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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이란 무엇인가

딸기21 2016. 12. 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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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이란 무엇인가 Les avatars du vide

마르크 라시에즈-레. 김성희 옮김. 알마




매우 얇은데 매우x10000 어려운 책. 근래 읽은 책들 중에 가장 얇고, 가장 난해한데, 가장 폼난다.

'진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이 책을 읽는다고 진공이 무엇인지 단번에 이해하게 되지는 않는다. 진공이 그렇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런 책을 과학자들이 힘들게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진공은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개념이고,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개념이다. 진공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류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변화해왔으니. 때론 진공은 그냥 텅 빈 공간이었고, 물질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었으며, 하늘이었고, 우주였다. 

이 책은 '에테르'부터 '우주복사'까지, 진공과 관련된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진공의 역사서'다. 진공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작업에는 당대 물리학의 첨단 연구들이 녹아들었다. 그래서 진공의 역사서는 곧 물리학의 역사가 된다. 이 짧은 책에 복잡다단한 역사를 꼬깃꼬깃 접어넣어놨으니 어려울 수밖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멍해지는 '위상학'과 초끈이론까지.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무엇보다, 근사하다!



진공의 서사시는 적어도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그리고 이후 루크레티우스까지, 원자론자들에게 진공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근간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진공은 물체가 존재하고 운동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이 경우 진공은 오늘날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혼동되며, 물체를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일종의 '용기'로 간주된다. 

_20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의 존재를 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마다 밀도가 다른 건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반박했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이후 2000년간 기준으로 삼았고, 원자론자들의 견해는 잊혀 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가서야 재평가를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부 운동이 물체가 '본연의 장소'로 돌아가려는 경향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 '본연의 장소'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주위에 있는 물질들과는 다르고 그 모든 물질보다 우월하면서 신성한 어떤 물질적 본질'에 대해 언급했다. 진공의 또다른 화신, 에테르를 두고 한 얘기다. 에테르는 '항상 빛나는 것'을 뜻했다.

_21쪽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연구 활동이 에테르에 물리적 지위를 부여하고 다른 물질적 실체들과의 비교를 통해 그 속성을 정확히 밝히려고 노력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의 일이다. 16세기부터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후 새롭게 확립된 물리학은 많은 점에서 원자론으로의 복귀에 해당한다. 이 새로운 물리학의 출발점은 뉴턴이 1687년에 출간한 <프린키피아>다. 하지만 거인들, 즉 뉴턴의 '선배들'은 진공이라는 문제 주위를 온갖 방식으로 배회했다.

1587년에 <물리적, 수학적 공간에 대하여>를 출간한 철학자 프란체스코 파트리치는 진공과 무한한 공간의 존재를 처음 명시적으로 주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반박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파트리치와 동시대 인물인 조르다노 브루노는 원자론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견해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단 판결을 받고 1600년에 화형당했다. 

_24쪽


갈릴레이의 제자이기도 한 수학자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는 1644년 이른바 '대기압 실험'으로 진공을 만들어냈다(길이 1m의 유리관에 수은을 채운 뒤 거꾸로 세우면 유리관 속의 수은은 내려오다가 약 76cm 높이에서 멈춘다). 토리첼리는 그 실험에서 거꾸로 세운 유리관 윗부분에 빈 공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진공은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주장을 더는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_26쪽


진공에 물질로서의 특성을 부여해야 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자 상황은 복잡하게 전개되어 갔다. 독일의 공학자 오토 폰 게리케는 '진공 펌프'를 만든 데 이어, 1654년에는 마그데부르크에서 유명한 실험을 진행했다. 반구 두 개를 맞붙인 뒤 그 안을 진공상태로 만들었을 때, 두 반구를 떼어내려면 말 24마리가 잡아당기는 힘이 필요함을 보여준 실험이었다. 진공이 행사하는 힘, 정확히 말해 공기의 압력이 진공에 행사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 확인시켜준 것이다. 

_28쪽


하위헌스는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떤 매질의 파동으로 전달되는 것일까? 하위헌스는 그 매질을 언급하면서 '빛 에테르' 혹은 간단히 '에테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모든 공간에 가득 차 있으면서 그 안에 잠긴 물체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이 빛의 파동을 전달하는 매체라고 본 것이다. 이 개념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논거는 간단했다. 빛은 파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뉴턴은 빛을 입자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에테르를 들먹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_29쪽


1801년 영국의 토머스 영은 실험을 통해 빛이 간섭현상을 보인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빛은 파동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에테르가 물체의 운동, 천체들의 운동과 완벽하게 무관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라는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이며, 전자기 현상은 전자기파의 형태로 전달될 수 있음을 알아냈다. 특히 전자기파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래서 그는 빛이 전자기파의 특수한 한 가지 형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빛 에테르의 문제가 전자기 에테르의 문제로 확대된 것이다. 맥스웰의 연구는 '전자기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문제를 일부 해결하는 데 이르렀다. 순수하게 전자기적인 성질의 실체로 간주되는 전자기장이 빈 공간에서 전파된다고 보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에테르는 그 물질성을 상실하고, 전자기장이 전파되는 공간으로만 남게 된다.

전자기 현상을 파동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20세기 들어 양자물리학에 의해 다시 한번 변화를 맞았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전자기 현상을 맥스웰의 전자기장과 구별되는 '양자장'을 가지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양자장은 파동의 측면과 입자의 측면을 동시에 허용했고, 이로써 '파동-입자 이중성'으로 표헌되던 오랜 논쟁을 결정적으로 해결한다. 

_31쪽


뉴턴은 빛 에테르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물체에 신속하게 스며드는 미세한 氣'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대신 뉴턴은 에테르에 대해 정확한 물리적 속성을 부여했다. 무한히 탄력적이고 서로 분리된 아주 작은 입자들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뉴턴이 진공의 또 다른 화신, 즉 중력 에테르를 고려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내놓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있다. 예를 들어 천체는 빈 공간에 있을 때도 중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 공간은 적어도 중력을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빈 공간은 '중력 에테르'라고 불렸다. 

_33쪽


운동은 상대적이다. B의 속도로 달리면서 C의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를 지켜볼 때, 그 물체의 속도는 B+C다. 하지만 빛은 언제나 동일한 속도로 이동한다. 빛은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를 따르지 않으며, 에테르에 어떤 운동 상태를 부여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이 내놓은 새로운 이론은 상대성 원리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기본 원칙으로서의 역할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한다. 이 때 상대성은 '갈릴레이의 상대성'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으로 바뀐다. 속도 합성 법칙이 단순한 합산에서 '로런츠 변환'이라 불리는 더 복잡한 공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새로운 공식이 포함된 상대성 원리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라고 부른다. 
푸앵카레와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로런츠 변환을 시공간의 회전과 동일시했다. 여기서 '시공간'은 이전까지 서로 분리돼 있던 뉴턴의 공간과 시간을 대신하는 새로운 실체로서, 특수상대성이론이 전개되는 이상적인 틀이다. "앞으로는 공간 따로, 시간 따로의 개념은 그림자로 사라지고, 오직 그 둘이 하나로 통합된 것만이 독립적인 실체로 남을 것이다."(민코프스키) 

_45쪽


아인슈타인이 새롭게 내놓은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을 '곡률'이라 불리는 수학적(기하학적) 양으로 표현되는 '시공간의 형태'와 동일시한다. 시공간이 그 안에 놓인 물체에 따라 중력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맥스웰은 전자기 현상을 전자기장이라는 새로운 실체로 설명했는데, 아인슈타인은 중력에 대해 같은 식으로 설명하되 좀더 나아갔다. 중력장을 시공간의 곡률에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력은 빈 공간에서 거리에 걸쳐 전달되는 게 아니라 '시공간의 곡률'이라는 매질의 연속적 변형으로 나타난다. 시공간의 곡률이 이전까지 에테르에 부여된 역할을 하고, 중력적 상호작용은 그 곡률의 전달로 설명되는 것이다. 

또한 시공간의 곡률은 에너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에테르의 역할을 하되, 그 지위는 에테르보다 더 나아가 물질의 지위에 가깝다는 얘기다(곡률은 중력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중력과 '동일시' 된다). 

_50쪽


일반상대성이론에서 공간은 그 자체로 역학적인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공간은 팽창 중인 우주의 경우에서처럼 진화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공은 '공간 그 자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제거되었을 때 남는 것으로 정의돼야 하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은 진공을 그런 식으로 정의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보았다. 물질만 없는 게 아니라 공간도, 시공간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말이다. 하지만 정작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그와 다르게 말하고 있다. 물질이 없을 경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어떤 특별한 시공간, 즉 바로 진공에 해당하는 시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_51쪽


1928년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랙은 전자에 대한 양자론을 내놓으면서 '디랙 방정식'이라 불리는 새로운 방정식을 소개했는데, 이 식은 난처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방정식의 일부 해가 음(-)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전자는 양의 에너지를 가질 수도 있고 음의 에너지를 가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모든 전자는 (모든 물리계와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체소화함으로써 가장 안정된 상태에 놓이려는 경향이 있다. 전자의 에너지가 음이 될 수 있다면 거의 모든 전자가 음의 에너지를 띠려고 할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디랙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공의 성질에 주목했다. 진공이 텅 빈 게 아니라 무한히 많은 음 에너지의 전자로 채워져 있을 거라고. 그런데 전자들은 배타원리(두 개의 전자가 같은 상태를 취할 수 없다는 법칙)를 준수한다. 디랙은 무수히 많은 진공의 (가상) 전자들이 음의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 상태를 모두 차지한다고 보았다. 그러면 실제 관찰 가능한 전자들은 음의 에너지를 가질 수 없다. 빈자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의'가 중요하다. 몇몇 경우 음의 에너지 상태에 대한 자리가 소수이긴 해도 빈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디랙은 이를 '구멍'이라 불렀다. 따라서 진공이라는 '바다'에서 구멍은 (음의 에너지를 지닌 가상의) 전자의 부재로 정의된다. 디랙은 처음엔 이 부재가 양성자의 존재로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얼마후에는 양성자를 양전자 혹은 반전자 anti-electron라 불리는 새로운 입자와 동일시했다. 그리고 양전자는 1932년 칼 앤더슨에 의해 우주선 cosmic rays에서 실제로 발견된다. 

_62쪽


오늘날 양자물리학의 기본 문제들은 양자장론의 틀에서 논의된다. 양자장론은 물질계를 기본적인 입자로 이뤄진 게 아니라 양자장이 중첩돼 있는 것으로 본다. 단, 양자장의 수는 입자 종류별로 하나씩으로 제한된다. 정의상 양자장은 시공간 전체에 펼쳐져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빛의 파동 전체는 전자기적 양자장 하나로 기술된다. 따라서 전자의 양자장과 전자기적 양자장 사이의 상호작용은 우주의 모든 전자와 모든 전자기파 사이의 모든 상호작용을 단번에 설명해준다. 

양자장론에 따르면 전자장은 여러 상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전자장이 취할 수 있는 상태는 매우 다양하다. 그 수많은 상태 중에 다른 모든 상태와 구별되는 어느 한 상태가 있다. 이 상태는 에너지가 최소이고 대칭성이 최대(다양한 시점에서도 동일한 속성을 유지한다는 뜻)다. 이를 두고 '바닥상태 ground state'라고 부른다. 다른 모든 상태는 들뜬상태 excited state다. 겉으로 봤을 때 하나 이상의 전자가 있다면 그것은 들뜬상태라는 뜻이다. '양자적 진공'은 바로 바닥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양자물리학의 무대는 텅 비는 일이 절대로 없다. 장은 언제나 존재하며, 장의 부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공은 장의 무재가 아니라 장의 특별한 한 가지 상태에 해당한다. 

_65쪽 


장의 상태는 모든 진동자의 모든 상태로 이뤄진 무한집합에 해당한다. 장의 에너지는 그 모든 진동자의 에너지의 합인데 이런 식의 계산은 그 장의 상태가 어떻든 무한대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양자장의 절대적인 에너지를 알 필요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상태들 사이의 에너지 차이를 추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물리학자들은 난관을 해결할 방법, 즉 임의적인 상수를 집어넣어 무한대에서 유한한 값을 끌어내는(재규격화) 방법을 고안해냈다. 재규격화 이론을 완성한 리처드 파인만은 그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았을 때 무한대의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해결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인 건 사실이다. 

_69쪽


겉으로 보기에 진공을 물질과 구별해주는 속성은 입자의 부재다. 하지만 진공에 그런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양자장론에서는 입자의 개념 자체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공을 입자가 전혀 없는 상태로 보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게 아니다. 디랙은 진공이 무한히 많은 전자로 이뤄져 있다고 봤는데, 양자장론이 진공에 대해 내놓는 현대적 해석은 디랙의 이해 방식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래서 대개는 진공이 입자를 무한대로 지니고 있다고 말하되, 이 입자들을 '가상의' 것으로 규정한다. _72쪽


진공의 에너지는 구간이 0에서 무한대인 적분의 값으로 주어진다. 구간의 하한을 진동의 파장이 가질 수 있는 최솟값에 해당하는 아주 짧은 길이로 대체하면(컷오프) 적분은 유한한 값으로 수렴한다. 양자적 진공의 에너지를 정확히 고려할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지만 만약 그 방법이 나온다면 컷오프의 역할을 할 미시적 성질의 새로운 기본 길이 단위를 개입시킬 가능성이 크다. 

_77쪽


우주 팽창 가속의 원인을 둘러싼 물리학자들의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한쪽에서는 그 가속이 자연의 기본상수인 '우주상수'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주가 가속을 일으키는 신비한 물질로 채워져 있다고 보는데, '이질적 에너지 exotic energy' 혹은 '암흑에너지'라 불리는 그 물질의 주된 특성은 척력적 중력 효과로 우주 팽창을 가속시키는 것이다. 이 두 이해방식의 차이는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장론 사이의 대립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후에 두 관점이 통합되면 두 이해방식도 통합돼 우주상수와 암흑에너지 사이의 구별이 무효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_85쪽


일반상대성이론은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우주상수(람다)를 포함하는 버전이고 하나는 포함하지 않는 버전이다. 람다가 있을 때의 풀이에 따른 진공은 없을 때의 진공과는 다른 '드 지터 시공간'이라 불리는 굽은 시공간이다. 드 지터 시공간은 언제나 0이 아닌 일정한 값의 곡률을 가진다. 람다가 그 값에 해당한다. 즉 우주상수는 다름 아닌 진공의 곡률이다. 곡률은 곡률반지름이라 불리는 길이를 뜻하는데, 일반상대성이론의 진공을 드 지터의 진공으로 보면 진공의 곡률반지름은 자연의 기본길이가 된다. 

_88쪽


우주가 급팽창 단계 때 팽창의 극심한 가속을 겪었다고 보려면 그런 가속을 일으키는 물질이 필요해진다. 급팽창 이론에서는 이 물질을 '인플라톤 inflaton'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이 가설의 근거가 없고 임의적이라는 데 있다. 급팽창 개념이 구체화되려면 미래의 물리학 이론은 진공의 에너지라는 개념을 입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플라톤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장의 존재도 입증해야 한다. 

_96쪽


진공에 대한 이해방식들 거의 모두가 한 가지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진공은 가능한 모든 상태 가운데 가장 '대칭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 진공에 불규칙성(디테일)이 생겼다고 상상해보자. 그 디테일이 진공(혹은 공간)의 구조에 너무 박혀 있거나 진공의 일부로 간주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기하학적으로 얘기하면 진공이라는 끈(이라고 가상할 때)의 매듭의 위치는 변형될 수 있지만 끈의 위상학적 구조는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찰하는 물질이 사실은 그런 실체라고 생각해도 될까? 물질은 시공간, 즉 진공의 기하학적 구조에서 흠집(디테일, 흉터, 매듭)에 해당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입자로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끈이론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의 다양성을 미시적인 끈들의 진동 및 감김이 가질 수 있는 상태의 다양성으로 보면서 그 기하학적 성질을 규정한다. 

_99쪽


이른바 '통일적' 접근은 입자물리학을 양자장론의 틀에 통합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모든 물리학적 상호작용을 통일된 틀 안에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아직 없지만 앞으로는 나올 가능성이 있다. 많은 물리학자는 끈이론이 그런 이론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통일적 접근의 이론들은 우주의 상호작용들이 아주 이른 원시 우주 단계에서는 통합돼 있었지만 우주 역사의 어느 시기에 대칭성 깨짐 symmetry breaking이라는 과정에 따라 분화됐을 거라고 얘기한다. 

_100쪽


물질과 복사는 일부 특성에서는 다르지만 존재론적으로 같은 성질을 지니며 수학적으로도 비슷하게 기술된다. 장의 특수한 한 가지 상태로 간주되는 진공 역시 마찬가지다. 물질과 복사, 상호작용, 진공 사이의 통합이 이뤄진 것이다.

보다 완벽한 통합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물질과 진공, 복사와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중력과 시공간의 기하학까지 모두 같은 차원에 놓고 같은 방식으로 다루면서 동일한 실체로 간주하는 이해 방식이 나올 수 있을까?

오늘날 이론물리학자들의 목표는 진공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연구의 결과물은 결국 진공의 새로운 이해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현재 양자물리학은 물질과 복사, 상호작용을 이미 진공의 들뜸으로 보고 있다. 특히 양자중력 이론은 시공간의 기하학도 진공의 들뜸으로 간주한다. 고대 이후 모든 것을 하나의 실체로 환원하려는 물리학의 통합적 행보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행보가 성공할 경우, 물질을 공간으로 환원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공간을 물질로 환원할 것인지는 아마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유일한 시레를 기하학적인 것으로 보는지, 물질적으로 보는지의 문제도 중요하지 않다. 그 실체는 기하학적이면서도 물질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_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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