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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올해의 책,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딸기21 2021. 12. 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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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 403킬로미터도 더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에 살던 두 청년이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들은 그 무렵 자주 이용되던 비둘기로 서신 왕래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편지가 너무 길고 무거웠다. 서신 교환은 스물여덟 살로 연장자이던 이가 약간의 친분이 있던 열여덟 살의 청년에게 과학과 철학에 관계된 다양한 주제의 질문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그가 던진 거의 모든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한 주제였다. 두 사람은 적어도 네 차례의 긴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별들 가운데 또 다른 태양계가 존재하는지, 아니면 우주에는 우리 행성만이 존재하는지를 물었다. (45쪽)

S. 프레더릭 스타의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이은정 옮김, 길). 비루니와 이븐 시나의 편지 논쟁으로 시작되는 책. 올해 두툼한 책들을 좀 읽었고 대체로 재미가 있었지만 이 책은 압권이다. 유라시아 복판의 드넓은 지역에서 벌어진 사상과 정치와 문학과 예술의 흐름을 쭉 훑는데, 전달해주는 내용이 몹시 방대하면서도 또 하나하나의 주제들이 엄청나게 재미있다. 

 

두 사람이 무려 8세기나 앞서 진화론적 지질학은 물론 다윈주의의 요점까지 논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1000년 전의 대화가 오늘날 이처럼 부각되는 경우는 과학 역사상 흔치 않다. 우리가 이를 알게 된 것은 필사본 형태로 전해진 사본이 거의 1000년이 지나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루니'로 알려진, 아랄해 인근 출신의 스물여덟 살의 아부 라이한 알 비루니(Abu Rayhan al-Biruni, 973~1048)는 지리학과 수학, 삼각법, 비교종교학, 천문학, 물리학, 지질학, 심리학, 광물학, 약물학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보다 어린 상대는 간단하게 이븐 시나로 알려진, 아부 알리 알 후사인 이븐 시나(Abu Ali al-Husayn ibn Sina, 980~1037)였다. 그는 부하라에서 성장했으며, 장차 의학과 철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신학, 임상약물학, 생리학, 윤리학, 음악이론에서 이름을 남길 터였다. 이븐 시나의 권위 있는 저작인 <의학정전>이 라틴어로 번역되고 나서야 서양에서는 근대 의학이 시작될 수 있었으며, 1500년 전에 이미 12쇄가 발행된 이 책은 이 분야의 경전이 되었다. (46쪽)

 

이란의 우표에 나온 이븐 시나.

 

이 학자들은 철저하면서도 엄밀하게 이성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럴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야말로 지적이고 철학적인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이 시기는 진정 중앙아시아가 세계의 지적 허브로서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던 계몽의 시대(Age of Enlightenment)였다. 인도와 중국, 중동, 유럽 모두 관념의 영역에서 풍성한 전통을 뽐냈지만, 중앙아시아야말로 기원후 1000년을 전후로 한 400~500년 동안 이 모든 중심지와 교류하며 대두한 세계의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중앙아시아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교량 역할을 하며 고대와 근대 세계를 연결하는 위대한 고리가 되었다. (49쪽)

 

요 몇 년 사이에 지식계(?)에서는 중앙아시아가 붐인 모양이다. 아랍/이슬람의 재해석이라는 트렌드는 너무 오래돼 이젠 신선함이 없어졌고, "님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진짜 중요한 데가 여기거든~" 하면서 개중 덜 부각된 채 남아 있던 중앙아시아를 띄우는 분위기인 것인가. 중국 관련해서도 중앙아시아 얘기가, 러시아에서도 중앙아시아 쪽이, 이슬람 세계에서도 중앙아시아가, 기타등등... 중앙아시아가 별로 안 팔리는 인문사회지리역사 영역에서 그나마 신상이고 핫한 상품인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중앙아시아가 '자원 부국'으로 인식(솔직히 좀 오해라고 본다;;)되고 있는데다 우즈베키스탄 그 건조한 곳에 골프장 지어 놀러가고 성매수하러 가는 개저씨들도 많고, 한국에 들어와 있는 우즈베크 이주노동자들도 많다 보니 경제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인적 교류 면에서나 어쩐지 좀 친숙해진 이유도 있으려나.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다. 한국에서 한 20년 '테러와의 전쟁 시대'를 거치며 중동/아랍/이슬람 세계에 대한 책들이 마구 쏟아져나왔는데, 요즘엔 중앙아시아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눈에 띈다.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중동/아랍/이슬람 세계에 비하면 축적된 작업이나 저술이 훨씬 적을텐데, 앞으로도 많이 나왔으면.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지적 교환을 위한 하나의 공용어로 아랍어를 채택한 것은 국제적인 사고의 장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새로운 개념과 용어로 아랍어를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에 가장 앞장섰던 이들은 바로 중앙아시아인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작가나 사상가 대부분이 아랍어를 쓰는 직업 세계에서 전문가의 삶을 살았지만, 아랍어는 그들의 모국어가 아니었고 그들 역시 아랍인이 아니었다. (68쪽)

500년 전에는 이란도 터키도 국가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란 및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다양한 언어와 방언을 쓰던 사람들이 오늘날 이란의 동쪽까지 펼쳐져 있는, 그리고 11세기까지는 지금의 터키에 해당되는 그 어떤 지역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방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다양한 이란 및 튀르크인들이 다른 곳도 아닌 대중앙아시아라는 지역에서 만나 어울렸으며,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일찍이 다원적이나 매우 실질적이고 독특한 그들만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이곳의 주민들은 중동뿐만 아니라 인도 및 중국과도 직접적인 교역 관계를 맺었다. 반면 이란어나 튀르크어를 사용할지라도 더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주로 중동이나 코카서스(Caucasus), 유럽과 관계를 맺었다. (69쪽)


그런데 이 책의 저자님은 중앙아시아를 넘나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이분의 시각대로라면 온 우주의 중심이 중앙아시아다. 이란도 튀르크도 아프가니들도 기타등등 모든 민족들도 몽땅 중앙아시아라고 하면 꼭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없지만... 너무 중앙아시아를 강조하고 있어서, 굳이 그럴 필요가 뭐가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 

 

페르시아어와 튀르크어를 사용한 저자 및 지식인에게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두 번째 공통점은 그들이 주로 도시 환경의 영향을 받았고 경력을 대도시에서 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살았던 중앙아시아 도시들을 오늘날 직접 보는 것은 물론이고 상상하기도 매우 힘들다. 이는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사용된 건축자재가 주로 햇볕에 말린 비영구적인 벽돌이었기 때문이다. 아도비 점토처럼 이러한 자재들은 저렴하고 견고했지만 비바람에 의해 쉽게 부식되었다. 중세 작가들이 상세히 묘사한 기념비적인 건축물과 수많은 소박한 건축물 거의 대부분이 겨우 흙더미만 남겨놓은 채 오래전에 사라졌다. (70쪽)

도로가 포장되었고 공중목욕탕은 널찍했으며, 일반적으로 사원이나 성지 인근에 위치한 대규모의 소매상 구역이 존재했다. 이러저러한 편의시설은 중앙아시아에 뿌리 깊고 세련된 도시적 생활방식이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음을 보여 준다.
사실, 이 지역의 도시화 전통은 목축업자들이 대집단으로 무리 짓기 시작한 거의 500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4,000년 전 무렵 고누르데페(Gonurdepe)나 마르구쉬 (Margush) -두 도시 모두 투르크메니스탄의 (오아시스 도시) 메르브에 있다 -같은 청동기 시대의 성벽도시가 번성했다. 겨우 몇 세기도 지나지 않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근방의 문디각(Mundigak)에 정착한 공상적인 청동기 도시민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와 꼭 닮은 거대한 사원을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인더스 계곡의 하라파(Harappa) 문명과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대문명이 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났다. 마르구쉬와 고누르데페를 발굴한 투르크메니스탄의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Victor Sarianidi)는 이는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야강 계곡이 나일, 인더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계곡과 더불어 제4의 도시문명 발생지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94쪽)

 

황허, 의문의 1패... 

오늘날 우리는 호라즘과 아랄해 지역을 오지이자 금단의 사막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1004년 이곳은 내륙 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발달하고 최고의 연결망을 가진 지역으로 소문나 있었다. 중세 말까지는 아무다리야강이 카스피해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강의 하류를 따라 이 일대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더 큰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429쪽)

우리가 주목하는 시대 내내 중앙아시아의 기후는 지금만큼이나 건조하고 척박했던 것 같다. 오늘날 이 지역의 농부들은 4000년 전 물(Water)에 신전을 지어 바쳤던 마르구쉬 조상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무엇이 이같은 변화를 야기했던 것일까? 지붕보에 쓸 목재의 소실로 인해 3000년 된 투르크메니스탄의 고누르데페 같은 초기 도시 중 일부에서는 건축업자들이 건물의 지붕을 벽돌 돔으로 덮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아프라시아브나 메르브, 구르간지에서도 예전에는 흔하게 쓸 수 있었던 목재가 귀해졌다. 한때 배가 드나들 정도로 풍성한 수량을 뽐내며 발흐에서 아무다리야강까지 흘렀던,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말라버린 발흐강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두 변화 모두 기후가 아니라 인간 행동에서 기인했다. 미국 학자 나오미 밀러(Naomi Miller)에 따르면, 삼림 파괴의 기원은 대장간이 많이 생기면서 엄청난 양의 땔감이 필요해진 2,400년 전 청동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풀을 고사시킬 정도로 짧게 뜯어 먹을 수 있는 이빨을 가진 양과 염소의 방목 또한 물 위기를 재촉했다. 그 결과 지형은 황폐해졌고 지층 아래의 암반을 노출시키는 대대적인 침식으로 이어졌다. 요컨대, 중앙아시아의 환경은 문화 황금기 이후 수세기 동안 극적으로 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동인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97~98쪽)

 

대상단 행렬은 하루에 약 32킬로미터가량을 이동했고 더운 날에는 밤에 움직였다. 낙타는 포장도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상단 우두머리는 날씨나 시장, 정치적 변화에 따라 언제나 노선을 변경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대상단 무역의 엄청난 유연성 때문에 동-서 /남-북 간선도로의 명확한 통행로를 밝히려는 최근의 노력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중앙아시아의 무역업자들은 우리가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지역의 주요 3대 강을 이용해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배로 상품을 실어 날랐다.
‘비단길’(실크로드, Seidenstrasse)라는 용어를 만든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ven, 1833~1905)이 대략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1500년까지 이 노선을 따라 중국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비단에 주목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그는 비단이 유일한, 아니면 주된 무역 상품이었음을 암시하는 실수를 범했다.
또 그는 주요 운송로들이 주로 중국으로 이어졌고 인도로는 향하지 않았다고 추정하는 우를 범했다. 중앙아시아 사업가들이 다른 이들이 생산한 비단을 옮겨 나르느니 직접 비단을 생산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 대륙에 걸친 복합적인 교역 체제가 중앙아시아 문화를 어떻게 주조 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첫째, 지역도시들의 물산 집산지로의 부상과 둘째, 먼 지역까지 뻗어 있는 네트워크를 가진 노련한 전문 무역업자 계층의 형성, 끝으로 수준 높은 지역 산업과 제조업에 기반한 수출 위주의 경제성장이 그것이다. (106~108쪽)

 

책에서 가장 재미났던 것은 과학자들 이야기.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내용 가운데 종교 얘기가 많음. 

 

조로아스터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계시종교이자 인류 최초의 일신론적 신앙이었고 최초의 구원 종교였다. 메리 보이스(Mary Boyce)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 도외시된 신앙의 대가는 “개인의 심판, 천국과 지옥, 미래의 육체의 부활, 전면적인 최후의 심판, 재결합된 영혼과 육체의 영원불멸한 삶에 관한 교리를 최초로 가르쳤다." 이 모든 개념이 ‘바빌론의 유수' 동안 그들과 조우한 유대인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 후에는 유대인들이 이러한 개념을 기독교와 이슬람에 건네주었다. (149쪽)

기원후 3세기에 등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는 고위 성직자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이미 한물간 종교가 되어버린 조로아스터교는 쇠퇴하였고 곧 중앙아시아 전역에 확산될 다른 종교가 들어설 공간이 창출되었다.
기원후 3세기에 페르시아 서부 출신인 마니(Mani, 216~274)는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 양쪽 모두에서 개념을 차용했다. 11세기의 한 중앙아시아 학자에 따르면, 그는 여행을 떠난 인도에서 힌두교 신자로부터 윤회사상(영혼의 환생)을 배웠고 그것을 자신의 새로운 사상 체계에 결합했다. (150쪽)

 

오옷 마니교! 중드 명작 중의 명작 <장안십이시진>에 나오는, 그리고 <의천도룡기>에도 나오는 마니교. 

 

"마니의 추종자들은 곧 무역로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종국에는 동투르키스탄(신장)과 그 너머로까지 진출했다. 중국과 인도로 이어지는 무역로 전역에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마니교 공동체는 서에서 동으로, 그리고 동에서 서로 문화를 전달하는 일종의 컨베이어 벨트의 기능을 했다."(151쪽)

 

사진은 드라마 &lt;장안십이시진&gt;의 장면들로, 본글과는 아무 관련이 없음...

 

겹겹이 쌓인 지층처럼 형성된 중앙아시아의 종교는 특히나 그곳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든 존재론적 질문을 만들어냈다. 아랍 침략 전 1,000년 동안 중앙아시아인들은, 유목민들의 신앙을 굳이 헤아리지 않더라도 4~5개의 새로운 신앙체계를 접했다. 그들은 각각의 종교를 대조해 보고 그 특징적 요소와 공통점을 찾아내는 데도 노련해졌다.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670년 사이에 등장한 다양한 종교를 수용한 방식에서 ... 매번 그들은 매우 개방적이었고 진정한 호기심을 보여 주었다. (182쪽)

그들은 활력과 변화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고 까다롭게 선별하는 과정을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으며, 다양한 종교의 바람직한 요소를 결합해 독창적이면서도 예상 밖의 융합을 만들어냈다. 자신들을 엄습한 종교와 사상을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중앙아시아인들은 새로운 신앙의 성서들을 성문화하고 분석하며 편집 해설하는 데 능란해졌다. (183쪽)

감각지각을 수용하고 과거와 미래를 포용하며 권위 있는 해설을 강조한, 좀 더 실용적인 불교의 비바사사 학파를 선호한 중앙아시아인들이 훗날 이슬람 법학파 가운데 실리적인 하나피 법학파에 끌리고 고대 그리스 사상가의 저작 번역물에 주석을 다는 일에 매력을 느낀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184쪽)

 

저자는 중앙아시아의 계몽 시대, 황금시대를 대략 아랍의 정복이 이뤄진 750년부터 몽골이 초토화시킨 무렵인 13세기 정도로 잡는다. 당시 이 일대에 흘러넘쳤던 활력에 대해 "중앙아시아는 세속 및 종교 영역 모두에서 풍부하게 축적된 문화적 지적 경험을 가지고 황금기에 진입했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이슬람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으며, 많은 다른 지적 전통이 1,000년 이후에도 이슬람 사상과 나란히 꽃을 피웠다. 이는 모든 방면에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50쪽)고 말한다. 

 

"660년에 시작된 아랍의 침략은 늘 그렇듯이 파괴와 고통, 일시적인 교역 붕괴를 초래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세 가지 면에서 기존의 침략과 달랐다. 첫째, 현지 주민들이 당시 거칠고 지속적인 저항을 했다는 점이다. 아랍인들은 어떤 정복전쟁에서도 중앙아시아인들처럼 자신들에게 집요하게 저항한 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둘째, 아랍 침략자들은 자기들끼리 싸웠고, 셋째, 그래서 아랍의 중앙아시아 정복에는 '거의 한 세기'가 걸렸고 완전한 이슬람화는 더 오래 걸렸다고 저자는 주장함. 음... 그렇게 오래걸렸다고 볼 수 있나? 물론 저자도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랍의 공격은 결국 두 가지 주요 측면에서 성공적이었다. 공식적인 의사소통과 지적 교류를 위한 새로운 언어, 즉 아랍어와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을 뒤에 남겼다는 측면에서 말이다."라고 인정하기는 함. 

 

이 지역의 지적, 문화적 활력을 여러 종교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익숙해진 일종의 소화 과정으로 해석한 것은 재미있음. 조로아스터에서부터 불교 기독교 이슬람 등등이 흥할 때마다 토론하고 검증하고 자기네들 색깔로 맞춰가면서 수용을 했는데, 그 덕에 중앙아시아인들은 이런 종교들의 경전을 모아 편집하고 주석을 다는 일에 전문가가 됐다는 것.

재미는 있는데, 이렇게 보는 게 맞을지는 좀 의문이다. 저자는 중앙아시아인들을 모든 종교의 중심 이론가로 여기고 있지만, 아랍 이슬람법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려나 ㅎㅎ 그냥 중앙아시아 얘기만 하지.... 중앙아시아를 띄우는 것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책의 전반적인 논리 구조는 엉성함.

 

그는 엄청난 액수를 군에 투자했고 모든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그에게는 칼리프가 되기 전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이 목표를 위해 사령부를 락까(Raqqah)로 옮긴 그는, 10년이 넘도록 바그다드를 방치했다. 하룬은 제국의 경영을 소홀히 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투로 칼리프 제국의 재원을 서서히 고갈시키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제국 곳곳에서 불만과 원심성의 동요를 촉발했다. 아바스 제국의 쇠퇴의 씨앗은 칼리프 제국의 황금 시기인 바로 이때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압바스 칼리프 왕조가 지적/문화적 권위에서는 페르시아인들에게 의존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저자는 '바그다드는 아랍의 수도였지만 실제론 거기서도 중앙아시아인들이 활약했어!'를 말하느라 입이 좀 아플 것 같다. 칼리프 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끈 하룬 알라시드도 중앙아시아 출신 선생님들에게 어릴 적 교육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바르마크 가문은 하룬이 권좌에 오르도록 도왔다. 그 후에는 바그다드를 오랫동안 비웠던 하룬을 대신해 그의 대리인으로서 도시를 전적으로 돌봤다. 세 명의 칼리프 아래서 그들은 재상직과 왕의 수석 보좌관을 역임했고 하룬 밑에서도 계속하여 일했다. 명목상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칼리프 제국의 통치자는 중앙아시아인들이었다."(236쪽)고까지 한 것은 좀....  

 

마문은 행동할 때가 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바그다드의 종교학자들 개개인을 간단하게 시험하여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를 명백히 할 작정이었다. 심문(mihna)의 주요 질문은 매우 단도직입적이었다. '선생은 꾸란이 창조되었다고 믿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믿는가?' 만약에 전자라면 이성의 추종자일 테고, 따라서 전 무슬림의 영적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칼리프의 운동을 지지할 공산이 크다. 반면 후자라면 자신이 전통과 비이성의 노예이자 영적 권위를 추구하는 마문의 적임을 인정하는 것이리라.
마문 시대가 지나고 300년 뒤 시작된 중세 가톨릭 심문처럼 이는 단순한 학문적 활동이 아니었다. 마문은 심문을 통해 개인의 충성심을 테스트했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자신의 것인 종교 권력을 명확히 행사하고자 했다. (260쪽)

마문의 주도로 처음 시작된 심문은 동생 무타심(Mutasim) 때까지 무려 2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대부분은 재빨리 자신들은 당연히 꾸란은 창조되었다고 믿으며 따라서 그것은 자격 있는 관계자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 단지 두 명의 피고인만이 반기를 들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아흐마드 이븐 한발(Ahmad ibn Hanbal)은 누구보다도 예언자와 그의 동료들의 말씀에 충실했고 종교 및 법과 관련해서는 이성의 판단이나 경합하는 다른 모든 권위를 철저히 거부했다. (261쪽)

 

마문의 종교 심문 부분은 아주 재미있었음. 하지만 결과는 한발 같은 고집쟁이의 등장과 한발리파의 형성, 그리고 이슬람 학문 세계에서 이성의 역할이 축소되고 활발한 논쟁도 사라지는 쪽으로 향해갔다는.... 무타심은 바그다드 북쪽 사마라로 도읍을 잠시 옮겼던 칼리프.

 

<샤나메>의 길이는 페르도우시가 자신에게 부과한 방대한 과업의 불가 피한 결과였다. 페르시아 민족이 세계무대에 처음 등장한 때부터 거의 작가가 속한 시대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의 포괄적인 역사라는 방대한 틀 안에 옛 전설들을 끼워넣었기 때문이다. 이는 페르도우시가 적어도 쉰 명의 통치자의 삶과 시대를 다루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들 중 절반은 문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시대의 인물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실제 인물들이었다. (358쪽)

그렇다고 이 책이 민족의 영광에 무조건적인 경의를 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저자는 당당하게 수많은 페르시아 왕의 극심한 무능력을 통렬히 묘사했다. 마치 민중의 고난은 신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기인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이 말이다. <샤나메>는 처음부터 끝까지 페르도우시가 살던 당시 지도층의 실패에 대한 엄중하고 심오한 비판을 담고 있다. 비록 당대에 대한 언급은 은밀하거나 우의적이었어도 한 가지 사실, 즉 저자가 자신이 속해 있는 시대를 위해 기획된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의식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360쪽)

페르도우시는 풍요로우나 오만했던 사산 제국(224~651) 치하에서 페르시아의 힘이 속절없이 위축되었고, 그 결과 아랍 군의 침략으로 몰락할 수 밖에 없었음에 주목했다. 권력의 부패가 분명 한 요인이었지만 페르도우시는 무제한적인 권력 행사로 인한 실수보다는 지도자들의 무능함과 유약함에 더 짜증이 났다. 결국 그는 체념한 듯 순순히 인간사에 있어 운명, 즉 포르투나(fortuna)의 역할을 강조했다. (364쪽)

행위를 치하하는 동시에 그것의 절망적인 최후를 인정함으로써, 페르도우시의 서사시는 해결되지 않는 모순적인 전망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시 전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영웅 행위와 운명의 힘 사이에 해소되지 않는 긴장 관계는 <샤나메>를 예리하고 웅장하며 깊이 있게 만드는 수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예언은 옳았다.

세상천지가 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나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뿌린 이 씨앗들이 무덤으로부터 나의 이름과 명성을 구하리라.

(366-367쪽)

 

왕의 서사시, 샤나메 (1) 아흐리만의 유혹

 

비루니의 <고대국가들의 연표>는 중세에 쓰여진 가장 놀라운 저작 중 하나이며,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매우 난해한 작품 중 하나이다. 이집트인, 그리스인, 유대인, 페르시아인, 무슬림,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 조로아스터교도, 호라즘인, '유사-예언자 등 이들 각각을 논한 장이 모여 두툼해진 <연표>는 처음에는 각 나라에서 발생한 주요 역사적 사건을 하나하나 세심히 나열한, 이미 알려진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역사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전체 분량의 반절 이상을 각 민족의 역법 체계에 대한, 심지어는 연, 월, 일, 시를 세는 방법 을 극도로 상세하게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442쪽)

비루니는 회의적인 눈으로 다양한 이 모든 자료를 다루었는데,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견에 맞춰 시간을 단축하거나 늘려 역사와 내력을 조작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근거가 부재할 때, 특히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가 필요할 때에 왜 각 종교는 그토록 격렬히 자신들의 입장을 지키려 하는 것일까? 무슬림들은 처음에 메카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드렸고, 마니교도들은 북극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 비루니는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키블라(Kibla, 기도 방향을 나타내는 벽감)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비루니는 천체에 관한 각 집단의 견해와 추정을 제시하고, 이것이 그들의 역법 체계에 구현되면서 시간 개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분석을 수행하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모든 문화권의 과학적 세계관과 점성학적 체계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전까지는 알려지지도 연구되지도 않았던 우주론적 구조에 천착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자정이나 정오에 날이 시작하는데, 왜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은 해가 뜨면 날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을까? 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정이든 정오이든 간에, 자오선을 기준으로 하는 것뿐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443쪽)

천지창조의 시기와 아담 및 이브의 시대에 관한 모든 성서의 주장을 세심하게 검토한 후에 비루니는 짓궂게도 하나의 표로 이를 정리했다. 그는 각 전승에서 말하는 주요 역사적 사건의 연대를 다룬 또 다른 일련의 표를 작성했고, 마지막에는 이들을 한데 모아 다양한 비교표로 만들었다.
결과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다양한 연대표가 서로서로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가 그야말로 터무니없었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천지창조나 아담과 이브, 출애굽, 그 외 선사 시대의 어떤 사건으로부터도 인간사의 연대를 추정하기란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탄생이나 자라투스트라의 일생, 로마의 몰락과 같이 최근에 발생한 사건의 날짜를 기록한 다양한 달력으로 인해 상황은 더 혼란스 럽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쉽게 말해, 합리적인 사건 연대표로서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루니는 역사적 사건은 어떤 토대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아주 명료했다. 즉 역사는 추론에 기반해야 하며, 이는 천문학적 진리를 의미했다. 시간을 계산하는 합리적인 체계가 없다면 연대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연대표가 없다면 과거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445쪽)

 

비루니 부분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짖궂은 학자... ㅎㅎㅎ

 

옛소련의 우표에 등장한 비루니. 이제 보니 이분들이 우표에 많이 나오시네...

 

이는 지구 표면의 3/5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 거대한 공백을 처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대부터 비루니가 살던 시대까지 모든 지리학자가 수용했던, 즉 유라시아 대륙이 ‘세계양(‘World Ocean)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라는 해명을 원용하는 것이었다.
비루니도 이러한 가능성을 숙고하기는 했지만 결국 논리와 관찰에 근거해 이러한 주장을 거부했다. 그는 지구의 2/5에 해당하는 지역에 육지를 형성한 힘과 과정이 왜 나머지 3/5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골똘히 생각했다. 이런 식의 추론을 통해 비루니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광대한 대양 지역 어딘가에 반드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광활한 땅덩어리, 즉 대륙이 존재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논리적인 단계를 밟아나가던 비루니에게 이번에는 미지의 이 대륙은 황 무지일까 아니면 인간이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이제 그는 위도에 관한 데이터도 참조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가운데 인간이 오늘날의 러시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부터 인도 남부와 아프리카 중앙까지 뻗어 있는 남-북 광대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대역이 지구의 거주 가능 지역을 의미한다고 추정한 그는 미지의 대륙 또는 대륙들도 이 대역의 남단과 북단 사이에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584쪽)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논리적 추론으로 상상한 비루니...

 

그는 결코 평범한 스텝 유목민이 아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가장 엄격한 규율을 강제했고 어떤 이탈도 허용하지 않았다. 문서로 된 통신수단이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그는 시리아 기독교도 무역업자들이 서쪽에서 가져온, 고대 아람어에 기반한 튀르크-위구르 문자를 채택했다. 이전의 유목민 전사들과는 달리, 오르콘강(Orkhon River) 계곡 깊이 자리 잡은 카라코룸을 정주할 수도로 삼을 준비도 했다. 게다가 일찍이 화폐 주조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정복지 전역의 화 폐를 표준화했다. (685쪽)

관용과 원색적인 잔인함이 결합된 이러한 낯선 특성이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진 칭기스칸의 모든 전투에서 나타났다. 동부의 위구르인들이 항복하자, 그는 그들의 도시를 건드리지 않았다. 같은 일이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도시와 읍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저항하거나 더 심하게는 항복을 해놓고도 배신했을 경우에 그곳의 주민은 칭기스칸의 군대에 의해 몰살되었다. (687쪽)

페르시아와 중국을 통치했던 칭기스칸의 후예들과는 달리, 칭기스칸이 중앙아시아를 위탁했던 손자는 결코 유목생활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고 수도도 건설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도시생활을 포용하고 경제적 문화적 부활을 촉발한 쿠빌라이칸도 훌라구도 중앙아시아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중앙아시아가 몽골 침략 이후에 장기적인 경제적 문화적 침체에 빠진 데에는 엄청나게 파괴적이었던 칭기스칸의 군사작전도 한몫을 했다. (714쪽)

몽골 침략이 중앙아시아에 끼친 인구학적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페르시아나 러시아로의 침략과는 달리, 중앙아시아에 대한 몽골의 공격은 상당히 개인적이었으며 호라즘의 샤와 주민 전부가 불복종과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자 계획된 복수전이었다. 결과는 전멸전이었다. 사마르칸트에서의 사망자 수는 비교적 낮게 잡아도 인구의 3/4에 근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716쪽)

몽골 침략 오래전부터 이미 중앙아시아의 지적 생활에는 퇴락의 명백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통치자와 조정은 자신들에게 사상가와 저자들에 대한 지원을 대폭 줄였다. 가잘리 등은 지적 탐구를 위한 심오한 근거를 훼손했고 패기 있는 과학자와 사상가들을 수세로 몰아넣었다. 법에 얽매인 주류 종교의 수호자들은 몽골군이 나타나기 오래전부터 확고하게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몽골인들이 비난을 받는다면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문화의 파괴과정을 심화하고 완성했기 때문이지 그 과정에 착수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733쪽)

 

몽골에 이은 티무르. 

 

티무르는 1370년에 정식으로 발흐의 통치자 자리에 앉았다. 제국 프로젝트를 선택한 시기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흑사병으로 1350년대 초반에 페르시아와 코카서스 전역의 인구가 감소했다. 페르시아계 몽골 일한국도 거의 같은 시기에 붕괴하면서 중동과 페르시아에는 권력 공백이 생겼다. 게다가 러시아가 1380년에 황금군단의 몽 골인(킵차크 칸국)들을 패퇴시켰다.
전리품에 끌려 모여든 신병들로 군대를 꾸린 티무르는 비어버린 이곳으로 진군했다. 그러고는 중동 쪽으로 이동하여 바그다드와 안티오크, 다마스쿠스를 성공적으로 포위 공격했다. 다마스쿠스 교외에서 그는 우마이야의 옛 수도를 약탈하지 말아줄 것을 간청하는 이븐 할둔을 만났다. 티무르는 연로한 이 사상가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이븐 할둔은 티무르의 가계가 네부카드네자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며 아부성 발언으로 회답했다. 그렇지만 티무르는 다마스쿠스를 약탈했다. (736쪽)

 

결론 부분은 갑자기 뚜두둑 미끄러지는 느낌.

 

"계몽의 시대는 아랍 유목민 병사들이 중앙아시아에 이슬람을 들여온 획기적인 사건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향후 수세기 동안 계속될 무슬림과 다른 종파 그룹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 과정을 촉발했다. 동시에 9, 10, 11세기 내내 고조되던 그룹 간의 긴장은 결국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반목으로 확고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분열은 모든 공동체와 국가, 제국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806쪽)

 

이 지역이 왜 쇠퇴했는지에 대해 저자는 "이슬람 공동체, 즉 움마 안에서의 갈등, 다시 말해 수니파 대 시아파 간의 투쟁이 중앙아시아에서의 이슬람 지성의 종말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807쪽)면서 경제사회적 영역의 변화를 피해간다. 책의 한계와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번역자님께서 넘나 훌륭한 해제를 뒤편에 써주셔서, 그걸 반드시! 같이 읽어야 함.

 

책은 진짜 흥미진진, 몰랐던 지역에 대한 소개를 넘어 세계사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는 '현란한 지식의 향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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