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차태서, <30년의 위기>

딸기21 2024. 3. 16. 14:47
728x90

 

30년의 위기

차태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3/12

 

성균관대 차태서 교수님의 신간. 미국 정치사를 이런 시각으로 보고 이렇게 과감하게(!) 써주시는 한국 학자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넘 반갑고 기쁘다.

 

2020년대 초반은 세계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순환(cycle)이 종료되었음을 조망하게 되는 시간이다. 2021년 여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와 탈레반 재집권, 2022년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은 단극체제의 균열과 자유세계질서 프로젝트의 종식을 재삼 확인시켜주었다. 특히 두 에피소드 모두 탈냉전기 미국에 의해 추진된 단선론적 역사철학에 근거한 거대 사회공학 구상이 모순에 부딪혀 나타난 후과라는 점에서, 각 사건은 오늘 날 세계체제 요동의 징후로서 읽혀진다. 
회고건대, 팍스아메리카나의 거대한 전환이 시작된 것은 조지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 말기 전 지구적 금융위기가 발생 하고 대테러전이 수렁에 빠지던 때부터다. 그러나 그 변화의 심도를 세계인 모두가 심각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이었고, 이때부터 미중 패권 경쟁의 심화, 코로나 팬데믹 기간 글로벌 거버넌스의 기능 부전, 그리고 마침내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등의 사건을 경유하며, 우리는 전간기의 기시감 속에 국제정치의 흐름을 불안한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5

현재 자유주의적 세계질서가 겪고 있는 "쌍둥이 위기"와 그 증상으로서 포퓰리즘의 부상은, 우리가 전간기와의 역사적 유추를 통해 탈냉전 30년의 위기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구조적 조건을 형성한다. 쌍둥이 위기란 대략 2008년 전후를 기점으로 표출된 팍스아메리카나의 지정학적 위기와 정치경제적 위기를 말한다.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수정주의적 대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현상을 유지하려는 워싱턴과 현상을 변경하려는 베이징 (그리고 모스크바, 테헤란 등) 사이에 거대한 지정학적, 지경학적 경쟁이 목하 진행 중이다.
나아가 2015-16년부터 시작된 선진 서구 세계에서의 정치적 격변, 즉 브렉시트(Brexit), 트럼프 당선, 서유럽에서 우파 포퓰리 즘의 득세 등은 위기의 징후이자, 그 위기가 얼마나 심도 있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예증해주는 사건들이었다. 전후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구성하고 추동해온 세계체제의 핵심부에 더는 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음이 백일하 에 드러난 셈이었다.
-22-23

 

저자는 "안정적 패권국이 부재한 '대공위기(Interregnum)'에 자유주의적 이상주의 프로젝트가 파산에 이른 상황"이라고 현 시기를 진단한다. 대공위기에 대한 논의가 몇 년 새 활발하게 나오고 있는 듯.

 

차 교수님은 현재의 중국을 수정주의 시기, 즉 현상유지를 넘어 현상을 변경하려 시도하는 단계로 보고 있는 듯하다. 이 문제는 그야말로 관심거리다.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중국은 '도광양회'를 벗어던졌다(일전에 서울시립대 모 교수님은 도광양회라는 말 자체가 중국이 스스로 내세운 것이라기보다는, 서방 언론이 덩샤오핑의 말 중에 굳이 뽑아서 부각시킨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지만).

시진핑 집권 뒤 유엔 안보리에서 중국 대표가 시리아 내전과 관련해 했던 말들 혹은 시진핑 본인의 발언들은  2000년대 대테러전 기간 중국의 판에 박히다 못해 인용하기조차 힘든 도돌이표 발언들과는 뉘앙스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을 수정주의 국가로 볼 수 있을까? 현상 변경을 시도하는 것인가?

 

1) 2차 대전 이후 그어진 국경선의 변경, 그 가운데에서도 대만의 병합

2) 아태 지역에서 미국 패권에 대한 공개적 도전(군사적 패권 추구)

3) 아태를 넘어선 영향력 확대(군사력 확대)

 

이런 것들을 실행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인가? 대만을 무력병합하려는 시도는 아직 하지 않고 있고 또 당장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2010년대 말부터 양안에서의 무력 시위가 많아진 것에 더해 '상륙 작전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기는 한다. 다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를 언급하는 것은 대체로 미국이며 미국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의 입에서 '2027년 대만 침공설'이 맨 먼저 나왔다는 점은 고려해야겠다.

 

남중국해 갈등이 시진핑 집권 전후한 시기부터 산호섬 키우기;;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남부전구는 자체제작 항모를 만들고 있으니 '중국 항모전단'이 대양에 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하다. 그럼 3번은? 지부티 군사기지를 나무라는 미국의 이중잣대는 물론 웃기지만 중국이 아부다비 칼리파 항만, 이스라엘 하이파 항만 운영 등을 놓고 전통적인 아시아 영역권 밖에서 미국과 부딪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현상유지에서 수정주의 쪽으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봐도 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중국 전문가들께 더 여쭤봐야 할 듯.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이론으로서 민주평화론이나 신고전 경제학 자체는 일정한 객관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들이 미국 외교정책상의 정권 교체론이라든지, 워싱턴 컨센서스와 같은 국제기구의 교조적 독트린으로 진화되었을 때 발생했다. 특히 자유주의가 마치 구소련 시절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같은 강성 이데올로기가 되어 역사철학적, 목적론적 신념의 형태를 띠었을 때, 이라크전쟁 실패와 세계 금융위기와 같은 대규모의 재앙을 불러오고 말았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단극 시대의 유토피아적 판타지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적 세계질서 프로젝트의 한계를 비판하고, 역사의 주기성과 비극을 다루는 현실주의 전통의 고전들을 다시 펼쳐 들어야 하는 “카의 계기(Car moment)"가 도래한 것이다.
-28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E H 카가 전간기를 분석한 책 <20년의 위기>를 모티프로 탈냉전 후 30년의 시기를 긴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다. 이 책을 읽고 내친 김에 카의 책도 샀는데 다 읽고 비교해봐야겠다.

 

거친 수사들과 말실수들, 그리고 실제 정책 집행 과정의 혼란을 논외로 한다면, 트럼프는 상당히 일관성 있는 현실주의 외교정책을 가졌던 것처럼 보인다. 특히 강대국 간의 관계에서 트럼프 정부는 "새로운 미-중-러 삼각 체제"의 형성을 추동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한편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실한 세력균형 정책을 수행함과 동시에 “강력한 지도자들이 통치하는 지역 열강들과 타협"도 일정 부분 추구했다. 러시아와 손잡고 패권 도전국 중국에 맞서는 전략은 현실주 의적 세력균형의 원칙에 입각해볼 때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특히 오늘날 바이든 행정부가 세계를 선악 이분법 구도로 이해함으로써 외교정책의 유연성을 상실하고, 중러 밀착과 자유패권 전략의 부활과 같은 역효과를 가져오는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강대국 간 삼각관계에 주목하는 닉슨-트럼프식의 현실주의적 접근에 대한 재평가가 요구된다.
-124-125

 

상당히 공감하는 내용.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러시아는 2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모든 룰을, '체제'를 깨뜨렸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본다.

 

오늘날 포퓰리즘이 소환하는 노스탤지어 독트린은 특히 신주권론 혹은 민족국가의 귀환이라는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포퓰리스트들에 의하면, 작금의 지구화된 세계는 인민의 자기 결정권, 곧 선출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결정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초국적 엘리트들과 국제기구 관료들에게 주권을 양도해온 비민주적 공간이기 때문에, 다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재영토화하는 것이 요구된다. 근대적인 국경선을 복원하여 이민자와 난민들의 흐름을 막아내는 것도 중요한 목표로 제시된다.
-190

 

엘리트들이 빼앗아간 주권의 회수... 의미 있게 볼 지점들과, 왜곡된 방향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전후 아시아 지역 아키텍처로서 샌프란시스코체제의 핵심 구성요소는 양자 동맹체제에 기반한 미국 주도의 안보질서였다.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보면, 동시대 서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는 제국적 색채가 강한 모노-허브(mono-hub) 형태의 차륜 구조(hub-and-spokes system)가 정착된 셈이다.
탈냉전기에 와서 아시아 지역 안보 아키텍처에도 점진적인 변환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유럽과 같은 다자주의로의 전면적 이행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대신 “복합 패치워크(complex patchwork)", 노드 방위체제(nodal defense arrangement)”, 제휴 협력 (alignment cooperation)” 등의 유사 개념들로 불리는 동아시아만의 고유한 복잡 네트워크 구조가 등장한 것이다. 특히 21세기 초반에는 9.11의 맥락 속에, 대테러 전쟁, 비전통 안보 등의 새로운 방위 이슈 부상이 역내 아키텍처 변환의 추동력을 제공했다. 이른바 소다자주의가 전통적 양자 동맹체제를 보완하며 지역에 새로운 국가 간 협력의 기제로 부상한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통적 차륜구조의 변환을 본격 추동한 것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대의 아태전략프로젝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패권 조정이라는 대전략상의 변화 맥락 아래서 2010년대에 신미국안보센터(CNAS),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같은 주요 싱크탱크들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아키텍처 변환에 대한 보고서들을 차례로 제출했다. 이들은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다음 단계로서 기성 차륜구조체제를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광범위한 안보 네트워크들에 내장시키는 방법을 선택해 오래된 동맹 시스템을 보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한 민간 담론이 행정부의 공식 전략으로 수용된 결정판이 애쉬 카터 당시 국방부 장관의 "원칙적 안보 네트워크(Principled Security Network)” 건설에 대한 선언이었다.
-220-221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단일의 다자 안보기구가 수립되기 어려운 조건에서 복합 패치워크의 복 잡성과 유연성은 단점이 아닌 장점이 될 수 있다. 우선 멤버십이 서로 겹치고 제도 내 위계가 부재하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 간의 제로섬적 제도 균형 경쟁이나 안보 딜레마 상황을 완화시킬 수 있다. 여러 제도에 멤버십을 갖게 된 강대국들이 점차 국제 규범과 법규들에 구속당하는 효과도 생겨난다.
셋째로 패치워크는 집단행동 문제(collective action problem)를 해결하는 것에도 도움을 준다. 직접적 이익이 결부된 제도들에 국가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무임승차 문제가 자연히 약화되고 비용과 위험의 공평한 배분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복합 패치워크의 복잡성은 중소국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유용한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패치워크의 발전으로 지역 네트워크의 복잡성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미국이나 중국이 단독으로 주도하는 국제제도를 선택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들며, 두 강대국을 제도 패치워크의 규칙들에 얽어 놓는(enmeshed)" 적극적 결박 전략을 펼칠 기회도 늘어날 수 있다.
-222

 

 

Remarks on "Asia-Pacific's Principled Security Network" at 2016 IISS Shangri-La Dialogue (June 4, 2016)
Delivered by Secretary of Defense Secretary of Defense Ash Carter

 

중국 문제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대중 견제의 메시지 못지않게 책임 있는 이해 상관자(responsible stakeholde)로서 중국이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중요 노드나 허브를 담당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여와 확장'의 자유국제주의적 패러다임을 유지한 측면도 존재한다. 특히 아태 지경학에서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 구상이 상징하듯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높여 통합과 협력의 국제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주류적 접근법이 그대로 존재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의 '공간적 재척도화(rescaling)'로서 인도-태평양이란 지역 개념화에는 그 근본에서부터 역내의 군사화, 봉쇄의 전면화라는 전략적 패러다임 전환이 내재되어 있었다. 지난 30여 년간 사용된 아시아-태평양 개념이 주로 경제적 교류 증진을 위해 무역과 투자 관련 정부 간 레짐 구축을 염두에 둔 지역주의 관념에 기반했던 것에 반해, 인태 개념에는 인도까지도 반중 세력균형 동맹에 끌어들여 중국의 해양 군사력 증대와 A2/AD 전략에 맞서자는 안보 중심적 프로젝트가 근저에 깔려 있다.
…이제는 (중국이) 미국 패권 자체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대국으로 성장했다고 진단하면서, 강경한 대중 압박정책으로의 근본적 대중 전략 전환을 선포했다. 대중 전략의 강경화가 오늘날 정치 양극 화의 시대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민주· 공화 양당의 합의 아래 형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미국 대전략에서 장기적 신경향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실제 정권 교체 후 바이든 행정부에 서도 큰 경향성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로써 중국까지 포함해 지역적 협력과 통합을 구축해가려던 복합 패치워크 자체가 전통적인 지정학에 기반한 반중국 균세연합으로 수정되었다. 특히 두 초강대국이 서로 자신들이 주도하는 배타적 지역 네트워크 전략을 추구하면서, 제도적 균형(institutonal balancing) 현상이 심화되었다. 
-230-231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은 코로나 비상사태를 겪으며 전방위적인 신냉전의 형태로 진화했다. 코로나 위기의 지속이 미중관계의 긴장을 반영했을 뿐 아니라 그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트럼프의 초기 대응은 "중국 때리기(China bashing)"에 기반한 정치 술책에 의존해 있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시각에서 주목할 것은 이 시기 미중 경쟁의 내용이 정치체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경쟁으로 질적 도약을 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의 전면적 "신냉전-대결정책" 방향으로 미국의 대중국 전략이 진화했던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진입한 후인 2020년에 작성된 정부의 공식 문건이나 연설문들의 서사는 결이 전혀 달랐다. 이 시기부터는 교역이나 테크놀로지 분쟁의 수준을 넘어 전면적 체제 대결-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레짐-수준으로 미중 경쟁이 격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미국 수뇌부는 중화인민공화국 (PRC)이 아닌 중국공산당(CCP), 시진핑 국가주석(President) 대신 총서기(General Secretary)라는 명칭을 사용해 상대를 지칭하는 등 새로운 용어와 수사를 동원해 중국 체제의 전체주의적 속성 자체를 비판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현실주의적 담론 대신 네오콘적 언어가 가미됨으로써,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식의 이데올로기-레짐 경쟁 차원에서의 타자화(혹은 더 나아가 악마화) 작업이 본격화된 것이다.
-300-302

(한미동맹은) 단순한 대북한 안보동맹을 넘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전 지구적 규모의 '전략동맹'으로 진화했다. 즉, 냉전형의 비대칭 동맹의 틀을 탈각하고, 대테러 전쟁에서부터 기후변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포괄적 분야를 아우르며 자유세계질서 수호의 일익을 담당하는 소위 '글로벌 파트너십'을 구축해왔다는 것이 2010년대 중반 한미동맹의 거대 서사였다.
그러나 트럼프-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며 한미동맹은 탈단극 시대 동아시아 지역 아키텍처의 균열 심화와 함께 또 다른 성격으로 변화하고 있다. 넓게는 자유세계질서, 좁게는 동아시아 복합 패치워크의 구성 국면에서 크게 개방되었던 중견국의 틈새 외교 또는 네크워킹 주체성(networking agency)의 공간이 미국 패권의 상대적 하락과 지역 아키텍처의 반중 세력균형 동맹화의 과정에서 갈수록 폐쇄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235

 

책의 상당 부분은 미국 정치, 국가의 '내러티브'와 그 변화 과정, 의미를 분석한다. 

봉건적 페습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 출발하여, 존 로크 식의 고전적 자유주의가 거의 절대적으로 관철될 수 있었던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고 알려져 왔다. 독립선언문과 연방헌법은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미국 신조를 신생 국가의 본질적 정체성으로 고정시킨 확고부동한 경전의 지위를 차지해왔다(자유주의 합의사학).
탈냉전기에 미국 정치 발전(American Political Development, APD) 분과에서는 이러한 지배적인 내러티브에 반기를 들면서 미국의 정치사상과 민족 정체성에 내재한 반평등적, 반자유주의적 이단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일군의 연구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수정주의적 접근법을 통칭해 '복수 전통론(multiple traditions approach)'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인종, 종족, 젠더와 같은 귀속적 특질에 기반해 위계적인 사회를 구성하려는 반동적 흐름이 미국사에 면면히 존재해왔음에 주목한다. 이 반주류 서사의 핵심은 미국을 종족 종교 정체성(ethnoreligious identity) 차원에서 정의함으로써 세속화와 세계화의 흐름에 맞서 네이션의 본질주의적 경계를 수호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인의 국가, 기독교 국가로서의 상상된 '원형'을 보존하거나 회복하려는 반근대주의적 경향이 주 내용이다. 건국 초기부터 지속된 귀화와 이민자 시민권의 조건을 둘러싼 논쟁, 미국의 '원죄' 인 노예제의 유산과 관련된 것으로 남북전쟁 후 재건기 실패가 낳은 미완의 과제로 인한 민권운동 이슈, 보다 최근에 는 다문화주의와 문화 전쟁에 대한 좌우 대결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249-250

마이클 린치에 따르면, 전통적인 정치 경쟁의 변수로서 물질적 이익이나 이념적 원칙이 아닌 문화적 거대 서사에 바 탕을 둔 집단 정체성이 정치의 근본 토대로 작동할 때, 특히 그 러한 맹목적 확신이 디지털 플랫폼에 의해 더욱 증폭되는 인터넷 세상에서, 이른바 진영 논리로 모든 것이 수렴하고 정치의 공간은 일종의 패싸움 혹은 종교적 선악 전쟁의 영역으로 퇴화해버린다. 
이런 역사적 국면에는 고전적인 정치학 교과서에서 묘사하는 이익 배분과 타협 혹은 좌우 이념 갈등과 같은 정치의 '정상적' 작동은 멈춰버리게 된다. 정당 정치가 물질적 이익이 아닌 존엄성 차원의 갈등 혹은 윤리의 문제로 비화했기에 협상과 조정은 거의 불가능하며, 전심전력을 다해 상대의 의제를 거부하여 정치적 교착 상태를 야기하는 것, 후쿠야마의 용어로 비토크라시(vetocracy)가 두 거대 정당의 일상적 행태가 되어버렸다.
-285-286

 

미국 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가 비토크라시로 달려가는 듯.

 

비서구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편견과 무지에 기초한 거대 사회공학의 시도는 현대 미국 외교사의 오랜 실패 스토리를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따름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작동할 수 있는 토대가 부재한 곳에 인위적으로 단기간에 외래의 레짐을 구축할 수 있다는 순진한 환상은 실현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개입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현대 민족주의의 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전쟁은 전형적인 "제국적 과잉 팽창" 전쟁이었다. 냉전 종식 후 최강의 지위를 누렸던 미국이 귀중한 역사적 기회를 쓸모없고 인기도 없는 신식민주의적 역할 수행으로 낭비한 대표적 사례라 고 볼 수 있다.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9.11테러 이후 "전 지구적 테러와의 전쟁(GWOT)" 국면은 사활적이지 않은 주변부에서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집중하다 훨씬 더 중대한 이슈인 "중국의 부상과 양극체제로의 전환을 허용했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329

 

이전 시기의 학자들과 달리,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대테러전 세대'임을 밝히고 있으며 그 전쟁들의 의미에 대한 분석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더 재미있다.

 

헌팅턴이 제기했던 "문명들의 충돌" 테제는 학계 엘리트들 사이에서 기각되어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정치의 두드러진 특성으로 서구와 비서구 강대국들 사이의 경쟁이 부각되고, 특히 권력 이동(power shift)의 양상이 단순한 지정학적 힘의 충돌을 넘어 문명 간의 지문화적(geocultural) 경합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헌팅턴의 문제 제기가 재소환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문명주의(civilisationalism)'와 그에 기반한 '문명국가(civilisational states)’ 프로젝트가 비서구 지역에서 부상해온 현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21세기 전환기부터 부상하기 시작한 문명주의란 본질적으로 자유국제질서의 지구화에 대한 대항패권적 기획, 더 심원하게는 서구의 지배적 근대성 전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환언하면, 자유주의적 문명표준에 반해 본질화된 특수주의적 집단 정체성, 대안적인 비자유주의적 규범체계, 다극적 국제질서 비전을 제공하려는 거대 서사가 출현한 것이다.
이러한 문명주의 담론을 현실에 제도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바로 문명국가 프로젝트다. 21세기에 문명국가를 자처하는 비서구 강대국들은 공통적으로 근대화 과정의 거대한 트라우마에 기초한 "상처받은 민족주의” 정서를 토대에 깔고 있으며, 그 집단적 고통의 기억을 안겨준 대타자(Other)로서 서구와 자유주의를 지목한다. 이들 국가의 지배 엘리트들은 서구의 "오 염”에서 벗어난 "고유한 문명전통"에 기반해 국가의 예외주의적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시도하며, 문명국가(또는 제국 전통)의 부활과 정당한 국제적 지위의 회복을 위해 서구(미국) 패권의 전복을 통한 다극적(다원적) 세계질서의 건설을 획책한다. 그러므로 이들 문명국가의 외교정책은 자연스럽게 기성 서구 중심적 세계질서와 근대 주권국가체제를 전복하려는 수정주의-또는 더 근본적 차원의 혁명주의-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구소비에트 공간에 "러시아 세계(Russkiy mir)"를 복원하려 는 푸틴의 유라시아주의 비전과, 아편전쟁 이래 "백년 국치"를 극복하고 "인류 운명 공동체(혹은 '천하')"를 구현하려는 시진핑의 중국몽 등이 문명국가 프로젝트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크라이나전쟁은 조직 원리상으로도 새로운 미래 국제관계의 부상 가능성을 타진하게 하는 중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푸틴의 러시아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유라시아주의 문명국가 비전을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명주의가 몇몇 이단적 사상가들의 공상이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정권 정당화 수사에 그치지 않고, 실제 국가 간 질서에 거대한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변수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354-356

 

심지어 현재 북한은 사실상의 해보유국이자 "비대칭 확전"이 라는 가장 공격적 교리를 갖고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핵전쟁 을 벌일 군사기술적 완성도를 갖춰 가는 국가로 발돋움했다. 국제 사회가 합심해 북한의 행동을 억제하 던 집단 안보 거버넌스도 이제는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비핵화와 통일이 당분간 달성할 수 없는 목표라는 점을 완전히 인정한 뒤에 새로운 접근법을 고민해야만 한다. 결국 대안은 현실주의적 패러다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핵보유국 북한과 공존할 수 있는 '공포의 균형'을 군사적 측면에서 구축하고, 군비통제 협상을 통해 핵을 머리에 이고도 안정적으로 남북관계를 운용할 수 있는 외교적 위험 관리 방안을 주변국들과 함께 모색해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해법은 불만족스러우며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그럼에도 매우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불완전한 임시적 해법이야말로 과거 문재인 전 대통령이 말한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 피해 주지 않고" 함께 사는 방법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따듯한 봄의 평화가 아니라 수십 년간 지속 될 차디찬 겨울 풍경일 테지만, 그런 긴 겨울을 준비해야 할 만큼 신냉전 초입에 서 있는 오늘날 한반도의 정세는 엄혹하다.
-366-367

 

아, 재미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엄청 빨리 읽었다.


























728x90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건영, <국제관계사>  (0) 2024.04.08
E H 카, < 20년의 위기>  (0) 2024.04.07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0) 2024.03.16
케네스 월츠 ‘인간 국가 전쟁’  (0) 2024.03.09
에릭 홉스봄 ‘역사론’  (0) 2024.02.24