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코로나 위기'와 독일의 바주카포…10년 전과 달라진 유럽

딸기21 2020. 3. 2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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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광장이 코로나19 때문에 봉쇄돼 텅 비어 있다.  파리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13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올해 유럽 경제가 “꾸준하고 완만하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코로나19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위협하고 있었지만 유럽의 리스크는 낮게 봤다. 올 1분기가 지나면 감염증은 약해질 것이고 이 전염병의 “세계적인 영향은 제한적”일 거라고 했다. 심지어 지난 12일에도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코로나19 경기대책에 대해 ECB의 일이 아닌 “정부들이 할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열흘 만에 유럽은 전염병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22일까지 이탈리아의 감염자는 6만명, 스페인은 3만명에 육박한다. 10년 전 금융·재정위기에서 아직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1920년 스페인 독감 이래 ‘100년만에 최악의 전염병’ 사태를 맞은 것이다. 경제 침체는 목전에 닥쳤고 회원국들의 단합이 쉽지는 않지만, 이전의 경험을 교훈삼아 대규모 재정투입을 앞다퉈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독일의 달라진 태도가 유럽을 살릴 지가 관심사다.

 

‘수출주도 경제’ 독일의 고민

 

유럽에서 경제적 타격이 가장 큰 나라는 이탈리아다. 영국 런던경제대(LSE) 이탈리아 경제전문가 로렌초 코도뇨는 최근 가디언에 “이탈리아의 위기는 처음이 아니지만 지금은 정부도 공공재정 상황도 아주 취약하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코도뇨는 올해 이탈리아 경제가 3.1%에서 최악의 경우 6.5% 위축될 것으로 봤다. 주세페 콘테 총리가 예상을 뛰어넘는 정치력과 과감함을 보여주고 있으나, 여러 정당들이 뭉친 연립정부는 기반이 약하다. 금융권 사정도 2009~2010 금융·재정위기 때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프랑스는 정부가 ‘심각한 경제타격’을 이미 여러번 경고했다. 지난해엔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노동·연금개혁 때문에 항의시위와 파업이 계속됐고 경제의 새 동력도 없다. 중앙은행은 올 1분기 경제성장률을 0.3%로 봤다가 이달 들어 0.1%로 낮췄다.

 

21일(현지시간) 코로나19로 주민 이동이 금지된 벨기에 브뤼셀에서 이웃들끼리 유리창에 붙인 글과 술잔을 이용해 생일축하 인사를 나누고 있다.  브뤼셀 AFP연합뉴스

 

독일의 경우 코로나19 확진자가 2만5000명에 이르지만 감염증 자체는 이탈리아나 스페인과 비교할 때 그리 큰 타격이 아니다. 문제는 수출주도형 경제다. 코로나19가 유럽에 들이닥치기 전부터 중국 생산공급망이 차질을 빚었고, 지금은 이탈리아 자동차부품 공장들도 문을 닫았다. 세계의 소비는 위축됐다.

 

그럼에도 제조업 기반이 탄탄한 것은 독일의 강점이다. 베를린 유럽개혁센터(CER)의 크리스티안 오렌달은 가디언에 “식당과 호텔은 피해가 크겠지만 화장지 제조업체는 위축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공황심리가 가라앉으면 제조업 반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관광산업에 의존하는 스페인 같은 나라들보다는 독일이 빨리 일어설 것으로 예측했다.

 

유럽도 “이번엔 재정 푼다”

 

감염증 대응 시기를 놓쳐 비판을 받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지금 1조 달러 넘는 대규모 부양책을 의회와 협상 중이다. 국민들에게 현금을 내주는 ‘헬리콥터 드롭’도 제시했다. 10년 전과 같은 파국을 피하려면 유럽 역시 과감히 돈을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영국 경제학자 애덤 투즈는 2010년 금융위기를 분석한 저서 <붕괴>에서 미국과 중국 등이 과감히 돈을 풀었던 것에 비해 유럽은 미적거리다가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비판했다. ECB의 대응이 늦었고 독일이 재정건전성에만 매달렸다는 것이다.

 

이번엔 유럽도 10년 전과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연방정부의 금과옥조였던 ‘슈바르츠 눌(적자 제로)’에서 물러설 뜻을 내비쳤다. 재정적자를 죄악시해온 독일이 조금만 돈을 풀어도 유럽 전체를 위한 부양책이 될 수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중앙역에서 22일(현지시간) 방역요원이 플랫폼 벤치를 소독하고 있다.  스톡홀름 AFP연합뉴스

 

메르켈 정부는 세금 납부기한 연장과 인프라 구축 같은 방안을 내놓았다가 사태가 심각해지자 확대재정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올라프 숄츠 재무장관은 국내총생산(GDP) 5%에 이르는 재정을 ‘바주카포’처럼 투입하겠다고 했다.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기업들에 5000억 유로를 빌려주는 것 등이 포함돼 있다. 미국의 헬리콥터 드롭과 독일의 바주카포에 세계 경제가 달려 있는 셈이다.

 

프랑스는 450억유로 규모 소상공인·서민 지원을 포함해 GDP 2% 규모에 이르는 경기부양 패키지를 준비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스페인 민주주의 역사 상 최대규모의 재정 투입”을 약속하며 1000억달러 기업·상공인 대출지원 등 총 2000억유로의 부양책을 내놨다. 영국의 리시 수나크 재무장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GDP의 15%에 이르는 3300억파운드를 쏟아붓겠다고 지난 17일 선언했다. 집주인들에겐 석달간 모기지 상환을 면제해주고 소기업에는 2만5000파운드씩 내준다고 했다. 경제위기와는 동떨어져 있던 북유럽국들도 나서고 있다. 스웨덴 재무부는 GDP의 6%에 해당하는 3000억크로나 규모의 세금 면제를 추진하고 있다.

 

“대출보다 현금을”

 

그러나 여전히 유럽 경제의 그늘은 가시지 않는다. 유럽을 위협하는 침체의 규모는 10년 전 금융권 위기보다 훨씬 총체적이고 심대할 것으로 우려된다. 프랑스는 이달 26~27일 EU 정상들 만남에서 유럽 차원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회원국 재정기준도 풀어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EU 집행위는 생각이 다르다.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경제담당 부위원장은 “지금은 재정적 부양책보다 감염증 위기 자체에 집중할 때”라고 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2일(현지시간) 코로나19 대책을 담은 성명을 발표한 뒤 돌아서고 있다.  베를린 로이터연합뉴스

 

ECB가 18일 팬데믹긴급매입프로그램(PEPP)이라는 이름으로 7500억유로 규모의 채권 사들이기에 들어가고 20일 기업들과 주민들이 1조8000억유로까지 빚을 낼 수 있도록 금융기준을 완화한 것은 청신호다. 최소한 지난번 위기 때보다는 빨리 대응에 나서 불확실성을 줄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약속에는 ‘지원’이 아닌 ‘신용대출’이라는 이름표가 달렸다.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볼프강 뮌하우는 22일 기고에서 “유로존에 필요한 것은 크레디트(신용)가 아닌 캐시(현금)”라며 미국이나 아시아 국가들이 하고 있는 현금 투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럽의 돈줄인 독일이 자국 경제만 생각할 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돈을 풀어야 한다는 요구가 계속 나온다. 하지만 이번에도 독일에선 이웃들 짐을 얼마나 나눠 져야 할지를 놓고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이탈리아가 280억유로 경기부양 계획을 내놓고 유럽국들에도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나 독일은 마스크 수출도 막으면서 ‘가난뱅이 이웃’ 보듯 한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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