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기로 전격 결정하면서 중동의 지정학적 구도가 격변을 맞게 됐다. 2015년의 이란 핵합의와 2017년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출범, 걸프의 분열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개혁 드라이브 등을 거치면서 조금씩 누적돼온 중동의 변화는 이번 ‘사건’을 통해 결정적 분기점을 맞았다. 이스라엘과의 협정을 통해 UAE는 중동의 중요한 플레이어로 위상을 굳혔다.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가 다른 걸프국들로 이어질지가 관심거리다.
전격 결정 이끈 아부다비 왕세제
14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에서는 UAE가 이스라엘 편에 선 것에 항의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열렸다. 시위대는 UAE와 이스라엘 깃발을 함께 불태우면서, 길 바닥에 UAE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아부다비 왕세제 모하메드 빈 자예드의 사진을 붙이고 발로 밟았다. 1980년 이집트, 1994년 요르단에 이어 26년만에 ‘이스라엘과 수교하는 아랍국’이 된 UAE의 결정을 이끈 사람이 모하메드 왕세제이기 때문이다.
통칭 MBZ로 불리는 왕세제는 현 에미르(수장)인 칼리파 빈 자예드의 동생이다. UAE는 7개 수장국들의 연합체로, 아부다비의 수장이 대통령을 맡고 두바이 수장이 총리를 맡는다. 명목상 국가 수반은 칼리파 대통령이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모하메드 왕세제가 아부다비를 통치하면서 UAE를 움직이고 있다. 최근 몇년 새 매우 적극적으로 변한 UAE의 외교정책을 주도한 사람이 그다. UAE가 사우디의 예멘 공격에 적극 가세한 것, 걸프 국가들이 카타르를 따돌릴 때에 주도적으로 나선 것,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구상을 내놓은 것 등이 그런 예였다. 올 1월 뉴욕타임스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지난달 UAE는 아랍권에서는 처음으로 화성탐사선을 쏘아올렸다. 이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났듯이 UAE는 모하메드 왕세제의 주도 아래 교육, 과학기술 에너지, 탈석유 경제, 금융 등등 경제발전을 위한 전방위 국가개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를 위해 프랑스, 싱가포르와 전략적·장기적 파트너십을 맺었으며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키우기 위해 대외 원조도 늘리고 있다. 2018년에는 모하메드 왕세제가 에티오피아를 찾아가 30억달러의 금융지원을 약속했고, 소말리아에는 가뭄 피해 구제를 돕겠다며 원조를 내줬다.
UAE는 미국을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여겨왔으며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주의자들과의 전쟁에서 미국에 발을 맞춰왔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정부가 이란 핵협상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아 배신감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모하메드 왕세제는 트럼프 후보가 2016년 미 대선에서 당선되자마자 뉴욕으로 가서 만났고, 트럼프 정부와 러시아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다.
대선 앞둔 트럼프에 ‘선물’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비판도 많았다. 모하메드 왕세제는 풀뿌리 이슬람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랍의 봄’을 비롯한 중동의 민주화 움직임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시민혁명 뒤 출범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정부가 2013년 사실상의 군사쿠데타로 뒤집혔을 때 UAE는 앞장서서 이집트 군부를 지원했다. 사우디와 함께 한 예멘 공격은 인도적 참사를 불렀다. 2018년 11월 그가 프랑스를 방문하자 인권단체들이 예멘 공격을 비판하며 전쟁범죄 혐의로 고발한 적도 있었다. UAE는 지난해 7월 예멘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며 성과 없이 재앙만 부른 전쟁에서 발을 뺐다.
이스라엘과 타협한 것은 이미 실효성을 잃은 ‘아랍의 대의’에 매달리기보다 사회·경제개혁을 가속화하고 중동 역내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당장 이스라엘과 하늘길이 열리면 UAE가 추구해온 걸프의 금융·경제중심이라는 위상이 더 확고해질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UAE는 이스라엘보다 이란을 훨씬 더 큰 위협으로 보고 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시블리 텔라미 선임연구원은 15일 웹사이트 글에서 여기에 ‘바이든 요인’도 있었다고 분석했다. UAE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근래 계속 개선돼온 것은 사실이지만, 미 대선을 석달 앞둔 시점에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할 수 있게 함으로써 확실한 호재를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미 민주당은 사우디와 UAE의 예멘 공격에 부정적이었으며 조 바이든 후보가 당선된다면 오바마 정부 때의 대이란 화해 정책으로 되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트럼프 정부와 이스라엘, UAE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깨져나간 아랍 공동전선
아랍국들이 이란을 더 적대시하면서도 겉으로만 내세워왔던 반이스라엘 공동전선은 UAE의 이번 조치로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협정 발표 뒤 이집트, 오만, 바레인의 ‘지지’에 감사를 표했다. 걸프 국가들이 뒤따라 이스라엘과 수교할 것인지에 시선이 쏠린다.
평화 외교의 중재자로 위상을 정립해온 오만은 이미 두 나라 협정을 지지하며 “중동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오만으로선 이스라엘과 더 적대할 이유가 별로 없다. 다른 걸프국들과 달리 이란과도 긴밀한 사이라는 것이 변수이지만, 올초 이란과 친했던 술탄이 타계해 지도자가 바뀌었다.
사우디와 다리로 이어져 있는 섬나라 바레인 정부는 UAE-이스라엘 관계 정상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병합을 유보하기로 한 것을 환영하는 논평만 내놨다. 그러나 주변 정세가 바뀐다면 바레인도 이스라엘과의 적대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바레인은 지난해 미국이 주도하는 이-팔 협상을 중재하기도 했다. 문제는 내부 사정이다. 왕정은 이란에 적대적이지만 국민 다수가 시아파이고 이란 영향력이 크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미국 묵인 하에 사우디군이 다리 건너 바레인으로 밀고 들어가 왕정 붕괴를 막았다.
사우디의 침묵, 이란의 비난
최대 관건은 사우디도 따라갈 것인가다. 15일까지 사우디는 어떤 논평도 내놓지 않았으며 로이터 등은 사우디의 침묵을 주시했다. 그동안 사우디의 공식 입장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UAE와 마찬가지로, 개혁과 경제개발의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사우디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과거와 결별하고 있으며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고 있다. 실제로 사우디는 몇년 새 이스라엘과 관계를 조금씩 개선해왔고 트럼프 정부가 내놓은 이-팔 평화안을 받아들이라고 팔레스타인에 물밑 압력을 넣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UAE의 조치로 사우디도 더욱 압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다만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지지한다는 왕정의 공식 입장을 이른 시일 내 철회하기는 힘들 것이며, 최소한 살만 현 국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수교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봤다. 유라시아그룹의 중동전문가 아얌 카멜은 이 신문에 “사우디도 결국에는 비슷한 길을 걷겠지만 훨씬 주저할 것이고 속도도 느릴 것”이라고 말했다.
UAE가 던진 충격의 최대 승자가 이스라엘이라면 최대 패자는 이란이다. 이란 보수파는 이스라엘과 적대하면서 ‘무슬림의 보호자’를 자처해왔다. 하지만 앞바다 건너 걸프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서면서 고립이 더욱 심해지게 됐다. 이란 국영 IRNA통신은 이란 외교부가 “UAE-이스라엘 협정은 전략적으로 어리석은 짓이며 역내에서 저항의 축을 강화할 것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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