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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푸엔테스, <의지와 운명>

딸기21 2023. 9. 1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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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운명 1, 2
카를로스 푸엔테스. 김현철 옮김. 민음사.



나는 흔히 말하듯 '봐줄 만한 모습이 아니다. 나는 잘린 머리다. 멕시코에 서 일 년 동안 잘린 머리 중 천 번째 머리다. 나는 일주일 동안 목이 잘린 쉰 명 중 한 명이며, 오늘 일곱 번째로 목이 잘린 사람이며, 최근 세 시간 십오 분 동안 유일하게 목이 잘린 사람이다.
-13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이라니.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에 이 책 이야기가 나와서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올초 갈레아노의 책을 읽은 김에 라틴아메리카와 관련된 것들을 내처 읽었고, <칼리반>에 푸엔테스가 여러번 언급되는 걸 보고 주문을 했다.

잘린 목이 하는 이야기. 처절하다. 정작 읽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올초 시작해서 이제야 끝냈다. 재미는 있는데 그렇다고 술술 넘기기엔 많이 무겁다. 간만에 읽은 소설이 이렇게 스산+심란한 것이라니.

"착각하지 마. 하느님은 지적이지 않아. 하느님에게는 의지가 없어."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신부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심한 이단이네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이 인 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어.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이 아 냐. 천박하게 '하느님은 신성한 존재다. 라고 말하지는 않겠어. 하 느님은 그저 다른 존재일 뿐이야. 하느님을 우리 미덕의 거울로, 우리 결점의 부정으로 삼는다 해도 얻을 건 하나 없어. 하느님은 우리와 같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일 뿐이야."
-109

 

그의 부모는 어느 가난한 동네에 그를 버렸고, 그곳 쓰레기통에서는 개들조차도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개를 한 마리 잡아먹으려 했다. 하지만 쓰레기통 같은 동네에 그를 버린 부모를 찾아 잡아먹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145

 

모든 이들의 도시인 공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향해 그곳에 가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일 때문에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 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방향을 안다고, 공항이라는 식인귀의 내장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안다고 믿는다. 하지만 예기치 않았던 일이 허가도 받지 않고 불쑥 끼어들기 마련이다.
-151

 

나는 1904년에 태어났어.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대통령이 되기 칠 년 전이었지. 혁명의 사도인 그는 1913년에 찬탈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의 배신으로 암살당했지. 아옌데 대통령과 여자 목소리를 지닌 배반자 피노체트와 같은 경우지. 새로운 헌법이 비준되었을 때 내 나이 열세 살이었어.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는 열여덟 살이었지. 그 외팔이는 셀라야 에서 판초 비야를 무찔렀지만 한쪽 팔을 잃어야 했지. 판초 비야 가 배신당해 죽었을 때 난 열아홉 살이었고.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암살당했을 때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지. 그리고 수도 남쪽의 한 레스토랑에서 옥수수 빵을 먹고 있던 오브레곤 장군의 머리에 어느 보수 꼴통 가톨릭 신자가 총알을 박아 넣었을 때는 스 물네 살이었지.
-200

그는 1936년에 끝에서 두 번 째 군사혁명을 주도했어. 이미 습관이 되어 버린 반항심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을 거야. 완전히 멍청한 것이었지. 시절이 변했다는 것을 몰랐던 거야. 혁명은 제도에 자리를 양보했다는 사실을, 게릴라들은 캐딜락을 타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는 사실을, 라스 로마스에서는 농지개혁이 아니라 매매에 의해 주거지역이 거래 된다는 사실을, 노동의 자유가 뻔뻔한 지도자들이 이끄는 조합 노동자들을 끝장내리라는 사실을, 출판의 자유가 우리의 대부 아르테미오 크루스가 강화한 종이 독점권에 의해 허용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지.
-201

 

그녀는 엄청난 고통이 담긴 눈으로, 그보다 훨씬 큰 원망이 담긴 눈으로, 멕시코의 실패라는 가공할 만한 핑계가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패배 했다는 느낌, 항상 패배자라는 기분, 오로지 패배의 축복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분. 우리는 승리를 축하하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모든 면에서 중국적인 패배를 알리는 일시적인 광고 뿐이다.
-243

 

멕시코에 존재했던 그 수많은 개자 식들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네는 믿을 수 있겠나? 믿을 수 있어?
-261

 

그놈들은 이주 노동자들이 자랐던 동네 사 람들을 조직해 고향으로 돌아온 노동자들에게 돌을 던지도록 시켰어. 왜냐하면 그 노동자들이 없으면 더 이상 달러를 벌 수 없었으니까, 멕시코에서는(미겔이 나를 쳐다보지 않을 때 나는 미 겔을 쳐다보았다) 이주 노동자들이 보내 주는 달러가 없으면 사 람들이 살 수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으니까……
-290

 

사무실 달력에는 '어제'라는 개념이 없었다. 마치 막스 몬로이의 권위가 퍼져 나와 과거의 페이지들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오늘로 집중되었다.(과거를 불태워 버린 오직 오늘-오늘-오늘이었다.) 오직 오늘의 오늘만 중요했다. 미래의 모든 약속이 포함된 바로 이 순간, 그리고 잘 보낸 오늘이었다고 해도 그 어떤 망각보다도 더 짙은 안개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 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업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리고 그 신선함은 오늘 했던 일을 내일 해야 할 일로 성실하게 연결하는 것이었 다. 축소된 블로그는 어느 여인의 핸드백에 들어갈 것이다. 휴대용 카메라는 우리 모두를 일시적인 파파라치로 만들어 버릴 것 이다.
-2/12

그렇다면 결국 막스 몬로이는 가장 폐쇄적인 독재 정권과 가장 개방적인 민주주의의 상징이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제는 벽장도 없고, 벽장에 숨겨진 시체도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생활의 찌꺼기를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항상 앞을 향해 나간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막 수 없다. 인류의 발전은 필연이며 항상 위로 상승한다. 화장로, 집단 수용소, 아우슈비츠, 굴락, 아부그라이브, 관타나모 등이 정반대의 실상을 우리에게 보여 줄 때까지……
-2/13

 

하지만 아순타가 버리고 온 바로 그 북부 지방은 양키의 번영이 빛나는 국경선의 남쪽이었다. '사우스 오브 더 보더, 다운 멕시코 웨이,(South of the border, down Mexico way.)' 멕시코 북부의 부는 미국의 국경선 너머에 있는 가난이었다. 몰래 애리조나나 텍사스로 스며드는 노동자들의 통로, 철조망. 코요테 트럭. 국경 수비대의 총알. 시우다드 후아레스의 칼. 티후아나에서 리레도까지 퍼져 있는 마약 단속반. 괴저. 고름.
-2/184

 

나는 기억이 일종의 현현의 방식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어떤 경우라도 영혼이 기억을 통과해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자극이 필요하다. 기억은 단지 한순간을 포착해 그 순간을 즉시 되돌려 줄 뿐이다. 기억은 흉터와 같은 게 아닐까? 나 자신이 알아보지 못하는 과거가 아닐까? 만일 내가 그걸 모른다면 어떻게 그걸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이란 단지 일종의 모의실험, 즉 우리가 잊어버린, 혹은 더욱더 좋지 않을 경우, 우리가 결코 살아 보지 못한 것을 기억해 내는 그런 게 아닐까?
나는 기억에 상상력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고 싶었다. 상히네스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2/189

 

폐쇄적인 협정 가격에 대항하는 현대화. 통신. 산과 절벽, 밀림과 사막, 계곡과 화산으로 이루어진 구겨진 양피지, 정복자 코르테스가 카를로스 황제에게 단숨에 그려 보인 그 양피지, 구겨진 양피지, 그것이 바로 멕시코다. 어떻게 해야 그걸 반반하게 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순수함을 조건으로 한, 갈증 때문에 잉태된 나라를 상상해 보았다. 양피지 나라.
-2/194

 

그가 말했다. 멕시코에서는,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는, 밤낮으로 반란의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다, 볼리바르와 카스트로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까지는 참겠지만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런 반란 음모는 실현될 수 없 다. ‘예전의 혁명' 같은 혁명을 다시 불러오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현재의 권력은 약삭빠르고, 충분한 정보가 있고, 사회는 최상의 희망을 품고 있고, 좌익은 선거제도를 인정하고, 우익은 천성적인 게걸스러움을 제한하기 위해 때때로 자리바꿈을 하기 때문이다.
-2/220

"여호수아, 오늘날 멕시코의 위대한 드라마는 범죄가 국가를 대체했다는 거야. 민주주의에 의해 파괴된 국가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후원하는 범죄에 그 권력을 넘겨주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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