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새벽(현지시간) 이란의 공격을 받은 이라크 서부 안바르의 알아사드 공군기지는 이라크에 있는 미군 기지 중 2번째로 큰 곳이다. 미 해병대와 82공중강습사단, 의료부대와 지원부대, 영국군 등이 주둔하고 있다. 2018년 1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가 방문했던 곳이고, 지난해 11월에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미군 위로차 방문한 기지다.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시설을 공격한 데 이어 추가공격을 이어갈 것이라 공언했다. CNN방송 등 미국 언론들은 이란 혁명수비대가 “미국이 대응해오면 우리는 미국 내에서 대응하겠다”라고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정부가 이란 군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살해한 뒤, 중동의 불안정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다.
여론 등에 업고 대미 공격 나선 이란
이란은 솔레이마니가 살해된 직후에 보복을 다짐하기는 했으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나라를 전쟁으로 끌고 가지는 않겠다”라고 4일 발언한 데에서 보이듯 미국과의 직접적 군사적 대결과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여론이 ‘순교자 솔레이마니’ 때문에 하나로 모였고, 특히 7일 테헤란에서 열린 솔레이마니의 장례식에는 “1989년 호메이니 장례식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명지대 박현도 교수는 “정부가 추모 군중을 동원한 흔적이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동원만으로 되지 않는다”며 이란 민심이 반미로 결집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반정부 시위 여파가 가시지 않았던 데다 다음달 총선도 있어 이란 측이 일사불란하게 강경대응을 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됐으나, 전국적인 추모 열기와 미국에 대한 분노로 여론이 모이면서 보복 수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란 측의 언급을 보면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외교장관은 지난 4일 트위터에서 미국의 국제법 위반을 비난했다. 7일 CNN, 알자지라 등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솔레이마니 사살을 미국의 “국가 테러”로 규정하며 발언 수위를 높였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도 이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미국의 “중대한 전략적 실책”을 지탄했다고 IRNA방송 등이 보도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6일 국가안보위원회를 찾아 ‘미국의 행위에 비례하는 직접적인 공격’을 지시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중동 역내 무장조직들을 이용한 대리전을 넘어, 직접타격이라는 지침을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와중에 “이란에 문화적으로 중요한 52곳의 공격목표물 정해놨다”는 발언으로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호세인 살라미 이란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은 이튿날 “미국이 아끼는 곳들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응수했다.
이란과 화해하려던 사우디 ‘당혹’
트럼프 정부가 솔레이마니를 살해함으로써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미국 잡지 애틀랜틱은 “솔레이마니를 살해한 것은 오사마 빈라덴이나 이슬람국가(IS) 우두머리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살해와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솔레이마니는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지도자이자, 한 나라의 자원을 움직여온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속속 전해지는 제거작전의 경위를 보면, 트럼프 정부가 파장을 얼마나 예측했는지 혹은 향후 전략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문스러운 상황이다.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이란을 상대할 여러 시나리오 중에 솔레이마니 제거안이 포함돼 있었는데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이를 적극 밀어붙였고,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솔레이마니가 이라크를 방문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화해를 위해서였다. 사우디 측이 이란과 갈등을 끝내고 싶어 했고, 이라크가 중재에 나섰고, 이 문제에 대한 이란 최고위층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솔레이마니가 바그다드를 찾았다는 것이다. ‘미국 공격 음모를 꾸미러 왔기에 사살했다’는 백악관 주장에 아딜 압둘마흐디 이라크 총리가 6일 “평화 임무를 가지고 왔고 (살해된) 당일에 나와 만날 예정이었다”며 거세게 반발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친미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례적으로 당혹해하며 미국에 긴장완화를 촉구한 배경과도 맞아떨어진다. 사우디와 이란의 화해 조짐은 몇 달 전부터 있었다. 지난해 9월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가 드론 공격을 받은 뒤 미국이 이란을 정조준한 것과 달리, 사우디는 이란을 공격의 주체로 명시하지 않았다. 사우디는 예멘 전쟁을 끝내려던 참이었고, 이란과의 갈등을 무마한 뒤 경제개발에 집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이 이런 사달을 만들면서 호르무즈의 긴장은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지난해 12월 유럽 중재로 휴전에 합의한 예멘의 친이란 후티 반군은 다시 들고 일어날 것이며, 사우디는 미국 시설 등에 대한 자국 내 반미세력의 공격과 후티반군의 공격을 모두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사우디는 급히 미국에 칼리드 빈 살만 국방차관을 보내 트럼프 대통령,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정세를 논의했다.
‘반미’ 고조 속에 긴장한 이스라엘
이라크와 레바논에서는 솔레이마니의 노골적인 정치·군사적 개입 때문에 최근 이란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잇단 시위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지역들이 반미로 돌아서고 있다. 이라크에서는 솔레이마니가 살해될 때 시아파 민병대 PMF 부사령관이 함께 숨지는 일까지 겹쳤다. 지난해 10월 반이란 시위가 일어났던 중부의 나자프와 카르발라 같은 시아파 중심지들은 모두 추모와 분노에 빠져들었다.
미-이란 싸움의 불똥이 튄 이라크는 미군의 영원한 수렁이 될 판이다. 트럼프는 철군을 주장해왔고, 미 국방부와 정치권 등에서는 찬반 양론이 부딪치고 있었다. 국립외교원 인남식 교수는 “미군이 떠날 수 있으려면 미국과 이란을 향한 이라크의 민심이 균형을 맞추는 정도는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는 미국을 오히려 고립시켰다. 현재 이라크 정부는 격화되는 반미 감정과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이라크 저널리스트 가이트 압둘아하드는 미국 진보단체 ‘데모크라시나우’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에서 미국과 이란이 공존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레바논 베이루트, 시리아 다마스쿠스 도심에도 솔레이마니의 대형 사진들이 나붙었다. 근래 이란 입김이 세졌다지만 아랍국들은 오랫동안 이란과 적대적 관계였다. 그냥 뒀으면 이 나라들 스스로 이란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했을 텐데, 미국이 이란을 도와준 꼴이다. 사실 애당초 이란이 시아파 벨트를 묶을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없애고 이라크를 정치적 진공으로 만든 탓이었다.
이란의 보복이 현실화되자, 레바논 헤즈볼라를 이웃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은 잔뜩 긴장했다. 현지언론 하레츠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6일 안보내각 특별회의에서 솔레이마니 살해를 “미국의 일”이라 규정하며 “우리는 관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네타냐후는 앞서 솔레이마니 사살을 미국의 “정당한 권리”라고 옹호했었다. 시리아 알레포의 군중들은 7일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웠다. 중동에서 미국과 한몸으로 인식돼온 이스라엘이 ‘대리 타깃’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중동에 간 푸틴
이런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새해 첫 외국 방문으로 7일 오후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찾았다.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두 번째 방문이다. 크렘린은 푸틴 대통령이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만나 시리아 내 러시아 군사기지 상황 등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시리아에 안정이 회복되고 있는 것을 축하하러 갔다지만, 솔레이마니 사망 뒤 긴장이 높아진 중동에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푸틴 대통령은 아사드 대통령과 만나 “불행히도 중동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며 우회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지난해 10월 미국이 시리아 쿠르드를 저버리고 중동 민심을 잃었을 때 크렘린이 나서서 ‘우리는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던졌던 것과 같은 모습이다. 푸틴은 이날 저녁엔 곧바로 터키로 이동했다. 명목은 러시아와 터키를 잇는 ‘투르크스트림’ 가스관 개통식에 참석하는 것이지만, 결국 중동 문제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려는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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