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코로나19 감염자수가 5만명을 향해 가고 있다. 그 중 절반은 뉴욕주에서 나왔다. 특히 뉴욕시는 23일(현지시간)까지 누적 확진자가 1만3000명이 넘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해온 ‘민주당 주 정부’가 적극 검사에 나선 까닭도 있지만, 근본 문제는 ‘세계도시 뉴욕’의 밀집된 환경이다.
뉴욕시의 인구는 2010년 센서스 기준 840만명으로 미국 내 1위다. 2위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주민 수 400만명의 2배다. 문제는 밀도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뉴욕은 미국에서 인구밀도도 가장 높아, 1평방마일(2.6㎢)에 2만8000명이 살고 있다. 2위인 샌프란시스코는 1만7000명이다. 주민 수는 2위여도 평방마일 당 7500명이 사는 LA에서는 코로나19 감염자가 아직 500명밖에 안 나왔다.
인구 대비로 보면 뉴욕은 1000명당 1명 꼴로 감염돼 미국 평균의 5배다. 인구 당 감염자 수로 따지면 이탈리아나 중국보다 많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들은 인구 규모나 밀도로 봤을 때 뉴욕이 코로나19 발원지인 중국 우한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본다”고 23일 전했다.
뉴요커들의 자랑인 유서 깊은 지하철이 감염증 사태에는 최대 취약점으로 지목됐다. 평일 500만명이 지하철을 타는데, LA 지하철이 보름 동안 수송하는 사람 수에 맞먹는다. LA는 대중교통이 부족하고 근교에 ‘스프롤(도시의 확산)’된 소도시 출퇴근자들이 승용차로만 이동해 환경파괴가 심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런데 감염증이 뉴욕과 LA의 장단점을 역설적으로 뒤바꾼 것이다.
캘리포니아대 공중보건학자 리 라일리 박사는 뉴욕타임스에 “여기서는 흩어져 살면서 차를 타고 다닌다. 대중교통시스템은 경악할 수준이다. 반면 뉴욕에는 지하철과 버스, 타임스퀘어가 있으며 작은 아파트에 붙어 산다”고 말했다. 뉴욕주에는 공공주택도 많다. 40만명이 공공주택에 살아, 역시 미국 내 최대다.
삭막한 서부 대도시들과 달리 뉴욕은 복작거리는 ‘인간적인’ 삶으로 명성을 떨쳐왔으나 그것도 그대로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연간 6000만명이 뉴욕시를 찾았고,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하루에 이 도시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3000대였다. 미국 내 다른 주에서 오는 통근자들과 여행객도 연인원 1000만명에 이르렀다. ‘팬데믹’이 습격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경제 중심지이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밀라노가 감염증 배양토가 된 것과 비슷하다.
밀라노처럼 멈춰서진 않았으나 지금은 뉴욕 브로드웨이의 불이 꺼지고 맨해튼은 유령도시처럼 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슈퍼마켓과 약국들은 문을 열고 있으나 선반은 텅텅 비었다. 시 교통국(MTA)에 따르면 버스 탑승객은 평소보다 61%로 줄었고 지하철은 74%로 줄었다.
뉴욕시를 비롯해 주 전역에서 확진자가 하루 새 5000명 늘어 23일 2만명을 넘겼고 병원들은 포화상태가 됐다.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는 병원들마다 환자를 50%씩 더 받으라고 명령했다. 여러 병원들을 응급진료시설 지정한 데 이어, 중국 우한처럼 긴급진료소를 만들 계획이다. 맨해튼 재비츠 컨벤션센터 등에 연방재난관리처(FEMA)가 총 1000개 병상을 갖춘 이동식 병원 4곳을 설치하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미군 공병부대를 동원, 진료소를 더 만들 예정이다.
마스크나 의료용 장갑, 보호복을 비롯한 의료장비도 모자란다. 빌 드블라지오 뉴욕시장은 23일 CNN방송에 나와 “인공호흡기를 이번주 안에 더 확보하지 못하면 살릴 수 있는 사람도 떠나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맨해튼의 병원에서 일하는 한 간호사는 뉴욕포스트에 보호장비조차 모자라는 현장 상황을 전하는 기고를 실었다. “평소라면 감염병에 노출된 간호사들은 검역을 마친 뒤 업무에 복귀한다. 하지만 지금은 간호사들이 감염병 우려가 있다는 사실조차 전달받지 않은 채 감염원에 노출되고 있다.”
이미 주 정부가 이동제한령을 내렸고 트럼프 대통령도 ‘주요 재난지역’으로 선포했지만 당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며칠 전 쿠오모 주지사가 젊은이들을 상대로 일갈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동제한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당국의 엇갈린 메시지도 한몫 했다. 쿠오모 주지사는 ‘멈춤(pause)’을 촉구했으나 드블라지오 뉴욕시장은 지난 21일 시민들에게 “식당에 가라”며 일상생활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드블라지오 스스로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튿날인 22일 쿠오모 주지사는 “제발 집에 머물라”고 재차 호소했고 드블라지오 시장도 입장을 바꿨다. 드블라지오 시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전에는 맞닥뜨려본 적 없고 우리 누구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뉴욕주가 적극적으로 검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확진자가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한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감염자 폭증’으로 비친 것과 비슷하다. 이탈리아 등에 비해 뉴욕주의 누적 사망자는 157명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적극적인 검사로 확진자를 찾아낸 만큼 치명률은 낮았던 한국 상황과 유사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뉴욕주의 인구 대비 바이러스 검사 건수가 중국이나 이탈리아보다 많다”고 했다.
반면 캘리포니아는 진단키트가 없어 쩔쩔매고 있다. LA의 인구 밀도가 뉴욕보다 낮다 해도 감염자 수가 상대적으로 많이 적은 것은 검사 자체가 적은 탓이다. 안드레아 가르시아 LA시 대변인에 따르면 시 전체에 감염 진단을 할 수 있는 곳이 4곳뿐이다. 그나마도 시민들은 어디서 검사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고, 보건당국이 ‘검사 지시’를 내린 사람만 검사하는 실정이다. LA 시 측은 곧 진단능력을 확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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