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밀 수입도 힘들어진 '페니키아의 후예'

딸기21 2020. 8. 19.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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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사고로 초토화된 레바논의 베이루트 항구. 사고가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11일(현지시간)의 모습이다. EPA


8월 4일 오후 6시쯤(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항구에서 대형 폭발이 일어났다. 사망자가 최소 220명에, 부상자는 7000명에 이른다. 직접적인 원인은 곧 밝혀졌다. 비료 원료인 질산암모늄이 항구의 창고에 보관돼 있었다. 인화성 물질인 질산암모늄에 불이 붙으면서 폭발한 것으로 추정됐다.
 

폭발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규모 4.5의 지진과 맞먹는 충격이었다고 이웃한 요르단 지진연구소는 분석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아리랑 위성으로 찍은 폭발전후의 항구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지우개로 지워진 듯’하다는 동영상 제목처럼, 항구에 줄지어 서있던 창고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항구에 있던 자동차들이 공중으로 치솟고 컨테이너와 화물용 철로도 구부러졌으며 항구 가까이에 있던 대형 선박이 찌그러지고 좌초했다. 폭발이 일어난 곳에는 지름 120m가 넘는 ‘분화구’가 생겼다. 10km 떨어진 곳의 빌딩들까지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이웃한 시리아까지 연기가 번졌고 바다 건너 섬나라 키프로스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 

 

4일 베이루트의 항구에서 폭발이 일어나, 불길과 연기가 치솟고 있다. AFP

 

하산 디아브 레바논 총리는 사건 직후 기자회견에서 “항구 창고에 약 2750t의 질산암모늄이 안전조치 없이 6년간 보관돼 있었다”면서 관리 부실을 탓했다. 이어 당국은 항만 관리들을 상대로 수사에 들어갔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문제의 질산암모늄은 2013년 동유럽 몰도바 선적의 화물선에서 압류한 것으로, 선박 소유권을 놓고 상업적 분쟁이 벌어져 2015년부터 부두 창고에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고가 일어나자 이번엔 모두가 ‘주인이 아니다’라면서 질산암모늄 소유권을 부정하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끔찍한 비극을 놓고 경박하게 입을 놀린 사람은 이번에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었다.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끔찍한 공격으로 보인다, 일종의 폭탄이었다”고 말했다. 근거는 없었다. “미군 장성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더라”라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미군 당국자조차 공격이라는 정보를 “들은 바 없다”며 부인했고, 트럼프 대통령도 이튿날 “아무도 알 수 없다”며 물러섰다. 

 

 

폭발에 따른 부상자가 너무 많아 레바논에서는 의료 대란이 일어났다. 거기에다 당장 ‘빵 걱정’을 해야 할 판이 됐다. 질산암모늄 창고만 날아간 게 아니라 근처에 있던 곡물 창고가 산산이 부서져 밀 1만5000t을 못 쓰게 됐기 때문이다. 라울 네흐메 경제장관은 사고 이튿날 “전국에 공급할 곡물 비축분이 한 달 치밖에 안 남았다”고 털어놨다. 항만 교역의 80%를 담당하는 베이루트 항구가 마비돼 수입마저 차질을 빚게 됐다. 
 

지중해에 면한 레바논은 쐐기문자로 유명한 페니키아의 후예다. 고대부터 이곳 사람들은 교역으로 살아왔다. 면적은 1만㎢가 조금 넘어 경기도와 비슷하고, 인구는 700만명이 채 안 된다. 구매력 기준(PPP)으로 보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5000달러이니 빈국이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농업이나 제조업보다 교역에 의존해온 레바논에서 식량 수급은 고질적인 불안요인이다. 곡물 소비량의 80%를 수입에 의존한다. 밀 역시 80%를 수입한다. 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부터 사들인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레바논 파운드 가치가 폭락했다. 환율이 요동을 치고 달러화가 부족해져 곡물 수입이 줄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코로나19 확산 이후 밀 수출을 제한했다. 폭발 사고 직전에 레바논 정부는 인도 등에 밀 4만t을 요청했다.
 

 

환율 급등에 전염병까지 겹쳐 레바논 경제는 총체적 위기다. 물가는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3월 한 달에만 60% 올랐다. 정부의 공식환율은 여전히 ‘안정적’이지만 실제론 의미가 없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달러는 연일 치솟고 있다. 무엇보다 큰 문제가 식료품값이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으니 품귀현상이 벌어진다. 통조림 하나에 200만파운드(약 160만원) 가격표가 붙었고, 다급해진 시민들이 물물교환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실업률은 40%인데 특히 청년층은 10명 중 6명이 일자리가 없다.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다. 잠시 역사를 돌아보면, 레바논을 비롯해 시리아와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이 모여 있는 지역은 지구상의 대표적인 지정학적 불안지대다. 특히 레바논은 ‘약소국의 설움’을 고스란히 겪어온 나라다. 팔레스타인 난민 50만명이 수십년 째 레바논에 살고 있다. 1980년대 ‘레바논 내전’이 일어났다. 실상은 이스라엘과 그 지원을 받는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저항세력과 레바논 땅에서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11일 베이루트의 의사당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는 시민들. EPA

 

그 다음엔 시리아가 들어와 사실상 점령통치를 했다. 2005년 ‘백향목 혁명’이라 불리는 항쟁을 통해 시리아군을 몰아냈지만 곧이어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 무장정치조직 헤즈볼라를 없애겠다며 공격을 했다. 조금 잠잠해질까 싶더니 2014년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극단조직 이슬람국가(IS)가 점령했고, 시리아에서 난민들이 레바논으로 몰려왔다. 
 

지금까지 들어온 시리아 난민은 150만명. 현재 레바논에 사는 사람 4명 중 1명이 난민이다. 정부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부국들은 레바논에 난민 문제를 떠넘기고 있고 지원금은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 3월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긴급 구제금융 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 폭발사고가 또 다른 짐을 레바논에 안겼다. 베이루트 주지사는 폭발의 물적 피해가 100억~15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올해 재정적자가 75억달러로 예상됐는데, 그 위에 저 손실이 고스란히 얹어진 셈이다.
 

베이루트 시내에 11일 폭발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이 놓여 있다. 로이터

 

사고는 불안정한 정국에도 기름을 부었다. 폭발 참사에 성난 시민들은 거리로 나가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랜 경제난과 정치권의 ‘권력 나눠먹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지난해부터 계속되던 차에 이런 사고까지 일어나자 다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지난해 격렬한 시위로 정부가 바뀌어 디아브 총리가 올초 취임했는데 폭발 때문에 다시 내각이 총사퇴했다. 국제사회가 일주일새 지원하기로 약속한 돈은 약 3억달러. 앞으로도 몇년은 사고 여파에서 헤어나오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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