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회계기준을 따르지 않는 중국 기업들은 뉴욕 증시에서 쫓아내겠다”고 엄포를 놨다. 하지만 시장의 움직임은 ‘중국 퇴출’과는 거리가 멀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정치적 압박이 시장에는 먹혀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은 10일(현지시간) 백악관 브리핑에서 “미국의 회계기준을 지키지 않는 외국 기업은 미국 증시에서 퇴출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뉴욕증권거래소(NYSE)나 나스닥에 상장된 중국 기업들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백악관은 중국 기업들이 미국 기준을 따르지 않아서 미국 투자자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며, 이미 누차 ‘퇴출’을 예고해왔다.
중국 기업들은 2013년 양국 정부가 체결한 양해각서에 따라 미국 규제당국에 회계자료를 내지 않는 혜택을 누려왔다. 그 대신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에 자료를 냈다는 것만 입증하면 됐다. 미국 투자자들은 핫한 중국기업들에 투자하고, 중국 기업들은 미국 증시에서 쉽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는 중국 기업들의 불투명성을 문제 삼으며, 미국 기준에 따라 회계감사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2022년 1월까지 이를 따르지 않으면 증시 상장을 폐지하겠다고 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재무부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실무그룹이 최근 백악관에 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증시에서 거래되면서 미 당국에 회계 자료를 내지 않는 기업은 총 283개이고, 그중 251개가 중국·홍콩에 본사를 둔 기업이다.
앞서 6일 트럼프 대통령은 동영상 공유앱 틱톡 모회사인 바이트댄스와 메신저서비스 위챗을 운영하는 텐센트의 미국 내 거래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 내 거래’가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지만 중국의 대표 IT기업 텐센트는 홍콩증시에서 그날 주가가 급락했다. 바이트댄스와 달리 텐센트는 중국의 ‘국민 플랫폼’ 격이어서, 트럼프 정부가 벌이는 ‘중국 정보기술(IT) 기업과의 전쟁’에서 대표적인 타깃이 돼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을 석 달 앞두고 계속 중국 기업 때리기를 하고 있다.
시장에선 여전히 ‘설마 중국기업이 정말 퇴출될까’ 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므누신 장관이 칼을 빼들겠다고 발표했지만 실효성이 있을지, 미국 투자자들이 이를 반길지는 알 수 없다. 블룸버그통신은 “중국 기업들을 증시에서 쫓아낸다고 미국이 위협하지만 중국 기업들은 미국 거래소에서 주식을 팔겠다며 줄을 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기업들의 미국 상장 ‘대기줄’은 더 길어지고 있고, 미국 투자자들의 관심과 호응도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3억달러 규모의 회계부정 스캔들이 불거진 러킨커피 등이 퇴출됐거나 퇴출될 예정인 점을 제외하면, 중국 기업들의 ‘뉴욕행’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 증시를 이용한 중국 기업들의 자금 조달 규모는 2018년 90억달러로 정점을 찍고 지난해와 올해에는 많이 줄었다. 하지만 올들어 지난 7일까지 발표된 것만 해도 45억달러에 이른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닛케이아시안리뷰는 트럼프 정부의 규제 강화가 오히려 중국 기업들이 뉴욕 상장을 서두르게 만들고 있다며, 올해 기업공개(IPO) 규모가 50억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10일 보도했다.
텐센트 계열 자산관리회사 KE홀딩스, 알리바바와 일본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전기차 회사 샤오펑(Xpeng)은 지난 8일 뉴욕증시 IPO를 신청했다. 자산관리플랫폼 루팍스, 데이타회사 친데이타 등도 5억~20억달러 규모의 IPO를 준비 중이다. 베이징의 전기차 회사 리오토는 이미 지난달 말 나스닥 IPO로 11억달러를 조달했다. 2018년 ‘테슬라도 떤다’던 상하이 전기차 스타트업 NIO가 상장될 때 11억5000만달러를 기록한 이래 최대 규모였다. 나스닥의 중국 기업 주가지수인 GDCI는 올들어 30%가 올라갔다.
트럼프 정부의 압박에도 투자자들의 흐름이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은, 시장을 무시한 정치적 압박카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백악관의 움직임을 보면 대선을 겨냥한 제스처 성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알리바바홀딩스와 바이두 등 대기업들이 미국 상장기업회계감독위원회(PCAOB)에 회계자료를 제출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백악관 실무그룹은 최근 보고서에서 ‘PCAOB가 인정한 미국 회계법인의 회계감사’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미국 기준을 따르는 미국 회계법인’이 회계감사를 한다면 중국 기업들이 자료를 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두 나라 규제당국의 요구를 충족시킬 ‘우회로’를 열어준 셈이다.
트럼프 정부의 엄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홍콩 증시다. 홍콩보안법을 이유로 홍콩의 특별경제지위를 박탈하는 등 미국이 온갖 압박을 가하고 있으나, 5월 말 잠시 출렁였던 홍콩 항셍지수는 7월 이후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중국 IT 기업들의 상장이 늘어난 덕이 컸다. 중국과 외국 투자자들은 백악관의 압박보다 이 기업들의 미래 수익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알리바바에 이어 올 6월엔 징둥닷컴과 넷이즈가 홍콩 증시에 상장됐다. 미국 증시에서 거래되는 중국 기업들 가운데 이렇게 홍콩 증시에 중복 상장하려 대기 중인 회사가 40곳이 넘는다. 올 상반기 IPO 실적을 보면 나스닥은 170억달러, 홍콩 증시는 112억달러, NYSE는 53억달러다. 그러나 하반기에 알리바바의 모바일 결제 자회사 앤트테크놀로지가 상하이와 홍콩 증시에 동시 상장하는 ‘초대형 IPO’를 예고하고 있어, 홍콩증시가 나스닥도 제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잦은 협박’에 시장은 이미 익숙해져버렸다. 미국과 중국이 공격과 보복을 거듭한들 작은 요동만 보일 뿐이다. 양국 갈등이 격화된 10일에도 뉴욕, 홍콩, 런던 증시 모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가 압박하면 중국 기업들은 우회로를 찾거나 다른 시장에서 돈을 마련하면 된다. 홍콩 미즈호은행 분석가 켄 청은 파이낸셜타임스에 “트럼프 정부의 조치들은 미국과 중국 증시의 디커플링을 촉진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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