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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치의 책은 언제나 오래된 듯한, 그러나 낯설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 <젠더>(이반 일리치. 허택 옮김. 사월의책)는 특히 그렇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이 책을 읽는다면 욕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또한 동조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다.
토박이 문화에서는 장소, 시간, 도구, 일, 말투와 몸짓, 감각 등을 남자와 결부시키거나 여자와 결부시켜 구분했다. 이러한 연관관계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므로 사회적 젠더를 이룬다. 나는 이것을 토박이 젠더(vernacular gender)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이 연관관계는 토박이 방언이 그러하듯이 같은 전통을 가진 사람들(라틴어로 gens 곧 핏줄)에게만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처럼 ‘젠더’라는 말을 좀 더 새로운 방식으로 쓰려고 한다. 즉 과거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이름붙일 필요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 탓에 성(sex)으로 착각되곤 하는 어떤 이원적 특징을 지칭할 때 이 말을 쓰고자 한다. 내가 볼 때 ‘성 sex’이라는 말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현상으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특성을 집어넣고 나서 다시 양극화시킨 결과를 의미한다. 하지만 젠더는 지역마다 다른 이원성을 띠고 나타나는 물질문화를 보여준다.
(16쪽)
내게 충고하는 이들의 말을 곰곰이 들어보니 그들이 내 강의에 왜 그렇게 불편해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논지가 그들이 꿈꾸는 것들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는 성 역할을 강요받지 않는 젠더 없는 경제를 꿈꾼다. 좌파 운동가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정치 경제의 주체가 되는 사회를 꿈꾼다. 인간 미래주의자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의사, 남자, 개신 교도, 유전공학자 등으로 자신의 역할을 바꾸고, 무엇을 골라도 똑같이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그러나 성의 관점으로 경제학을 들여다 본 결론은, 간단히 말해 이런 꿈들이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꿈꾸는 욕망은 모두 하나의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젠더 없는 경제'이다.
산업사회는 단일 성(unisex)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단일 성이란 남성과 여성이 같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고, 같은 현실을 느끼며, 겉모습은 달라도 욕구는 같다는 가정이다. 젠더 없는 개인주의 경제학의 바탕을 이루는 희소성이라는 가정 자체가 논리적으로 단일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일’을 두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이란 것이 성별과 무관하게 인간에게 들어맞는 행위라는 새로운 정의가 생겼기 때문이다. 경제학이 경제 주체로 드는 존재는 젠더 없는 인간이다.
(22~23쪽)
교육 과정을 밟는 남녀는 우선 젠더 없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는 인간 존재가 되어 교육을 받는다. 다음으로는 경제 제도 역시 젠더와 상관없이 가치가 희소하다는 가정 위에서 운용된다. 그리하여 이 가치는 생물학적으로 별개의 성이면서도 서로 경쟁하는 중성 인간들에게 똑같이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 된다.
칼 폴라니는 이것을 두고 공식 시장경제가 토박이 경제로부터 ‘뽑혀 나간(disembedding)' 것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인류학적으로 표현하여, 젠더가 성으로 탈바꿈했다고 말한다. 경제 제도는 문화적으로 뿌리를 내린 두 젠더를 전혀 낯선 경제적 중성으로 가차없이 바꿔버린다. 이럴 경우 뿌리 없이 생겨 난 성보다 남녀를 더 잘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바짓가랑이 사이가 불거졌는지 아닌지는 예로부터 남녀를 구별하는 특징이긴 했지만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기준으로 인간을 구별하고, 그에 따라 한 종류 인간에게 다른 종류 인간 위에 올라설 수 있는 특권을 준다.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차별은 이렇듯 젠더를 폐기하고 성을 사회적으로 구성하지 않았다면 생겨날 수 없는 것이었다.
(24쪽)
19세기를 거치며 확산된 임금 노동 바깥에서, 그것과 병행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제2의 경제 활동이 생겨났다. 물론 이전에도 여자는 남자와 다른 방식으로 더 광범위하게 경제 활동에 동원되었고, 이전이나 이후나 임금 노동에서 동둥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임금 노동이 출현하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에 한층 더 불평등한 조건으로 얽매이게 되었다..
새로운 지하경제의 출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가사노동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나는 그들의 글을 읽고서, 과거의 집안일과 현재의 가사노동 사이에는 전통적 언어로는 제대로 담아낼 수 없고 계급분석의 범주나 사회과 학의 전문용어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날 여성들이 하는 가사노동은 과거의 여성이 하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대의 여성은 그녀의 조상이 지하경제에서 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가사노동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 반론의 여지 없이 그 점을 증명했다. 현대 주부의 전형적인 활동은 비산업사회에서 여성이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르다.
(46쪽)
눈에 보이는 빙산을 떠받치는 것은 거의 모두 수면 아래의 지하경제에서 이뤄지는 노동일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임금 노동으로 고용이 늘어날수록, 물밑에서는 고생스런 노역이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 물론 가사노동은 보고되지도 않고 경제학의 탐조등이 비추지도 않는, 지하세계의 실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노동이지만, 그 세계 유일의 노동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보고되는 경제와 보고되지 않는 경제에서 공히 행해지는 유급 노동과, 그것을 보완하는 지하경제의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을 대조해 살펴보고자 한다.
경제인 물품 및 서비스 생산과 달리 그림자 노동은 상품 소비자가 수행하는 노동이며, 특히 가정에서의 소비 활동이다.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고 사용가능한 물건으로 전환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동은 모두 그림자 노동이다. 어떤 상품이든 구매한 상태 그대로는 용도에 맞춰 쓸 수 없으므로, 소비자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새로 가치를 추가해야 한다. 따라서 그림자 노동이란 상품을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모든 행위를 지칭한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용어를 통해 달걀을 요리하는 오늘날의 절차와 옛날에 하던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자. 현대의 가정주부는 마트에 가서 달걀을 고르고, 자동차에 싣고 아파트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집에 내려서는, 레인지를 켜고 냉장고에 있는 버터를 꺼내 달걀을 부친다. 각 단계마다 주부는 상품에 가치를 추가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하던 방식은 달랐다.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고, 집에서 만든 돼지기름덩어리를 조금 떼어낸 다음, 손자가 공유지에서 주워온 장작으로 불을 지피고, 장에서 사온 소금을 뿌렸다.
이 예가 낭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양쪽의 경제적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똑같이 달걀을 부치지만, 현대의 가정주부는 시장에서 구매한 소비재와 고도로 자본이 들어간 생산재를 사용한다. 자동차나 엘리베이터, 가전제품 등이 그런 생산재다. 할머니는 여성 젠더 고유의 일을 함으로써 자급자족을 유지한다. 반면에 현대의 가정주부는 그림자 노동이라는 힘겨운 가사노동을 견뎌야 한다.
가사노동의 변화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생활수준의 상승으로 온갖 가정용 기기와 제품이 쏟아지면서 가사노동은 더욱 자본집약적이 되었다.
(47~48쪽)
좀더 근본적인 변화는 이 가사노동이 새로운 무급 경제활동의 패러다임이 되었다는 것이다. 가사노동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한 컴퓨터 관리 사회에서 경제학자가 통계로 잡거나 잡지 못하는 생산 활동보다 더 근본적인 노동이 되었다. 그림자 노동이 예외 없이 여성 의 일이 되어버린 것은 남성의 일이 가정으로부터 공장이나 사무실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가사 일은 급여로 산 물건들을 가지고 수행하는 노동이 되었다. 임금 노동으로 생산한 물건의 가치를 무급으로 높이는 활동은 고스란히 여성의 몫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말도 그들이 놓인 처지에 맞는 새 용법을 가지게 되었다.
(49쪽)
경제적 진보는 보통 새로 생겨난 직장들 곧 일자리 숫자로 측정된다. 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상품을 시장에 공급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의미는 상품이 새로 나올 때마다 그림자 노동이 더 많이 투입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 발전이란 생산이 더욱 자본집약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집약적인 그림자 노동을 더욱 더 투입해서 최소 수준의 복지에 도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생산 자동화로 인해 임금 노동의 전체 규모가 줄고 상품 마케팅만 확대되어, 소비자/사용자가 무상으로 기울여야 하는 노동만 증가할 것이라 예측한다. 그리고 임금 노동이 줄고 그림자 노동이 늘면서 생겨나는 경제 성장의 그림자로 인해 새로운 종류의 성차별이 가속화될 것이다. 바로 그림자 노동 안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이다. (51쪽)
임금 노동에서 더 이상 쓸모없어진 사람들은 그림자 노동으로 밀려난다. 그림자 노동은 더 이상 여성만의 영역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자 노동은 젠더 구분 없는 노동으로 뚜렷하게 바뀌어가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의 장에서 경제적 차별의 장으로 중심 무대를 바꾸고 있다.
지난 20년간 남녀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시행했어도 직장 내 여성 차별은 더 확산되고 훨씬 심해졌다. 이제는 갈수록 줄어드는 일자리로 인해 많은 남자들이 그림자 노동으로 내몰리면서, 가정에서까지 더 공공연하게 여성 차별이 벌어지게 생겼다. 공식적인 고용 노동과 그림자 노동을 막론하고 여성 차별은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58쪽)
여성의 몸에서 젠더를 차근차근 씻어낸 과정, 그리하여 여성을 생식기관은 발달했지만 털은 별로 없는 특수한 인간 종으로 재구성해온 과정은 최근 들어 충분히 연구되고 있다. 하지만 여성을 이렇게 반대쪽 극단의 인간으로 만드는 데 있어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은, 의료와 공공 법규를 통해 여성의 출산장소를 제한하면서부터이다.
1780년까지만 해도 의학 논문이나 공공 법규에서 출산은 여성의 영역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생리가 멈추고 몸이 불어나는 등의 임신 징후, 유산 또는 낙태, 출산 및 수유는 영아살해를 택할지 양육을 택할지의 문제 못지않게 여성에게 달린 일이었다. 이런 문제는 사적인 일도 비밀도 아닌, 그저 젠더에 맡겨진 일이었다.
여성(특히 복수명사나 집합명사로서의 여성)이 새 생명의 원천이라는 인식은 앙시앙 레짐의 마지막 무렵에 와서 비로소 바뀌었다. 이제는 법 조항이 외음부의 문턱을 넘어 자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를 ‘시민’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태 안에 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자궁을 감시하는 법률도 통과되었다. 엄마라는 존재가 장차 시민이 되고 군인이 될 생명을 위협하는 주요 공격자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가 가난하거나 미혼모라면 더욱 그렇게 간주되었다.
1735년 프로이센 경찰은 생리가 멈춘 미혼여성을 관리대상으로 등록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낙태용으로 쓰던 약초를 시장에서 몰아냈고, 약국 처방을 받아야만 하는 최초의 약품으로 지정했다. 경찰은 마치 오늘날의 대마초를 대하듯이 낙태용 추출물을 얻던 튜자나무(서양측백나무)를 공원에서 뿌리째 뽑아버렸다. 마침내 자궁은 공공의 영역으로 선포되었다.
19세기 끝 무렵에는 신생아를 보호한다면서 자궁과 질을 소독하는 일에 주력했다. 산모가 혹시 감염이라도 되면 태아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18세기에는 가난한 여자일수록 유산 가능성이 높다고 의심받았지만, 19세기에는 아이를 감염시킬 위험이 크다고 의심받았다. 시대를 불문하고 가난은 산모를 이웃으로부터 격리하고 출산 전에 보호시설에 수용하는 구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의 몸은 미래의 남성 의료인을 훈련하는 실험장으로 손쉽게 이용되었다. 20세기가 되자 매사추세츠가 선두에 서고 베를린과 밀라노가 뒤를 이어 젠더 없는 병원 출산이 여자들에게 이롭다고 광고하기 시작했다.
(123~125쪽)
고딕 시대의 그림들에서… 마리아는 서서히 젠더에서 분리되기 시작했고, 그 대신 고대 여신들에게서 빌려온 신화적 분위기와 교부들의 칭송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신학적 수사가 붙게 되었다. 이제 마리아는 ‘여성’ 자체의 모델로서 남성에 필적하는 유형이 되었고, 젠더 구분 없이 인간 양심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마리아가 ‘여성상’의 원형이 된 시기 여신이 아니고, 더 이상 성상(icon)도 아니면서, 아직 바로크 미술의 감상적 주인공도 되지 않았던 시기-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가득 채운 다른 조상(彫像)들도 각자 자리를 잡기 시작하던 때였다.
성자와 괴물의 모습을 한 조상들 대부분이 그들을 낳은 씨족과 함께 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마을 젠더를 지키던 털북숭이 수호신도 교회 성소로 들어와 순교자의 예복으로 갈아입거나 성자의 휘장으로 장식되었 다.마돈나 심지어 원래 있었던 뿔과 비늘을 그대로 붙인 채 돌로 깎은 나뭇잎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조상도 있었다. 신화에서 용에게 던져졌던 젊은 여인이 성녀 마르가리타의 복장을 하고 용의 고삐를 잡은 모습으로 제단 위에 자리 잡았다. 강의 신, 숲의 정령 사티로스, 땅의 요정 코볼트, 폭풍의 신 모두가 자리를 잡았다.
어떤 것은 기둥머리에, 어떤 것은 동물이 조각된 들보에 자리 잡았고, 이밖에도 수많은 조상이 주춧돌, 문기둥, 의자에 새 겨졌다. 북방민족의 털북숭이 괴물이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사자와 함께 기둥에 새겨졌고, 도서관 책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기이한 공작새와 성서 속 온갖 인물들이 함께 기둥에 들어갔다.
(162~163쪽)
오래도록 ‘도리'를 지켜주던 수호신은 고딕 시대의 도덕성으로 지은 엄격한 아치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온갖 이단에 대한 색출 작업으로 옛 신들이 부벽과 벽감에서 쫓겨났고, 긴 세월 동안 가톨릭 신앙의 비호 아래 그 지역의 예의범절을 지키던 수호신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 고딕 양식으로 바뀌면서 용과 코볼트 상, 바실리스크와 야만인 상도 실내장식에서 쫓겨났다. 좁고 뾰족하게 꽉 들어찬 고딕 양식의 기둥들에는 그들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조각들은 한 세기도 넘게 박쥐처럼 교회 외벽에 매 달려 있어야 했다. 곧 날아오를 기세로 공중에 돌출해 있거나, 지붕 난간의 이무깃돌이 되어 주둥이나 사타구니로 빗물을 흘려 보내야 했다. 양심으로 무장한 신학자들은 더 이상 이들을 숭배하지 않았다.
(165쪽)
젠더 역사의 일부는 유령이나 악마로 화한 이런저런 신령들이 어떻게 교회로부터 추방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남자이지만 대개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도상 가운데는 이집트에서 온 ‘베셋’(Beset)이 있다. 베셋은 수단에서 나일 강으로 내려온 여신이다. 가정과 출산의 수호신인 이 여신은 후대 왕조들을 거치면서 지중해 연안을 통틀어 여신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신이 되었다.
북방의 섬에서는 또 다른 무단 점유자가 프랑스로 내려온다. 우리의 공통 어머니인 이브의 옷을 입은 여신이다. 그녀 이름은 실라 나 기그(Sheela-na-gig)로, 아일랜드 또는 스코틀랜드 부족 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일찌감치 세례를 받은 여신임에 틀림없다. 그녀 역시 본래는 젠더의 수호신이자 악을 물리치는 강력한 해독제였다. 이 무단 점유자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들어오자마자 지상에 사는 모든 것을 보살피는 상징이 되었으며, 이브 곧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브가 된 실라 나 기그는 교회 서쪽 에 난 출입문의 중앙기둥 위를 떠받치는 축이 되었다.
(166~167쪽)
이브의 옷을 걸친 실라 나 기그가 정점에 오른 무단 점유자의 힘을 상징한다면, 그녀가 교회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성스러운 후광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이 여신은 일곱 가지 대죄의 하나로 양심을 어지럽힌 죄 곧 육욕의 죄로 낙인찍힌 채 지금까지 그녀가 맡았던 젠더수호의 성스러운 역할을 고통스럽게 빼앗기게 되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그녀가 이브의 사과를 빼앗기고, 뱀과 아담의 대화에도 끼지 못하고, 성스러운 힘을 계시해왔던 하늘거리는 투명함을 잃은 채 교회에서 추방당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손상되긴 했지만 아직 파괴되지 않은 젠더를 가지고 그녀는 마녀의 어떤 한 모습을 표현하게 되었다.
(168쪽)
젠더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집단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므로 서로 싸우고 빼앗고 물리치더라도 어느 선을 넘을 수 없다. 토박이 문화란 간혹 비정할 때도 있지만 양쪽 젠더 사이의 휴전이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몸을 망가뜨리는 문화에서도 규방에서는 남자의 감정에 극심한 고통을 가해 앙갚음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휴전과 달리 희소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남녀 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여자들은 늘 새로운 패배를 당한다. 물론 젠더가 다스리는 곳에서도 여성은 종속적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통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성은 오로지 제2의 성일 수밖에 없다. 여자들은 젠더 없는 판돈을 건 이 도박에서 이기든 지든 영원히 불리한 위치에 선다.
(184쪽)
산업사회는 두 가지 신화를 창조했다. 하나는 오늘의 사회가 성차(性差)에 기초해 있다는 신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평등한 사회로 향하고 있다는 신화이다. 두 신화는 ‘제2의 성’이라는 중성들의 개인 경험에서 만들어진 허구임이 밝혀졌다. 이제 성차별주의에 맞서는 저항은 환경 파괴를 줄이는 운동과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에 대한 상품과 서비스의 근본적 독점에 도전하는 운동과도 만나야 한다.
오늘날 이 세 가지 운동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은, 경제 영역의 축소가 이 운동들 모두의 공통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제각기 다르지만 경제 축소란 더 나은 삶을 위한 소극적 필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조건이다. 나아가 이 세 가지 운동은 공유를 회복하려는 시도의 세 가지 측면을 각각 대표한다. 여기서 공유(재)란 정확히 '경제적 자원’의 반대말이다.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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