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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산유국도 빵은 먹어야…사우디-러시아 '유가 합의'와 식량 거래

딸기21 2020. 4. 1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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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아지즈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10일(현지시간) 리야드에서 20개 주요 산유국 석유장관 화상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리야드 로이터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석유시장을 놓고 벌여온 ‘치킨게임’이 12일의 감산 합의로 일단락됐다. 석유시장의 두 강국들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 진정국면을 맞은 이면에는 ‘식량’이라는 핵심적인 이슈가 숨어 있다.

 

양국은 2008년 무렵부터 생산량을 조절하면서 유가 담합을 해왔는데,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사우디가 의도적으로 유가를 떨어뜨리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사우디 실세 무하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정치적 도박 속에 코로나19라는 세계적 위기가 겹치면서, 양국의 움직임에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었다.

 

밀 실은 러시아 화물선

 

당초 분석가들 전망은 ‘사우디 우세’였다. 지난달 외환보유고를 보면 사우디는 5000억달러, 러시아는 5800억달러로 큰 차이는 없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는 사우디가 25%인데 반해 러시아는 15%로 다소 적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가격 하한선에서, 사우디는 유가가 배럴당 3달러까지 떨어져도 버틸 여력이 있지만 러시아는 배럴당 30달러가 안 되면 못 버틸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따라서 감산을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러시아가 백기를 들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엔 석유 외에도 중요한 거래가 있었다. 미들이스트모니터에 따르면 유가전쟁 한창인 와중에 지난 9일 흑해 항구에서 대형 화물선이 사우디로 출발했다. 배에는 러시아산 밀 6만톤이 실려 있었다. 이튿날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러시아는 세계 1위 밀 수출국 지위를 지켜나갈 것”이라는 정부 방침을 보도했다. 드미트리 파트루셰프 농업장관은 “세계 최대 밀 수출국 자리를 유지한다는 특별한 계획 아래 사우디와의 식량거래를 계속 늘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12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에서 방역요원이 소독약을 뿌리고 있다.  모스크바 AFP연합뉴스

 

러시아가 사우디에 밀을 수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러시아 측은 ‘역사적인 거래’로 보고 있다. 파트루셰프 장관은 “지난해 두 나라 농업당국이 협력의 돌파구를 만들었고, 러시아로선 중동 최대의 밀 소비시장을 열게 됐다”고 평가했다. 사우디 측은 러시아 밀 수입에 대해 공식 확인하지 않고 있으나, 미들이스트모니터는 작년 8월 사우디아라비아곡물기구(SAGO)가 러시아 밀을 들여오기 위해 규정을 바꿨다고 보도했다. SAGO는 사우디의 밀 수입을 독점 관리하며 수입상대와 수입량을 정하는 기구다.

 

두 달 뒤인 10월에는 푸틴 대통령이 리야드를 찾았다. 미국의 맹방이던 사우디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틀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리고 반 년 뒤, 두 나라가 석유 감산을 놓고 치열한 밀고당기기를 하는 와중에 밀을 실은 배가 출항했다.

 

중동 곡물시장 노리는 러시아

 

사막의 나라인 사우디는 해외에 땅을 사들여 농작물을 키우고, 자국 내에서도 농지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물 부족 때문에 식량자급률이 늘 고민거리다. 관개농지를 늘려 연간 1만톤 수준이던 밀 생산량을 2018~2019년 50만톤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3년 전 발표했지만,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설혹 야심찬 증산목표를 채웠다 하더라도 자급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SAGO에 따르면 연간 밀 소비량은 350만톤에 이른다.

 

관개농업으로 곡물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lifeinsaudiarabia.net

 

유가도 중요하지만,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사우디는 일단 식량부터 확보해야 한다. SAGO는 이달초 ‘해외농지’를 보유한 자국 투자자들에게 밀 35만5000톤을 들여와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사우디도 무작정 러시아에 문을 열어주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예전에도 이집트산 밀을 수입하면서 ‘품질기준’을 들이댄 전례가 있다. 러시아산도 품질검사부터 통과해야 한다. 국가적 거래라지만 SAGO가 퇴짜를 놓으면 러시아 수출업체엔 엄청난 손해다.

 

러시아는 이라크, 알제리 등으로 곡물 수출을 늘릴 계획이기 때문에 사우디와의 거래선을 트는 게 매우 중요하다. 흑해 곡창지대의 밀을 그동안 주로 독일과 발트해 국가들에게 팔아온 러시아가 중동·북아프리카로 ‘골포스트를 이동하려 한다’고 로이터통신은 표현했다. 그동안 주로 동아프리카 땅을 사거나 장기임대해 농산물을 생산해온 사우디 투자자들도 광활한 러시아 농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직 러시아에 확보한 땅은 없지만 사우디 국부펀드의 농업부문 투자를 맡고 있는 사우디농축산투자회사(SALIC)이 러시아 투자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국들 사재기하면 빈국은 ‘식량대란’

 

밀 거래가 사우디와 러시아 두 나라에는 ‘윈윈’이 될 지 모르지만, 세계의 빈국들에겐 식량수급 적신호가 될 수 있다. 러시아는 올해 식량 총 4500만톤을 수출할 계획이다. 그 중 밀이 3600만톤을 차지한다. 미국 농무부는 지난해 7월부터 올 6월말까지 러시아의 밀 생산량을 3350만톤으로 예상하고 있다. 러시아는 밀 비축량이 많아서 지난해에 생산쿼터를 오히려 약간 줄였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세계의 식량위기 우려가 커졌다. 지난달 30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각국 봉쇄로 식품 공급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다”면서 “4월과 5월에 식량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하자 러시아 농산물감독청은 지난달 20일 “앞으로 열흘 간 모든 곡물 수출을 제한”한다고 발표했고, 곧바로 세계에서 식량대란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FAO 자료를 보면 러시아는 2018년 3300만톤의 밀을 다른 나라에 팔아, 수출규모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미국, 3위는 캐나다, 4위는 호주였다. 월즈톱엑스포츠닷컴에 따르면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이 세계 밀 수출량의 55%를 차지하며 미국과 캐나다가 27%, 그리고 호주가 7.5%를 맡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저개발국들은 주로 식량을 수입한다. 아프리카의 경우 세계 밀 수출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0.1%에 불과하다. 돈 많은 산유국들이 사재기를 시작하면 빈국들은 식량위기 위험이 더 커진다. 한국의 경우도 식량자급률이 47%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이어지던 2010년 밀 수출을 통제해 세계의 곡물값 대란을 부른 전례가 있다.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농산물 수출국들은 이미 곡물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카자흐스탄은 밀 수출을 줄였고 인도와 베트남은 쌀 수출 제한에 들어갔다. 카자흐스탄은 세계 10위 밀 수출국이고, 인도와 베트남은 각각 쌀 수출 1위와 3위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우디와 이집트에서는 이미 밀값이 오르고 있다”면서 “세계가 밀 수출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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