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이란, 미국, 우크라이나, 캐나다...보잉 추락과 제재 '복잡한 셈법'

딸기21 2020. 1. 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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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의 이맘호메이니 공항 부근에 사고로 추락한 우크라이나국제항공 여객기 잔해가 흩어져 있다. 테헤란 IRNA·AFP연합뉴스

 

미국이 만들어 우크라이나에서 운행하던 항공기가 이란에서 추락해 캐나다인들이 많이 숨졌다. 미국과 이란이 공방을 벌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테러나 미사일 공격이라는 증거도 없고 미국인들이 사망한 것도 아니지만 이 사고가 향후 미-이란 관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당장의 사고조사는 물론이고, 사고기 제작사인 보잉의 항공기 판매 문제도 걸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캐나다와 우크라이나까지 관련돼 있어 파장과 셈법이 몹시 복잡하다.

 

이란 “블랙박스 미국에 안 준다”

 

8일(현지시간) 이란이 이라크의 미군 기지를 미사일로 공격하고 있을 때 테헤란 공항을 떠나 키예프로 향하던 우크라이나국제항공 PS752 여객기가 추락했다. 176명이 숨진 이 사고와 관련해 현재까지 확인된 정보는 적다. 비행기는 정상적으로 이륙했고, 8000피트 고도까지 무사히 올라갔다. 플라이트레이더 등 항공기 운행기록 사이트에 공개된 비행기록은 이후 갑자기 끊겼다. 이란 당국은 사고기가 이륙 뒤 공항으로 회항을 시도했으나 추락했다는 초기조사 내용을 9일 발표했다. 이맘호세이니 공항 쪽으로 기수를 돌렸지만 관제탑에 비상호출을 보내지는 않았다고 했다.
 

사고 직후 이란 반관영 ISNA통신은 엔진 이상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보잉 측 설명에 따르면 사고기의 기종인 737-800은 엔진에 이상이 생기더라도 일단 이륙 뒤에는 비행을 계속하게 돼 있기 때문에, 이 고도에서 갑자기 떨어진 원인은 아직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사고기는 3년 된 새 비행기였다.

 

 

관건은 앞으로의 사고 조사다. 항공기 사고가 나면 사고지점의 항공당국, 운항한 항공사, 항공기 제작사와 엔진 제작사 등이 모두 조사에 참여한다. 미국 비행기가 걸려 있을 때에는 세계에서 항공기 사고조사 기술이 가장 발달한 미 교통안전위원회(NTSB)가 많이 개입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추락 장소가 테헤란이고 주도권은 이란 당국에 있다.

 

이란이 미국에 어떤 정보를 주느냐,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을 비롯한 미국 측 관계자들이 사고 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해줄 것이냐가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이란을 ‘악마’로 만들어왔고 이란 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살해하기까지 해 무력충돌까지 갔던 상황이었다.

 

이란 민간항공기구(CAO)의 알리 아베드자데 사무총장은 메흐르뉴스에 “미국 생산자에게 블랙박스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조사를 주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다만 블랙박스의 조종실 음성기록과 비행기록 등을 모두 이란 혼자서만 분석하겠다는 뜻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아베드자데는 “테러리즘과는 관련 없다”며 사고임을 강조했다.

 

사고 현장에 어린 아이의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다.  테헤란 ISNA·AFP연합뉴스

 

제재에, 사고에…난처한 보잉

 

다급해진 것은 보잉 쪽이다. 인구 1억에 면적이 160만㎢인 이란은 거대한 항공시장이다. 국토가 넓어 항공교통이 일반화돼 있지만 미국 오랜 제재로 비행기들이 낡았다. 특히 투폴례프나 안토노프, 일류신 등 러시아제 항공기들의 사고가 적잖게 일어났다. 2015년 핵합의 뒤 제재가 완화되자 제일 먼저 한 것이 항공기 계약이었다. 이 때 이란은 항공기를 무려 200대나 구매하기로 하면서 유럽 에어버스에 120대, 미국 보잉에 80대를 주문했다. 이번 사고기도 보잉이 이란에 최근 넘긴 항공기였다.

 

세계 항공기 시장이 포화상태인 상황에서 에어버스나 보잉 모두 이란 시장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갑자기 핵합의를 깨고 제재를 재개했고, 에어버스도 보잉도 미국의 조치를 지켜봐야만 하는 신세가 됐다. 특히 보잉은 최근 맥스 기종의 잇단 사고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CNN은 “이번 사고로 보잉이 더 어려운 처지가 됐다”고 지적했다. 보잉은 “무엇이든 필요하면 도울 준비가 돼 있다”며 몸을 낮췄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보리스필국제공항에 설치된 추모소에서 8일 유족과 시민들이 테헤란 항공기 추락사고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키예프 EPA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제재를 강조하면서 ‘솔레이마니 사태’는 일단 무력 충돌을 피하는 쪽으로 가고 있지만, 미국의 오랜 제재에 내심 불만이 많은 것은 미국 기업들이다. 지난해 4월 미국이 제재 강화를 발표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전 세계 에너지 기업들과 이란의 거래를 묶는다지만 중국 기업들은 예외”라고 썼다. 미국은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부터 대통령 행정명령과 이란-리비아제재법(ILSA) 같은 법들로 이란을 옥죄어왔다. 이 때문에 미국 기업들은 이란과 거래하지 못했고 유럽 기업들보다 불리한 입장이었는데, 트럼프 집권 뒤 그나마 틈새를 엿봤던 시장마저 중국에 빼앗기고 있다.

 

보잉만 해도 핵합의 뒤 이란항공, 아스만항공 등과 196억달러 어치 계약을 맺었는데 2018년 5월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이 “항공기 판매 계약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은 파이프라인 등 이란 산유설비 1억5000만달러 계약의 입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 때 막혔다. 허니웰은 미국 밖 지사들을 통해 이란과 1억1500만달러 규모의 계약을 했지만 역시 미국 압박에 거래를 중단했다. 프록터&갬블도 이란과의 사업을 포기했다.

 

캐나다가 ‘중재자’ 될까

 

항공기 사고 파장에 우크라이나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말레이시아항공 MH17 항공기가 격추되는 사건이 있었다. 러시아는 온갖 헛소문들을 퍼뜨리며 자신들과 관련 없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유럽국들이 참여한 사고조사에서 러시아 소행으로 거의 굳어졌다. 이번 사고 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재난을 둘러싼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과 추측들을 경계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잘 알려진 대로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몬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한 축이며,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8일 오타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테헤란 항공기 추락사고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오타와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사고로 인한 사망자들의 국적은 아직 확인 중이지만, 항공사측 탑승자 명단을 보면 이란인이 82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캐나다인이 63명이었다. 캐나다도 일종의 당사국인 셈이다. 캐나다의 이란계 학자들을 비롯한 방문객들이 테헤란에 갔다가 키예프에서 연결편을 갈아타려고 사고기에 탑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캐나다는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을 탈출한 이들이 많이 갔던 나라 중 하나였으며 밴쿠버나 리치먼드힐 등에 대규모 이란 공동체가 있다. 현재 캐나다 내 페르시아계(이란계) 인구는 21만명에 이른다. 특히 2015년 집권한 저스틴 트뤼도 총리는 전임 보수당 정권의 정책을 뒤집고 이란과의 관계를 복원하며 경제협력에 공을 들여왔다. 트뤼도 총리는 “사고 조사 과정에서 기술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제의했다고 CBC방송 등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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