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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상/하
에릭 홉스봄. 이용우 옮김. 까치
이전의 장기 19세기 3부작보다 나는 이 책이 더 재미있었다.
이미 자신 있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황금시대가 낳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변동의 엄청난 규모와 충격이다. 그 영향으로 인한 전세계의 인간생활의 변화는 뒤집을 수 없을 만큼 깊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변화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금세기의 3/4분기는, 인류의 압도적 다수가 먹을 것을 재배하고 가축을 돌보며 살아간 긴 시대를 끝냈다는 이유만으로도, 석기시대의 농업 발명으로 시작된 인류사의 7,000-8,000년을 끝냈다고 말하는 쪽이 더욱 설득력 있다. 이에 비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의 역사는, 아마도 역사적 중요성이 덜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23
러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쿠바의 담배 농장 노동자들도 '소비에트'를 구성했다. 스페인에서는 1917-19년이 '볼셰비키의 2년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혁명적 학생운동이 1919년의 북경과 1918년의 코르도바(아르헨티나)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곧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퍼져서 각국의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 및 정당들을 낳았다. 인도의 민족주의 투사인 마나벤드라 나스 로이는 멕시코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매혹되었다. 1917년에 가장 급진적인 국면에 접어든 멕시코 혁명은 자연스럽게 혁명 러시아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몬테수마 2세, 에밀리아노 사파타 그리고 구색을 갖추느라 포함된 인디언 노동자들과 함께 멕시코 혁명의 우상이 되었고, 오늘날도 멕시코 혁명의 공식적 미술가들이 그린 대벽화에서 여전히 그 두 사람을 볼 수 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로이는 모스크바에서 새로 생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식민지 해방 정책을 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0월 혁명은 부분적으로 헨크 스네블리트 같은 네덜란드계 사회주의자 거류민들을 통해서 인도네시아 민족 해방운동의 주된 대중조직인 사레카트 이슬람에 흔적을 남겼다. 멀리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 오지에서, 주로 아일랜드계 카톨릭 교도인 양털 전모공들은 정치이론에 대한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소련을 노동자 국가로 환호했다. 미국의 이주민집단들 중에서 오랫동안 가장 맹렬하게 사회주의적이었던 핀란드인들은 일제히 공산주의로 개종하여, 미네소타의 황량한 광산촌을 집회들로 채웠다.
-97-98
파시즘의 호소력은 실패와 패배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파시즘은 강에 내던져진 흙덩어리처럼 녹아버린 셈이었고, 무솔리니에게 경의를 표하는, 그리 크지 않은 신파시스트 운동(Movimento Sociale Italiano)이 영속적으로 존재한 이탈리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치무대에서 사실상 영원히 사라졌다.
국가사회주의는 1945년 이후의 독일인들에게 기억 외에는 줄 것이 전혀 없었다. 파시즘은 그것이 등장할 수 있게 해준 세계 공항과 함께 사라졌다. 파시즘은 이론적으로조차 보편적인 프로그램이나 정치적 계획이었던 적이 전혀 없었다. 다른 한편 반파시즘은 그 동원이 아무리 일시적이었고 비영구적이었다 해도 엄청난 범위의 세력을 단결 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그 단결은 계몽주의 와 혁명의 시대의 공유된 가치와 열망- 이성과 과학의 적용에 의한 진보, 교육과 민주정치, 태생이나 혈통에 기초한 불평등의 거부, 과거 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사회-에 기초한 것이었다.
-249-250
최근의 세계를 돌아본다면...
초현실주의는 프랑스(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스페인(가르시아 로르카), 동유럽, 라틴 아메리카(페루의 세사르 바예호,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의 일급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일부는 현재까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술적 리얼리즘' 저작을 통하여 반향되고 있다.
초현실주의의 이미지와 상상력-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호안 미로 또한 살바도르 달리까지도 -은 우리의 이미지와 상상력의 일부가 되었다. 각본가인 자크 프레베르의 경우에는 영화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경우에는 포토저널리즘이 각각 초현실주의에 빚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256
읽다 보니 초현실주의야말로 진정 내 취향이었음을 깨달음.
재작년 베네치아에서 만난 에른스트 등의 초현실주의 작품들.
국제적인 오페라의 레퍼토리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제국의 시대 것이었다. 그러나 오페라의 전통적인 파트너인 발레는 주로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러시아의 오페라 흥행주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에 의해서 의식적인 전위예술 매체로 변형되었다. 그의 "퍼레이드(Parade)"의 1917년 파리 상연(디자인 파블로 피카소, 음악 에리크 사티, 대본 장 콕토, 프로그램 해설 기욤 아폴리네르) 이후에, 입체파인 조르주 브라크(1882-1963)와 후안 그리스(1887-1927) 같은 사람들에 의한 무대장식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마누엘 데 파야, 다리우스 미요, 프랑시스 풀랑크가 작곡하거나 편곡한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다. 1914년 이전에는 적어도 영국에서 '포스트-인상파 전람회'가 대중으로부터 조롱을 받았던 반면, 이제는 스트라빈스키가 가는 곳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뉴욕과 그밖의 다른 곳에서의 병기 전시회가 그랬듯이 말이다.
-257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사장인 '엉클' 칼 램리는 모국인 독일을 매년 방문할 때마다 최신의 사람들과 생각들을 공급받는 데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 결과 그의 스튜디오의 특징적인 성과물인 공포영화("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등)는 때때로 독일의 표현주의 모델들에 꽤 가까운 복사물이 되었다. 또한 대서양 너머로부터 프리츠 랑, 에른스트 루비치, 빌리 와일더 같은 중부 유럽의 감독들이 흘러들어온 것은 헐리우드 자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260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각국의 문화적 전위들이 당대의 요구에 맞게 과거를 다시 쓰거나 재평가했다는 점이 될 것이다. 영국인들은 존 밀턴과 알프레드 테니슨에 관해서는 잊고 대신 존 던을 찬미하라는 단호한 말을 들었다. 스페인 회화의 애호가들에게는 이제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릴료의 시대가 끝나고 대신 엘 그레코에 대한 찬미가 의무적인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본의 시대 및 제국의 시대(그 시대의 전위예술은 제외하고)와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떠한 것도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261
중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유일한 저항 집단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한 공산당에 의해서 급진화되었다. 1948년 이후 영국인들이 주로 중국인들로 구성된 게릴라 봉기 및 전쟁을 패배시키는 데에 12년이 걸렸다. 말라야의 탈식민화는1957년이 되어서야 말레이인 보수주의자들과 중국인 백만장자들에게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프랑스인이나 네덜란드인들과는 달리 영국인들은 인도에서의 오랜 경험을 통해서, 만만치 않은 민족주의운동이 일단 생겨나면, 공식적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만이 제국의 이점을 고수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배웠다. 영국인들은 1947년에 최소한의 반발도 없이 인도에서 철수했다. 실론(1972년에 스리랑카로 개칭했다)과 버마 역시 독립이 허용되었다. 전자는 놀라워하며 환영했고, 후자는 보다 망설였다. 버마의 민족주의자들은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이 이끌기는 했지만 일본인들과도 제휴했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에 너무도 적대적이어서, 버마는 탈식민화된 영국의 모든 속령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연방에 가입하기를 즉각 거부했다.
-308
분리된 '파키스탄'이라는 관념(그 개념과 이름 자체는 1932-33년이 되어서야 일부 학생들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다)이 1947년에 어떻게 현실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역사에서의 '만약'에 대한 학자들과 몽상가들 모두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물음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분할은 아무의 실책도 아니거나 모든 이의 실책이었다. 1935년 헌법에 따른 선거에서 국민회의는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에서조차 승리했고, 이슬람 연맹은 별로 좋은 기록을 거두지 못했다. 선거는 자신이 힌두교도와 이슬람 교도 둘 다를 대표하는 유일 국민정당이라는 국민회의의 주장을 강화한 것으로 보였다. 이로 인해, 무서운 지도자 무하마드 알리 지나가 이끄는 이슬람 연맹은 국민회의와 관계를 끊고 잠재적인 분리주의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지나가 이슬람 국가 분리에 대한 반대를 포기한 것은 1940년에 와서였다.
인도를 둘로 쪼갠 것은 전쟁이었다. 영국의 인도 통치는 마지막으로, 영국의 전쟁을 위해서 인도의 사람들과 경제를 1914-18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동원했다. 국민회의의 전쟁반대는 그 지도자들을 정치에서 밀어냈고, 1942년 이후에는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전시경제의 압박으로 인해, 특히 펀자브의 이슬람교도 중에서 영국의 인도 통치를 정치적으로 지지했던 주요 집단들이 영국으로부터 멀어지고 이슬람 연맹 쪽으로 넘어갔다.
이슬람 연맹은 이제 대중적 세력이 되었는데 바로 그 순간에, 국민회의의 전시동원 방해능력에 대해서 우려한 델리의 정부는 힌두교도와 이슬람 교도의 경쟁을 의도적, 조직적으로 이용했다.
-309-310
(1956년의 수에즈 모험은) '중동의 영국시대', 즉 1918년 이래 중동지역에서 영국의 헤게모니가 문제시되지 않았던 시대를 영원히 끝장냈다. 1950년대 말까지는, 공식적 식민주의가 청산되어야 한다는 것이 살아남은 구제국들에게 자명해졌다. 포르투갈만이 계속 반대했다. 포르투갈의 후진적이고 고립되고 주변화된 식민본국 경제는 신식민주의를 수행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파리, 런던, 브뤼셀(벨기에령 콩고)은 경제적, 문화적 종속을 온존시킨 채 형식적 독립을 자발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좌파체제하의 독립으로 끝나기 쉬운 장기적 투쟁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케냐에서만 상당 규모의 민중봉기와 게릴라 전쟁이 벌어졌다. 주로, 일부 종족인 키쿠유족에 국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마우마우 운동).
벨기에령 콩고를 제외하고 다른 곳들에서는 예방적 탈식민화 정책이 성공리에 수행되었다. 벨기에령 콩고의 경우에는 그러한 정책이 거의 즉각 좌절되어 무정부상태와 내전에 빠지고 국제 무력외교가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령 아프리카에서는, 재능 있는 아프리카 정치가이자 범아프리카주의 지식인인 크와메 은크루마가 이끄는 대중정당이 이미 존재했던 황금해안(지금의 가나)이 1957년에 독립 을 허용받았다.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는 기니가 1958년에, 피폐한 상태에서 독립을 일찍 강제로 맞이했다. 당시에 기니의 지도자 세쿠 투레는 자치를 프랑스 경제에의 엄격한 종속과 결합한 드골의 '프랑스 공동체'에 가입하기를 거부했고, 블랙 아프리카의 지도자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도움을 찾아야 했다.
-312
사회주의의 토대를 침식한 것은 자본주의 및 그 초강대국과의 적대적인 대결이 아니라, 사회주의 자체의 갈수록 명백해지는 심각한 경제적 결함들과, 훨씬 더 역동적이고 선진적이고 우세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가속화되는 침탈의 결합이었다. 핵전쟁이라는 동반 자살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냉전의 수사가 오히려 약한 쪽 경쟁자의 존속을 보장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철의 장막으로 바리케이드를 친 뒤에서는, 중앙에서 계획된 비효율적이고 늘어지는 통제경제조차 생존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상처 입기 쉽게 만든 것은 1960년대부터 계속된, 소련형 경제와 자본주의 세계경제 사이의 상호 작용이었다. 1970년대에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경제체제를 개혁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정면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새로 이용할 수 있는 세계시장 자원들(유가, 얻기 쉬운 차관 등)을 활용하는 쪽을 택했을 때 그들은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판 셈이었다.
-351
소련이 자신의 우방체제와 위성체제들에서 다양성을 훨씬 덜 용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그러한 체제들 내에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할 능력 역시 훨씬 작았다. 1970년 이전에조차 소련은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중국에 대해서 줄곧 행사 해온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쿠바와 루마니아 지도자들의 개인주의적인 행동을 묵과해야 했으며, 제3세계 나라들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지배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소련이 무기를 공급해주었고 미 제국주의에 대한 소련의 적대감을 공유한 제3세계 국들 중 거의 어느 나라도 자국 공산당의 합법적인 존재조차 용인하지 않았다.
정글 같은 국제현실에서 살아남을 능력이 없는,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불안정하고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정치체들(홍해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지역은 그러한 정치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은 그럭저럭 계속 존재했다. 핵폭발 버섯구름의 그림자는 서유럽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와 같은 체제들의 존속을 보장했던 것이다. 냉전은 극소국가가 되기에 가장 좋은 시대였다.
-354-355
폴란드 정부와 형가리 정부는 공산주의에 대한 열의부족을 그리도 분명히 보여 준 인민들에게 경제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폴란드에서 농업은 탈집단화되었고 보다 중요하게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힘이 급격 한 중공업화로 크게 강화되어 그때부터 암묵적으로 인정되었다.
1956년의 사건들을 촉발시킨 것은 포즈난에서의 산업노동자들의 움직임이었다. 그때부터 1980년대 말에 연대자유노조가 승리할 때까지 폴란드의 정치와 경제는, 정권과 노동계급 사이의 대결에 의해 지배되었다. 대결은 대체로, 폴란드 정부가 주기적으로 물가를 올림으로써 기본생계비에 대한 상당한 보조금을 삭감하려 했던 시도를 둘러 싸고 일어났다. 그러한 시도는 파업을 낳았고 으레 (정부의 위기가 발생한 뒤에) 후퇴가 뒤따랐다.
헝가리의 경우, 1956년 혁명이 패배한 뒤에 소련인들이 부과한 지도부는 보다 진정으로 개혁주의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그 지도부는 야노쉬 카다르(1912-89)의 지도하에 조직적으로, 아마도 소련 내의 유력한 부서들로부터 암묵적 인 지지를 받으며 체제를 자유화하고, 반대파를 회유하고, 소련이 받아들일 만하다고 볼 한계 내에서 1956년의 목표들을 사실상 달성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50년대 초의 무자비한 숙청 이후 정치적으로 침체했으나, 조심스럽고 시험적으로 탈스탈린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1960년대 후반에 두 가지 이유로 급격히 가속화되었다.
이중민족국가에서 결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슬로바키아인들은 당내의 잠재적인 반대파를 후원했다. 1968년 의 당 쿠데타로 서기장에 선출된 사람이 슬로바키아인인 알렉산더 두프체크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와는 별개로, 경제를 개혁하고 소련형의 통제체제에 일정한 합리성과 유연성을 도입하려는 압력이 1960년대에 들어와서 갈수록 억제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한 압력은 공산권 전역에서 느껴졌다. 그 자체가 정치적으로 폭발적인 것은 아니었던 경제적 탈집중화는 지적 자유화, 더욱 크게는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요구와 맞물릴 때 폭발적인 것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가 특히 거칠고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렇게도 많은 공산주의자들(특히, 나치의 점령 전후에 진정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당 출신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여전히 품고 있는 공산주의적 희망과 체제의 현실 사이의 괴리에 깊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가 더더욱 강력했 다.
-548-549
1990-93년에는, 선진 자본주의 세계조차 불황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시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황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기의 몇 십 년 동안 중심적인 사실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황금시대만큼 잘 기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이 통제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경제의 변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알거나 그 변덕을 관리할 수단을 보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금시대에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었던 정부 정책은 더 이상 효과가 없 었다. 위기의 몇십 년은 국민국가가 경제적 힘을 잃은 시대였던 것 이다.
-561
피델 카스트로는 라틴 아메리카 정치에 특유한 인물이었다. 정책은 불분명했지만, 개인적인 용맹을 보여주고 전제정에 맞선 자유라는 대의의 영웅이 되기로 굳게 결심한, 명문지주 집안 출신의 원기왕성하고 카리스마적인 젊은이가 적시에 출현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의사이자 천부적인 게릴라 지도자인 게바라는 148명- 정복을 완수할 때까지 300명으로 늘었다 -을 데리고 쿠바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는 일에 착수했다. 피델의 게릴라는 1958년 12월에, 1,000명의 주민이 사는 소도시를 처음으로 점령했을 뿐이다. 피델이 승리한 것은 바티스타 체제가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발코니의 마이크들 앞에 서고 대중들로부터 우상시되는 카리스마적인 인물들로 가득 찬 단기 20세기에, 한 번에 몇 시간씩 연설하고 다소 비체계적인 생각을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의심하지 않는 군중(필자를 포함)과 공유한, 주름진 전투복 차림의 몸집 크고 턱수염을 길렀으며 꼼꼼하지 않은 이 사람만큼, 회의적이거나 적대적인 청중이 적었던 지도자도 또 없었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혁명이 집단적인 밀월로 체험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의 라틴 아메리카 반란자들은 불가피하게, 볼리바르에서 호세 마르티에 이르는 그들의 역사적 해방자들의 수사뿐만 아니라 1917년 이후 좌파의 반제국주의적, 사회 혁명적 전통에도 의존하게 되었다.
피델도 그의 어떤 동지도 급진파이기는 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미국의 외교관들과 정책고문들은 그 운동이 친공산주의적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논쟁했으나 결국 친공산주의적이 아닌 것으로 명백히 결론지었다. 그러나 무장 게릴라 봉기를 수행하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회 혁명적 이데올로기에서부터 1950년대 미국의 열렬한 반공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피델주의 운동을 공산주의 방향으로 몰고 갔다. 전지구적인 냉전이 나머지 역할을 했다. 피델이 쿠바가 사회주의국이 될 것이며 그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훨씬 전인 1960년 3월에 이미 미국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취급하기로 결정했고, 그의 정부를 뒤엎는 공작을 벌일 권한을 CIA에게 부여했다.
-602-603
1964년 이후 혁명 볼리비아에서의 군부의 집권은 아마도 그 나라에 대한 쿠바의 영향에 관한 미국의 우려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게바라 자신이 미숙한 게릴라 봉기 시도중에 죽었지만, 볼리비아는 그 나라의 어떤 군인에 의해서도 단기간 동안조차 쉽게 통제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우루과이에서는 군부가, 유별나게 이성적이고 효과적이었던 '도시 게릴라' 운동을 일상적인 살해와 고문의 구실로 삼았지만, 진정으로 지속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묘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남미 국가에서 1972년에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아마도, 전통적인 양당제에 맞선 '범좌파' 인민전선의 부상일 것이다. 우루과이인들은 군사통치자들이 제시한 불구화된 헌법을 결국 부결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전통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1985년에 민간정부로 돌아갔다.
-607
체 게바라의 초상화는 동경의 학생시위대가 우상처럼 들고 다녔고, 턱수염을 기르고 베레모를 쓴 더할 나위 없이 남성적인 그의 얼굴은 대항문화의 비정치적인 사람들조차 가슴 뛰게 했다.
핵무기에 대한 반대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좌파를 많이 동원한 것은 제3세계 게릴라들에 대한 지지와, 1965년 이후 미국의 경우 그들과 싸우러 파병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알제리 해방전쟁에 참가했던 카리브 해의 한 정신과 의사(프란츠 파농/역주)가 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Les Damnes de la terre)」은 지식인 활동가들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요컨대, 열대우림 속에서 싸우는 유색인종 게릴라들의 모습은 1960년대 제1세계의 급진화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부분이자 아마도 그것에 가장 큰 영감을 주었을 요소였다. '세계체제' 이론가들이 암시하듯이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뿌리가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부상이 아니라 16세기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제3세계 정복에 있다면, 20세기에 이러한 역사의 진행을 역전시키는 것이 제 1세계의 무력한 혁명가들에게 무기력상태로부터의 탈출구를 제공할 것이었다.
-608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개혁가들의 마음속에 글라스노스트가 페레스트로이카보다 훨씬 더 명확한 강령이었다는 점이다. 글라스노스트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법의 지배와 시민적 자유의 향유에 기반한 입헌적, 민주적 국가의 도입 내지 재도입을 의미했다. 한편,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준은 경제가 원칙적으로 어떻게 운영되는가가 아니라, 쉽게 나열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점들에서 경제가 매일 어떠한 성과를 보이는가였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오직 결과에 의해서만 평가되었던 것이다.
1980년대 중국의 GNP 성장률은 남한에게만 뒤지는 것으로 연간 평균이 거의 10%에 달했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중국의 페레스트로이카 사이의 현격한 차이는 시차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없고, 심지어 중국인들이 주의깊게 중앙통제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명백한 사실로도 설명될 수 없다. 사회체제와 무관하게 경제성장에 유리한 것으로 드러난 극동의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중국인들이 어느 정도 득을 보았는가를 조사하는 일은 21세기의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660-661
(고르바초프를) 전후세대에 속하는 또 한 사람의 50대 지도급 공산주의자와 대비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984년에 개혁 추세의 일환으로 카자흐스탄 공화국을 맡게 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공장노동자에서 출발해 전업 공직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됨으로써 당에서 국가로 이동했고, 지방분권화와 시장을 비롯한 필요한 개혁들을 추진했으며, 고르바초프와 소련 공산당의 몰락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항상 실용주의자였던 나자르바예프는 그의 봉토(와 그곳의 주민)의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는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진했고, 시장개혁이 사회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시장은 예스, 통제되지 않은 물가상승은 단호히 노였다. 그 자신이 선호한 전략은 다른 소비에트(또는 구[품]소비 에트) 공화국들- 그는 중앙아시아 소비에트 공동시장을 선호했다- 과의 쌍무적인 무역거래와, 외국자본과의 합작사업이었다.
그는 러시아나 심지어 비공산국들 사람을 일부 고용했으므로, 급진적인 경제학자들의 견해에 반대하지 않았던 셈이다. 즉 2차 대전 종전 이후의 자본주의 경제가 실제로 얼마나 성공적으로 작동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 남한 경제기적의 브레인 중 하나를 초빙했던 것이다.
-672-673
아마도 방찬영 전 경제고문을 얘기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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