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일 동안 거친 바다에 떠 있던 배는 떠났다.”
지브롤터의 항구에 억류돼 있던 유조선이 떠나자 현지 방송인 GBS뉴스는 19일 이렇게 보도했다. 원유 210만 배럴을 싣고 지중해를 지나던 이란 유조선 ‘그레이스1’ 호는 지브롤터에 붙잡혀 있는 동안 이름이 ‘아드리안 다리야-1’로 바뀌었고, 그새 도색까지 마쳐 새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혔다.
‘이란 위기’를 증폭시킨 유조선 억류는 이렇게 마무리됐고, 이란이 보복으로 붙들어놓은 영국 선박을 풀어주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란 앞바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은 미국과 유럽의 불협화음만 노출시켰다.
지브롤터는 영국과 다르다
‘아드리안 다리야-1’ 호는 그리스의 항구도시 칼라마타를 행선지로 내걸고 바다로 나갔다. 최종 행선지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이란 측이 유조선을 호위할 선박을 보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란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영국 해군은 지난달 4일 이 배를 억류해 지브롤터에 정박시켰다. 유럽연합(EU)은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민간인 학살이 계속되자 시리아 정부와 개인·기업들을 제재하고 있으며, 올해 6월까지로 돼 있던 제재를 지난 5월 1년 더 연장했다. 유조선 억류 근거도 EU의 제재였다. 내전 중인 시리아에 원유를 보내는 것은 제재를 위반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유조선을 계속 붙잡아둘 것을 요구했지만 지브롤터 법원은 억류를 풀라는 결정을 내렸다. 지브롤터 법무부는 성명에서 “미국으로부터 17일 이 배를 계속 우리 해상에 머무르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란에 대한 EU와 미국의 제재 규정은 다르다”고 밝혔다. 배가 시리아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한 이상, 이란 선박이라는 이유로 계속 붙잡아둘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지브롤터 측은 “영국과 EU에는 미국의 이란제재법에 해당하는 법은 없다”고 못박았다. 미국은 이 배에 대한 압류영장을 발부하는 것으로 응했으나 지중해에서 미국이 직접 나서 배를 억류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란은 배를 지키기 위해 호위 선박을 보냈다.
이베리아반도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면적 6.7㎢의 지브롤터는 영국령 자치지역이다. 스페인이 수시로 영유권을 선언하지만 지브롤터 주민들의 영국에 대한 소속감은 굳건하다. 1967년과 2002년에 두 차례 독립을 놓고 주민투표를 했으나 압도적으로 영국 잔류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선 영국과는 다른 흐름이 감지됐다.
미국은 이란 앞바다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선박들의 ‘항행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며 ‘호르무즈 호위연합’이라는 군사연합체를 만들려 하고 있다. 영국은 이 연합에 들어가겠다고 맨 먼저 선언했다.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좁은 해로를 끼고 있는 지브롤터야말로 배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바탕으로 먹고 사는 곳이다. 지브롤터는 이란을 압박하는 런던을 뒤쫓기보다는 EU의 규정과 명분을 따르는 길을 택했다. 영국은 브렉시트를 택했지만 지브롤터는 EU에 남기를 원하고 있다.
유럽은 미국이 아니다
유조선이 억류됐을 때 이란 측은 “시리아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라며 반발했지만 목적지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시리아를 비롯해 EU의 제재 대상인 곳으로는 가게 하지 않겠다”며 물러섰다. 석방되기 직전에는 파나마 선적으로 돼 있던 배를 이란 선적으로 바꾸고 이름도 변경했다. 미국 제재를 피하려고 이름을 바꿨다는 지적에 대해 하미드 바에디네자드 영국 주재 이란 대사는 “선적이 바뀌어 이란식 이름을 지은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배가 풀려나자 마무드 바에지 대통령 비서실장은 메흐르통신에 “이란의 외교적 승리”라고 말했다.
지브롤터의 성명을 보면 이란의 승리라 해도 무방하다. 미국은 앞서 4월에 이란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이란이 반발한 것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도 무리한 주장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미국은 지브롤터에 억류된 유조선이 혁명수비대와 관련돼 있다며 ‘이란과 시리아의 밀착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했다. 그러나 지브롤터는 이번 성명에서 “EU는 혁명수비대를 테러조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이란은 유조선 억류에 대한 보복으로 지난달 19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스웨덴 선적의 영국 유조선 ‘스테나 임페로’ 호를 나포했다. 영국은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했다. 이제 이란도 영국 배를 풀어주는 게 다음 수순이겠지만 언제가 될 지는 알 수 없다. 영국이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바에디네자드 대사는 지난달 말 “억류된 유조선들을 맞바꾸자는 영국의 제안에는 응할 수 없다는 것이 이란 정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란 선박을 인질로 삼으려던 영국은 도리어 인질을 잡힌 꼴이다. 러시아의 정치분석가 그리고리 루키야노프는 이란 국영 IRNA통신에 “영국은 이란이 똑같이 유조선 억류로 맞받아칠 줄 몰랐을 것”이라며 영국의 ‘계산착오’였다고 지적했다. 이란의 반다르압바스 항구에 매여있는 스테나 임페로에는 러시아 선원들이 타고 있어, 러시아 대사관 직원들이 이 배를 방문하는 등 이란과 긴밀히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이란을 압박하고 호르무즈에서 무력 시위를 해도, 유럽은 여전히 이란과 거래하고 있다. 미국이 이란과의 핵협정을 깨고 제재에 들어갔지만 유럽 외교장관들은 지난 7월 핵협정을 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대표는 이달초 태국 방콕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만나 이란 핵협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을 같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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