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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과 프리먼의 여행.

딸기21 2016. 10. 2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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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는 빨간 꽃을 피운 선인장이 서 있었고, 우리가 앨버커키로 다가가는 동안 딕은 좋아서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태양은 우리를 위해 빛났고, 경찰차가 우리를 환영했다. 딕은 경찰차가 우리에게 서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을 알아채는 데 한참이 걸렸다. 경찰은 우리가 책에 나오는 모든 교통법규를 어겼다고 공손하게 말해 주었고, 약식 재판을 하는 법정에 출두하라고 했다. 


판사는 벌금 50달러를 내라고 했다. 판사는 자기가 내린 과속 벌금 중에서 이번이 가장 비싼 벌금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앨버커키의 기록을 깼다. 딕은 이때부터 그가 가진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어떻게 이타카에서 앨버커키까지 3200킬로미터를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하러 달려왔는지, 앨버커키는 얼마나 멋진 도시인지, 3년만에 처음 돌아오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판사에게 들려주었다. 결국 벌금은 14.50달러로 낮춰졌다. 

(100-101쪽)


정말 흥겨운 글이다. 딕과 프리먼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학기가 끝나고 난 뒤에 여름학교가 시작될 때까지 2주일 동안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딕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앨버커키로 차를 몰고 갈 거야. 같이 갈까?' 지도를 보았더니 앨버커키는 앤아버와 같은 방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91쪽)


리처드 파인만. _ 위키피디아


그렇게 두 사람은 여행을 시작한다.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사막을 달리며 좋아 죽을 지경이었던 두 사람이 리처드 파인만, 그리고 프리먼 다이슨이라니! 파인만의 책을 몇 권 읽었으나(무려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 강의>도 읽었다!) 그 철철 넘치는 매력의 단면들과 함께 슬픔의 단면들까지 다이슨은 들여다보고, 들려준다. 두 사람의 여행 이야기는 다이슨의 책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에서 당당히 한 대목을 차지하고 있다. 다이슨은 파인만에 대한 애정, 존경심,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파인만에 대한 추억담은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에 대한 관찰기의 일부분에 속한다. 다이슨은 영국에서 독일을 폭격하는 전략폭격 사령부에서 일을 했고,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윤리적으로 후퇴하게 하는지, 어떤 비극성을 마음에 심어주는지를 절절이 느낀 뒤에 미국으로 향했다. 


얼마 전 노벨 물리학상 기사를 쓰면서, 올해의 수상자가 코넬대학교에서 한스 베테를 사사했다는 것으로 글을 시작했다. 다이슨의 코넬대학 회고 역시 한스 베테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코넬대학교로 오기 전에 한스 베테가 로스앨러모스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로스앨러모스 사람들 중에서 오피(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제외하고 많은 사람들이 코넬에 다시 모여 있는 줄은 몰랐다. 로버트 윌슨은 로스앨러모스에서 실험물리학부장이었고, 필립 모리슨은 마리아나 제도로 가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할 원자폭탄을 점검했다. 딕(리처드 파인만)은 계산부서의 책임자였고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로스앨러모스 시절에 대해 끝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수많은 이야기 속에 그들의 긍지와 향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로스앨러모스 시절은 위대한 경험이었고, 고된 작업과 동료애로 둘러싸인 행복한 시기였다. 

1948년 2월 ‘타임’에 오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에서 그는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어떤 저속함으로도, 어떤 유머로도, 어떤 강변으로도 덮어 버리기가 불가능한 있는 그대로의 뜻으로, 물리학자들은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로스앨러모스 사람들은 대개 분개하며 오피의 말을 거부했다.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81-82쪽)


자전거를 타는 한스 베테(왼쪽). Hans Bethe with Boyce McDaniel in the tunnel of the Cornell Electron Storage Ring, 1968. ©Russ Hamilton/CU


다이슨은 솔직 담백하다못해 순진하게까지 보이는 회고록에서 과학기술과 윤리, 대량살상의 문제를 끊임 없이 번뇌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미국 과학자들의 '빛나는 순수함'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로스앨러모스 물리학자들의 죄는 그들이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 히틀러의 독일을 상대로 한 절망적인 전쟁에 얽혀 있을 때 폭탄을 만드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만들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폭탄 만드는 일을 즐겼던 것이다. 그들은 폭탄을 만들면서 인생 최고의 시가을 보냈다. 내가 보기에 물리학자들에게 죄가 있다고 말했을 때 오피는 이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옳았다.

몇 달 뒤에 나는 왜 미국 학생들이 매력적이지만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인생의 비극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나와 같은 세대의 모든 유럽 사람들에게 깊이 새겨진 정서였다. 미국인들은 비극을 한번도 겪지 않았고, 비극에 대한 느낌도 없었다. 비극에 대한 느낌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죄책감도 없었다. 그들에게 로스앨러모스는 거대한 놀이터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순진함은 훼손되지 않았다. 오피가 말한 물리학자들의 진실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유럽 사람들에게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은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비극적 분위기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도 같았다. 오피는 유럽 문화에 젖어서 성장했고, 이 비극적 감각을 습득했다. 유럽 사람인 한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미국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림자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미국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은 유럽의 1차 대전과 비슷한 영향을 주었다. 이 전쟁으로 미국은 비극을 알았다. 순진함의 시대는 이제 대서양 양안 모두에서 끝나 버렸다.

(81-84쪽)


모든 면에서 예외였던 파인만은 비극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외였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비극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빛나는 여성 예술가와 사랑하고 결혼했지만 그녀는 결핵으로 죽었다. 결혼할 때 이미 그들은 그녀가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딕이 로스앨러모스에 합류할 때 오피는 딕의 부인을 위해 앨버커키의 요양원을 알선해서 부부가 최대한 함께 있도록 배ㅕ해 주었다. 그녀는 이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가 전쟁이 끝나기 몇 주일 전에 죽었다.

딕은 시인이 아니었고 공산주의자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프랭크처럼 목소리가 컸고, 정신이 기민했고, 모든 종류의 사물과 사람에 관심을 가졌고, 미친 듯이 농담을 했고, 권위를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물리학의 거의 모든 것을 손수 재발견하거나 재발명하도록 스스로를 닦달했다. 이런 방식으로 5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결국 양자 역학을 재발명했다. 그는 자기만의 양자 역할을 만들어냈다. 이 성과를 가지고 그는 전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계산했다. 한스가 조금 앞서서 정통 이론으로 계산해 냈던 결과를 그는 자기 이론으로 재현했다. 한스가 내게 제시한 문제를 풀기 위해 나는 정통 이론을 이용해서 몇 달 동안 수백 장의 종이에 계산을 해댔다. 하지만 딕은 칠판 하나에 30분 만에 똑같은 답을 적었다.

딕을 대할 때 좋은 점은, 내가 쓸데없이 딕의 시간을 빼앗는 게 아닐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찾아갔을 때 나와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렇게 내뱉었다. “가, 바빠.” 그러면 나는 물러났다. 그러나 내게 앉으라고 말하면 이것은 의례적인 친절이 아니었다. 우리는 많은 시간 딕만의 물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마침내 그것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85-86쪽)


Richard Feynman: 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 Nanotechnology lecture - 1959


딕의 말을 듣고 그가 칠판에 그리는 이상한 그림을 자꾸 보면서 나는 점차 도형을 이용하는 그의 상상력에 빨려 들어갔고, 그가 보여 주는 우주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딕의 이론의 핵심은 모든 구속 조건을 풀어버리는 것이었다. 정통 물리학의 과정은 대개 이렇다. 전자가 어떤 시간에 어떤 상태에 있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미분방정식으로 계산하고, 방정식의 해를 가지고 그 다음 시간의 상태를 계산한다. 딕은 이렇게 하지 않고 단순히 전자가 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한다고 받아들였다. 전자는 가능한 모든 경로를 따라 모든 시간과 공간을 누비고 다닌다. 전자는 자기가 하고 싶다면 시간을 거슬러 갈 수도 있다. 전자가 시간과 공간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경로가 하나하나의 역사이고, 여기에는 시간을 따라가거나 시간에 역행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경로도 모두 포함된다.

사물을 역사의 총합(Sum-over histories)으로 보는 방식은 한번 익숙해지기만 하면 사실은 그리 신비롭지 않다. 심오한 독창적인 다른 아이디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물리학의 틀 속으로 서서히 흡수되었다. 

(87-88쪽)


딕의 물리학, 딕의 원자폭탄. 원폭 개발과 투하를 파인만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파인만은 그저 지시 혹은 권유를 받고 동원된 과학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딕의 인생에서, 그에 대한 평가에서, 로스앨러모스는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가 너무나 매력적이고, 너무나 인기가 많은 물리학자였다는 그 사실 때문인지도.


딕에게 원자폭탄 연구에 합류하라고 권한 사람은 로버트 윌슨 교수였다. 딕은 본능적으로 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싫습니다.” 그렇게 말해 놓은 다음에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원자폭탄 계획에 참여했고, 처음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로스앨러모스로 갔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연구에 매달렸고 불과 26세에 계산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로스앨러모스 사람들은 경주에 너무 몰두하느라 독일인들이 경주에 탈락해서 홀로 달리고 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이 결승선을 통과한 트리니티 테스트(최초의 원폭 실험)의 날에 딕은 지프의 지붕에 올라가서 봉고를 두드리며 즐거워했다. 나중에야 그는 윌슨에게 했던 첫 번째 본능적인 대답이 더 옳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군사 관련 일에 손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 일을 너무 잘했고 너무 즐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94쪽)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에서 원폭 개발에 대한 파인만의 '변명'은 딱 한 문장이다. "나는 선배로부터 '과학자는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배웠다". 어떤 사람들은 오펜하이머가 파인만의 아내를 치료하게 해주겠다며 꾀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다이슨이 설명했듯이 파인만은 스스로 로스앨러모스로 향했고, 그 뒤의 자괴감이나 변명이나 합리화 역시 스스로의 몫이었다. 


딕은 전쟁이 때때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핵무기도 사용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무기를 세상에 내놓고 나서 자신이 무죄라고 우기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뉴욕 사람들이 히로시마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살아간다는 사실을 어이없게 생각했다. 클리블랜드와 세인트루이스를 거쳐 자동차를 몰고 가면서, 그는 마음의 눈으로 폭발 지점으로부터의 거리를 재면서 치명적인 방사선이 어디까지 미칠지, 폭풍과 화염이 얼마나 멀리까지 손상을 입힐지 가늠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참으로 황량했다. 나는 마치 롯을 따라 소돔과 고모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95쪽)


아마도 파인만은 영원히 합리화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위악을 하듯 한 문장의 변명만을 적은 것이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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