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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 ‘역사론’

딸기21 2024. 2. 2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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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론
에릭 홉스봄. 강성호 옮김. 민음사. 2/24

홉스봄 책을 읽는 김에 ‘역사론’도 꺼내 들었다. 읽다만 흔적이. 책을 오래 오래 읽기는 해도 다 끝까지 읽는데, 이 책은 대체 언제적에 읽다 만 것인지.

나는 역사가가 실재를 탐구한다는 견해를 강하게 옹호한다. 역사가는 확정된 사실과 꾸민 이야기 사이를, 증거를 필요로 하고 증거에 근거한 역사적 진술과 그렇지 않은 진술 사이를 근본적으로, 아주 중점적으로 구분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비록 시작했을 때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상대주의는 법정에서 쓸모가 없는 것처럼 역사에서도 쓸모가 없다. 만약 독자들이 피고석에 앉게 된다면 실증적인 증거에 호소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포스트모던적 변호 방침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죄인을 변호하려는 변호사이다.
-6-7

아마도 이러한 분위기 덕을 가장 많이 보는 것은 외국인을 혐오하는 민족주의나 관용을 베풀지 않는 움직임일 것 같다. 낯선 이방인을 비난하는 일은 언제나 가장 손쉬운 일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요점이다. 왜냐하면 양귀비가 마약의 원료인 것처럼, 역사는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나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 또는 근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있어 아마 가장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다. 만약 적당한 과거가 없으면 그러한 과거는 언제든 발명될 수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이 정당화하려는 현상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딱 들어맞는 과거는 대개 존재하지 않는다. 호메이니가 이슬람 국가를 새롭게 재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현대판 종교적 근본주의는 겨우 1970년대 초에야 출현했다. 과거는 현재를 정당화시킨다. 과거는 별로 기념할 가치가 없는 현재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배경을 제공한다. 인더스 계곡의 고대 도시 문명을 "파키스탄 5000년"이라는 제목으로 연구했던 글을 어디선가 본 일이 있다. 하지만 어떤 학생 투사가 파키스탄이란 이름을 생각해낸 1932~1933년 이전에는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파키스탄은 1947년 이 후에야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역사가는 이러한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정치가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역사학이라는 전문 영역이 핵물리학과는 달리 최소한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학이 해악을 끼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일랜드공화국군이 작업장에서 화학 비료를 폭약으로 바꾸는 법을 배웠던 것처럼, 우리의 연구도 폭탄 공장으로 변할 수 있다. 우리들은 역사적 사실에 책임을 져야 하며, 특히 역사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일을 비판해야 한다.
-23-24

나는 40년 동안 민족적 선전 또는 시온주의자의 논쟁으로 쓰이던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가 더 이상 이스라엘 내에서 쓰이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아일랜드의 역사에도 똑같은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아일랜드 대부분이 독립을 쟁취한 지 반세기 후 아일랜드 역사가들은 더 이상 민족해방 운동의 신화적 관점에서 역사를 쓰지 않았다.
-28

1929년의 경기 침체 이후로 신고전파 경제학을 정책에 적용하는 일은 급속도로 진척되었다. 순수 이론가들은 통계 숫자와 개념 점증에 대한 무관심을 버렸고, 계량경제학은 1930년대에 제도화될 수 있었다. 동시에 조작화의 중요한 도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일부는 한계 혁명 이전의 고전 정치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에서 비롯되어 마르크스주의를 거쳐서 1925년 레온티예프(Wassily Leontief)의 소련 경제발전 계획에 대한 예비적 연구에 서 처음으로 출현한 투입-산출 분석이었고, 다른 일부는 선형 계획법처럼 군사 작전 연구에 응용된 수학에서 비롯되었다.
-169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새로운 사회사'는 많은 사회사가들의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을 확실하게 끄는 주제를 거의 빠뜨리지 않고 다루었다. 그 주제들은 이름 없는 민중, 흑인 해방, 그리고 반제국주의나 최소한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을 사회적 저항과 결합시켰다.
… 가이아나 해안에 있으며 한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고 지금은 실망스러운 작은 독립국가인 수리남에서는, 옛날부터 존재한 여섯 개의 탈주 노예 공동체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나 차지하기 때문이다.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도착한 직후에 가장 도망가기 쉬웠기 때문에, 자유로운 탈주 노예 공동체는 식민지 사회가 초기 단계였던 16~17세기에 가장 쉽게 형성될 수 있었다. 브라질의 독립 공동체(quilombos) 가운데 가장 큰 팔마레스 공화국은 169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가 곧바로 6년간의 전쟁으로 몰락했다. 때때로 식민지 지배자들이 탈주 노예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나라들에서조차, 탈주 노예 공동체는 거의 존속되지 못했다.
리처드 프라이스의 『탈주 노예 사회』는 유진 제노브즈의 『반란에서 혁명으로」의 한 장과 함께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최고의 입문서이 다. 프라이스는 현재 탈주 노예 전반과 특히 수리남의 탈주 노예('숲 속의 니그로‘)나 사라마카 공동체에 대한 권위자이다. 『알라비의 세계』는 사라마카 사회가 독립 후 정착했을 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40년 동안 사라마카의 최고 지배자였던 알라비(1740~1820)의 '생애와 시대'를 말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310-311


이 책에서 홉스봄이 자세히 소개한 에릭 울프의 책은 샀는데 <알라비의 세계>는 국내에 나와 있는 게 없네 ㅠㅠ

유럽을 대륙이 아니라 클럽으로, 즉 클럽의 위원회가 적합하다고 공인한 후보자만 받아들이는 클럽으로 간주하는 전통은 거의 '유럽'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유럽'이 끝나는 지점은 자연히 각자의 입장에 달려 있다. 메테르니히에게 있어 '아시아'는 빈의 동쪽 출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고, 부다페스트의 주민들에게 진정한 유럽의 경계선은 헝가리 사람들과 크로아티아 사람들 사이를 명확하게 가로지르는 것이었으며,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에게는 크로아티아 사람들과 세르비아 사람들 사이를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자부심 강한 루마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후진적인 슬라브 사람들 사이로 유배당한 순수한 유럽인이자 정신적으로는 파리 시민으로 본다. 비록 동유럽의 부코비나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 작가인 그레고르 폰 레초리(Gregor von Rezzori)가 그들을 자신의 책 속에서 "마그리브인“, 즉 '아프리카인'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지리적 구분은 진정한 구분이 아니다. 그렇다고 꼭 이데올로기적인 구분이 진정한 구분인 것도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구분은 자신을 '잘난 사람'으로, 즉 지적, 문화적, 심지어 생물학적으로 항상 이웃보다 높은 집단에 속하는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었듯이 피부로 느끼는 우월감과 속으로 움츠러드는 열등감으로 구분한다. 구분은 반드시 인종적인 것도 아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된 경계선은 부자와 빈자 사이, 다시 말해 사치와 교육과 외부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356-357

다른 대륙으로 경사져 흘러가는 유럽 문화의 정점은 유럽 전체가 야만의 영역에 속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제야 볼 수 있었다. 14세기 후반까지도, 위대한 이븐 할둔 같은 높은 수준의 문명 지역의 학자들은 기독교 유럽에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는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신다"라고 말했는데, 이미 2세기 전 톨레도의 하급 법관인 사이드 이븐 아흐마드는 북쪽의 야만인들에겐 배울 것이 없다고 확신했다.
바로 여기에 유럽사의 역설이 놓여 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유턴(U turn)이나 중지가 유럽사의 특징이다.
동아시아에서부터 이집트까지 펼쳐져 있는 높은 수준의 문화 벨트는 모든 침략, 정복, 대변동에도 불구하고 야만주의로의 지속적인 퇴보를 경험하지 않았다. 이븐 할둔은 역사를 초원의 유목민과 정착 문명 사이의 영원한 투쟁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투쟁에서 유목민은 때때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승리자가 아니라 계속 도전자로 남았다. 몽고인과 만주인 지배하의 중국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온 모든 정복 침입자들로 들끓었던 페르시아는 그 지역의 높은 문화의 등대로 남았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도 파라오, 바빌로니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아랍인이나 투르크인의 지배를 받든지 말든지 그 지역의 높은 문화의 등대로 남았다. 대초원 지대와 사막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천 년 동안 침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세계의 모든 위대한 제국은 한 가지 예외만 제외하고 모두 살아남았다. 오로지 로마 제국만이 영원히 파괴되었다.
문화적 연속성이 붕괴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는 필요하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를 포함한 서양의 철학자들의 잘못된 신념, 즉 역사 발전의 동력은 아시아나 아프리카가 아니라 오로지 유럽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신념은 다른 문명의 지적이고 도시적인 문화의 연속성과 서양사의 불연속성 사이의 이러한 차이에서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358-359

그러나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15세기 말부터 세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유럽 중심적으로 되었고, 20세기까지 그랬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를 명나라와 무굴 황제, 맘루크들로부터 구분하는 모든 것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세계'라는 개념조차도 유럽의 서반구 정복과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 체제의 출현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것이 유럽의 상황을 세계사 안에 고정시키고, 유럽사의 문제를 규정하고, 그리고 유럽이라는 특수한 역사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유럽사를 매우 독특하게 만든다. 유럽사의 주제는 지리적 공간이나 인간 집단들이 아니라 과정이다. 유럽이 자신을 변환시키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세계를 변환시키지 못했다면, 단일하고 통일적인 유럽사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남아시아'가 (최소한 유럽 제국 시대 이전에는) 개념과 역사로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유럽'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유럽으로 의식하는 그리고 유럽이라는 지리적 대륙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유럽‘은 오로지 근대에 이르러서야 출현하였다.
-360

나는 내 인생의 많은 부분, 아마 내 의식적인 삶의 대부분을 확실하게 좌절되었던 희망, 명백히 실패한 이상에 바쳤다. 그것은 10월 혁명이 개시한 공산주의였다. 그러나 패배만큼 역사가의 정신을 또렷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나와는 매우 다른 신념을 지닌 오랜 친구의 말 몇 마디를 인용함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한다.
“승리의 편에 있는 역사가는 단기적인 성공을 장기적으로 소급되는 목적론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들기가 쉽다. 패배자는 그렇지 않다. 패배자의 주요한 경험은 모든 것들이 희망했던 것이나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패배자들은 왜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은 일어나지 않고 다른 어떤 것이 발생했는지 설명해야 할 필요를 더 크게 느낀다. 이것은 중기적 원인과 장기적 원인에 대한 연구를 자극할 것이다.” (Reinhard Koselleck)
-384-385


1990년대의 학살들에 대해.

야만주의가 약 150년 동안 쇠퇴하다가 20세기 대부분의 시기에 증가했고, 여전히 이러한 증가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음을 논의하려 한다. 나는 '야만주의'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첫째, 모든 사회가 자기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그리고 작게는 자기 사회의 구성원들과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규칙과 도덕적 행동 체계의 분열과 파괴이다.
둘째, 나는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18세기 계몽사상의 기획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인류의 합리적 진보에 헌신하는 국가 제도에서 구체화된 도덕적 행동 기준과 그러한 규칙의 보편적 체계의 확립에 대한 반전을 의미한다.
마이클 이그나티예프는 저서 <피와 소유(Blood and Belonging)>에서 1993년의 쿠르드 게릴라 중 총기를 소지한 사람과 보스니아 검문소에서 총기를 소지한 사람 사이의 차이를 적어놓았다. 국가가 없는 쿠르드족 사회에서 … 무기를 갖는다는 것은 한 소년이 더 이상 아이가 아니고 성인 남성처럼 행동해야만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총의 문화에서 는 책임, 절제, 비극적 의무를 강조한다." 반대로, 1945년 이후 발칸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국가가 합법적인 폭력을 독점하는 사회에서 살았다. 국가가 붕괴했을 때엔 그러한 독점도 무너졌다. "일부 젊은 유럽인 남성들에게, [이러한 붕괴에서] 결과된 혼란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자극적인 낙원으로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이 사실에서 검문소의 반(半)성적, 반(半)포르노적 총기 문화가 비롯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남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장악했을 때 억누를 수 없는 자극적 스릴을 느꼈고", 그것을 무기력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데 사용했다. 나는 세 대륙의 내전에서 최근 저질러진 수많은 잔학 행위들이 첫 번째 형태의 분열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 번째 형태의 야만화에 관심이 있다. 나는 우리가 어둠 속으로 가속적으로 몰락하는 것을 막는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18세기 계몽사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치 체계라고 믿는다. 이러한 가치 체 계는 이 순간에 유행하는 견해가 아니다.
-406-407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산이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비교적 현대적이다. 그리스인과 그 이웃과의 실제 분쟁은 1912년 발칸 전쟁 이후에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간의 마케도니아 분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 전체는 이전에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 민족적, 언어적 논의에서는 슬라브 민족의 주장과 아마도 알바니아 민족의 주장이 더 지지를 받기 때문에, 현재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리스 경우는 주로 시대착오적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역사가가 테살로니키의 주민 대부분이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이 아니라 거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이었다고 지적한다면, 그 역사가는 세 나라의 민족주의적 열광자들 사이에서 똑같이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439

그럼에도 이와 같은 사례는 신화 파괴자라는 역사가의 기능의 한계를 보여준다. 첫째, 역사가의 비판의 힘은 소극적이다. 카를 포퍼(Karl Popper)는 우리에게 반증 가능성의 검사는 한 이론을 지지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하지는 못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둘째, 신화가 잘못임이 밝혀질 수 있는 명제에 근거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신화를 깨뜨릴 수 있다. 마사다의 포위 공격과 관련하여 구성된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은 이스라엘의 학생들과 외국 방문객들이 배우는 애국적 설화라는,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진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따라서 로마 시대 팔레스타인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가들의 정당한 의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진지한 역사가들은 히틀러가 '최종적 해결‘을 원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이러한 결과에 대해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은 입증할 수 없다.
세 번째 제약은 더욱 명백하다. 단기적으로, 역사가들은 역사 신화를 믿기로 마음을 굳힌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경우에 특히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무기력하다. 그리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 주로 민족사는 알려진 모든 공교육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해서 역사가의 공적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가는 선동과 신화로 전환되는 원자료의 주요 생산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44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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