톰슨가젤(영양류이고, 좀 작다 뿐이지 영양처럼 생겼다)이다.
치타는 3초 만에 시속 97킬로미터로 가속할 수 있다. 페라리, 포르쉐, 테슬라 같은 스포츠카들과 겨룰 만하다. 사자도 가공할 기속력을 자랑한다. 가젤은 사자보다 기속력은 좀 못하지만, 대신 지구력이 더 뛰어나고 방향 바꾸기에 능하다. 고양이과는 일반적으로 단거리 달리기에 알맞고, 먹잇감이 방심하는 사이에 펄쩍 뛰어올라서 잡는다. 한편, 끈기가 주특기인 아프리카 사냥개나 늑대 같은 개과는 먹잇감을 지치게 해서 잡는다.
치타의 성공적인 사냥은 보통 시작하자마자 끝난다. 기습과 가속에 의존한 성공이다. 치타의 성공적이지 못한 사냥도 보통 일찌감치 끝난다. 치타는 최초의 역주가 실패로 돌아가면 에너지를 아끼려고 사냥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치타의 사냥은 늘 눈 깜박할 새에 끝난다!
(505쪽)
무릇 생명의 모든 특정이 그렇듯이, 통증은 통증을 겪는 개체의 생존을 증진시키기 위한 다윈주의적 장치다. 뇌에는 “통증을 경험하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일을 다시는 하지 마시오”라는 경험적 규칙이 장착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꼭 이렇게 죽을 만큼 아파야 하는가는 여전히 흥미로운 논의 주제다.
자연선택은 고통이라는 경고를 개체가 무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자연선택은 우리가 생존하기를 ‘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번식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실제적이고 전면적이고 견디기 힘든 통증 대신 뇌의 ‘붉은 경고 깃발’을 갖게 된다면 어떨까? 철학적으로 까다로운 문제가 좀 있겠지만 제쳐두고 말하면, 아마도 비다윈주의적인 이유에서 통증을 무시하는 사례가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몸을 꿰뚫는 통증 대신 ‘붉은 깃발’ 체계를 써서 신체적 위험을 피하는 돌연변이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은 고문을 아주 잘 견딜 테니, 당장 스파이로 채용될 것이다. 물론 고문을 기꺼이 견디는 요원을 구하기가 쉬워지면 고문이 더는 강요의 수단으로 쓰이지 않겠지만.
(521쪽)
미래를 위해 과거의 정보를 기록해두는 한 가지 방법은, 선조DNA들의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 과정을 이용하는 것이다. DNA라는 우리의 주된 데이터베이스는 바로 그 경로를 통해서 구축되어왔다. 하지만 과거의 정보를 저장해서 미래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으로는 그 외에도 세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면역계, 신경계, 문화다.
이 세 가지 이차적 정보수집 체계도 결국은 DNA의 자연선택이라는 첫 번째 체계에서 나왔다. 우리는 이것들을 네 가지 ‘기억’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첫 번째 기억은 선조들의 생존 기술을 저장한 DNA의 기억이다. 두 번째 기억인 면역계는 한 개체의 일생 동안 몸이 경험하는 질병과 손상을 기록한다. 과거에 어떤 질병을 겪었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지 기록한 이 데이터베이스는 개체마다 독특하고, 항체라는 일군의 단백질 위에 쓰여 있다.
세 번째 기억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기억이라고 말할 때의 기억, 즉 신경계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다. 세 번째 기억은 가장 단순한 경우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서 구축된다. 이 과정 역시 자연선택에 비견될 만하다 이 경우 자연선택에 해당하는 힘은 ‘강화’다. 보상(긍정적 강화)과 처벌(부정적 강화)의 체계다.
세 번째 기억인 뇌의 기억은 아울러 네 번째 기억을 낳았다. 우리의 뇌에는 집단기억도 담겨 있다. 과거 세대로부터 유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전수된 기억들, 구전으로, 책을 통해,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기억들이다. 네 종류의 기억은 모두 생존의 수단이라는 방대한 구조물의 일부거나 그 여러 표현 형태다. 그 구조물은 원래 DNA의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이라는 다윈적 과정을 통해 구축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부분이 큰 몫을 차지한다.
(539쪽)
우리가 아는 최고의 자기복제 분자는 DNA다. 단백질 분자는 탁월한 효소지만 서툰 복제자고. DNA는 정확하게 그 반대다. DNA는 삼차원 형태로 접히지 않으므로 효소로 기능할 수 없다. DNA는 활짝 열린 직선 모양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제자이자 아미노산 서열 지정자로서 안성맞춤이다.
생명 기원의 딜레마란 이런 것이다. DNA는 복제할 수 있지만, 복제 과정을 촉매하기 위해서 별도의 효소를 필요로 한다. 단백질은 DNA 형성을 촉매할 수 있지만, 정확한 아미노산 서열을 규정해 주는 DNA가 있어야 한다. 초기 지구의 분자들은 어떻게 이 강고한 결합을 끊고 자연선택을 개시했을까? 여기에 RNA가 등장한다.
RNA는 서열 정보를 전달하기 쉽도록 죽 뻗은 형태를 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8장에서 상상했던 지석 목걸이처럼 삼차원 형태로 자기조립을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 형태가 효소로 활약할 수 있다. 실제로도 RNA 효소가 존재한다. RNA 세계 이론에 따르면, RNA는 단백질이 진화하여 효소 역할을 맡을 때까지 그럭저럭 효소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고, 또한 DNA가 진화해 복제자 역할을 맡을 때까지 그럭저럭 복제 임무도 수행할 수 있었다.
(557쪽)
우주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우리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벌이 없는 우주도 있을지 모른다. 그 우주의 물리법칙들과 물리상수들은 원시 수소를 응집시켜 별로 만들지 않고 고르게 퍼뜨려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우주는 누구에게도 관찰될 수 없다. 별이 없으면 무언가를 관찰하는 개체가 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눈길을 돌리는 어디에나 초록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활짝 피어 번성하는 계통수의 한 가운데에 작은 가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포식자와 먹잇감, 기생생물과 숙주가 끝없이 증강하는 무기경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다윈이 이야기한 ‘자연의 전쟁’과 ‘기근과 죽음’이 없다면, 무언가를 바라보는 능력을 지닌 신경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직접적인 결과다. 그것은 마을 유일의 게임, 지상 최대의 쇼다.
(5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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