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리프킨, 화석연료 없는 문명이 가능한가
기후변화로 감염병과 홍수, 가뭄, 산불, 태풍 같은 재난이 오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혼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전체 공동체가 협력하는 수평적으로 분산된 새로운 통치가 요구됩니다. 저는 피어 어셈블리peer assembly(참여자가 동일한 자격을 갖는 동배 의회)를 꼽습니다. 피어 어셈블리가 표준화되고 있어요. 지역에 있는 사회기관과 단체들이 정부와 손잡고 모이고 있지요.
특히 유럽 그린 뉴딜의 중심에 피어 어셈블리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의회입니다. 미국의 배심원 제도처럼 모든 성인이 일정 기간 잠깐씩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방식입니다. 피어 어셈블리는 정부가 관리하지만 정부의 확장이기도 하므로 전체 커뮤니티가 자신의 미래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35쪽)
계속 정리해야지 해놓고 게으름피우다가 안쌤의 새 책이 도착해서(!) 이제야 스크랩.
리프킨의 주장은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음. 이어진 원톄쥔의 글은 어떤 면에서는 재미있음. 이 책을 읽을 무렵 함께 읽었던 책들에서 공교롭게도 계속 원톄쥔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어 관심이 좀 생김.
원톄쥔, 위기 이후 어떤 세계화가 도래할 것인가
중국에는 아직 50퍼센트 넘는 사람들이 농촌에 삽니다. 중국의 농촌 마을에는 의사가 없습니다. 병원도 없습니다. 상상해보세요. 의사도 없고 병원도 없는 곳에서 농촌 사람들이 바이러스 공격을 무엇으로 막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폐쇄했습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자립을 이뤘죠.
마을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요? 모두들 농작물을 키웁니다. 광활한 경작지가 있고, 닭을 치고 소와 돼지를 기르고, 작은 가게들이 즐비합니다. 목수도 있고, 전기 기술자도 있고, 식당과 술집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을 안은 하나의 독립적인 사회입니다. 자립할 수 있는 생계가 있어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외부인이 오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라면 안전할 수 없겠죠.
중국이 이 심각한 바이러스를 다스릴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 인구의 반이 어떤 보살핌도 필요로 하지않기 때문입니다. 의료진을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바이러스와 관련한 일체의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죠. 자연 속에서 그들은 바이러스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습니다. (52~53쪽)
장하준의 주장이 가장 간명하면서도 마음에 와닿았다. 우리가 누구에게 신세를 지고 있고, 그럼에도 누구를 잊고 있는지.
장하준, 왜 우리는 마이너스 성장을 두려워하는가
한 가지, 이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깨달은 게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에센셜임플로이essential-employees, 영국에서는 키워커key-worke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두가 생존하는데 기본이 되는 필수 노동을 한다는 점요. 의료진, 음식 파는 가게 직원, 배달 노동자, 양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 지금까지 저임금으로 일해온 노동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쇄 상황에서 이런 말들이 나와요. ‘이제 보니 투자 은행가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이들 없으면 못 살겠구나!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일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해요. 코로나19 위기가 끝나고 이들 분야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98쪽)
우리는 복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잘못돼 있어요. 돈 있는 사람들한테 거둬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주는 걸로 생각해요. 그런데 북유럽식 복지는 사회보험을 공동 구매하는 겁니다. 의료보험, 교육보험, 연금보험 등을 국민이 공동 구매하는 거예요. 미국이 복지 지출을 적게 한다고 말하지만 복지지출이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많은 부분이 개인 지출이죠. 공공 지출만 보면 프랑스, 핀란드, 스웨덴 같은 나라들은 국민소득의 30퍼센트를, 미국은 20퍼센트만 지출하니까 미국이 복지 지출을 안 하는 거 같죠? 하지만 개인이 쓰는 복지지출까지 합하면 핀란드 다음으로 많아요. 그럼에도 의료보험 체계가 잘못돼 다른 나라의 두 배를 쓰고도 선진국 중에 최하위 건강 지표를 보이죠.
말하자면 복지는 월마트 논리예요. 어느 한 병원이 제약 회사에 가서 1만 명분 당뇨병약을 달라 하는 것하고 정부에서 700만 명분 당뇨병약을 달라고 하는 것 중 누가 더 좋은 가격을 받겠어요? 공동으로 구매해 가격을 낮추는 거예요. 어떻게 지금 돈 쓰면 나중에 자식들이 고생한다는 아주 저열한 논리로 얘기를 하고, 그 말이 또 다수에게 먹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105~106쪽)
사회를 조금이라도 공정하고 구성원들이 덜 좌절하도록 만들려면 복지 제도를 강화하고 그에 필요한 세제 개혁을 해야한다는 거죠. 불평등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려면 누진세를 적용하고 복지를 확대하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보다 복지를 두 배로 늘려도 미국 정도입니다. 유럽 수준 되려면 세 배 이상 늘려야 하고요. 저는 우리 사회가 이 말은 꼭 명심하면좋겠어요. 불평등하면 잔인한 사회가 됩니다. (110쪽)
마사 누스바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제가 사는 시카고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다른 인종들에 비해 매우 불균형적으로 바이러스에 취약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요. 흑백 분리 거주가 뚜렷이 자리 잡은 시카고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더 많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불평등한 조건이 만들어내는 현상에 대해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미국 전역에 걸쳐 매우 의미 있는 대화를 촉발시켰습니다. 주거지와 주거 상태, 건강보험 가입 여부, 그리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나 식재료에 접근할 수 있는지 여부가 얼마나 건강에 근본적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한 비판 의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시카고와 일리노이주에서 저는 혐오 정치의 이면을 봅니다. 이는 자기 비판 정치, 사랑의 정치를 위해 반드시 선결되어야 하는 자아 성찰 정치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모두가 바이러스 앞에서 취약해졌듯이 인간은 모두가 연약하다는 깨우침이 확산된다면 이 코로나 위기에서 벌어지는 혐오 정치에 대한 성찰이 일어나리라 봅니다.
(127~129쪽)
저는 이 바이러스가 평소에 싫어하던 사람들에게도 동정심을 갖게 만드는 그 어려운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특히나 싫어하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이 보리스 존슨 총리인데요. 최근 그에게 어마어마한 자비심을 보내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예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심지어 침대에서 나오기도 전에 구글 검색창에 적습니다. ‘보리스 존슨 건강’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를 어릿광대일지언정 뼛속 깊이 악마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서겠죠.
누구나 당할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않을 방법이란 없습니다. 연민의 마음을 거부하기란 여전히, 정말로 힘이 듭니다. 노인에 대한 혐오가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온다는 말을 했지요. 역설적으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삶이 훌륭하고 세상이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때로 연민과 자비 같은 사랑의 감정이 혐오만큼 강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132~133쪽)
누스바움은 곤경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 성찰과 연민을 본다. 존슨에 대한 구절을 읽다 보니 넘 웃겼음.
케이트 피킷, 우리는 질병과 죽음 앞에 평등한가
우리는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를 고를 수 있어요. 당면한 이슈에 대해 폭넓은 정보를 얻어 사고를 단련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과 정책 결정자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길로 나아가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죠. 직장에서도 여러 분야에 걸쳐 시행되는 관행들이 과연 공정한가 질문하는 겁니다.
동료들이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도록 북돋우면서요. 노동자라면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고, 소비자로서 노동자에게 안전한 작업환경을 제공하고, 노동자 간에 임금 차이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기업들을 응원할 수 있죠. 그리고 우리에게는 투표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지구를 위해 정책을 내는진보 정당에 표를 준다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불평등을 줄이고자 활동하는 여러 단체들을 지원하는 것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해주는 거죠. 우리의 말과 표정은 곧 우리의 노동조건이자 사회 환경이기도 하니까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지 보여줬습니다. 그동안 낮은 임금으로 돌봄 영역에서 일해온 이들, 슈퍼마켓 선반을 채워온 이들, 생필품을 배달해온 이들,청소를 해온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들 핵심인력의 귀중한 역할을 계속 기억해야 해요. 저는 요즘 낙관주의자가 됐습니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때 우리가 바른변화를 이뤄낼 거라고 예견합니다.(161~162쪽)
반다나 시바의 말은....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반다나 시바,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가짜 고기는 GMO(유전자변형생물) 콩으로 만들었어요. 왜 아마존 열대우림이 잘려나갈까요? GMO 콩을 재배하기 위해서예요! 식품 소비 구조를 유전자조작 산업으로 옮겨가려는 겁니다. 식물을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대부분의 가짜 고기 원료가 GMO 콩이에요. GMO 콩으로 만든 버거를 먹으면서 숲을 보호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GMO 콩 경작지로 둔갑하느라 아마존이 타 들어갑니다. 미 중부에 있는 광활한 GMO 콩 재배지도 생명의 무덤이 습니다. 나비가 사라지고, 제왕나비가 죽고, 여타 식물들도 죽었어요. 거기에 슈퍼 잡초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슈퍼 잡초의 대명사인 아마란스Amaranth는 원래 신의 음식이라는 뜻의 ‘람바나’로 추앙받았습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영양가 높은 식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8000년 동안 먹었죠. 여기에 그린green(식품 산업)과 그리드greed(탐욕)가 뒤섞여 슈퍼 잡초가 된 겁니다. 아마란스는 GMO 콩 재배지에 뿌린 살충제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천대받습니다.
미국 콩 농사의 반이 GMO 콩으로 넘어갔어요. 라운드업 레디 콩(몬산토가 만든 콩으로 강한 제초제에도 죽지 않는다)으로 매년 종자 거래 이윤을 남기고자 불임 씨앗으로 만든 데다 암까지 유발합니다. 우리는 이를 금지하려고 미국인과 함께 싸우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유전자조작 씨앗을 옹호하는 빌 게이츠가 한발 더 나아가 펜타곤과 손잡고 유전자 편집으로 종들의 멸종을 부르는 연구를 지원합니다. 그들은 아마란스를 멸종시키려 합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는 쓸모없는 종들을 없애겠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생물학적 다양성의 원리를 위배하는 겁니다. 우리와 지구와의 관계를 위배하는 거예요. 또한 인도와 같은 나라들의 식량 안보를 해치는 겁니다.(198~199쪽)
인공육이 '가짜고기'라는데, 진짜고기와 뭐가 다른가? 이 부분은 동의하기 힘듦. GMO콩으로 가짜고기를 만들기 위해 숲을 베어낸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음. '진짜고기' 사료 때문에 베어지는 건데, 지금 얼마 먹지도 않는 가짜고기 탓을 하다니.
GMO콩 재배지가 생명의 무덤이 됐다는 말도 진짜인지 의심스러움. 자연을 오히려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아마란스 부분은 롭 월러스의 책 <죽은 역학자들>에도 나온다. 좌파임을 질리도록 강조하는 월러스 역시 비록 반다나 시바와 마찬가지로 실험실 고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미국 중부의 잡초들을 단일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아마란스를 슈퍼잡초로 만든 데에는 GM 제초제뿐 아니라 유기농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불임 씨앗은 반다나 시바를 비롯한 운동가들이 '터미네이터 종자'라 이름붙여 거세게 반대한 덕분에 몬산토가 포기했다. 그런데 그걸 반다나 시바는 마치 현재진행형인 양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라운드업 레디 콩(혹은 GM 작물 일반)이 암까지 유발한다는 증거는 없는 것 같은데...
"빌 게이츠가 펜타곤과 손잡고 유전자 편집으로 종들의 멸종을 부르는 연구를 지원"한다는 밑도끝도 없는 말은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인도의 식량안보를 해친다는 주장도... 환금작물인 목화 때문에 식량 부족이 일어나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GM과 세계적인 음모 탓으로 몰아가는 것은 잘못된 시각인 듯. 인도 내부의 정치적, 정책적 실패에 더 기인하는 것 같은데.
우리들은 소비자가 되면서 작아졌어요. 뭔가를 주문하기만 합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우리의 손은 뭔가 멋진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손은 바느질을 할 수 있고, 수를 놓고, 뜨개질도 할 줄 압니다. 텃밭을 일굴 수도 있고요. 간디는 진정한 배움은 머리head와 가슴hear과 손hand을 함께 쓰는 가운데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지성은 성장합니다. 순환경제는 모든 개인을 포용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다양한 지성이 모든 차원에서 순환하는 거죠. 우리는 단지 데이터로 보여지는 소비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역공동체 안에서, 지구 가족들 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는 창조적인 인물들입니다. (216쪽)
그럼에도 이런 지적은 새겨들어야 할 것 같아서 기록해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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