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회적 거리 두기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가 인간의 삶, 그리고 정치 공학적으로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관점에서든 우리는 이 문제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고려 사항은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로 발생한 매우 특이한 성질과 관련된 사안이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이라는 걸작을 통해 접촉에 대한 두려움이 권력의 기반이 되는 ‘군중’과 연관되어 있다고 정의한다. 인간은 보통 타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하고, 거리 두기는 이러한 두려움의 결과지만, 이러한 두려움이 전복되는 유일한 상황이 군중이다.
“인간은 군중 속에서만 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군중이 되어 자신을 버리는 순간부터 타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옆에 다가오는 모든 이와 동질감을 느끼고, 자기 자신처럼 타인을 느낀다. 갑자기 모든 것이 한 몸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58쪽)
혼자서는 구원이 존재할 수 없다. 타인과 함께하기에 구원이 있다. 그렇기에 구원은 도덕적인 사유가 아니다. 타인에게 선을 기대하고 행동해야 하기에, 그저 내가 혼자가 아니므로 구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나 홀로는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이는 고독하고 특별한 진리다. 구원은 혼자가 아니라 다수에 속하기 때문에 열리는 차원이다. (140쪽)
아감벤의 글을 좋아한다. <도래하는 공동체>, <예외상태>, <내전>, <불과 글>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지적으로 현란하면서도 명확하고 날이 서 있어서 읽다 보면 늘 기분이 좋다.
코로나19가 이탈리아를 휩쓸 때, 그러니까 2020년 봄에, 아감벤은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 사업장 폐쇄와 영업제한 같은 정부의 방역조치들을 비판했다. 글로벌 팬데믹 시대, 특히나 이탈리아에서 몇 만 명씩 사망자가 나오던 때였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유럽 지식인이라지만 무분별하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아감벤을 향해 쏟아졌다. 심지어 해외 언론들에까지 어이 없는 지적질로 소개됐을 정도였으니.
<얼굴 없는 인간>(조르조 아감벤, 박문정 옮김, 효형출판)은 2020년 동안 아감벤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아감벤이 손가락질을 받았던 사실을 몹시도 의식했는지, 얇은 책에 국내 학자들이 쓴 기획&해설의 해명성 소개글이 줄줄이 나온다. 정작 아감벤의 글은 그 뒤에 둔 걸 보니 "욕먹은 거 알지만 이 사람이 하는 말을 그래도 우리가 한번쯤 들어볼 여지가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하는 느낌이 물씬 났다.
사실 그렇게까지 '아감벤을 위한 변명'을 해줄 필요는 없다. 그의 말은 충분히 울림이 있다. 방역조치에 반대하는 것으로 들리지만, 아감벤은 '방역조치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 포기하고 있는 것, 앞으로 잃을 것'을 말하고 있다.
CCTV가 곳곳에 설치되기 시작한 1990년대 중후반,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걸 기억한다. 사생활 침해라는. 하지만 어두운 밤골목을 지나 집으로 가야 하는 여성들에겐 CCTV로 인한 사생활 침해보다 치안이 훨씬 중요하다. 이제는 무슨 일이 나면 CCTV를 돌려보는 것은 기본이고 '왜 거기에는 CCTV가 없었느냐'고 질타한다. 유치원, 어린이집에 CCTV를 달아놓고 교사들을 감시하거나 내 아이가 노는 모습을 실방으로 본다.
프라이버시, 폭넓게 말해 인권에 관한 우리의 고집은 다른 모든 사회현상이 그렇듯 비스듬한 경사로에 있는 것이어서,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저 아래까지 훅 밀려내려가 있다. 사회를 그 비탈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끌고 올라오기까지는 너무나 힘들었는데 말이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우리는 힘겹게 올라온 그 경사로에서 방향을 돌려 아래로 달음질쳤다. 그럴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몇만 명 아니 몇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CCTV를 달았듯이 시시각각 모든 움직임을 등록했고 헌법에 보장된 자유까지도 포기하면서 '비상상황'에 적응했다. 우리가 안전을 위해 내줄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마지노선이 어디인지 미처 고민하지도 못한 채.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장소다. 인간은 단순히 짐승의 주둥이나 사물의 앞면이 아닌 얼굴을 갖는다. 얼굴은 가장 개방성이 있는 장소다. 얼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나눈다. 이것이 얼굴이 정치적 장소인 이유다. 지금의 비정치적 시대는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더는 얼굴이 없어야 하고, 숫자와 수치만 있어야 한다. 독재자도 얼굴이 없다. (138쪽)
아감벤의 글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지금껏 스크랩 하나 해 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음. 몇 달 전에 읽은 이 책을 이제라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정부가 내외국인의 얼굴을 어느 기업에 내줬다는 글을 읽고서다. '출입국 생체정보 위탁'이라는 이 일은, 생체정보뿐 아니라 움직임 정보(동선)까지 방역을 위해 온 국민이 정부에 내준 동안에 슬그머니 일어났다.
출입국 관리도, 방역도 모두 시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안전을 위해 내준 정보를 민간기업에 건네는 것은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편의와 행정을 위해서다. 이 정도로 다 내줬으면 보호를 받을 수 있겠거니 하는 안도감 대신에 이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우려다. 정보와 바꾼 안전이 위협으로 바뀌는 순간. 그러나 어디 얼굴 정보뿐일까. 우린 이미 정부에, 기업에 너무 많은 정보를 내주고 있지 않은가.
전 세계를 잠식해 가고 있는 지금의 자본주의는 서구가 만든 자본주의와 그 형태와 다르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극도로 빠른 생산성과 전체주의적 정치 체계를 결합한 공산주의 형태를 띄는 자본주의다. 이것은 엄밀히 따져 보면 중국이 경제뿐만 아니라 국제 질서의 패러다임과 팬데믹의 정치적 사용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맡고 있다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자칭 공산주의라고 하는 국가들이 자본주의의 형태로, 특히 경제 후진국에 적합한 국가 자본주의를 적용했다는 것은 역사의 맥락을 읽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변형된 자본주의는 이미 그 역할을 다 하고 쓸모없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디지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재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단계에서는 지배적인 사상이 될 운명이었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는 법치 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공존했던 서구 자본주의와 새로운 공산주의적 자본주의 간의 갈등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점은 새로운 레짐은 인간관계를 극도로 약화시킬 것이며, 전례 없는 사회적 통제를 활용하는 가장 잔혹한 국가주의적 공산주의와 가장 비인간적인 자본주의가 합쳐지리라는 것이다.
(159~160쪽)
전염병의 시대에 우리가 포기했던 것들은 나중에 우리에게 어떤 부메랑이 되어 다가올까.
그러니까, 아감벤 같은 이들이 하는 말을 꼭 들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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